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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룻기 1:6-18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그 먼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단지 이방 며느리 둘과 함께 있던 나오미는 베들레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제 그 동안의 흉년이 사라지고 풍성한 비와 함께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의 흉년은 모세의 언약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 것을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땅에는 양식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홀로 남은 나오미는 무조건 고향 땅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한편,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결정으로 인해 각각 자기들의 삶을 어찌할지 결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 며느리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두 며느리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아들 말론의 처는 룻이고 둘째 아들 기룐의 아내는 오르바였습니다. 이 두 며느리는 신기하게도 둘 다 대단히 정이 많고 착했습니다. 못된 며느리였다면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를 괄시하고 불평하며 신세 타령을 했을 텐데, 룻과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섬기며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며느리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서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모압 여인 룻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고, 오르바는 룻기 1장에만 기록된 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이 두 며느리는 세상적으로 볼 때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모압 족속 사람들이 볼 때 룻과 오르바는 특이한 민족인 유대 남자와 결혼한 매우 어리석고 고집 센 여성이었을 뿐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성경을 연구하며 확신한 바는 룻이든 오르바든 자기 남편을 정말 생명 다해 사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룻은 인류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여성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오르바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르바는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그 여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너무나 큰 기회가 한 동안 있었지만 마침내 그 구원의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윗 왕의 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6).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17).
나오미의 남편이 세상을 뜬 후, 두 아들이 모압 여인을 하나씩 데려와 결혼하자, 나오미와 두 아들, 그리고 두 며느리는 함께 살았습니다. 가난한 처지에 두 아들이 각각 넓은 집에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며, 집 한 채를 구하여 각 방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들이 지내고 작은 방 하나에서 나오미가 살았을 것입니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이방 땅에서 좋은 여인들을 만난 말론과 기룐은 매우 행복했고, 그들의 행복을 지켜보는 나오미 역시 두 며느리가 모두 상냥하고 순종적이면서도 남편을 잘 모시는 것을 보고 매우 흡족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두 아들마저 건강 문제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이 모압 땅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나오미는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홀로 남았더라”(룻 1:5, 스데반 황 번역).
이때 나오미는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 며느리가 딸려 있습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베들레헴에 양식이 많아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당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단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모압 지방의 그녀가 있던 곳에서 떠나 유다 땅으로 향하였더라”(룻 1:6).
그런데 성경의 표현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부분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단지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감정적인 문제이거나 혹은 먹고 사는 문제가 극단적으로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돌이키셨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은 그곳에 가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고, 또한 흉년 가운데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게 된 참된 신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주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듣고 싶었고, 주를 섬기는 자들과 온 마음을 다해 맘껏 예배하고 싶었습니다. 이에 그녀는 베들레헴 에브랏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사실 나오미는 이미 십 년 정도 살아오면서 익숙하여진 모압 땅에서 두 며느리와 함께 그럭저럭 살 수 있었습니다. 두 며느리 역시 나오미를 시어머니로 존경하면서 여러 면에서 시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며 아무런 불평 없이 순종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오미 입장에서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심령은 모압 땅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만이 그의 허전한 심령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참 성도들이라면, 가장 깊은 갈급함은 말씀이랍니다. 즉,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참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인간의 가장 큰 비참은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의 기갈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사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은 기근 때문이었지만, 어쩌면 기근과 함께 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 때문에 더더욱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짜 교회로 가득한 가나안 땅을 보며 모압 땅으로 이사하는 것을 합리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고, 주님은 그들을 만나주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나오미는 주의 백성들과 함께 주 하나님을 너무나 만나고 싶은 심한 기갈 때문에 당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자, 마침내 나오미는 짐을 꾸린 후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가 묵묵히 나오미를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바래다주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가고자 했습니다. 나오미는 길을 걷던 중에 그들의 심중을 알게 되고는 국경에 이르기 전에 여러 차례 “여기까지 왔으니 충분하다. 이제 너희 부모에게로 돌아가거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계속 시어머니를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국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본문에는 나오미와 룻과 오르바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위하는지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며느리들은 오직 나오미를 배려하고 있고,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장래를 걱정해주면서 배려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헤어지는 것이 그토록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국경 지역에 이르자 이제는 더 이상 애매한 상태로 같이 갈 수 없기 때문에 나오미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자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희들은 모압 사람이니까 모압에서 사는 것이 편할 것이다. 그 동안 나와 죽은 내 아들을 잘 보살펴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 너희들은 정말 훌륭한 며느리였고, 또한 나의 두 아들에게 가장 좋은 아내였다. 참으로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잘 돌보아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새 남편과 새 가정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축복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계속적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반복한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세의 언약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에 해당합니다. 즉, 나오미는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을 두 며느리에게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1:8-9).
