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주 기행](21)공주의 명주 ‘계룡백일주’
|
명산 ‘계룡산’이 있는 공주에 명주 ‘계룡백일주’가 있다.
백일주는 ‘백일 동안 익힌 술’이다. 우리의 전통 민속주 중에는 해가 저물 녘에 빚기 시작해 새벽 닭이 울 때쯤 완성하는 술이 있는가 하면, 3년에 걸쳐 완성되는 술도 있다. 백일주는 술을 빚는데 석달 열흘 걸리는 술이다.
#400년을 이어온 궁중술의 전통
백일주의 원조는 ‘궁중술’이다. 1623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일등공신 중 한 명인 이귀(李貴·연안 이씨)에게 선물을 하사했다. 그 선물은 왕실 대대로 전해온 궁중술의 양조비법이었다.
이귀는 이 술의 비법을 부인인 인동 장씨를 통해 이어가도록 했다. 이때부터 이 술은 연안 이씨 가문의 며느리를 통해 오늘까지 이어졌다. 때문에 술을 빚는 방법은 문헌 등에 나와있지 않다. 며느리에서 며느리를 통해 ‘가문의 술’로 전수됐기 때문이다. 지금 역시 연안 이씨 며느리인 지복남씨(80)에 의해 술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 술이 바로 ‘계룡백일주’다. 계룡백일주는 빚기가 워낙 까다롭다 보니 늘 귀했다. 연안 이씨 가문은 술을 대량 생산하지 않았다. 조금씩 만들어 제사상에나 올렸다. 연안 이씨 종가가 있는 공주에서도 이 술의 맛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귀했다.
그러나 그 맛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다. 몇 잔 마셔본 사람들의 입에서 늘 ‘최고의 술’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16도 약주는 ‘신선주’, 40도 소주는 ‘백일소주’
백일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16도짜리 ‘약주’다. 찹쌀·누룩·재래종 국화꽃· 오미자·홍화·진달래·솔잎 등을 재료로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숙성시켜 만든 것이 바로 약주로서의 계룡백일주다. 향긋한 향취와 마실 때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일품이다. 뒤끝이 깨끗한 것도 이 술의 자랑중 하나다. 냉장보관해서 차게 마시면 더욱 맛이 좋다. 이 약주에는 그래서 ‘신선이 마시는 술’ 또는 ‘마시면 신선 같은 기분이 드는 술’을 뜻하는 ‘신선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다른 하나는 40도짜리 소주다. 약주를 증류시킨 뒤 벌꿀을 넣어 만든다. 이 소주를 옛날에는 ‘백일소주’라고 불렀다. 독한 편이지만 솔잎과 국화꽃 등의 은은한 향이 있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담백한 맛이 일품이고 많이 마셔도 숙취가 적은 것이 장점이다. 40도짜리 백일주는 오래 될수록 맛과 향이 더욱 좋아지는 매력이 있다. 요즘에는 도수를 조금 낮춘 30도짜리 소주도 나온다.
#공주의 자연, 계룡산의 자연을 그대로 담아
계룡백일주는 주변의 자연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계룡산 주변 등 공주 일원의 솔잎·진달래꽃·국화꽃 등이 술에 녹아있다. 이 술을 빚기 위해서는 봄이 되면 진달래꽃을 따다 말리고, 가을이 되면 국화꽃을 따다 말려야 한다. 1년 내내 쓸 수 있는 분량을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 하는 것이다. 솔잎이나 국화꽃 등은 백일주의 맛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재료다. 은은하고 담백한 맛은 모두 이런 재료를 통해 나온다. 다른 술에 비해 숙취가 적은 것도 이런 자연재료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백일주에 쓰는 누룩은 찹쌀가루를 사용해 만든다. 통밀과 찹쌀을 똑같은 분량으로 섞어 거칠게 빻아낸 뒤 물과 섞어 반죽을 한다. 누룩 틀에 담아 띄우는 기간은 여름철 2개월, 겨울철 3개월. 2~3일에 한번씩 뒤집어 주어야 누룩이 제대로 뜬다.
계룡백일주는 밑술이 발효되는 데 30일, 본술을 빚은 날부터 술이 다 익을 때까지 또 70일 걸린다. 본술을 빚을 때 백일주의 맛과 향을 좌우하게 되는 국화꽃·진달래꽃·솔잎·오미자 등의 온갖 재료가 들어간다.
백일주의 최종 완성은 창호지를 이용한 걸러내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100일 동안의 세월이 녹아 있는 술은 언뜻 보면 맑고 깨끗한 것 같지만 조금 놔두면 앙금이나 찌꺼기가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 이를 막기 위해 창호지를 받쳐 걸러준다.
#백일주 마실땐 참죽나무 순과 곶감말이가 최고
연안 이씨 문중 사람은 물론 공주 사람이 백일주를 마실 때 먹는 특별한 안주가 몇가지 있다. 봄에 딴 참죽나무 순에 찹쌀 고추장과 참깨 양념을 버무려 말린 뒤 다시 찹쌀 풀을 입혀 말리면 최고의 백일주 안주가 된다. 매콤하면서도 바삭바삭한 맛이 백일주에 딱 맞는다는 것이 애주가들의 설명이다.
