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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묵상글 들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사랑으로 묶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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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사랑으로 묶인
오늘 우리 교회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같이 묶어 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 중에 하나를 베드로 사도와 같이 축일로 지내지 않고
바오로 사도를 짝으로 우리 교회가 축일로 지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주님께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만을 동반하셨는데 왜 베드로를 야고보와 요한과 묶어
축일을 지내지 않고 바오로와 묶어 축일로 지낼까요?
그것은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라고 하는 오늘 감사송처럼 두 분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묶어 하나의 교회를 세운 분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두 분은 어제 성무일도 찬미가에서 "거룩한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교회의 중심이요 두 기둥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초기 교회 안에서 두 교회 사이에 그리고
두 교회를 대표하는 두 사도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있었고,
인간적으로만 보면 두 분 사이가 사뭇 껄끄러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테살로니카 2장을 보면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베드로를 비판하고,
이런 직설적인 바오로로 인해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갈라서고 마는데
베드로는 그래도 그러지는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베드로가 바오로를 품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와 바오로이기에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교회의 반석인 이유는 그가 무오류의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류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받았을 때
그것을 넓은 품으로 잘 받아들여 오류를 고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대로 뒤집으면 바오로와 같이 오류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교회가 오류에 빠지지 않았던 겁니다.
교회 안에 오류가 있는데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그리고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어도 그걸 말하지 않으면
교회는 오류에 빠질 것이고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비판과 지적을 사랑으로 해야 오류가 시정이 됩니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싫어하는 것을 무릅쓰고
비판과 지적을 하지 않을 것이고,
미움과 분노로 비판하고 지적하면 그것은 받아들여 지지 않고 거부되겠지요.
사실 사랑없는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일 뿐이고,
비난은 인신공격일 뿐이기에 오류를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성원 서로 적이 되고 원수가 되게 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비판을 하지도 비판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지도 않기에
서로 경쟁이나 하고, 비난이나 하고, 흉이나 보고, 파당이나 짓고
교회가 잘 되기 위한 건전한 비판이나 사랑의 지적을 하지 않지요.
사랑이 자기 연민에 그치는 사람은 작은 비판도 큰 상처가 됩니다.
사랑이 자기 사랑에 그치는 사람은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자기 사랑을 넘으면 비판 때문에 사랑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 이르면 하느님 교회를 위해 밑돌들이 됨을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랑을 통해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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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이 두 분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직무를 맡기신 으뜸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는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셨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빼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를 주님께서 바오로 사자의 굴에서 구출해주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보증해 왔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인 것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밝혀주고 알려주신 계시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는 반석 위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이 교회가 이 세상 끝 날까지 지탱해 나갈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으니, 그것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신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권한이 그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토록, 베드로 안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안에서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곧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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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주춧돌을 놓은 베드로, 기둥을 세운 바오로
오늘은 신앙 고백의 주추를 놓은 베드로 사도와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의 아나빔들과 함께 초대교회를 이끌었고,
바오로 사도는 이 초대교회에서 응원해 준 활력으로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역대 모든 교황들의 모범이 되었고,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 모든 선교사들과 그리스도 신앙
진리를 자신들의 언어로 해설하려 한 신학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인적이고 법적인 정통성에서, 그리고 바오로는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정통성에서 든든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묘한 역사의 섭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려 천8백여 년 동안 지구 반바퀴를
돌아 한반도에 이른 후에, 반만년 동안 하느님을 믿어 온 한민족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천진암 강학회에 모인 선각자 선비들이 놓은 주춧돌과 기둥에 힘입어,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가 또한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이 두 사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수선탁덕으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조차도 못다한 길을 박해 속에서 훌륭하게 걸어갔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고도 믿음이 모자라서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조정 대신들로부터 천주교를 배교하고 사제가 되기까지
닦은 서양 학문으로 조정에 봉사하겠다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던 회유를 받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치명함으로써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한국 천주교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한 길을 닦았습니다.
