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사(秋風辭) 김광한 *가을 바람에 모든 잡된 것들 날려보내는 추풍사(秋風辭) * 한나라 무제(武帝)의 추풍사(秋風辭) *
秋風起兮白雲飛 가을바람이 일고 흰 구름 나는 도다.
草木黃落兮鷹南歸 초목은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고 기러기는 남쪽으로 돌아 가도다.
蘭有秀兮菊有芳 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로우니,
懷佳人兮不能忘 아름다운 님 그리워함을 잊을 수 없도다.
泛樓船兮濟汾河 다락 배를 띄워 분하를 건너려고,
橫中流兮揚素波 강물을 소리지르니 흰 물결 날리도다.
簫鼓鳴兮發棹歌 퉁소불고 북소리 울리고 뱃노래 부르는데,
歡樂極兮哀情多 즐거움이 다하니 슬픈 마음 많아지네,
少壯幾時兮奈老何 젊고 씩씩한 날이 얼마나 되리요? 늙어 감을 어찌할꼬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중국 초나라의 장왕(莊王)과 관련된 "절영(絶纓) 연회(宴會)"란 말이 있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22대 장왕은 즉위한 첫 3년동안 호령을 내리는 일 없이 향락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사실은 그 3년 동안 그는 신화들의 재능을 몰래 살피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장왕은 신하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등불들이 일제히 꺼져 버렸다.
주연은 중단되고 연회장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궁녀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그 궁녀는 장왕이 총애하는 애첩이었다.
"상감마마, 빨리 불을 켜게 해 주십시오. 누군가 제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궁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누가 제게 무례한 짓을 했는지는 불만 켜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갓 끈을 잡아채어가지고 있습니다. 갓 끈이 떨어진 사람이 바로 범인입니다. 어서 불을 켜게 해주십시오."
애첩이 자기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했던 것이다. 어둠속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이제 불이 켜지면 왕이 총애하는 궁녀를 희롱한 그 신하는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러나 장왕은 의연하게 말했다. "오늘 밤 주연은 내가 베푼 것이다. 그런 무례한 행위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다. 여자의 정조와 수절을 판가름하기 위해 신하가 수치를 당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장왕은 오히려 그 궁녀를 꾸짖은 다음, 소리높여 분부를 했다. "자, 모두 자기가 쓰고 있는 갓의 끈을 떼어 버리시오. 만약 떼지 않은 자가 있다면 엄히 문책할 것이오." 수많은 신하들이 모두 갓의 끈을 떼어버려 범인을 찾을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초나라는 진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 전쟁에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위기에 처한 장왕을 구하며 커다란 공을 세운 신하가 있었다.
장왕은 친히 그 신하를 불러 공을 치하하였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었다. 내 어찌 그대의 공을 잊겠는가?"
그러자 그 신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히려 이렇게 말하였다. "주군께서 이미 제 목숨을 살려 주신 바 있는데, 제가 어찌 자그마한 전공으로 주군의 은혜를 갚았다고 하겠습니까?"
그가 바로 연회가 있는날 밤 궁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가 갓 끈을 떼인 신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감동을 가져다 주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보통 권력을 쥐고 있는 임금이나 군주였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노발대발하며 불을 켜라고 한뒤 갓끈을 떼인 신하를 찾아내 바로 요절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장왕은 달랐다. 오히려 총애하는 애첩을 나무라고 한뒤,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갓 끈을 다 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장왕의 애첩인 궁녀 입술을 탐했던 신하는 크게 감복을 받고 온 몸을 다 바쳐 장왕을 위해 나라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지도자가 자기와 관련된 피지도자들의 허물이나 실수가 있더라도 이를 책망하거나 문책하지 않고 알고도 눈감아주고 덮어주는 관용과 덕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보았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장왕의 은혜를 잊지않고 혼신을 다해 죽기를 불사하고 보은하는 그 신하의 충정을 보면서 이 정신 또한, 우리들이 꼭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권력과 부를 가진 지도자일수록 더욱 부하와 아랫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덕인이 되길 바라고 은덕을 입은 부하와 아랫사람은 어떻게해서든 그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지언정 섭섭함과 불평만을 늘어놓지 말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보은인이 되었으면 한다 작년에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 사건이 있었다. 한때 대통령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대변인이 젊은 여자의 몸을 만졌다는 이유로 난타를 당해 지금은 거의 폐인 수준으로 있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비공식적으로나마 위로의 말을 전달하는 아량이 있다면 좋을 것같은데 아쉽다. 