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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릿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외신 보도를 하였다. 이 기사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라고 하면서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큰 제목을 달아 보도하였다.1]
광복 후 불과 4개월 남짓 지난 시점에서 이 기사가 가져온 파장은 매우 컸다. 신탁통치를 곧 제2의 식민지배로 받아들인 국민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반탁반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남한 내에 존재하던 많은 정치단체들 또한 우익과 좌익을 가리지 않고 거센 반대를 표명하며 시위에 나섰다.2]
이 기사는 워싱턴발 AP통신 기사(12월 25일 발신)를 받은 서울의 합동통신이 12월 27일 국내 언론에 배포한 것으로서, 당시 동아일보 뿐 아니라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도 1면에 대서특필했었다.3] 그리고 이 기사가 난 뒤 하루 뒤인 1945년 12월 28일 미.소.영 3국 수도에서는 「모스크바협정문」이 공동 발표되었다.4] 협정문 중 한국에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1. 한국을 민주주의적인 원칙하에 발전시키는데 필요한(중략) 제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한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2. 한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고, 그에 필요한 적절한 방책을 연구, 조정하기 위하여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야 한다. 그 제안을 준비함에 있어 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주의적인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3.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한국임시정부와 민주주의적 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작성하되, 그 제안은 최대한 5년 기한으로 한국을 4개국 신탁통치하에 두는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의 각국 정부가 공동심의 할 수 있도록 제출되어야 한다.
4. 2주일 이내에 재한 미. 소 양군사령부 대표자 회의가 소집되어야 한다.5]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한국을 최대 5년간 신탁통치하에 두는 것을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하되, 그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가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제안을 미.영.중.소 4개국이 공동 심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한국민이나 이후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협정의 내용을 "한국에 대한 4개국의 5년간 신탁통치"라고 규정하고 있었지만, 실상 협정에서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내용은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하고, 협의를 위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이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협정은 1항과 2항, 그리고 4항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보다는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대한 부분이 강조되는 측면이 더 컸던 것이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이 외신을 받아 보도한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그러나 보도에서는 단순히 "신탁통치"에 관한 부분만 다뤘을 뿐이었고, 당시 신탁통치=식민지배라고 인식하고 있던 민족감정상 이런 조건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일반 국민들은 물론, 우익과 좌익을 가리지 않고 모든 정치단체들이 들고일어나 강력한 반탁반소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언론보도에 의해, 한반도의 즉각독립을 주장한 미국과 달리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와 달랐다. 한반도에 대한 미, 영, 중, 소 4개국이 참여하는 직접지배방식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고, 영국은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소련은 한반도의 즉각적인 독립 및 민주주의 절차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신문보도의 내용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언론의 자극적인 왜곡보도는 모스크바 협정문 발표 이후에도 이어졌다. 신조선보, 동아일보, 대동신문은 협정문이 발표된 뒤인 12월 29일자 1면에도 AP통신을 인용해 기사를 냈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소련은 미국에 대해 사실정정을 요구했으나, 한국민의 극심한 반발이 반미감정으로 번질까 우려한 미국은 침묵을 지켰다. 이에 관해 학계 일부에서는 오히려 미국이 오보를 조장하고 부추겼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6] 어쨌든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상호 신뢰와 협조관계에 균열이 생겼고, 이는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46년과 47년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소련이 확실하게 여론을 장악하고 있던 북한과 달리 남한의 좌, 우익 단체들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대립구도가 펼쳐짐으로 인해, 다방면으로 진행되어 왔던 좌우합작움직임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정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언론은 사실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으로 보도를 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왜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일단 모스크바 3상회의에 참가한 당사국들의 입장을 알아보자.