그 당시 중동에서는 과부의 경우 가장 소외된 계층에 속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을 먹이고 보호할 남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부들은 모압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학대와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 과부들을 보호할 것을 명하셨습니다(출 22:22-23). 그들을 학대하거나 불공정하게 대하는 일이 없도록 법으로 제정하셨고, 나아가 많은 먹을 것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되도록 조치하셨습니다(신 14:29; 24:19-20; 27: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이든 과부는 너무나 비참하고 고생하는 것이 그 시대의 사정이었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두 며느리가 아직 젊기 때문에 재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가지라고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과부가 모압 땅에서 보호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새 남편이 생기고 그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되기를 주 여호와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여기서 개역개정이 ‘위로’로 번역한 원어 (메누하)는 안정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나오미는 두 며느리가 지금까지 고통과 어려움과 가난 속에 있었지만, 새 남편을 잘 만나서 안정된 삶을 살라고 권하며 축복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한 뒤, 나오미가 작별을 하기 위해 며느리들에게 입을 맞추었고, 그러자 두 며느리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두 며느리는 소위 목 놓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 동안 그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겪어 보면서 시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진실하고 멋진 성품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과 배려심이 얼마나 많은지를 맘껏 경험했던 두 자부는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동안 참았던 슬픔을 일시에 터뜨리며 엉엉 울었습니다. 특히 시어머니가 자기의 장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며느리들의 장래 행복을 위해 권면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리고 두 며느리가 떠나면 완전히 홀로 거지처럼 되어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생각할 때 눈물이 앞을 가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껴안고 목놓아 우는데 그 장면은 처량하기도 하고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고부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엉엉 울던 두 며느리가 갑자기 나오미에게 강력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아니 됩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가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오미는 이걸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동안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이방 나라인 모압으로 왔다가 너무나 고생했기 때문에 나오미 역시 더 강력하게 두 며느리를 만류합니다. 나오미는 문화와 환경 차이가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고, 또한 언어가 다를 때 얼마나 살아가기 힘든지, 말 통하는 친구들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를 알려주며 두 며느리가 자기와 같은 고생을 하지 않도록 더 이상 쫓아오지 말라고 권합니다.