박해자였던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기성 사도단의 추천으로 사도요 선교사가 되었지만
만만치 않는 방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교회가 보편적인 진리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로마 문명과 정면승부를 하였는데,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천주공경가를 지은 이벽과 주교요지를 지은 정약종 등
평신도 교부들의 노력에 힘입어 천주가사를 더욱 많이 지어
교우촌 신자들에게 알리고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보편교회에서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는
김대건과 최양업 사제가 주님의 집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덕분에
하느님의 백성이 제사를 바치고 찬미를 드리며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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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베드로, 바오로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사람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나도 당신의 길을 가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 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베드로 첫째 편지 4장12절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서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성향을 충분히 존중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을 완성하십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베드로, 바오로! 그들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2,20-21.29).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2,1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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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통은 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가 흔들리면서 빠지는 꿈이었습니다. 다행히 깨어보니 이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근심, 걱정, 불안이 없어진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잠에서 깨어보니 이는 잘 있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백신을 맞고, 거리두기도 완화되니 신문홍보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8월에도 신문홍보를 하기로 했고, 10월에도 하기로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움츠렸던 사람들이 기지개를 편다고 합니다. 여행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가족 모임도 합니다. 앞으로 신문홍보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에게도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끝까지 찾아서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바오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베드로 사도는 나약했고, 바오로 사도는 냉철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천국의 열쇠도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초대교회를 잘 이끌었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해박한 지식과 화끈한 추진력으로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이라며 반대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였고, 서간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잘못한 것들은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친화력과 바오로 사도의 추진력으로 초대교회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뜨거운 신앙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교우 분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자상하신데, 다른 신부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나요?’ 저는 자상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 사목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르신들께서 좋아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열정은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바리사이파처럼 주님을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없습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완벽한 것도, 똑똑한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흘렸던 참회의 눈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으로의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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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聖人이 되고 싶습니까?
- 기도하는 공동체, 좌우명, 내 삶의 성경 -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참 자랑스러운 우리 천주교회의 양대 기둥인 두 사도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가까이 현존해 계시는 느낌이 드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입니다. 말그대로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게(ever old, ever new)’ 느껴지는 성인들입니다. 두 사도 성인 대축일 때마다 흥겹게 불렀던 성가 291장 ‘사도 성 베드로와 바오로’ 가사도 생각납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르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1절만 인용했지만 4절까지 내용이 참 풍부하고 깊습니다. 두 사도의 삶이 짧은 가사안에 다 담겨있습니다. 늘 생생한 느낌으로 와닿는, 샘솟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참 서로 잘 보완하고 있는 둘이자 하나처럼 생각되는 두 사도입니다. 성 베드로를 교회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전통과 정주의 총사령관이라 하면, 바오로는 복음 선포 전투 현장의 야전사령관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좌우간 두 분 사도는 수없이 갈린 교회의 ‘일치의 중심’이라 주저없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베드로와 성 바오로뿐 아니라 우리 천주교회의 참 자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인들을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흡사 교회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같은 성인들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 교회의 보물이자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이요 끊임없는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되는 성인들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하라만 있는 성인들 축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들이 되라고 격려하는 성인들 축일입니다. 사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습니다. 제가 늘 감사하고 감탄하고 감동하는 것은 성인들뿐 아니라 현재의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지나 주일은 교황주일이었고 제1대 교황이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베드로이니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말 그대로 누구나 인정하는 살아 있는 성인이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최초의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출신이요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님이요 역대 교황님들중 가장 개방적인 분에 속할 것입니다.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 86세의 고령으로 2013년 이후 8년동안의 재위기간을 맞이하셨어도 참 한결같이 직무에 충실하십니다. 힘있고 젊을 때 성인되기는 싶습니다. 그러나 고령이 되면 심신의 병에 치매의 위험성으로 성인될 확률은 점차 줄어듭니다. 그런데 86세의 고령인 교황님의 정신과 영혼은 영원한 청춘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세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보다 사람 많이 만나고 바쁘신 분도, 부지런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시간이 전혀 없는 완전 공개된 공인公人의 삶같습니다. 제가 잠깨어 일어나면 교황님 홈페이지의 강론과 메시지를 읽어 봅니다만 참 불가사의라 할 정도로 샘솟듯 쏟아지는 귀한 말씀들입니다.
