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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람을 볼 때마다 기분이 거북하더라...
비록
신문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실제로 만난대도 그냥 머리 조아리고 가만히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집에 와서 내 머리를 벽에 찧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더라..
아~ 내가
이 나이에도 아직 이런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냥 왠만만 하면 존경해버리면 편한데 그게 좀 묘해서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지내온 셈이다. 어느 쪽에 분류해 넣어야될 사람인지도 감이 잘 오질 않고..오늘 그 지끈거리는 이빨을 뽑아버릴라고 한다. 헬프 미~!
정 희진...
여성학 강사라면
이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방귀 좀 끼는 대학들이 이런 사람을 잡아갈 적에는 뭔가가 있으니 그렇지 않을까? 좀 삐딱할 지는 몰라도 속이 여사로 차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
웃지 마시라,
뭐 좋은 게 있다고 지금 이 시국에...꼴랑 과자 중독쟁이인 주제에...
이번 글은
그 제목이 "물에 빠진 나를 구한 통나무가 나를 물속에 붙잡아 둘 때"라고 되어 있다. 공유해서 생각해볼 꺼리가 충분히 되겠다 싶어서 같이 나눠 먹자고 오늘 요리로 내 놓는다. 이 사람 글은 무슨 연유인지 칼럼 자리에 잘 끼워주지 않고 책 소개하는 코너에 싣더라. 자리는 그곳이 더 멋지기는 하더라만. 세로로 길다랗게, 그것도 페이지 오른쪽을 왕창 다 차지하고...
그녀는
한 마디로 술 담배 같은 거에 대해 잘난 넘들이 토를 달더래도 너무 신경쓰지 말라면서 그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주더라. 가령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 라는 문귀는 어찌나 맘에 들든지 어디 여고생들 교실 벼락박에 붙여놓고 읽어라고 내놓아도 좋을 그런 위안을 주는 글이더만...
이 글을 쓰다가
'벼락박'이라는 말이 이게 진짜 있는 말인가 싶어 찾아 보았더니 사전에 나오질 않네...정말 그렇나 하고 용례를 찾아보니, “정이란 것이 그런 겁디다. 아무리 단속을 해도 모기장에 모기 들어오듯이, 세 벌 네 벌 진흙 처바른 벼락박에 물 새듯이 그렇게 생깁디다.” 라고 인용도 되어 있고...한창훈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에 나오는 말.
그러면서 이 말의 용례에 대해 이런저런 복잡한 설명이 잔뜩 들어있더라.. 참 말 한마디 하기가 이렇게 겁이 나서야...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어쨌든
정 희진이라는 이 사람은 여자인데도 열린 마음을 가졌구나 하는 기분을 마구 던져주더라. 글 속에서 그런 기운이 마구 샘솟더라고...모두들 한 번쯤은 이 사람 칼럼을 어디에선가 읽어 보았을거라...만사를 아주 드라이 하게 재단하고, 할 말을 어렵지 않게 하면서도 남의 머리는 터지게 하는 손속하며.
내가 하고싶은 말은,
사람 살아가는 데 이게 아니네 저게 아니네 하면서 남 즐겨먹는 거를 이리쿵 저리쿵하는 행태를 너무 쌈박하게 처리해버린 솜씨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한 방에 끝낼 수 있는지...난 술담배를 이렇게 정리해버린 사람을, 또는 이렇게 인용하면서 박수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이 사람이
인용하는 그 책에서의 설명은 참 멋지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걸머지고 동행하는 중독들을 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에 비유한 대목도 좋고..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이 사람 자신의 심경토로 부분이다.
'...몸의 한 부분은
중독되어 있고 한 부분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대개는 이 싸움에서 패배를 ‘선택’한다. 상실은 너무 아프고 위로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시도와 좌절의 반복. 절망과 자학. 나는 캐러멜 마카롱을 입에 물고 울먹인다. “어차피 구원받지 못하는 인생이 있고 극복되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냥 물에 빠져 죽자.”
캬라멜 마카롱...의심스러운 과자.
ㅋㅋㅋ..
이 사람은 자신을 과자 중독증을 지닌 사람이라고 고백한단다. 그래서 친구들이 자기 건강을 염려해서 술이니 담배를 권한다고 하네..헤헤 그것도 괜찮은 거긴 한데..