처음부터 모스크바 3상회의에 임한 세 나라의 속셈은 제각기 달랐다. 애초에 영국은 한반도에 아무런 이권이나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식민지체제 개편에서 세계 제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미국의 일방적인 의지관철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끼어든 입장이었으며,7] 구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신탁통치를 광범위하게 적용하려 하는 데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미 1945년 1월 외무성 조사국의 지시에 의해 토인비(Arnold J. Toynbee)교수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해 한반도에 대해서만큼은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찬성한다는 결론을 내려 둔 상태였다.8]
따라서 중요한 것은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었다.
이 양국은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독립국가가 수립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물론 자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지만). 하지만 미국은 일찌감치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구상을 갖고 있었던데 반해, 소련의 경우 처음에는 미국이나 다른 강대국의 정책을 확인하며 그에 대응하는 보다 더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9] 미국의 경우 서로 사이가 소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 대통령이나 국무부 모두 한반도의 즉각독립보다는 일정기간의 신탁통치를 통해 근대화시킨다는 계획과 구상을 1942년 무렵부터 구체화시키고 있었지만,10] 소련은 대조국전쟁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 전념하느라 상대적으로 극동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1944년부터 소련이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대독전선에서의 전황을 주도해나가게 된 반면,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밀어내고 공세에 나서며 거점을 하나씩 장악해 나가고 있었지만 극렬한 저항에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이 급증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보다 적은 피해로 빠른 종전을 위해 소련의 대일선전포고를 요구했고, 1945년 8월 8일 대규모의 소련군이 만주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이미 전쟁수행능력을 거의 소진했던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을 계기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1945.8.15). 이 시점에 한반도에 가장 가까웠던 미군은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지만, 이미 껍데기뿐인 만주군을 순조롭게 밀어내던 소련군은 한반도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기에 당황한 미군은 38도선을 기준으로 한 분할점령을 제안했으며, 소련 또한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지정학적인 특성 및 대전 말기 전황 상 어느 한 쪽이 한반도에 대한 모든 지분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공유하에, 일단은 미-소 양자 모두 한반도가 상대편의 세력하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막는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당시 상황은 냉전 대결구도가 본격화되기 전이었고, 기본적인 한반도 정책을 수립했던 루즈벨트나 국무부 모두 아시아의 안정에 있어 소련의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던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11] 또한 미국 내 한반도를 독자 담당하는 것에 대해 만연하게 퍼져있던 거부감 및 일본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한 카드의 하나로써 분할점령을 제의한 것이었다.12] 소련도 이 시점에서 한반도에 대한 독자적인 점령을 강행할 시 발생할 미국의 반발을 우려해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할 점령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국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일단 분할점령에 응하기는 했지만, 소련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크게 집착하지 않고 있던 미국과 달리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13] 미국이 제안하는 4개국 신탁통치안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미국의 제안대로라면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지분은 50%에서 25%로 줄게 된다). 게다가 미군정의 실정으로 혼란스러웠던 남한 지역과 달리, 소련이 장악하고 있던 북한 지역이 빠르게 소비에트화 된 것에 대해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독립과 함께 정부수립을 시도한다면 한반도 전체를 친소정권화 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한반도의 즉각 독립 및 단독정부 수립이란 소련의 입장은 이런 상황 하에서 도출된 결론이었던 것이다.
소련의 이런 선 정부수립, 후 후견안은14] 5년 내외의 직접지배방식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미국의 선 탁치, 후 정부수립안15]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발표된 모스크바 협정문은 이런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서로 절충한 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충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소련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것도 사실이었다. 협정문에서는 임시정부수립을 우선한다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었지만, 신탁통치에 대해서는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한다'라는 상당히 유동적인 문구로만 규정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임시정부 수립은 이후 촉발된 격렬한 반탁반소여론의 와중에 미국이 보인 태도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소련이, 미소공위를 파탄내고 하나의 정부 수립 대신 소비에트화된 북한의 단독정권을 수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무위로 돌아간다. 남한에서는 민중의 힘으로 강대국들의 신탁통치를 좌절시켰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었지만, 찬탁반탁의 와중에 결정적으로 서로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남한의 우익과 좌익 세력들의 합작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었고, 미국 또한 소련의 거부로 인해 유엔으로 문제를 이관하면서 결과적으로 1948년 남한만의 5.10단독선거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북한 또한 정부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민족 분단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과 소련, 양 이해당사자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결과까지 살펴봤으니 여기서 아까 제기했던 의문을 다시 꺼내보자. 왜 언론은 실상과 전혀 다른 보도를 하게 됐을까? 그리고 오보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오보의 시작은 국내 언론이 인용했던 AP통신과 UP통신이었다. 여기에 오보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동아일보의 주장은 이렇다.