보고 배웁니다. ‘보고 배운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참 행복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에 2000년 전통과 역사를 지닌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천주교같은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무엇보다 우리의 자랑은 늘 보고 배울 성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 세례명도 그와 같은 성인이 되라 주어진 선물같은 이름입니다.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겠는지요? 사실 성인이 되고 싶은 청정욕은, 깨끗한 욕망은 언제든 좋습니다. 그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늘 기도하는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갈 때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참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기도하는 가정, 기도하는 교회, 기도모임의 모든 소공동체입니다. 정치 현장에 복무하고 있는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정치가들이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6월27일자 가톨릭 평화신문 5면의 아름다운 기사와 사진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오스트리아-스펜인에서도 가톨릭 코드 외교, G7회의에 이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순방. 오스티리아 시토회 아빠스. 스페인 주교회의 의장 오메야 추기경 만나 한반도 평화 의지 다져’란 심도깊은 기사였습니다. ‘기도하는 가톨릭 교회 공동체’의 산물이 작금의 문대통령입니다. 거듭 간절한 바람은 교황님의 방북이 이뤄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성 베드로의 살아 있는 배경이 되고 있는 기도하는 교회공동체입니다. 베드로가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주님 천사의 개입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을 수 있었던 기적도 순전히 기도하는 공동체 덕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에 이은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그대로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우리 요셉수도원이 또 수도형제들이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음도, 날마다 끊임없이 거행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둘째, 내 삶의 좌우명을 지니는 것입니다.
좌우명도 좋고, 미리 써보는 유언도, 묘비명도 좋습니다. 참고로 제 좌우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평생처럼 살았습니다’입니다. 나름대로 좌우명을 써놓고 날마다 바라보면서 삶의 좌표로 삼아 깨어 살아간다면 하루하루가 참 절실하고 절박할 것입니다.
참고로 성 바오로의 삶의 좌우명은 오늘 제2독서의 다음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면 늘 어김없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위대한 전사, 성 바오로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면서, 또 임종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성 베드로의 좌우명은 무엇일까요? 바로 대축일 전야미사의 복음에 나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세 번 연거푸 물으셨던 질문이 아마도 베드로 사도의 평생 좌우명이지 싶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저 역시 택하고 싶은 좌우명입니다.
셋째, 내 삶의 성경을 끊임없이 렉시오 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성 베드로의 삶이, 성 바오로의 삶이 그대로 성서가 되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제1독서는 사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이고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어는 하느님이고 베드로와 바오로는 목적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어가 되어 하시는 일을 묵상하는 것이 바로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섭리은총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나 성인전, 평전을 읽을 때 궁극의 목적은 나를 읽는 것입니다. 내 삶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성서나 성인전, 위인들의 평전은 스토리(이야기)와 컨텐츠(내용)이 분명하고 풍요롭습니다. 이들은 바로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이런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사도 베드로의 축복은 내 축복이 될 수 있고 바오로의 고백은 내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아마 평생 베드로를 늘 새롭게, 분발케 했을 체험임이 분명합니다. 양상은 달라도 우리 역시 때로 이런 하늘 은총을 체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요셉 수도원에 몸담고 살 수 있음이 놀라운 신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의 체험적 고백도 감동적이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이런 고백이 바오로의 믿음을 깊이 했을 것이며 역시 우리 믿음에도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무궁하기를 빕니다.”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지요.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성서 독서,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의 목표는 내 삶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성서나 성인전을 읽을 때 동시에 내 삶(의 성경책)을 읽으며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365일 곱하기 내나이 하면 아직 미완의 내 삶의 성경책 쪽수가 나옵니다. 죽는 그날, 살아 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읽으며 써나야가야 할 내 삶의 성경입니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1.기도하는 공동체, 2.내 삶의 좌우명, 3.내 삶의 성경책 셋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름다운 미사 감사송 고백으로 두 사도의 위업을 기리며 강론을 마칩니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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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벳사이다 출신으로 시몬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케파(반석,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도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서기 65년경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고 그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보다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를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많은 편지가 성경으로 되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네로 황제 박해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복음: 마태 16,13-19: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자,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더욱 심오한 이해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군중들의 수준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줄곧 그분과 함께 지내며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스승님과 함께 많은 기적을 행했던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물으신다.
이 질문은 바로 당신을 따라다니던 모든 제자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즉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은 제자들이 올바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분에게 “열두” 제자들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라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인 반석(게파)이 되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루카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하느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케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본래 바위는 주님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바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도들의 신앙은 결코 정복당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나라의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오로의 축일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진정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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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닌,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지상 여정의 순례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명문가의 자제도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도 아닌 그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며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 길을 멀리서 바라보았고,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되어 하늘 나라의 열쇠를 관리합니다.
