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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세운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였다(행 18:1-11)
이곳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 지역에 해당되는 꽤 큰 도시였다. 아가야 주의 주도였다.
그리고 항구도시였다. 부산과 비숫한 도시였다.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고, 동시에 다문화 공동체였다.
이런 여건으로 인해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 가장 큰 교회였다. 성도 수도 제일 많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후 아볼로에게 교회를 맡겼고, 자신은 에베소로 이동했다(행 19:1)
성도 수가 많으면 문제도 많아진다. 자식도 많으면 문제도 많아진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여러 경로를 통해 선교지에 있던 바울에게 전달되었다.
자신이 세운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바울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기원후 55년 무렵에 바울이 첫 번째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고린도전서이다.
디모데가 전달자였다.
고린도를 방문했던 디모데로부터 교회 상황을 보고 받은 바울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2:1-2, 12:14, 13:1-2)
"다시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2:1-2. 공동번역본)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방문을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안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바울을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 사이에 몸싸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하여 교회가 큰 혼란에 빠졌던 것이다.
바울 자신도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였기에, 바울의 마음도 심히 상심했을 것이다.
성도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바울이 다시는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방문할수가 없다니..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도 못하고 선교지로 복귀한 바울이 자신을 대신해서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송했다.
디도는 고린도출신 헬라인이었다(행 18:7)
디도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후 바울에게 선교 보고를 했다.
바울은 충격적인 보고를 들어야만 했다.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전임자 바울을 가짜 목회자라고 공격했고, 성도와 바울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보고를 들었던 것이다.
충격적인 보고를 들은 사도 바울이 즉석에서 편지를 적어 디도편으로 고린도교회에 전달했다.
이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고린도후서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바울 지지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이 1-9장이다.
주로 긍정적인 내용이 기록되었다.
예) 1:1-7 "위로"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바울이 무산된 교회 방문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바울 지지파 성도들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반면에 10-13장까지에는 바울을 반대하고 이단들을 지지하는 대상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예) 11:13-15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이단세력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은 고린도후서는 두 개의 다른 편지가 편집 구성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쨌든, 오늘 본문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바울 반대파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중 일부분이다.
이들의 주장은 한 가지다.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라고 비난했다"(2) "속된 생활을 한다고 헐뜯는다"(현대어성경)
바울은 별 볼일 없는 자이다라고 비난했다.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1)
"바울은 성도들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는 유순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에는 강경하다"
"만나면 찍 소리 하지 못하면서 떨어져 있을때에는 큰소리친다"
바울은 속물이다.
이에 대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1. 바울은 자신이 육신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3)
자신이 육신의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우리는 육신을 지니고 있다"(현대어성경)
바울이 말하는 "육신"?
신약성경은 <육신>을 말할 때 크게 두 가지 헬라어를 사용했다.
1) "소마": "인격"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육신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할 때 사용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전 6:20)
2) "사륵스": "죄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육신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할 때 사용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 8:6)
본문 2절에 나오는 "육신"은 "사륵스"이다.
바울은 육신이 지닌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려 한다.
바울은 자신도 인간의 한계를 지닌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도 인간의 연약성을 초월하지 못하고 죄 많은 성품과 불건전한 충동밑에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예) 롬 7:15, 18-19
바울 자신도 자신의 모순을 인정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고 있으니 나는 도무지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도 이 같은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되는 말만 늘어놓는다.
우리는 성도이지만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한 끼라도 굶으면 견디지 못하고 짜증을 낸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암송하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검색하기 보다 맛집 검색을 더 좋아한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육신이라는 조건하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연약하다. 자주 넘어지고 좌절한다.
그리고 충동적인 욕구 아래에 살고 있다. 좋은 것보면 갖고 싶어진다.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을 느끼기도 하고 근거도 없는 기분에 도취되기도 한다.
격한 감정으로 인해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가지는 욕망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그렇게 살고 있다.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사도바울도 그랬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고인이 된 어느 유명한 목사님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이 분은 한국교회역사의 걸출한 인물이다. 지금까지도 성자 같은 인물로 추앙되는 분이다.
이 분이 교회를 은퇴한 후 어느 초라한 사택에서 홀로 거주 중이었다고 한다.
사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내외는 미국에 살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해주지 않을 작정으로 일찌감치 목사인 아들을 미국을 추방했다고 한다.
어느 날 서울 시내 유명한 교회 목회자들이 목사님의 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후배 목사님들이 덕담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 분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는 죄인입니다. 과거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교회를 목회중일 때에도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잠시나마 욕정을 느끼기도 했었다.
