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4)
헬라 문화의 주인이 된 야완(Javan)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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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박사 |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창 10: 1-2절)
헬라 문화를 일군 야완의 후손들
야벳의 넷째 아들 야완(Javan, ?ωυαν)은 그리스(Greece)의 히브리 단어다. 그 뜻은 분명치 않으나 어원상으로 이오니아(Ionia, 고대 헬라어 이알론)와 일치한다. 따라서 그 이름은 예언서들에서 이오니아 본토(소아시아 서부 연안)와 헬라 마게도냐에 거하는, 야완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헬라(Greece, KJV은 Grecia로 표현) 또는 헬라 족속(Grecians)은 구약에 다섯 번 나타나며(단 8:21, 10:20, 11:2, 욜 3:6, 슥 9:13 등), 그때마다 항상 히브리어로는 야완이라 쓰였다. 다니엘은 ‘헬라 왕(다니엘 8:21)’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문자 그대로 ‘야완의 왕’이었다. 그리스와 앗수르, 애굽 문서들이 헬라 사람들과 그들의 거주 지역을 가리킬 때 늘 야완이라 불렀듯이 구약성경도 정확히 일치한다.
야완에게는 엘리사(Elishah)와 달시스(Tarshish)와 깃딤(Kittim)과 도다님(Dodanim)이라는 네 아들이 있었다(창 10:2, 4; 대상 1:5,7). 이들은 모두 헬라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고대 헬라인들의 명칭인 Elysians는 엘리사(Elishah)에게서 그들의 이름을 물려받았음이 분명하다. 겔 27:7에 보면 두로가 ‘엘리사 섬’과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오니아와 헬라 지역에 분포하며 해양을 지배한 야완의 후손 가운데, 엘리사 후손들이 살았던 섬이 분명하다. 달시스(Tarshish) 또는 타르수스(Tarsus)는 실리시아(Cilicia, 현재의 터어키) 근방에 위치했었다.
깃딤(Kittim)은 구브로(키프로스, Cyprus)의 히브리식 명칭인 키티온(Kition)과 연관된다. 또한 키티온은 키프로스섬 남동 해안에 위치한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였다. 헬라 사람들은 쥬피터 도다네우스(Jupiter Dodanaeus)라는 이름으로 쥬피터 신을 숭배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야완의 네 번째 아들인 도다님(Dodanim)에서 파생된 말로 여겨진다.
그 성소(oracle)는 도데나(Dodena)에 있었다. 맛소라 사본은 도다님을 로다님(Rodanim)으로 표기하고 있다(대상 1:7). ‘로다님’도 에게해 지역에 분포한 섬주민들과 관련된 이름이었다. 결국 이들 야완의 네 후손들은 헬라와 이오니아를 중심으로 부근 에게해 주변 섬 지역에까지 널리 흩어져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구가 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히 지중해 쪽 섬들로도 진출하였을 것이다.
헬라와 이스라엘의 첫 만남- 노예 제도
에스겔 선지자는 야완을 노예와 놋그릇 무역상으로 묘사한다(겔 27:13). 맞는 말이다. 과거 헬라는 온갖 노예를 사고팔며 해양 무역을 주도하던 민족이었다. 요엘서 3:6에 보면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이 민족에게 노예로 팔려갔었다. 이렇게 전쟁과 포로가 민족의 이동을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 민족도 고조선, 백제, 고구려,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의 시대에 중국의 진, 한, 당, 원나라와 몽골, 일본, 러시아 등으로 너무나 많은 동포들이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이동하였다.
오죽하면 저 멀리 남미 인디언들이나 태국 북쪽 산악 지대 소수민족들에게서 옛 우리(고구려 등) 민족의 언어와 풍습의 원형을 찾아낸 선교사나 학자들이 있을 정도다.