그럼 바오로 사도는 어떠하였나요? 그는 베드로 사도와는 달리 명문가 출신으로 율법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선동가며 하느님에 관한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불순분자였을 뿐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게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속에서 교회는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두 사도를 이끌어 주지 않으셨다면, 그 둘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갔을 것이고 우리는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완성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변화되었듯이, 우리 자신도 우리가 만나는 공동체의 구성원도 하느님의 이끄심 안에서 변화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뜻과 계획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완전하고 완성된 공동체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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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믿음이 깊으면
사랑도 깊다.
믿음의
여정안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뜨거운
울림의 삶이 있다.
목마름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만남은
너와 나의
살아 있는
길이다.
만남은 반드시
회개와 눈물의
십자가를 함께
건너간다.
삶은 믿음과
가깝다.
믿음은 삶을
바꾸어놓는다.
헤매지만
십자가로
다시 돌아오는
믿음의 삶이다.
두 분 사도는
전혀 서로
다르지만
서로 협력하는
믿음의 삶이다.
우리의 삶이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믿음의 삶이다.
믿음에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으면
못 갈 곳이 없다.
마음이
있는 곳에
새로운 변화가
있다.
두 분 사도의
마음을 만난다.
마음의 길이
삶의 길이다.
믿음의 길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노력과 은총의
여정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두 분 사도의
삶을 통해
보게된다.
삶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마음은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삶에서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삶의 최전선에서
만나게 되는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사도의 행복이다.
믿음이
행복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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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 정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여기서 “너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너는 복된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무슨 학문 연구 같은 인간적인 능력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선택하시고 뽑으셔서
그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사람이기 때문에 ‘복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뽑으신 것은
남들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한 점들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들의 부족한 점과 그들이 잘못한 일들만 말하고
그들의 특별한 점과 위대한 점은 말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사도들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또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은총을 주셨다는 것만 말하고
그들이 그 은총에 응답하려고 노력한 것을 말하지 않는 것도 부당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부족한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뽑으신 것이 아니라,
“부족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더 뛰어난 점들이 많아서”
그들을 뽑으셨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모든 사람은 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뜻도 들어 있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너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내가 너희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들이고, 그 노력에서
가장 앞서 있는 사람들이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함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노력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여정은 맨 앞에서 예수님께서 가시고 사도들이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모든 신앙인이 사도들의 뒤를 따라가는 ‘영적 행군’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지만,
실제로는 사도들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의 부족한 점만 말하고, 또 주님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주셨다는 것만
말하면서 그들의 응답과 노력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특별한 점들과 뛰어난 점들은 무엇일까?
믿음, 사랑, 충성심, 겸손, 희생정신, 열정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주신 것도 아닙니다.
본인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쌓은 성덕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은총을 주셔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주님의 은총이 먼저이고 응답이 나중이지만,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은총이 은총으로서 작용하는 법입니다.
(만일에 응답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뛰어난 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정’을 ‘뜨거움’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뜨겁지 않은 사람들에게(열정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이 말씀에는 ‘미지근한 것은 차가운 것과 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뜨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들은 그의 뜨거움을 잘 나타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모습은 열정으로 가득 찬 모습이기도 합니다.)
종교박해를 비롯해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초대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열정과 지도력 덕분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사도입니다.
“......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별하고 위대한 점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 장점은 ‘뜨거움(열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있는 다음 말들은 그의 열정을 잘 나타냅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필리 2,17).”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그의 열정은 타고난 것도 아니고, 성격이 원래 그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주님에 대한 믿음, 사랑, 희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대충 하다가 그만두는 미지근함을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목숨까지도) 다 바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이 열정은 주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신앙생활인데,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태우는 뜨거움으로(열정적으로)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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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나이가 들었어도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첫째, 포용할 줄 아는 여유가 생기는 사람.
둘째, 내가 옳고 내가 답이라는 노욕(老慾)이 생기는 사람.
이 두 부류 중에서 누가 더 멋있고 아름다워 보일까요?
만약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또 “너는 틀렸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이 사람은 절대로 멋있지도 또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인상을 쓰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를 ‘꼰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들어주고 상대를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적게 듣고 많이 말하게 될 때는 ‘꼰대’가 되고 맙니다.