아마 지금 시대에 이런 며느리를 찾아본다면 천명 중에 하나 정도 나올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민족을 버리고 가난하고 외로운 거지 같은 시어머니를 따른다는 것입니까? 아직 자녀도 낳지 않은 젊고 아리따운 젊은 여자들인데 자기 인생을 버리고 민족조차 다른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나라로 가겠다는 것입니까? 그 나라가 애굽이나 앗수르 같은 큰 나라도 아니고 도리어 수년 동안 흉년으로 찌든 가난한 나라인데, 그곳으로 가겠다는 것입니까? 만일 두 자부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의 우정과 신의를 참으로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제안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나오미와 룻, 그리고 오르바는 인간적으로는 보통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성경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역사에도 길이 남을 지극한 효성과 희생과 진실과 우정의 아름다움이 한없이 노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들을 계속 만류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나오미가 분명하게 아는 것은 만에 하나 그 며느리들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살려면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자여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어려움들은 인간적으로 그럭저럭 극복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은 극복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유다 베들레헴으로 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나오미는 그들의 사랑과 희생 정신 등, 모든 진심을 알기에 그 두 며느리를 “내 딸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룻기를 보면, 두 며느리의 진심을 안 이후부터 나오미가 그들을 “내 딸”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도 보면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13절도 보면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하는 나오미를 볼 수 있습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왜 나를 따라오려고 하느냐? 지금 내 뱃속에 태아가 있어서 너희의 새 남편이 될 수 있는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거라. 심지어 나는 다른 남편을 맞아들이기에는 너무 늙었다. 설령 내가 오늘 밤에 다른 남편을 맞아들여서 아들을 낳을 수 있다 해도 너희들이 그 아이들이 자라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남편 없이 지내면서 그들을 기다릴 수 있겠느냐? 내 딸들아 절대 그렇게 하지 말거라. 그리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내가 비참해진 것이란다. 그래서 너희까지도 이렇게 과부가 된 것이 아니겠느냐? 참으로 내 죄 때문에 너희에게도 이런 비참한 상태가 이른 것인데 이에 대해 나는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로 미안하구나. 제발 너희 나라와 너희 집으로 돌아가서 좋은 남편을 만나서 안정된 삶을 살도록 하거라. 이 어미의 간절한 소원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치셨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나도 내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아프구나.”
그러자 두 며느리들이 더 크게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시어머니와 헤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들의 삶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오미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오직 고생만 하러 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자 오르바가 울다가 일어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입을 맞춥니다. 룻기 1장 9절을 보면 이미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에게 작별의 입 맞춤을 하였기 때문에 오르바의 입 맞춤은 작별에 동의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룻은 계속 엉엉 울기만 할 뿐 나오미에게 결코 입을 맟추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 1:14).
그 후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백성과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르바가 “그녀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알려줍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룻 1:15).
즉, 오르바와 룻은 참으로 진실하고 멋진 며느리였지만, 그 두 사람에게 영원한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룻에 대해서는 그녀의 고백에서 나타나는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룻 1:16)는 선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바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모압 땅, 곧 자기가 섬기던 그모스 신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이방 문화 및 환경, 특히 이방 종교를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신자였던 나오미는 오르바가 참으로 귀하고 진실한 멋진 사랑스런 며느리였으나, 남편 기룐과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지내면서 거듭난 참된 신자가 되었는지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인 과정에서 마침내 오르바는 실격하였습니다. 즉,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거짓 신자였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사람 좋은 여인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에 나오미는 룻이 믿음의 공동체인 베들레헴 에브랏에 가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모든 혈통과 외적인 조건을 얼마든지 초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르바와 룻은 시어머니를 향해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두 며느리는 멋진 아내였고 착한 여인들이었으며, 그들은 시어머니를 사랑하였기에 어디든지 따라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마침내 사람의 인정보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뚜렷한 믿음을 확인하자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났고, 룻은 남은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이 사건을 적용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두 아들이 아내를 얻은 후에 다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권사님이 두 며느리에게 재가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두 며느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가난한 어머니를 버리고 재가할 수 없습니다. 같이 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때 권사님이 자기와 함께 살 수 있는 조건을 말합니다.
“나랑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히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에 함께 다녀야 한다. 그것만이 나와 함께 살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러자 작은 며느리가 말합니다.