이들 가운데 인디언들은 어떤 계기로 자발적으로 바다를 건넌 우리 민족(숙신, 읍루, 발해 등)의 한 줄기였을 것이다. 태국 산악 지역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 중 일부는 당나라에 잡혀간 패망한 고구려·백제의 유민 중 정치적 이유로 남으로 남으로 이동한 무리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영원한 민족적 라이벌 그리스(야완)와 터키
같은 야벳의 후손인 그리스와 터키는 오늘날 한일 관계처럼 여러 모로 정치적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 문제로 우리 민족의 감정과 신경을 자주 건드리는 것처럼, 키프로스는 바로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긴장관계에 있는 섬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실은 혈통적으로 그리 먼 사이가 아니다.
특히 터키의 이오니아 지방과 지금의 그리스는 같은 야완의 땅이었다. 마치 일본과 우리 민족이 사사건건 늘 팽팽한 긴장과 라이벌 관계이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실은 혈통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민족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신앙적으로 우리 민족은 애증(愛憎)의 관계인 일본을 전도해야 할 신앙적 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화되어버린 터키의 영적 변화는 언젠가 그리스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야완의 후손 알렉산더 대왕
성경에 이 민족은 다시 등장한다. 바로 헬라 왕의 모습으로다. 칭기즈칸, 나폴레옹과 견줄 수 있는 또 한 명의 유명한 역사상 인물인 알렉산더 대왕(알렉산더 3세)이 그 사람이다. 야완(헬라)의 후손 알렉산더 대왕은 같은 야벳의 후손인 마대(페르시아)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마게도니아 왕 빌립 2세와 에피루스(Epirus) 여인 올림피아(Olympias) 사이에 태어나 헬라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었던 알렉산더(B.C. 356-323)는, 헬라 문화야말로 천하 대통일 제국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기원전 333년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로 진군한 그는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다.
이후 그는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온다. 두로와 가사가 완고하게 저항하였으나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남부를 점령하고 애굽까지 진격한다. 대제사장 얏두아(Jaddua) 시대에 헬라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이 적중(단 8장)한 것이다.
이후 애굽에서 팔레스타인을 거쳐 다시 바벨론, 페르시아로 들어간 알렉산더는 박트리아(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우즈벡, 카자흐스탄 지역을 통치한 국가)를 진압하고 인더스 계곡으로 달려가 지금의 인도 펀잡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과거 헬라,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땅 뿐 아니라 지중해, 에게해, 흑해, 카스피해, 인도양, 페르시아만, 홍해가 모두 그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야벳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시대로였다.
알렉산더 대왕과 유대인
지금의 중동 지방 전역을 유린한 알렉산더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대 민족을 어떻게 대우하였을까? 놀랍게도 알렉산더는 유대 땅의 이전 다른 정복자와는 조금 다르게 이스라엘을 다룬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 고유의 율법을 보호하였으며,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런 배경에 대해, 알렉산더의 꿈에 나타나 그의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경고로 인함이라고 기록(Antiq. ?. 314)하고 있으나 역사적 신빙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알렉산더는 애굽에 알렉산드리아 신도시를 건설할 때에도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장려 정책을 폈다. 훗날 70인역 성경이 애굽 땅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이렇게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땅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한다.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이들 ‘알렉산드리아 신도시’는 무려 70개 이상이나 되었다. 알렉산더는 팔레스타인 지방 뿐 아니라 애굽에서도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애굽을 자유케 한 해방자로 보였기에 환영을 받았다.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였던 알렉산더
알렉산더가 정복한 것은 땅만이 아니었다. 그는 정복한 북동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 엄청난 헬라 문화를 뿌려놓게 된다. 헬라식 웅장한 건물, 체육관, 야외극장들이 건설되었고, 의복과 생활 방식에도 대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새로운 상인 계급과 중산층이 등장하였고 무엇보다도 활발한 유형적·무형적 교류 가운데 언어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헬라어는 국제어가 되었고 다양한 타민족 간 소통이 원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배경 가운데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갈 4:4). 알렉산더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였다.