멋있고 아름다운 삶이 어떤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내려놓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삶을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겸손의 삶이고 사랑의 삶입니다.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볼품없는 어부 출신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믿음도 부족했습니다. 바오로 역시 좋은 신분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늘 간직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커다란 명예를 받았지만, 늘 겸손했고 대접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유능함을 가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니다.
이들 모두가 철저히 겸손의 삶과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그렇게 많았어도, 우리는 이들을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나요? 겸손과 사랑의 삶이 진정으로 멋있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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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영화 ‘러브 액추얼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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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즘 대학생들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런 답을 듣는다고 합니다.
1) 건물주가 되고 싶다.
2) 대기업, 공기업에 취업하고 싶다.
3) 여행 다니면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싶다.
가장 많은 대답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로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헌신하고 싶은 목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 자체로 만족한다고 말한다면 아마 1, 2번의 삶은 사회의 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3번은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삶에 불과할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건물주가 되고, 대기업, 공기업에 다니면서도 또 여행하면서도 어떤 삶을 만들어갈지 설명할 수 있는 자기 삶의 기준이 확실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가장 의미있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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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모든 믿는 이들의 삶을 끌어가시는 주님을 보여 주십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예수님께서 당신을 누구라 하는지 물으시자 베드로가 놀라운 답변을 합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그분 강생의 목적이 명확히 담긴 말씀이지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예수님은 베드로의 답변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일깨우시며, 그래서 그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은 자기 지식과 능력, 지위에 기대어 성과를 누리고 과시하는 삶을 행복이라 여기지요. 반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며 믿고 따르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세상 눈에 어찌 보이든,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모두 좋은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감옥에 갇혔다 구출된 베드로 사도의 일화를 전합니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사도 12,11)
야고보 사도의 순교 뒤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헤로데가 그를 끌어내려던 바로 그 전날 밤에 신비스런 힘으로 감옥을 벗어납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베드로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인 베드로는 그저 천사가 시키는 대로 일어나,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고, 겉옷까지 입은 채 그를 따라 나섭니다. "저절로" 열린 문을 지나서 걷다가 천사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베드로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깨닫게 되지요.
베드로 혼자 힘으로도, 그의 투옥이 안타까워 기도로 매달리는 동료들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삶에 직업 개입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러 온 천사는 자기의 할 일을 마치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도로서의 본인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자신의 약함을 겸손히 고백하던 사도가 자기의 삶을 이처럼 고평가합니다. 하지만 이는 교만이나 착각, 자화자찬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기반을 둔 진솔한 자기 인식입니다.
치열하게 복음을 위해 투신했던 사도는 자기 삶에서 어떠한 후회나 미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열혈 유다교 신봉자, 율법의 수호자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모되어 그분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철저히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티모 4,17)
이것이 사도가 그처럼 확고히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자기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곁에 계시면서 굳세게 해주셨기에 가능한 투신이었지요. 무조간 못 하고 안 하는 게 겸손이 아니라, 이처럼 부족하고 미약한 자신을 통해 움직이신 하느님을 믿고 행동하여 맺은 열매를 오로지 그분 영광으로 돌리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은 인간으로서는 한없이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당신으로 채워서 구원사업에 도구로 쓰십니다. 그들이 모든 업적을 당신께 돌릴 줄 아는 겸손을 배우기까지 인내로이 단련하시면서 이끄셨지요. 베드로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마태 16,19), 바오로가 얻은 "의로움의 화관"(2티모 4,8)은 하느님 신의의 선물이며,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사도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를 기리는 오늘, 그들을 채우고 이끄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며 우리 각자의 소명도 돌아보는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꾸었던 꿈이 당장은 실패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 곁자리를 떠나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고 꿋꿋이 나아가시길 기도합니다. 그분께서 부르셨으니 그분께서 손수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실" 테니까요.
사도 성베드로와 바오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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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당을 지어야 할지 학교를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교회가 되어야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이 위대한 두 성인을 같은 날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 베드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성 바오로는 선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성 베드로는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의미를 말해주고 성 바오로는 교회 밖으로 나가 선교해야 하는 의무를 말해줍니다.