호두를 곶감에 싼 뒤 자른 ‘곶감말이’를 계룡백일주와 잘 어울리는 안주로 꼽는 사람도 많다.
〈공주|글 윤희일기자 yhi@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
[전통주 기행]종가의 부엌에서 400년 지켜온 맛
|
충남 공주에 가면 연안 이씨 종가가 있다. 명인 지복남씨(충남 공주시 봉정동)가 계룡백일주의 맥을 이어온 곳이다. 지씨의 남편(이황·86)은 인조로부터 술의 비법을 하사받은 이귀의 14대 손이다. 지씨는 스물 넷에 연안 이씨 가문에 시집을 오면서 술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50년이 넘는 세월을 백일주와 함께 했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계룡백일주에는 주원료인 찹쌀 이외에도 솔잎과 재래종 국화꽃·진달래꽃·오미자 등이 들어간다. 재래종 국화꽃(황국)은 무서리가 내린 뒤에 핀 꽃이어야 제맛을 낸다. 진달래꽃은 꽃잎이 만개해야만 이른바 ‘완숙미’를 낸다. 이런 재료들을 제때에 따다 저장하는 일 등 모든 일이 지씨의 몫이었다. 어떤 때는 술을 잘못 빚어 엄청난 양의 술을 그냥 버려야만 했다. 비전문가들이 맛을 보면 맛의 차이를 모를 수도 있지만 지씨는 제대로 된 술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버렸다. 술의 맛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 때는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세월을 보내기도 했지만 백일주의 전통은 지켜냈다. 거기에는 가문의 정신과 혼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지씨는 온몸으로 백일주의 맛을 지켜냈다.
1989년에는 충남도로부터 무형문화 제7호로, 1994년에는 농림수산부로부터 전통식품 명인 제4호로 각각 지정받았다. 이후 우리농림수산식품 품평회에서 민속주 부문 대상을 차지하는 등 계룡백일주를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주(名酒)’로 키워냈다.
지씨가 이어온 계룡백일주의 맥은 현재 두 아들과 며느리들이 이어가고 있다. 성우씨(45) 등 아들들은 계룡백일주를 전국적인 브랜드로 키워내기 위해 서울 등을 오가며 애를 쓰고 있다.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백일주 비법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다.
‘술은 떨어져도 맛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으로 백일주 고유의 맛을 지켜온 지씨에게 최근 반가운 소식이 잇따라 전해지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한국관광명품’으로, 올 1월에는 청와대의 설 선물용 상품으로 각각 선정됐다.
지씨는 “아들과 며느리들이 술을 만들면 꼭 술맛을 본다”며 “계룡백일주의 전통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엄격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공주|윤희일기자 yhi@kyunghyang.com〉 |
[전통주 기행]그윽한 고향이 담겨있습니다
|
1907년 7월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주세법이 공포되고 8월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우리의 향토주는 서서히 잠적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또 밀주를 막는다며 1916년 1월부터 주류 단속을 대폭 강화했다. 이때부터 모든 주류가 약주·탁주·소주로 획일화되기 시작했다. 전통주가 ‘몰살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해방 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양조업체들을 한국인이 경영을 하게 되면서 우리의 전통주는 한 때 활기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국토가 양분되고 정치적 혼란이 빚어지면서 활기는 다시 사그라들었다.
1946년 이후 미곡을 원료로 한 양조의 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그 명맥을 확실하게 지켜온 술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공주 지방의 술을 대표하는 ‘계룡백일주’다.
일명 ‘신선주’라고도 일컬어지는 계룡백일주는 색과 향과 맛이 모두 뛰어난 ‘명주 중의 명주’다. 찹쌀과 백미는 기본이고 우리 강산의 솔잎·오미자·진달래꽃·국화꽃 등을 재료로 해서 빚는 술이다. 이 술은 연안 이씨 문중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전통 비법 그대로 만들어진다. 마실 때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는 그 감칠맛, 코끝을 향긋하게 자극하는 향취는 백일주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식사 때 반주로 1~2잔씩 마시면 혈액 순환에도 아주 좋다. 나는 냉장 보관한 계룡백일주를 좋아한다. 4도에서 12도로 맞춰 보관하면 더욱 뛰어난 향취와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계룡백일주를 벗해 왔다.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술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 맛과 향이 다른 어떤 술에 비해서도 좋기 때문이다. 백일주는 누룩을 적게 쓴다. 그래서 누룩에서 오는 거친 맛이 없다. 계룡백일주는 숙취가 적은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아무리 마셔도 다음날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이 주당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나는 우리의 향토술 계룡백일주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술의 전통이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전통을 이어온 향토주야말로 우리 몸에 가장 좋은 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동섭·공주시의원〉 |
※출처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