아마
아직 술과 담배의 진면목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하지 않았나 시퍼다. 주변 친구의 죄가 크다고 볼 수 있는 케이스이다..친구를 잘사귀어야지..쯧...
좋은 친구라면
평생에 걸쳐 술이니 담배는 아주 끈기있게 다가가야 그 품을 내어주는 것들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데...
이 사람이
최근에 쓴 다른 글의 제목이 '전향하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그 글도 책 소개를 주로 한 글이고...현재 수감중인 간첩 아무개 이야기를 책으로 쓴 것을 인용한 문구인데 간첩질 하러 남파되는 넘한테 총책임자가 마지막 당부로 한다는 말이 '잡히면 그냥 바로 전향해버리라' 라는 부분을 소개한 글이던데, 차암, 난 간첩 보낼 때 이런 일이 있는 줄도 이 사람 글을 읽고서야 알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미국과 소련이 인공위성 쏘아 올리는 경쟁을 치열하게 펼칠 때, 결국 미국이 달에 먼저 사람을 태워 보냈잖아? 그 우주인 이름이 루이 암스트롱인가 닐 암스트롱인가 그렇고.
그 당시
소련은 루나 15호인가를 달로 보내면서 달의 흙 한 웅큼 가져오겠다고 위험하게 사람을 보낼 수는 없다면서 무인 우주선을 보내는 길을 택했고, 미국은 사람 셋을 아폴로에 태워 보내는 결정을 했다고들 하거든.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소련을 뒤쫓는 입장이기도 했지만...
그 해프닝을 두고도
서로 씹어대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 목숨 귀하게 여기는 것은 차라리 민주주의 하는 쪽보다 공산주의 하는 넘들 아닌가 싶기도 하더라고..이거 너무 불온한 추론일런가.
간첩질이나
우주여행이나 실제로 하는 당사자들이야 죽을 각오로 나설테지만 결정이야 우두머리들이 내리는 거잖아? 가라 마라 하는 것들..그 우두머리들 사고체계가 좀 그렇다는 거라. 요번에 당선된 교황도 그랬잖아? 성공이니 돈을 위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이 여사로 보이는 이런 시스템은 문제 있다고..
그때
얼마나 식겁했던지 나중에 뒤따라 달에 내려섰던 올드린은 달 표면에 내려선 이후 우주복에 오줌까지 질질 흘렸다고도 하더라만, 그 당시 모두 죽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었다거등, 당사자도 그렇게 각오했고. 더욱이 성공 가능성도 별로 없었던 일이었는데도 본인 동의 받았다고 결행시킨 무지막지한 출발이었다고 하고...머 그런 생각도 들고, 하여튼 저넘의 세상에 대해서는 이 사람 말마따나 나도 '에포케(판단유보)' 상태이니..이번에 김 정은이 한 일이사 과거 독재자들이 한 일이랑 오버랩되니 정치하는 넘들 행태가 그런가부다 할 뿐이지만..
▶ 정희진 칼럼 원문
물에 빠진 나를 구한 통나무가 나를 물속에 붙잡아 둘 때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달빛 아래서의 만찬>, 아니타 존스턴 지음, 노진선 옮김 넥서스북스, 2003
아버지는
하루 3갑, 줄담배를 태우시는 체인 스모커다. 담뱃불은 기상 직후 딱 한번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갈 땐 결국 담배를 사게 된다. 있는 담배도 없애버릴 판에, 담배 사는 데 내 돈(!)을 쓴다. 나는 과자 중독이다. 먹는 것으로 인생고에 대처한다.
내 건강을
염려한 지인들이 과자 대신 술, 담배를 권할 정도다. 그렇지만 친구들도 내게 과자를 선물한다. 내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술, 담배, 도박, 초콜릿, 관계, 섹스, 쇼핑, 미디어(스마트폰), 게임… 사람들은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되지 않은 몸은 드물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긍정적 중독(일, 운동, 공부…)인 경우 덜 문제가 될 뿐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에 있다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없이는 못 살아”).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여성의 섭식 장애 관련서 중에서 관점, 현실 인식, ‘해결책’과 스토리가 모두 좋은 책이다.