마치 교회가 심장이라면 성 베드로는 심장 안으로 피가 모여야 함을 말해주고 성 바오로는 그 피가 다시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야만 함을 말해줍니다. 둘 중의 하나만 빠져도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이고 따라서 오늘 두 성인을 동시에 기념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 성 베드로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고 밖으로는 나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교회 안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였고 미사나 고해성사를 꾸준히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신앙이 이상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매일 성경책을 펴서 거기에서 나오는 말씀을 주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식 이야기가 나오면 밥을 먹지 않고 번제 이야기가 나오면 분명 누군가는 불에 타야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철저하게 믿었지만 실상은 거의 정신착란까지 간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성경을 점을 치는 행위와 같습니다. 성당이 아니라 점집에 다녔던 것입니다. 본인은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다고 믿었지만, 가정이 파탄 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내면에 베드로는 살지만, 바오로는 살지 않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께 가서 내어놓을 게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해 오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충실히 따르려고 하면서도 결국 선교를 제일 큰 목적으로 삼지 않으면 내가 머무는 교회는 점집이 됩니다. 돈 받고 그들 귀에 좋은 이야기만 해 주는 점집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 내 안에 바오로만 있다면 어찌 될까요? 나주 율리아처럼 교회와 단절된 상태에서 헛된 것을 전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마치 자신이 예언자나 된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받고 예언을 해 줍니다. 사람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체의 힘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혈관이 피를 통과시키지 않고 자기 안에만 머무르게 한다면 거기는 썩어버리게 됩니다. 깨끗한 산소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가 함께 모일 심장과 같은 구심점이 없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고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선교해도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만 있는 교회는 안에서 썩고 바오로만 있는 교회는 밖에서 썩습니다. 베드로가 약화하고 바오로만 강조된다면 아이는 낳고 키우지 못하는 무책임한 부모처럼 됩니다.
영화 ‘가버나움’은 자인이라는 아이가 부모를 고소하는 내용입니다. 가난하면서도 아이는 많이 낳아서 집세를 내기 위해 11살 딸을 시집보내버리고 자인은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만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베드로를 통해 오는 은총이 메마르게 된다면 교회도 고소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세례를 받고 5년 이내에 70%가 냉담 하는 상황이 이런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드로와 바오로가 함께 머무는 균형 잡힌 교회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대학교 이국종 교수가 힘들어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돈이 중앙으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기득권 의사들과 비교하면 그는 그런 것들이 외부로 나가는 데 더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있습니다.
지금 개신교가 겪는 어려움을 남의 일처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개신교가 왜 안 좋은 이미지가 되었을까요? 베드로와 바오로가 균형 잡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는 돈이 집중되어 대형교회들이 세워지지만, 겉으로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바오로의 모습만 비치기 때문입니다. 뉴스에는 계속 목사들이 수백억 원씩 착복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신도들은 절에 가서 행패를 부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교회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균형 잡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베드로 당시는 베드로 대성당이 없었습니다. 지을 생각도 할 수 없는 때이기도 했지만 사람이 교회였고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바오로 사도가 찾아왔습니다. 돈이 흐르는 곳에 복음도 흐릅니다. 심장만 커지고 혈관이 축소되면 몸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심장입니다. 바오로는 혈관입니다. 돈은 혈액입니다. 적당한 심장과 알맞은 혈관의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혈관으로 교회에 들어왔던 재물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건강하게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함께 기념하게 만든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인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 안에 베드로와 바오로가 균형 잡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만약 예수님이라면 먼저 성당을 지셨을까요, 학교를 지셨을까요? 아마 학교를 지으셨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선교를 먼저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분명 이 말씀 안에는 결국 성당을 지어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균형 잡힌 신앙이 결국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 비해 지금의 우리 모습은 당연히 ‘성당 먼저’가 된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성당을 짓고 났더니 돈이 부족하여 빚을 다 갚고 나면 이제 보수공사나 증축을 해야 하고 그렇게 밖으로 돌 수 있는 돈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심장 안에 피가 쌓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가난해지려 해야 합니다. 대신 그 피는 선교의 방향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교의 열매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교회 건물이 조금은 더 작고 초라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때에 남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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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핍이야말로 은총입니다.
결핍은 우리를 성화에로 인도합니다!
