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71)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昧於勇退
용퇴하는데 어두웠군요.
사람에게는 멋진 시작도 중요하지만, 더 좋은 것은 끝을 잘 맺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최후의’ 승리(勝利) 혹은 영광(榮光)이란 말은 인간 승리의 표현이 되었다. 마지막 승리는 앞에서 저지른 실수도 가려질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좋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마지막에 그 어려움을 극복한 경우라면 더욱 칭송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거나 젊어서 발군(拔群)의 실력으로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이라고 하여도 마지막이 비극적 실패로 끝나면 비참한 일이다. 그래서 끝을 잘 마감하는 것은 인생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수명이란 무한정 연장될 수 없는 것이어서 설혹 130살까지 살아도 결국 언젠가는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되고 그에 대한 평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망자(亡者)는 변명할 길이 없으니 정말 살아있는 동안 끝을 잘 맺도록 해야 한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자도, 지배를 받았던 사람도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후세 사람에게 평가되니 말이다.
사실 보통 사람이야 역사의 평가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적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라면 그 성공이나 업적이 만년(晩年)에 수포(水泡)가 된다면 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니 큰 업적을 이루어 성공한 사람은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기가 중요한데, 그러할 방법이 있을까?
속자치통감에 큰 업적을 쌓고도 마지막에 자살(自殺)로 마감해야 했던 사람의 행적이 실려 있었는데, 그렇게 된 이유를 ‘용퇴(勇退)하는데 어두웠다.’고 하였다. 흔히 말하는 ‘박수 받을 때’ 떠나지 못한 것을 지적하였으니, 바로 용퇴가 그 해답임을 말했다.
남송 이종(理宗) 시절이었다. 당시에 금(金)을 멸망시킨 몽고가 남송을 압박하고 있었다. 남송에서는 금(金)의 수모(受侮)를 받았던 역사를 조금이라도 돌아본다면 발분(發奮)하여 국방을 튼튼히 해야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니 구호(口號)만이었다. 실제로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국가의 안위와 이익에 앞서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몽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서는 촉(蜀, 四川) 지역이 중요한데 여기에 관직을 주어 사람을 보내 보았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기록을 보면 16년 동안 많은 사람을 보냈지만, 이 지역에 임명된 장수 대부분은 늙어서 제대로 일하지 못하거나, 일선 지역이니 고생스러워서 잠시 있다가 방법을 강구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각박한 짓을 하여 치부하려고 하면서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니 백성들도 살길을 찾지 못하여 불안하였다. 설혹 현명하다는 사람이 있어서 불러보았지만 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몽고군을 효과적으로 막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았다. 조정에서는 걱정하고 있다가 드디어 여개(余玠, 1199~1253)를 찾아내어 그에게 이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 그의 출신은 좋지 않았지만, 일찍이 명장 조규(趙葵)의 밑에 들어가서 두각을 나타냈고 나중에는 몽고의 주사(舟師, 水軍)를 공격하여 불 지르고 교량을 파손시키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온 사람이었다. 몽고에 대항하여 승리한 드물게 보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황제 이종(理宗)를 알현하면서 사천(四川)지역의 회복을 자기 책임으로 하겠다고 나서자 이종은 그를 사천선유사(四川宣諭使)로 삼은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사천지역 통치에 관한 전권(專權)을 주었고 그는 부임하자 기대대로 전임자들과는 사뭇 달리 일하였다. 과거의 폐정(弊政)을 일신(一新)하려고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현관(招賢館)을 만들어 인재를 불러서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자 능력 있는 사람도 속속 왔는데 전에는 불러도 오지 않던 사람도 그에게 와서 계책이나 방안은 건의하였다.