중독 증상 때문에
사회의 경멸적 시선과 자기 비하에 지친 이들이 읽으면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와 은유는 흥미진진하고 깊이와 통찰이 넘친다. 알코올, 담배, 마약 중독은 니코틴 같은 특정 성분에 대한 중독이다. 그런데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배고파서,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심리적 허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심리적 허기는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 위는 한정되어 있는데 음식은 계속 들어온다. 몸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내가 반복해서 읽는 부분은 통나무 이야기다. “폭우 후 물살이 사납게 불어난 강물에 빠졌다. 다행히 통나무가 떠내려 와서 붙잡고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고 숨을 쉬며 목숨을 부지한다… 물살이 잔잔한 곳에 이르자 헤엄치려 하는데, 한쪽 팔을 뻗는 동안 다른 쪽 팔이 거대한 통나무를 붙잡고 있다. 한때 생명을 구한 그 통나무가 이제는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 강가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놓으라고 소리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40~43쪽)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몸의 한 부분은 중독되어 있고 한 부분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대개는 이 싸움에서 패배를 ‘선택’한다.
상실은
너무 아프고 위로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시도와 좌절의 반복. 절망과 자학. 나는 캐러멜 마카롱을 입에 물고 울먹인다. “어차피 구원받지 못하는 인생이 있고 극복되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냥 물에 빠져 죽자.” 그러나 인생의 고문도 잠시 숨을 고르는 법, ‘악마’(또 다른 나)가 문지방에 서서 나를 쳐다본다.
역치( 値) 상태,
예를 들어 음식물이 위장에서 입으로 다시 나오는 경지에 이르면 다른 이야기가 절박해진다. 인생이 강물이 아니라 사막을 혼자 걷는 일이라면, 애초에 물에 빠진 사람도 없다. 우리가 선택한, 그립지만 괴로운 대상들은 사막을 지나가다 잠시 스친 풍경들이다. 조우했을 뿐 오아시스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인생의 오아시스가 없다고 생각하면 익숙한 것들의 막강한 존재감이 다소 상대화된다. 중독보다는 생존의 힘이 세다고 믿는다. 천천히 조금씩 이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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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문제를
이렇게 다가간 사람도 만났다...최근에.
이 사람이야
어릴 적부터 그 이름이랑 이런저런 글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어느 새 나이들어 사진을 보니 아주 노년에 완전 접어든 얼굴이더라. 이름이 김 병익이라고 모두들 많이 들어본 이름일거라.
문학 평론가 김 병익...
내가
김 현 샘에게 너무 빠져사는 바람에 내 눈에 쏘옥 들어올 수 없었던 양반이었더랬는데 한창 한양의 지가를 높인 평론가인 건 맞지..
아마 김 교수는
잘 알걸..서울대 문지 4인방이라 해서 저네들끼리 짜고 고스톱도 많이들 쳤다고들 씹는 사람들도 있었고...우리 김교수하고 5인방인가..
며칠 전에
큰 칼럼을 하나 읽었는데 나중에 보니 글쓴이가 바로 이 사람이더라고...이제 나이가 드니 이렇게 매치가 되는 글을 만나기도 하네..이 분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신을 '쌈박하게' 처리한 바로 그 분이다.
혹여
나이 들수록 두려움 때문에 신 문제로 찜찜해하는 친구들은 이 글을 읽고 도움이 되는 부분을 만났으면 좋겠더라... '종교적 인간'이라는 용어도 씹어가면서...이렇게 천천히 조금씩 그런 두려움과 이별하고 싶다면...
신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이 우리 인류 문화사에 가장 큰 영향과 자산 쌓아왔다는 ‘거대한 역설’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저녁 어둠이
일찍 다가오고 어디선가 캐럴이 들려오는 이맘때면 지금도 나는 아득한 회상에 젖어들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좀 달뜨며 10대 후반의 가난하고 추웠던 소년 시절의 아름답고 풍요한 추억에 젖어들곤 한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며 교회를 나가지 않은 게 20대 초였는데, 그 후 쉰해를 넘기며 이 거친 세상에 묻을 만큼 세속의 때가 두텁게 묻었고 헛된 시간에 무뎌질 만큼 마음이 무뎌졌는데도 왜 아직껏 전후의 그 을씨년스럽고 스산했던 철부지 시절을 풍성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되찾게 되는지.
