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노태우대통령 시절에 건립한 약사여래 대불 건립에는 우리 39동문들도
몇사람 찬조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재섭 동문이 1억원, 당시 대구지검장을 했던
정성진 동문의 경우도 액수는 작지만 이름이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상으로 동화사를 뒤로 하고 파계사로 향한다.
파계사(把溪寺)는 팔공산(八公山)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동화사(桐華寺)의 말사로
804년(애장왕 5) 심지(心地)대사가 창건하고,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스님이 삼창하였다.
파계사 현판 글씨는 서예가 一中 김충현 선생의 필치다.
현존 당우로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 법당인 원통전(圓通殿), 적묵당(寂默堂)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 현니암(玄尼庵) ·성전암(聖殿庵) ·금당암(金堂庵) 등이 있는데, 성전암은 경북 3대 도량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전암에는 1955년부터 성철 스님이 10년 동안 철망을 치고 동구불출하며 수도하신 곳으로 유명하다. 문화재로 보물 제1214호 파계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있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파계사에는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스님은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고,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淑嬪) 최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는 지방 유림(儒林)의 행패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御衣)는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다.
250년된 아래 느티나무를 '영조임금 나무'라고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서늘한 그늘에서 한참 더위를 식히고 대구로 돌아갔어도 동문들과 저녁모임 시간에 늦지 않았다.
오른쪽 위로부터 최태호, 이석만, 최희장, 지홍원, 왼쪽으로는 송대완, 이 연, 김정의 동문이다.
오세용, 박창규 두 동문은 도착이 약간 늦어 사진에 나오지 않지만, 모처럼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격의없는 방담으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 기뻣다.
첫댓글 다시 동화사와 파계사를 보니 우리가 자라난 곳이 더 자랑스럽군요. 잘 보았습니다. 대구 친구들의 건강한 모습도 반갑고요.
내내 건강하며 함께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