지금 내 나이가 90이 넘었지만 지금도 이런 인간적인 욕구를 느끼고 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후배 목사님들은 나처럼 살지 말고 예수 잘 믿으라"는 덕담을 남겼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다.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하다.
쉽게 상처받고 자주 넘어진다.
잠시 잠깐은 다윗처럼 살 수 있어도 영원토록 다윗이 될 수는 없다.
주일 하루만은 어찌어찌 견딜 수 있지만 월요일만 되면 본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의 약함을 이해해 주고 자주 격려하고 많이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버틸 수 있고 견딜 수가 있다.
우리는 육신에 불과하다.
2. 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싸움을 하고 있지 않다(3)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육신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육신의 생각대로 싸우고 있지는 않다"(3절, 현대어성경)
비록 우리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지만 육체로부터 지배를 받고 살지는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
앞서 언급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인들도 사람이기에 허황된 욕구를 가질 수 있고, 육신이 주는 욕망을 품을 수는 있다.
욕망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욕망이 주장하는 대로 휘둘리지는 않아야 한다는 의미.
모름직이 성도는 욕망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의미는?
5절을 보라. "육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한다"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구절을 복종시킨다는 행위로 해석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는 육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며 산다는 의미이다.
간절히 바란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게 되기를 바란다.
"복종시킨다"는 의미는?
전쟁 영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다.
전투에서 승리했다. 승리한 군사들이 포로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했다.
백성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서 이들을 환영한다. 여인들이 꽃가루를 푸려 댄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승리한 군사들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고 포로 된 적군들의 모습은 의기소침하다.
성 안에서는 이미 잔치준비로 분주하다. 온갖 악기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무희들이 춤을 추어댄다
황제와 신하들이 잔치자리에 배석했다.
승리로 이끈 장군이 포로들과 전리품을 황제 앞으로 가지고 데리고 간다.
그리고 황제 앞에 포로들의 무릎을 꿇린다.
이것이 바로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럼, 황제가 포로들을 살핀다. 그리고 전리품 일부를 승리한 군사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황제는 포로들에게 처분을 내린다.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든지 아니면 포로들을 종으로 삼으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잔치가 시작된다.
여러분 이 그림을 기억해라.
우리는 육신의 사람들이기에 육신이 주는 감정과 생각을 자주 가진다.
자신이 육신이 주는 감정을 느끼거나 육신이 주는 생각을 가질 때마다 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제일 먼저,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욕망을 사로잡아라.
육신의 욕망을 포로를 다루듯이 다루라. 틈을 주지 말고 결박을 해야 한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박을 하라.
그리고는 에수님 앞으로 데리고 와라. 이때 주의사항이 있다.
자신이 임의대로 포로를 처분해서 지배하려고 하지 마라.
범인을 잡았으면 파출소로 끌고 가든지 아니면 경찰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경찰관이 처분을 내린다.
그리고 그 포로들을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6)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대적자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한다.
자신은 육신의 사람이지만, 당신들처럼 육신의 생각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을 비난하는 행위는 육신의 생각에 지배를 받았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육신의 생각에 지배를 받으면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동료를 비난하고 상사를 비난하고 가족을 비난하게 된다.
자꾸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자기 앞에 무릎을 꿇리려고 한다.
육신의 생각이다.
성령의 생각은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8)
바울의 대적자들은 육신의 생각으로 바울을 무너뜨리려 한다.
성령의 사람은 타인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육신의 사람이셨지만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이시다.
오늘은 2024년 종려주일이다.
요한 12:12-19을 읽자.
예수님은 육신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예수님은 모닝을 선택하셨다.
그 당시 개선장군은 백마 네 마리가 끄는 마차에 올라타는 것이 관례였다.
개선식의 조건이 있었다.
적군 5천 명 이상을 죽여야 개선식을 베풀 수 있었고, 개선식에 참여한 군중들은 꽃세례를 퍼부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았다.
개선장군이셨지만 나귀를 타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육신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 살수 밖에 없다.
나쁜 생각이 좋은 생각보다 먼저 떠오른다.
나쁜 생각 못된 생각 더러운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지나치게 죄책감을 가지지는 마라.
대신에 그런 생각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이들의 무릎을 꿇려야 한다.
이때 주의사항이 있다.
육신의 욕망을 자신의 포로로 만들려하지 마라. 자신이 처분을 내리려 들지 마라.
그리스도의 포로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처분을 내리신다.
우리 모두 앞으로 육신으로 살아야 하지만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기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