근래
처음 인사한 화가 박정숙의 전시화 목록집 <생성을 위하여>에 주조를 이룬 푸른색들의 신비한 세계에서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신자들 집을 순방하며 밤샘 찬송가를 부를 때 순진한 마음으로 바라본 맑고 신선한 새벽의 짙푸른 하늘을 떠올렸고 정희성의 시집에서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선물>) 얻고 그 영원함에 대해 묵상했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으며 인격신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부정과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통쾌한 심정으로 동의하며 우리 신문에서 더러 보는 목회자의 권력욕과 세속화에서 성전의 장사꾼들을 내쫓던 예수의 호통과 면죄부를 팔아먹는 교회를 뒤엎은 종교개혁을 떠올렸다.
심지어
히틀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전기를 보며 그의 문화적 세련성과 정의를 향한 열정을 존경하면서도 그의 진지한 신심에 대해서는 의아히 여겼는데 그의 회의 없는 신앙이 그에게서 비롯된 1960년대 미국의 ‘신의 죽음의 신학’에서 현대 기독교의 고민을 짐작한 나로서도 좀 의외여서였다.
신을
부정하고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내 어린 신자 시절의 동심을 그리워하다니. 그 모순을 따져보는데 문득 떠오른 구절이 파울 틸리히의 말이었다. 그는 제도권의 의례적인 신자를 가리키는 ‘종교인’과 달리 “영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추구하는 인간”을 ‘종교적 인간’으로 구별했다. 예수나 부처를 말하지 않더라도, 아니 말하지 않고, 삶의 내면을 깊이 사유하고 시간의 흐름에 영원한 의미를 묻는 동경심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참된 종교적 인간의 모습이지 싶다.
나는
부모님 천도재를 지내던 절에서 연신 절을 하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불경을 따라 읽으며 내 무종교주의에 이런 의례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자문하는 중에 문득 떠오른 것이 앞의 틸리히였고 이어 따라온 것이 ‘영원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지향’이란 인식이었다.
아름다움이란
그 실체가 없는데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찾는 인간의 욕구가 예술의 형태로 태어나듯이, 신의 실재/부재를 알 수 없기에 그의 존재와 현현을 소망하는 인간적 의지 혹은 소망이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그것이다. 그 ‘없음’으로써, ‘부재한 것’이기에, 그것의 현존과 태어남을 더욱 갈망하는 것이 예술이고 신이 아닐까 하는, 나로서는 자못 도저한 도전이었다. 이 세상 만물 중에서 말을 하고 불을 사용하며 후회를 하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만이 성찰하며 창조한 것이 예술과 더불어 신이며 종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렇게 해서 든 것이었다.
종교의
그 허망함에 젖어든 근래의 내 생각을 추켜준 것이 <한겨레>(2013년 10월28일치) 출판면이 소개한 <무로부터의 우주>였다. 우주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의 이 과학책은 그 기초부터 무식한 내게 마치 산스크리트어의 불경처럼 읽어내기 참으로 어려운 책이었다.
용어도,
공식도, 따라서 그 논리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끝까지 이 책에 매달린 것은 그 서평을 쓴 기자가 인용한 구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체의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 구성된 ‘오리진 프로젝트’의 대표인 저자 크라우스는 135억년 전 빅뱅이 일어나 무에서 1000억~4000억개의 행성을 가진 은하수 4000억개가 탄생했으며 이렇게 태어난 우주는 2조년 후에는 시간과 공간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한없이 막막한 우주의 역사와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나 ‘영겁’이 가리키는 시간 개념에 압도당했지만 이 책이 전개하고 있는 시공간의 규모는 그 불교적 상상력까지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의 친구 히친스가 했다는 “열반이란 무를 성취하는 것”이란 말에 앞뒤 모르고 절로 승복되었다.
바로 이즈음에서
한승동 기자가 인용한 구절을 만났다. “목적이 없는 우주는 우리를 더욱 놀라운 존재로 만들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게끔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의식이 있는 축복받은 존재이며,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기회까지 주어졌기 때문이다.”