대통령이란 누구보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어야한다. 차가운 피가 흐른다면 그것은 국가를 위해 큰 불행이다. 신뢰(信賴)란 말 그대로 믿고 의뢰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신뢰하는 주인을 위해 자신도 신뢰를 하기 위해 부하는 충성을 다 바친다. 중앙일보 주필이었던 문창극 선생을 총리 후보로 지명하고 왜곡된 불량언론과 좌익들과 부패 정치인들이 반대한다고 임명한 사람을 사퇴시킨 대통령은 대통령의 의무도 인간적 신뢰도 잃어버린 그저그런 필부로 전락했다. 자신이 임명하고 자신이 사퇴시키는 인간으로서 결코 할짓이 아닌 행동을 보여준 사람,참으로 실망이 크다. 시장 바닥의 잡배도 자기를 따르는 졸개는 목숨을 걸고 지켜준다. 공기돌이나 공은 갖고 놀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들이다. 그러나 사람은 공기돌이나 공처럼 갖고 놀아서는 안된다. 평생을 글과 접한 분, 오직 좋은 글과 사상을 알리는 것에 가치를 둔 사람에게 그것은 더욱 예의가 아니다. 재작년 선거때 혹시 이 나라 적화되지 않을까 염려돼 새벽에 일어나 투표장 가서 지금의 대통령 찍은 수많은 내 또래 사람들, 참으로 허탈하기 짝이 없다.어디 인간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되는가. 문창극 선생이 총리 시켜 달라고 했나? 사람 갖고 놀지 말기 바란다.앞으로 몇명이나 더 상처를 주면서 그 직을 수행하겠는가.신뢰란 국가 지도자가 몸소 보여줘야하는 것이다. 약속(約束) 김신부님의 칠순 은퇴식 제게는 아버지같으신 존경하는 한분이 계십니다.서울 월곡동 성당의 주임으로 계신 김병일 요셉신부님입니다.김신부님은 제가 한창 방황할때 황량한 마음에 신앙의 맑은물을 넣어주어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준 은인이자 진심으로 존경하는 어른입니다.
1988년 여름 뜻한바있어 저는 서울 화곡4동의 성당에서 영세를 했는데 그 당시의 영세 신부님이셨습니다. 영ㅅ하자마자 그분은 제게 사목위원이란 직책을 주셨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오래된 사목위원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6.25당시 황해도 사리원 성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전쟁이나자 그 성당의 주임신부이신 전덕표신부님이 공산군에게 학살 당하는 걸 보고서 필리핀 군종신부였던 따디파 신부님을 따라 단신 월남, 구두닦이 등을 해가면서 혜화동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졸업 하느님을 증인으로 사제가 되신분이시지요.그러니까 남한에는 일가부치가 전혀없는 어찌보면 인간적으로 무척 외로운분이셨습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가족에게 갖지 못한 사랑을 신자들과 영혼이 메마른 모든분들에게 퍼주셨습니다.
김신부님에게 저는 인간의 삶 모두가 사랑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이제부터는 그동안 전념했던 수사드라마를 포기하고 신앙에 관계된 글을 써보기로 했지요.수사드라마는 읽는 재미는 있지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직장도 가톨릭 다이제스트란 가톨릭과 연관된 잡지의 편집장 등을 하게됐고 종교적으로 존경하는 많은분들을 알게 됐는데 이때 알게된 친구가 천주교 문학사의 사장인 한종오베드로였습니다. 이 친구와 의기투합을 해서 1802년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을 다룬 소설 윤유일과 몇권의 종교 단행본을 썼지요. 이런 김병일 신부님에게 평생에 꼭 하고싶은 일이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일이란 것이 50여년전에 황해도 사리원 성당에서 당신을 아껴주시고 신부가 되게한 밑거름이 되어준 전덕표 신부를 로마 교황청에 소상하게 알려 복자(福者)품위에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복자나 성인이 될 수 잇는자격이란 순교자가 되거나 생전에 많은 업적을 남겨야되는데 마더 테레사 수녀같은 분이 그렇습니다.전덕표신부는 신자들을 모두 피난보내고 당신만이 홀로 성당을 사수하다가 총살당했기에 충분히 그런 격이 있었습니다.그러나 그 기록이 있어야했지요. 기록이란 것이 그 당시에 신부님과 함께 있었던 현장 증인이 있어야하는데 황해도 사리원에서 6.25당시에 피란온 10여명의 신자들을 증인으로 세워 그들로부터 확실한 증언을 들어야했고 이를 기록으로 올려야되는 것이지요.
당시 김병일 신부님은 서초동 성당의 주임으로 계셨는데 그 성당에는 소설가 최인호와 김홍신이 나가고 있었습니다. 김신부님은 최인호에게 글을 써줄것을 부탁했는데 작가가 소설인줄 알고 써내려가다가 그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포기를 했지요.그래서 신부님은 제게 부탁을 한 것입니다.저는 최인호나 김홍신씨보다 글도 못쓰고 이름도 없어서 사양을 햇는데 신부님은 그런 글은 기교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씀에 증언록을 만들기로했습니다.그래서 전국에 흩어져있는 사리원 출신의 신자들, 이미 늙어서 70객이 된분들을 서초동 성당의 사제관에 집합시켜서 우선 얼굴 사진 부터 찍고 전덕표신부가 공산군에게 학살당했을때의 현장을 증언케 했는데 그만 이분들의 이야기가 중구난방이 되어버려서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는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주눅이 들어 몇달을 보냈지요. 그러던 어는날 김신부님에게 전화가 와서 당신이 제게 너무 부담을 안겨준것같다면서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저를 정신적 억압에서 해방시켜주었지요. 이것이 그분에게 진 글빚입니다. 그리고 두번째의 글빚이 늘어나게 됐는데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1998년 여름 제가 독립유공자유족회의 회장이신 김삼열 시인님과 함께 뜻한바있어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일대기를 소설화 시켜 그 출판 기념회를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거행했을때 김병일 신부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당시 김신부님은 서울의 마포 성산동 성당의 주임신부로 계셨지요. 김신부님은 제가 백범 선생의 일대기를 국내 최초로 집필했다는데서 무척 흐뭇하신 표정이셨습니다. 그때 저는 신부님에게 지난 몇년전에 진 글빚을 갚겠노라고 했지요.