이런 격동기를 거치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알렉산더 시대는 유대인들에게 도전과 응전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보내셨다. 유대인들에게는 시련과 고난과 유혹이 교차하였다.
헬라식 문명과 문화에 대한 압박과 동경은 문화적 동화를 가져왔고, 그것은 곧 신앙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반면 이 같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적 위험성을 직감한 일부 유대인들의 헬라 문화에 대한 종교적 저항은 더 깊은 신실한 신앙인들을 배출하게 되었고 그들은 유대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신앙적 안간힘을 다했을 것이다.
이 기간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 민족에게는 신앙적 연단의 시절이었다. 하나님은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유대 민족 신앙을 세계 신앙으로 바꿀 준비를 진행하셨다. 세계사적 흐름 가운데 이렇게 헬라는 그리스도가 오실 준비를 위한 배경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신앙적 도전과 연단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야완의 후손 알렉산더 대왕은 바벨론에서 33세에 요절하고 만다. 이것도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였다. 그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표범(단 7:6) 같은 인물이요 수염소(단 8:5,21) 같은 인물이었다. 외경 마카비 1서(1:1-8)에도 그의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대제국은 그의 수하 네 장군이 분할 통치를 하며 흐름을 이어갔다.
그렇게 세상은 300여년 후 인류의 구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은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짐)를 가져왔고, 놀랍게도 이러한 분산은 후에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마치 일제 치하 36년을 전후하여 우리 민족의 유랑이 일본, 중국, 원동,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의 복음 전파에 강력한 배경이 된 것과 많이 닮아 있다.
야완의 후손 헬라의 미래
헬라 지역은 과거 헬라 문화와 철학의 꽃을 피웠을 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와 강력한 융합을 통해 유럽 문화를 탄생시켰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사도 바울이 타고간 배에 유럽이 담겨있었다”고 표현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야완을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해양 민족으로 소개하고 있다(사 66:19). 야완은 다시스, 룻, 풋(Put) 그리고 두발 등 여호와의 영광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전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사자들이 파송될, 아득히 먼 나라들 중 한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에스겔서 27:13절은 야완이 두로의 부(富)에 기여한 자들 중 한 사람으로 암시되어 있다. 스가랴 선지자는 야완의 자식들을 치기 위해 시온과 유다와 에브라임의 자식들을 격동시킬 것이라고 했다(슥 9:13). 이 예언은 분명 다중적이다.
성경은 늘 헬라를 아주 강한 민족으로 묘사한다. 헬라는 스가랴 선지자 시대도, 알렉산더 시대도, 마카비 시대(기원전 2세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에도 강했다. 하지만 강하면 쉽게 꺾여버리는 것이 인생의 진리이다. 그들 모두가 무너졌다. 성경의 예언대로였다. 신앙을 대적하는 세상의 견고한 진도 언젠가 육적 헬라처럼 무너질 것이다. 인간이 느끼기에 세상의 역사와 흐름이 늘 지루하고 느린 듯하나, 결코 무한정 지루하고 느린 것은 아니다. 세상은 보기보다 내적으로는 늘 역동적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실 뿐이다. 즉 그날은 인간이 보기에 도적처럼 올 것이다.
그렇다면 야완의 후손 헬라의 미래에는 어떤 길이 열려 있을까? 헬라 지역이 너무 과거의 찬란한 영화에 사로잡혀서일까? 오늘날 그리스 지역은 세계를 주도한 문명과 문화를 뒤로하고, 극심한 경제적 침체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신앙은 때로 역설적이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한다. 문화적 자존심이 남달리 강하고 유럽의 관문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된 소식을 맨 먼저 받아들였던 영적 자존심도 강한 이 민족이,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구겨질 대로 구겨져 버린 자존심을 회복하고 다시금 신앙의 빛을 히복하는 계기를 맞을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사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 특별히 하나님은 사람을 주목하신다.
남유럽 라틴 민족의 경제 위기는 신앙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소망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하다. 야완의 땅 남유럽에 제2의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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