후기의 <문답>에서
크라우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목적이 없는 우주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고도 신명나는 일이다. 우주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연히 탄생한 생명과 의식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이 가치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태양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나는 이 우주에서 신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크라우스는 내가 이해 못 하는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종합하며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에서 “휠체어에 붙박인 채” 우주의 역사를 생각하며 “시간여행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설명한 스티븐 호킹의 ‘할아버지의 역설’에 의지하여 우주의 시작과 종말을 구성한 것이다.
나는
우주물리학 이론을 판단할 지식도 그럴 배짱도 없지만, 목적이 없음에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역설에 감동했음은 정직하게 고백해야겠다. 사실 우주와 그 해석에는 ‘역설’을 통해 이해될 진실이 참으로 많다. 크라우스가 창조 신화의 부정과 무신론에서 존재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듯이, 종교가 허무에서 탄생했기에 틸리히가 말하는 종교적 인간의 지향과 인간의 진실을 향한 종교문화의 창조도 가능했을 것이란 것도 그중 하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숱한 신앙적 고백과 거기서 태어난 예술적 고행이 없었다면 종교적 성찰에서 빚어진 사상의 위대함과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역사에 참여하는 신만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를 부인하는 과학조차 교회와 교리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려는 종교적 인간의 무한을 향한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신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이 우리 인류 문화사에 가장 큰 영향과 자산을 쌓아 왔다는 ‘거대한 역설’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없기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의미가 생겨난다는 인식에 나는 아마도 해방감에 젖은 듯하다. 그 자유와 해방감이란 따뜻한 위로도, 존재의 기쁨도 바랄 수 없는, 한없이 차고 헛되고 고독한 심상이겠지만.
나는
이 쓸쓸한 세밑에 너무 큰 문제에 매달린 것 같다. 먼저 간 친구들, 지금 투병하고 있는 친구들, 그들이 이 무의미한 세계에 남겨준 의미들을 생각하며 나는 시인 김형영처럼 “한참을 엉뚱한 길에서 놀았”다. 그는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을 읽다가 “하늘이 무너지면/ 새들은 어디서 날까?// 지구가 꺼지면/ 허공은 얼마나 깊어질까?/ 사람은 어디에 발 디디고 살지?” 자문한다.
아이들에게 보낼
카드를 사고 이젠 내가 다니지 않는 교회의 성탄절 장식을 보며 나도 이 <옆길>의 가톨릭 시인처럼 “꿍꿍이속 신발끈을 고쳐 매고/ 지구 밖에 나가봐야겠다”고 속삭인다. 하느님이 없음으로써 존재와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고려하는, 이처럼 장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걸 흐뭇하게 느끼며.
김병익 문학평론가
첫댓글 정희진의 글이나 김병익 선생의 글뿐 아니라 이를 하나로 묶어내는 용주의 용접기술도 압권이다. <그냥 물에 빠져 죽자>는 한 순간의 깨달음이나 <하느님이 없음으로써 존재와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고려하는><거대한 역설> 속에서 해방감을 맛보는 <장한 생각>을 묶어내는 용주의 용접에는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글을 반쯤 읽다가 베란다에서 담배 한대 피우면서 본 총총한 별(건드리면 깨어질 것 같다던, 미당 동천의 그 밤하늘의 별)을 보니 생각이 더 깊어지더라. <진정으로 제대로 된 것들은 모두 우릴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평화를 주는 것>이라는 내 생각을 굳혀주네.
맞아 맞아~
이럴 때 베란다에 나가 속깊은 담배 연기로 별빛을 쓰다듬는 거지...
별이
왜 그기에 있는데...좀 더 천천히 걸어가야 속을 보여주는 애들인데...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선생,
자네가 빠져 드는 사람들, 정희진, 정은지,...
다아 내하고 성이 같지?
묘하다, 미워하며 닮아간다 캐야 되나?
내가 옛날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정씨 하면
뭔가 성큼 다가가게 하는 게 있더라고..
나중에 안 거지만
정은지도 정가고, 왠만 하면 정가더라고..
이런
친화력이 나에게 체화된 거이 모두 정교수때문인 건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