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지혜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 혹은 영원한 그것
+찬미예수님
학교에서 윤리 과목들을 가르치다 보면 비참하고 슬픈 기분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목의 특성상 윤리적인 문제들에서 비롯되는 사건 사고들을 다뤄야 하는데,
결국 인간의 악한 성향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들을 마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 돈과 명예를 쫒는 현실, 육체적인 것에 대한 욕망.
그로인해 희생되는 피해자들을 수업시간에 다루노라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평소 인간이 보편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요약하자면 재물, 권력, 명예, 사랑 정도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구나 되도록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재물을 원합니다.
그 다음은 권력입니다.
권력은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이에 대한 욕심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타인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원하고 내 뜻에 맞춰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명예와 사랑 또한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고 싶고 좋은 평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저 또한 이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신자분들과 학생들에게 인기 있고 싶고, 괜찮은 신부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 사랑. 이 모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여겨지기에
일정한 목표에 다다르면 인간은 더욱 더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게 됩니다.
또한 혹시라도 이것이 사라질까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 더욱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으로 인해
질투와 미움, 열등감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처럼 어리석은 인간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러한 묵상을 하게 되면, “그렇다면 무엇이 정말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 최종 목표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첫 번째, 그 목표가 재물과 같이 변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권력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세번째, 명예 혹은 사랑과 같이 타인의 주관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결국, 변화하지 않는 가치로써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할 이것은 한가지로 귀결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모여있는 이유인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충만하게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 가치와 존재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빼앗길 위험도 없고
다른 이의 주관과 나에 대한 평판으로 인해 변화하지도 않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특별히 다른 민족의 선교가 아닌 자생적으로 교리를 받아들여 탄생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하느님을 위해 재물, 권력, 명예, 사랑과 같은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했으며
생명을 바쳐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는 어떠한 세속적인 욕심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느님 외에 다른 목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라고 해서 어찌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순교자들의 생애를 상기하노라면 오늘 제 2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가
매우 의미있게 들립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순교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즉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질투, 원망, 미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며
그저 진리와 사랑에 대한 열망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수많은 유혹과 위협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신앙으로 인한 순교의 위험이 없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손가락질을 받지도 않고 물리적인 손해를 받지도 않는 시대임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비록 핍박은 없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을 위협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물질의 유혹, 바쁜 일상, 봉사를 할 때 느껴지는 손실감,
성당에 나오는 것에 대한 귀찮음과 게으름.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또 다른 모습의 유혹이며 박해입니다.
이 밖에도 점점 세속적으로 흘러가는 이 시대는 신앙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들은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증거 하고자 애써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충만한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이 이러한 우리가 얻게 될 결과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아멘.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식당에서밥을 먹기전에 성호를 긋는것도 남이 봐도 좋다 하고 당당하게 긋는것도 순교자라고 할수있죠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