#1123,토요만필/적당히라는 맹점/김용원
어떤 이유로 요사이 나는 되도록 말을 줄이려 시도하고 있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이점이 많았다. 밖으로 쏟아내는 기가 안으로 모아지면서 생각할 공간이 넓어짐은 물론 영양가 없는 체력 소모까지도 줄일 수 있었다.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말을 줄이니 우선 내 영혼이 잔잔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은 호수에 던져지는 돌멩이와 같아 목울대를 울림과 동시에 영혼의 연못이 파장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있으면 흔들리던 영혼의 물결이 잔잔해지면서 죽음과 같은 고요함이 유지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말을 줄임으로써 얻어지는 것 중에 또 한 가지는 상대방으로부터 궁금증을 주어 부가적 관심 포인트를 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 때문에 터무니없는 값으로 매겨지는 낡은 집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 부대 이득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분이 어쩌면 신일 수도 있다.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도, 극악무도한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인간의 목숨과 인권을 짓밟았을 때도 당신의 형상으로 빚은 불행한 인간들을 위해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않은 신의 비밀이 바로 그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때 신이 “너희들 하는 짓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노라!”라는 말을 청천 하늘에서 울려퍼지게 하였다면 대번 신의 위상은 바닥에 나뒹굴어질 것이다. 우선 신이 한 말이 히브리어였느냐 라틴어였느냐, 아니면 세계공용어인 영어였느냐 따위가 문제되겠다. 더불어 목소리가 굵었느냐 카랑카랑했느냐, 아니면 하우링이 심했느냐 따위 분석에 들어가면서 궁금증과 호기심은 더욱 팽배해지겠다. 그래서 신은, 줄여 기독교에서 언급하는 예수님은 당대에 오겠다는 약속을 어기고(신약성경 해석상) 2천 년 넘게 세월이 지나도록 한 번도 부활은 그만두더라도 얼굴을 내밀거나 목소리마저 녹음이 되도록 현상성 있게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줄이기로 맘먹은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밥이다. 한창일 때는 87킬로그램까지 나갔던 몸무게였는데, 노력 끝에 72킬로그램까지 군살을 빼긴 뺐었다. 그랬는데도 몸은 가볍지 않고 무거웠었다. 당시 목표는 70킬로그램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요요현상이 내게 나타났는지 80킬로그램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늙어갈수록 팔뚝이며 종아리에서 표나게 근육이 빠져나가는데도 몸무게는 여전하니 죽었을 때 시신 무게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 힘들게 만들 것 같다.
문제는 식사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니를 꼬박꼬박 때우다 보니 늙어 근육은 줄어드는데도 몸무게는 그대로다. 근육 대신 발톱 깎을 때 힘들게 하는 뱃살이 체중 유지 대체 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지 싶다. 그래서 밥을 줄이기로 다짐을 해 본다. 밥을 조금씩 줄이다 보니 어느 순간 여기에 따른 즐거움이 곁들여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선 뱃속이 편하다. 양껏 밥을 먹고 나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기가 불편한데, 밥을 줄이면 그런 현상이 줄어든다. 그러다 보니 만성 피로감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배고픔을 느끼는 만큼 밥맛을 따로 유용하게 즐길 수 있고, 생명력 또한 은근히 증강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더불어 혹시라도 나쁜 병에 걸려 죽는 게 낫다 싶을 때 선택할 자살 방법으로 굶는 게 제일 나을 거라는 비책을 이번 기회에 깨달음과 동시에 마음다짐을 해봤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줄이고자 하는 것은 술이다. 자주 먹는 편은 아니지만, 문제는 절제력 없이 가끔씩 과음을 하는 습관이 있다. 과음을 하게 되면 자연 쓸데없는 말을 하게 마련이고, 수면에도 지장이 있으며 숙취로 오랫동안 불쾌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말 나온 김에, 아직 그런 단계는 나와 멀지만, 대부분 가정파탄의 원인을 보면 가장이 술을 좋아하는 게 원인이 되는 경우가 80% 이상은 되지 싶다. 술 자체에도 폭력성과 나태, 병약 같은 후유증을 가져오지만, 그에 뒤따라 붙는 부정적 옵션 또한 만만치 않다는 데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술에 따르는 부가적이고 부정적인 옵션을 우선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으면, 맨먼저 들 수 있는 게 자존감 손상이다. 술에는 세 가지의 피가 섞여 있는데, 하나는 사자피요, 다른 하나는 앵무새피, 그리고 남은 하나는 돼지피이다. 그 세 가지 피 중 한 가지는 꼭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어느 주정뱅이는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우선 사자피가 발광을 하면 아무나 멱살 잡고 덤비려 하고 손에 잡히는 물건은 대책없이 파괴하는 폭력성을 발휘한다. 그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앵무새피 또한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다. 술이 취했다 하면 마누라, 자식들 앞에 앉혀놓고 새벽까지 끊임없이 재재거리는 타입이다.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말마따나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경우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돼지피, 이는 술에 취하자마자 고꾸라져 코를 고는 타입으로 어쩌면 타인에게는 그중 가장 권장될 만한 태도이겠다. 물론 자신에게는 그대로 골로 갈 확률이 높아지는 경우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우선 당장 내가 절제하려는 세 가지 대상은 모두 한 음절이다. 말, 밥, 술! 이 세 가지를 절제하려는 것이지 단절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우선 말이란 라깡의 말마따나 인간은 언어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형성된다는 전제 아래 정도의 한계를 초월한 침묵은 현대사회에서 도태의 지름길로 이끌려가기 쉬운 코스가 되겠다. 말을 해야 나라는 병풍을 펼쳐 비로소 사회에 편입 및 존재성 획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밥도 마찬가지다. 밥은 곧 생명이다. 굶거나 극도로 절제하면 거식증에 시달리거나 면역력 결핍 따위 후유증으로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술에 대해서는 금주를 하였다 해서 크게 삶의 질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분위기에 어울어지거나 사교상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할 경우에는 그저 기분 좋을 정도 한두 잔은 할 수 있는 ‘절주’를 말함이다. 한마디로 말밥술 절제를 적당히 가늠하여 실천하고 싶다는 말인데, 그 ‘적당히’가 문제다. 그 자체가 맹점일 수 있겠다.
/어슬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