“다른 것은 다 따를 수 있지만, 그 조건만은 따를 수 없습니다. 신앙 문제는 각 개인의 자유인데 어떻게 그것을 강요합니까? 진심으로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따르고자 하는데 예수님을 믿고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를 다니라고 하니, 저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신앙 문제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큰 며느리는
“어머니, 저는 제 남편에게 예수님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서도 많이 들었어요. 들을 때마다 예수님이 믿어지고 감사했어요. 이제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다니며 더욱 하나님을 바르게 믿도록 할게요. 평생 어머니와 살도록 허락해 주세요.”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몸은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에 와 있어도 그 마음이 진심으로 예수님께 없는 사람들은 오르바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주 하나님을 섬기기로 하는 사람만이 룻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 좋은 교우들을 봅니다. 친절하고 싹싹하고 멋지고 성실하고 착하고 진실한 교우들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 가슴이 매어지도록 슬픕니다. 그들은 위기의 때가 오면 신앙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할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분 및 가장 큰 힘과 위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단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어떤 위기를 만날 때 나오미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작별 인사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믿는 신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 신은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안정된 삶일 수 있습니다. 직장일수도 있고 남편과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르바일 뿐입니다.
하지만 룻은 생명을 걸고 말합니다. 이 우주 상에서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따라가고, 어머니가 사시는 곳에서 살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제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 제게 무서운 벌을 내리셔도 좋습니다. 오직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룻 1:16-17).
이때 나오미는 룻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하고 참된 믿음의 공동체인 베들레헴으로 룻을 데리고 가기로 확정합니다. 따라서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룻에게 묻지 않습니다. 이는 그 여인을 확인해 보니 거듭난 주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룻 1:18).
신기한 것은 우리는 오브라가 그녀의 신인 그모스에게로 돌아간 후로 성경에는 그 여인이 이름이 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르바가 결혼을 했는지, 자녀를 낳았는지, 그래서 남은 삶을 안정되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는 것은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나오미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공동체인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룻을 통해 다윗이 태어날 곳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태어날 장소였습니다. 즉, 룻은 영원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 좌우에 두 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지막 몇 시간 내에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행악자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즉, 하나는 룻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오르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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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39-4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자고 있지만, 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데려감을 받은 자들은 하늘에서 주 예수님과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만 버림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하늘과 땅의 불덩이에 의해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는 룻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바입니다.
[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0-35)
이는 분명하게 오브라와 룻처럼 한 사람은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갔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현상은 십자가 상에서도, 그리고 주님 오실 때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차이가 어디서 납니까? 그 차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7-39)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에서 결정납니다. 오르바는 참으로 어느 정도까지 나오미를 사랑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룻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외치며 오직 주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의 시험이며, 이 시험에 의해 오르바와 룻이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고 위험한 길이라도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구속자이시기 때문에 생명 걸고 따르려는 진심이 있는 사람은 룻에 속하지만, 단지 교회 다니는 것이 대인 관계나 종교적인 정서를 채우기 위해, 혹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라비안 나이트의 지니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람은 오르바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지난 밤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는 내 자신보다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니 내 생명보다 하나님이 더 귀하다는 고백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이에 그의 믿음은 룻처럼 처음부터 참 믿음이었던 것이고 이삭을 바침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집을 얻지 못하고 가정을 얻지 못하고 조국을 잃더라도 오직 주 예수님만 따르겠습니까? 이 질문이 정확하게 나오미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에게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둘은 영원히 나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도 이 예배를 통해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 바쳐 사랑하며 나의 그 어떤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그분만을 믿고 순종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선까지만 믿는 척하고 그 이상은 거절하시겠습니까?