저는 신부님의 인생 여정기를 써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혈혈단신 월남해서 구두닦이 등으로 전전하면서도 신학교를 졸업 가족이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실때의 외로움과 감격,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원같은 것을 그리면 그분의 자서전이자 한국 천주교회에서의 신앙인의 역할을 조명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레서 며칠후 친구인 천주교문학사 사장인 한종오 베드로와함께 성산동 성당의 사제실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몇평 남짓한 사제실 정면 벽에 웬 할머니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느분이시냐고 묻자 신부님은 그 그림이 당신의 어머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신부님은 중국에 갔을때 거기서 압록강 근처의 도문이란 곳에서 꽃잽이라고 이름붙인 젊은 북한 낭인아이를 통해서 당신의 어머니가 아직 생존해있다는 것을 알았고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연락병(?)에게 어머니를 찾아가서 사진을 한장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 사진이 낡아서 신부님은 사진을 확대 그림으로 옮긴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와 헤어졌을때 어머니의 나이가 36세였는데 50여년이 지나자 86세가 됐고 이때는 만나서도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된것이지요. 그래서 생소한 이 그림을 아침마다 쳐다보면서 어머니 얼굴 읽히기를 한것입니다. 저는 신부님과 그 어머니 그리고 신부님의 어린 시절을 엮어서 자잔적 소설을 쓰기로 했고 친구인 출판사 사장도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업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병일 신부님의 일인칭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 됐지요.김신부님의 평양에 생존해 계신 어머니를 압록강 근처에서 극적으로 상봉해서 연변의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 됐는데 이렇게 만들면 많은 이산가족들과 신앙을 가진 분들에게 어떤 공감대를 가지리라 믿었기 때문이지요.그런데 소설이 완성되고나서 얼마후에 평양으로부터 김 신부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확실한 정보가 날아왔습니다.
이것이 그냥 소설이라면 그대로 만들면 되겠는데 실명 소설이기에 조금 곤란했지요.그리고 이 소설을 출판하기로 약속하고 교정에 들어간 내 친구 한종오 사장이 얼마후 위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요. 그래서 이 글 역시 빛을 보지 못하고 한장의 시디에 남을 수밖에 없게 됐지요.제 카페에 실린 어머니 얼굴 익히기는 그래서 나온 글 이지요.
김신부님에게 저는 다시 글빚을 지게 된것이지요.작년 3월 21일 신부님의 칠순을 서울 월곡동 성당에서 신자들과함께 했지요. 그때 제가 참석을 했더니 신부님이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었지요.제가 신부님에게 아마도 하느님이 제게 더이상 신부님에 대한 글을 쓰지 말라는 메시지 같습니다. 했더니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더군요. 10여년이 지난 지금 신부님은 치매에 걸려서 사람도 못알아본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지요.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글을 잘쓴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이랍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글도 아름답습니다. 글은 물건처럼 파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거저 주는 것이다. 70나이의 나는 글을 팔아서 살지 않았다.15년전에 쓴 김구 선생의 소설화,그것은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분들과 유족들에게 선물했다.때로는 글을 씀으로서 자존심과 명예가 훼손 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글을 쓰지 말아야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대통령도 죽고 사장도 죽고 교수도 죽고 목사도 신부도 가족도 죽고 나도 죽는다. 세상에 남기는 것이 없다.아무리 현세에서 유명한 글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중국역사상 유명하다는 사서오경을 말만 했지 읽어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또 그 많은 글들이 지금 몇편이나 전해져 오는가. 누가 그걸 읽는가. 그러나 한가지 생전에 남들에게 베풀었던 사랑의 마음들은 여기저기 향기를 뿜으면서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함께 복역하고 있는 청년에게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청년은 가수였고 일주일만있으면 풀려나게 되어있었다. 그 청년이 소크라테스에게 "선생은 일주일만 있으면 죽을 몸인데 노래 배워서 뭣하겠느냐는 말에 살아있을 때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고 청년에게 그대도 40년이나 50년정도 되면 죽을 것이다.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가르침을 받아드리고 그것을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야한다는 것이었다.사람에게 내일은 없다.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다. 인생이란 연못가에 비치는 황홀한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소크라 테스가 수감되었던 감옥(그리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첫댓글 오늘은 미국에서 손님이 오셔서 놀다가 이제 가섰어요
내일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