<신탁통치 국내 보도=본보는 1945년 12월 28일자에 ‘華盛頓(화성돈·워싱턴의 음역)二十五日發合同至急報’ 라고 출처를 밝히고 이 기사를 보도했다. 본보는 이날 1면 사설을 통해 “전문이 간단하야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한 설명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으나…”, “아직 진상의 전모가 들어나지 않앗슴으로 우리는 차후의 진행을 주시하는 동시에 이 이상의 비판을 보류하거니와…”라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중략...)
당시 보도에 대한 사실 왜곡=KBS ‘미디어포커스’는 2003년 12월 방송에서 본보가 국내 언론 중에서 유일하게 이 외신기사를 대서특필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본보의 외신 인용 보도가 반탁운동을 격화시켜 결국 남북 분단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중략...)
당시 미국 워싱턴에 특파원을 두고 있지 않던 국내 언론들은 외신기사를 전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를 무시하고 의도적인 왜곡보도로 몰아간 것이다.
문제가 된 기사를 최초로 보도한 것은 미국의 통신사인 AP와 UP로 알려졌으나 당시 기사 원문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일보 취재팀이 UP의 후신인 UPI 측에 문의한 결과 미국 현지 신문도 당시 UP 기사를 전재해 국내 언론과 같은 내용을 보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는 1945년 12월 26일자 7면에 UP 기사를 전재한 ‘May Grant Korea Freedom’이라는 기사를 통해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미군 기관지인 성조 태평양판(일본 도쿄에서 발행)도 1945년 12월 27일 AP, UP 기사를 종합한 기사를 1면에 싣고 문제의 UP 기사와 해당 기자 이름을 보도했다.>16]
오보의 시작은 한국 언론이 아니라 미국의 AP통신과 UP통신이었다. 당시 한국 언론들이 외국에 일일히 특파원을 둘 수 없었던 현실을 생각한다면 외신을 전재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이 오보사건 또한 근본적인 책임은 외국 통신사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 통신사들의 단순한 실수냐, 아니냐가 문제가 되는데, 위에서 내내 언급했듯이 이 시점에서 미국의 기본 정책은 한반도의 신탁통치였고, 따라서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라는 보도는 뜬금없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미국 통신사들이 그와 같은 보도를 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이에 대한 음모론이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17]
하지만, 그렇다면 동아일보를 비롯한 한국 언론에는 전혀 책임이 없을까?