이들의 건의에 따라서 몽고를 방어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진지(陣地)를 설치하고 군사의 지휘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하며, 또 사천의 형승(形勝)을 살펴 가면서 방어진지도 재편하였다. 또 양곡(糧穀)을 모으는 것으로 군사는 절대로 사천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니 백성도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거처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획기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그 위에 사천지역 경영할 계획을 세워 《경리사촉도(經理四蜀圖)》를 만들어서 올리며 말하였다. “다행스럽게 10년의 세월을 저에게 빌려주신다면 손으로 사촉(四蜀)의 땅을 이끌어 이를 조정에 올리고 그런 다음에 산림(山林)에 들어가서 귀로(歸老)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10년만 이곳에서 전권을 가지고 통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엄청난 자신감이었고 황제도 이에 동의하여 사천지역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개의 이러한 활동과 조치로 몽고병(蒙古兵)은 사천지역을 다시 넘볼 수 없었으니 그를 제갈량(諸葛亮)으로 인식하였다. 이렇게 8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몽고군은 사천지역 변경 가까이에 오지 못하게 되고 농사에 힘쓸 수 있어서 풍년까지 드니 예전의 모습이 회복되어 갔다. 황제는 그에게 ‘옛날 모습을 회복해 가고 있는데 장차 멀리까지 도모하기를 더욱 힘쓰니 그의 충성스러움과 부지런함에 보답하려면 충분히 포장(褒獎)하고 면려(勉勵)할 만하니 관질(官秩) 두 등급을 올리라.’고 조서를 내렸다. 엄청난 성공이었고 사천지역에 대한 장악력도 커졌다.
그러나 그의 성공이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그의 성공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게 될 수도 있다.’고 황제에게 참언(讒言)하였다. 10년을 기다려 달라는 요청했던 것은 잊히고 황제도 이에 동의하여 그를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너무 큰 업적이 도리어 그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하여간 조정에서 부른다는 소식을 접한 여개가 갑자기 죽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 업적과 상관없이 조정에 불려가서 사소한 꼬투리로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기에 자살했다는 뜻이다. 그의 죽음을 들은 촉인(蜀人)이 모두가 비통해하였지만 성공한 사람의 비극적인 최후는 바뀔 수 없었다.
그는 왜 이런 최후를 맞았을까? 속자치통감에서는 ‘오래도록 편의(便宜)한 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빌려서 혐의(嫌疑)받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용퇴(勇退)하는데 어두웠으니 드디어 참구(讒口)가 다가왔던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황제조차 10년 뒤에 귀로(歸老)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못 믿은 것이다.
실제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라도 반드시 결점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일정부분 성공하게 되면 혐의를 받기 전에 용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났다. 왜 ‘박수 받을 때 떠나라.’라는 용퇴를 몰랐을까? 사실 용퇴를 모르는 분이 그분들뿐이겠는가?
첫댓글 여개의 종말이 아쉽습니다. 자살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가요. 그가 떠날 때가 2년 남았다는 데 떠날 좋은 명분은 없었던 지요.
이승만과 박정희의 예는 그런 경우에 적절합니다. 그들은 역사에 좋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 얼마나 좋다는 인식보다 당시의 현상을 유지함을 더 중시한 탓이 아닐까요?
좋은 사론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이야기를 쓸 수가 없었는데, 여개는 촉 지역에서 성공하였지만, 조정에 끈을 대어 좋은 보직으로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를 막았고 여개에게 막힌 이들은 환관을 끼고 막후에서 여개를 공격할 준비를 했지요. 그리고 여개가 힘을 키우면 황제도 위태로워진다는 말로 황제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여개의 불법도 조사하게 하였는데, 한 지역을 그렇게 빨리 정돈하려면 요즈음 식으로 독재를 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여개가 너무 세상을 순진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잘 하면 그만이라고 ... 그러나 세상은 안 그렇지요. 여개가 죽은 다음에 그 반대자들은 그것 보라는 듯이 그의 아들에게서 모든 재산을 환수하였습니다. 세상 인심을 공부하는 좋은 경우인 것 같습니다. 세상 인심이 정의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심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니 이 또한 답답하지요. 하기는 다른 대안도 없지요.
친절한 추가 답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비슷한 상황을 현대사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고려조의 충렬공 감방경(1212~1300)은 안동 김씨로 우리나라 명장 중 명장이었습니다. 무인이었지만 문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습니다. 그가 무장으로 혁혁한 공로를 세우자 삼별초 난을 진압할 때 그가 반란을 준비했다는 무고를 당하여 곤혹을 치룬 예가 있습니다. 이는 원 세조의 올바른 판단으로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충무공 이순신도 그런 예에 속합니다. 이순신의 경우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살설이 떠돌게 된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용퇴에는 관직에서 물러남이 주이겠지만 자기의 주장에서 한발 물러남에도 용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