본질적으로 오르바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소돔과 고모라를 버리지 못하고 결국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썩어질 것 때문에 주를 멀리하고 결국 주님으로부터 돌아섰으니 가룟 유다와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룻에 속한 참 신자는 “주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백성은 나의 백성입니다. 저는 하늘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죽더라도 제 호흡이 마치는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그분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습니다, 죽더라도 주님만을 붙들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순교적인 정신으로 신앙을 갖겠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동과 따로 뗄 수 없습니다. 오르바는 그모스를 믿었기 때문에 결국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즉, 오르바의 삶은 그녀의 믿음에 따라 결정된 것입니다. 룻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 때문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베들레헴으로 발을 내밀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믿음에 의해 그녀의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가 그 믿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 룻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오직 주를 의지하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장래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룻 역시 그모스 신을 섬기던 여인이었지만, 이제 그모스 신이 아니라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모압 사람들과 함께 했지만, 이제는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네, 다름 아닌 믿음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룻이 믿는 하나님은 참되고 유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모스는 인간이 만든 거짓 신이며 그 뒤에서는 악령들이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도리어 마귀에게 속아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이신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토록 전능하신 능력과 사랑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함께 당장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기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확신과 위로와 감사와 능력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룻은 이방인들을 대표하여 구약에서 구원 받은 특별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민족들과 나라로부터 구원을 얻는 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이미 2천년 전에 이르렀으니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유의 주가 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택한 자를 구원하여 오시던 하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열방으로부터 택한 자들을 구원하여 오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룻처럼 이방인들이었지만, 또한 룻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왕과 대제사장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룻과 동일한 삶의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의지하던 모든 과거의 것들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내 인생을 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룻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주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소서. 저는 제 남은 삶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바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저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이 나의 구원주요 왕이요 대제사장이요 영원한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내 장래가 어떻게 될지 저는 알지 못하지만 모든 장래를 주께 의탁하고 저는 오늘 이 하루 오직 주의 뜻과 명령에 따르는 일에 전심을 다하겠습니다. 죄를 이기게 하시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온전히 닮게 하여 주소서.”
이로 보건대 룻은 참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시작하는 믿음이었지만, 참 믿음이었기 때문에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우선 순위가 오직 하나님이 전부이며 가장 중요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구원하는 참 믿음이라면 비록 연약한 모습은 있지만, 가장 깊은 마음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가장 깊게 신뢰하고 의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교회 안에 앉아 있는 오르바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믿음은 중간에 돌아서는 일이 없습니다. 중간에 신천지로 가거나 믿음이 사라져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가짜 신자입니다. 그 이유는 참 믿음은 비록 연약할 수는 있지만, 결코 돌아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르바는 비록 오랜 기간 나오미와 함께 살았지만 거듭난 신자가 아니었기에 돌아섰습니다. 하지만 참 신자인 룻은 돌아서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오직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삶과 남은 삶을 주께 바쳤으며, 이에 주께서 그녀의 삶을 인도하고 다스리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오직 참 신자들만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외칠 수 있는 고백들이 이곳 저곳에 많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러한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7-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압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장래를 주께 의탁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여러 가지로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여도 계속 주의 말씀을 알아가며 배워가며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뚜렷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그분과 믿음으로 연합한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신자의 삶입니다.
[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4-57)
마지막으로 룻의 고백 안에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7절인데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사실입니다. 이는 그녀의 가장 깊은 중심을 주 여호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고백한 것으로써 앞으로 오직 주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표현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장 정직하고 가장 진실한 이유는 가장 깊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가장 깊은 그곳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을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룻은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을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셔도 자신은 진심으로 남은 삶을 주께 전부 다 바쳤노라고 나오미에게 고백한 것입니다.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오직 주 예수님과 하나님만 의식하며 살기 바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오해가 생겨도, 환경과 모든 것이 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내 가장 깊은 곳의 믿음은 항상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신자입니다.
룻은 나오미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우리는 세례 예식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맹세합니다. 또한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맹세하며 기억합니다.
나오미는 룻의 고백과 맹세를 듣고 기뻤습니다. 그녀는 평생 동일한 신앙을 함께 나눌 영원한 친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믿음의 동료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죽는 그 날까지 외롭지 않습니다. 혹시 아내가 그러한 동료입니까? 그 사람은 최고의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혹시 남편이 그러한 동료입니까? 평생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해도 아쉽지 않을 최고의 짝입니다. 혹시 목사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성도들입니까? 오, 이보다 더한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러한 위로를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선포되며 성령께서 운행하시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다같이 룻의 고백을 함께 외쳐보겠습니다.
[
16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6-17)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여러분 모두가 내 자신이 룻인지 오르바인지 확인하고 오직 주 예수님을 택하심으로 영원한 복락에 들어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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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