물론 동아일보만이 위 기사를 유일하게 게재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동아일보만이 욕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 대한 해명은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동아일보는 위 기사에서 <“전문이 간단하야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한 설명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으나…”, “아직 진상의 전모가 들어나지 않앗슴으로 우리는 차후의 진행을 주시하는 동시에 이 이상의 비판을 보류하거니와…”라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라며 사설에서 자신들이 신중한 태도를 취했었다고 하지만, 우선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신중하기는 커녕 기사의 어조 자체가 상당히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측면이 컸다. 또한 동아일보는 그 이전에도 소련에 대해 다분히 적대적인 기사를 전재하기도 했다.18] 협정문 전문이 발표된 뒤에도 전문은 수 일이 지나서야 1면도 아닌 2면에 작게 게재했으며, "조선 독립 5년이나 유보"등의 헤드라인을 뽑는 등, 여전히 신탁통치에 대한 부분만을 강조하며 편향적이고 자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사실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은 이미 미 국무부 극동부장 빈센트(John Carter Vincent)의 10월 20일자 발언이 10월 23일에 보도가 나면서 국내에도 알려져 있었다.19] 신탁통치를 우선한 다음 조선의 독립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의 발언에 대해 당시 국내 정치단체들은 모두 반대입장을 표명했고, 이에 당황한 미군정이 나서 유야무야시켰던 전적이 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과 2달 만에 전혀 반대되는 내용의 기사를 인용 전재하며, 사실 여부가 판단 가능했던 이후에도 같은 태도를 밀어붙였던 것을 생각해볼 때, 비록 고의적인 오보는 아니라 하더라도 동아일보를 비롯한 당시 국내 대다수 언론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하지 못하고, 사실을 호도하며, 대중을 자극하고 선동했다는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그런 지적에 대해 자신들은 외신을 인용했을 뿐이며, 오보 하나때문에 남북이 분단되었다는 식의 비논리적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고, 또한 이후의 혼란스러운 정국은 모두 반탁에서 찬탁으로 하루아침에 돌아선 좌익단체들 때문이라는 식의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다.20]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 그 때 모스크바 3상회의의 보도가 실제 협정문에서 강조한 대로 신탁통치가 아닌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보도가 되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물론 당시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과 소련의 속내가 다르고, 수많은 정치단체들의 난립 속에 이미 남한 정국이 매우 불안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설사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해 제대로 된 보도가 나가고 임시정부수립 논의가 순조롭게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서로 목표하는 바가 달랐던 미국과 소련이 의사를 잘 합치시켰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들의 오보와 잘못된 태도가 남북분단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은 좀 과장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최소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남북이 합쳐진 임시정부의 수립까지는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동아일보 또한 남북분단은 좌익단체들 때문이다! 라는 치졸하고 속편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최소한 자신들의 과실이라도 좀 인정하는 편이 어떨까.
뭐,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언론이 제 입맛대로 사건을 다루고 자극적인 제목만 뽑아대며 사람들을 낚는 건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
1] "분단 고착시킨 동아일보 '탁치' 보도" 2004년 04월 19일 (월) 미디어 오늘.
2] 다만 학계에서는 남한 내 좌익단체들(득히 조선공산당)은 처음부터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다가, 나중에 모스크바 협정지지(찬탁이 아니다)로 돌아섰다는 연구결과가 많이 나와 있다.
3]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2004-12-12 동아닷컴:디지털스토리
4] 한 가지 부연하자면,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한국문제만을 논의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다. 7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모스크바 협정문에서 한국에 관한 조항은 세 번째 항목이며, 한국 문제 또한 회의의 여섯가지 의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기획 1 :한국현대사-왜곡과 진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완범. 역사비평 1995년 가을호(통권 32호), 1995. 8. p. 333-334.
5] 모스크바3상회의 2007. 12. 01 국가기록원 나라기록포털
6] <조선공산당의 탁치 노선 변화 과정(1945~1946)>. 이완범.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5. 12. p. 197-199.
7] "한국은 영국 왕실근위병의 유골 한 토막만도 가치가 없는 나라" 외무성 극동국 홀드(L. H. Fould). Cumings 1981, 488; note 65. 재인용.
8] <한국 신탁통치의 연구 - 미국의 구도와 변질을 중심으로 ->. 신복룡. 한국정치학회보 제27집 제2호(상), 1994. 3. p.37-39.
9] 스탈린은 카이로 선언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의 입장을 표명하며, 또한 "한국인은 아직 독립 정부를 영위,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40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루즈벨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eran. 1943. (Washington D.C.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1). p. 869. 재인용.
또한 테헤란 회담에서도 처칠이 소련에 대해 극동에서의 부동항 공여안을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극히 조심스러운 반응만을 보였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대한정책>. 이주천. <<미국사 연구>> 8권 p. 226.
10] 루즈벨트는 그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서 얻은 성과로 말미암아 전후 식민지 문제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1942년 2월 20일 윌리엄 랭던이 제출한 "한국문제에 관한 주요 메모"를 보고 결정적으로 굳어지게 된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대한정책>. 이주천. <<미국사 연구>> 8권 p. 223-227.
11]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대한정책>. 이주천. <<미국사 연구>> 8권 p. 241.
12] 전후 처리과정에서 소련은 일본의 할양을 요구했고, 맥아더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한반도에서 양보함으로써 일본을 지키려 하였다. <한국 신탁통치의 연구 - 미국의 구도와 변질을 중심으로 ->. 신복룡. 한국정치학회보 제27집 제2호(상), 1994. 3. p.32-33.
13] <한국 신탁통치의 연구 - 미국의 구도와 변질을 중심으로 ->. 신복룡. 한국정치학회보 제27집 제2호(상), 1994. 3. p.34-35.
14] 소련이 협정문에서 사용한 'ОПЁкА'라는 단어는 영어의 tutelage에 해당하며, 신탁통치(trusteeship)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기획 1 :한국현대사-왜곡과 진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완범. 역사비평 1995년 가을호(통권 32호), 1995. 8. p. 339.
15] <미국국무성의 한국신탁통치계획(1942-1945)>. 이형철. 한국정치학회보 21권2호, 1997. 4. p. 285-286.
16] [모스크바 3상회의 60주년]좌익 '찬탁돌변' 남북분단 불러.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2290090
17] 태평양 성조지의 특파원은 랄프 헤인젠(Ralph Heinzen)기자인데,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날조전문가로 통했다고 한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정용욱. 2003. p. 63. 재인용. <조선공산당의 탁치 노선 변화 과정(1945~1946)>. 이완범.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5. 12. p. 197-198.
18] "미국이 최근 소련에 대하여 조선의 통일화를 거듭 종용하였다"거나 "소련이 대일참전의 대상으로 조선과 만주, 내몽고를 가질 것"이라든가, "소련은 조선의 절반을 점령하고 있는데 미 점령군이 철퇴하게 된다면 소련은 남부조선까지고 주저 없이 점령할 것이 틀림없다"등의 반소적으로 편향된 미 언론 기사가 동아일보 1945년 12월 25일자에 게재되었다. 또한 같은 신문 12월 24일자에는 소련이 원산과 청진에 특별이권을 요구한다는 대중들의 반소적 감정을 자극하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공산당의 탁치 노선 변화 과정(1945~1946)>. 이완범.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5. 12. p. 194. 주 16.
19] <조선공산당의 탁치 노선 변화 과정(1945~1946)>. 이완범.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5. 12. p. 193.
20] [모스크바 3상회의 60주년]좌익 '찬탁돌변' 남북분단 불러.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2290090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1212/8138197/1
"분단 고착시킨 동아일보 '탁치' 보도" 2004년 04월 19일 (월) 미디어 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694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2004-12-12 동아닷컴:디지털스토리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1212/8138197/1
[모스크바 3상회의 60주년]좌익 '찬탁돌변' 남북분단 불러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2290090
모스크바3상회의 2007. 12. 01 국가기록원 나라기록포털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3312
<기획 1 :한국현대사-왜곡과 진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완범. 역사비평 1995년 가을호(통권 32호), 1995. 8.
<조선공산당의 탁치 노선 변화 과정(1945~1946)>. 이완범.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5. 12.
<한국 신탁통치의 연구 - 미국의 구도와 변질을 중심으로 ->. 신복룡. 한국정치학회보 제27집 제2호(상), 1994. 3.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대한정책>. 이주천. <<미국사 연구>> 8권.
<기획 1 :한국현대사-왜곡과 진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완범. 역사비평 1995년 가을호(통권 32호), 1995. 8.
<미국국무성의 한국신탁통치계획(1942-1945)>. 이형철. 한국정치학회보 21권2호, 199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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