피정오시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어설프지만 작은 야외 식당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기본 골조는 웃기게도 축구 골대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철 파이프와 폐자재들을 주워 모아, 얼기설기 용접을 해서 대충 뼈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다 천막까지 씌우니 그럴 듯하게 꼴을 갖추었습니다.
수도도 설비하고 조명까지 설치하니 금상첨화였습니다.
나름 개원식도 하고 축하공연도 하고 맛있게 고기도 구워먹었습니다.
그런데...바로 그날 밤에 엄청난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습니다.
미사를 끝내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며 식당으로 달려가 봤더니, 완전 초토화되었습니다.
천장은 비가 줄줄 새고 있었고, 고정시켜놓은 접합부위가 벌어져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건물을 짓는데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바닥재를 제대로 깔고, 시멘트를 이용해 단단히 고정시키고, 용접도 새로 하고, 천장도 스티로폼 판넬을 끊어와 제대로 얹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초석이 되신 두 사도,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두 분이 합심해서 교회의 기초를 단단히 놓으셨기에, 오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 분을 향한 깊은 감사의 정과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옵니다.
두 사도 역시 주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의 초기 그릇된 기초로 인해 삶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버린 적이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두 사도는 철저한 삶의 붕괴 이후 새로운 집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 결과가 위대한 대 사도인 것입니다.
오늘 미사 전례 중 감사송은 두 사도의 역할과 사명을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도로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만,
두 분 역시 젊은 시절의 방황과 미성숙과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한없이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던 두 사도의 성소 여정을 언제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고민하는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고되고 힘겨운 오랜 신앙 여정 끝에 마침내 자신의 결핍을 솔직히 인정하게 된 두 사도에게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시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한계, 나약함,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그 순간 우리는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그토록 우리가 원망하는 우리의 결핍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은총의 도구였습니다.
따라서 내 결핍, 내 가족의 결핍, 내 이웃의 결핍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은 한 가지입니다.
결핍은 축복입니다. 결핍은 은총입니다. 결핍은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우리들 삶의 길목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결핍을 체험하게 될 때 마다, 뿐만 아니라
내 결핍을 확인하게 될 때 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결핍이야말로 은총입니다. 결핍은 우리를 성화에로 인도합니다. 결핍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됩니다.
결핍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내게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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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제1독서 (사도12,1-11)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5) ~그제야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11)
사도행전 12장 1절에 나오는 '헤로데 임금'은 '아그리빠 1세'이다. 그는 헤로데 대왕의 손자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와 베리니케사이의 아들로 기원전 10년에 태어났다.
그는 처음 몇 년을 로마에서 지냈고, 칼리굴라 황제(A.D.37-41; 재위기간)의 총애를 받아 A.D.37에는 후작령으로 일정한 땅을 차지한다. 형제가 살해당한 뒤 아그리빠는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되도록 협조한다.
황제직에 오른 클라우디우스(A.D.41-54; 재위기간)는 고마움의 뜻으로 아그리빠를 A.D.41년에 유다 지방의 왕으로 임명한다. 유다 왕이 된 아그리빠는 자신이 죽던 해 (A.D.44년)까지 유일한 헤로데가(家)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조부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던 거의 전 지역을 다스린다.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은 육체노동을 통한 건축업이나 대규모 공사를 통해 돈을 벌면서 살기 보다는 유다인들의 고유한 생활 양식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아그리빠는 소수 사람들을 박해하며, 여기서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지도적 인물들에 대한 박해를 통해 다수의 백성들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인다.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의 집권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의 민족 의식을 조성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다.
사도 야고보가 참수된 사실로 보아(사도12,2) 유다의 국가 권력이 여러해 동안 로마와 친분을 나눈 뒤에 다시금 사형 집행 권한을 정식으로 가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당시 유다 왕국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유다 백성들에게 죄를 범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 다음 베드로가 투옥되었다가 신비로운 손길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오게 되는 사건이 펼쳐진다(사도12,3-6). 그 때가 '무교절'이라는 시기의 표현(사도12,1)은 이 사건이 '예수 수난'과 결부 되었음을 암시한다(루카22,1-7). 예수님의 운명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다.
여기에 서술된 베드로의 처지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
초대 교회 당시의 베드로의 수위권과 으뜸 사도로서의 위치와 신분과 성소의 무게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베드로 반석위에 선 교회(마태16,18-19)안에서 으뜸 사도의 운명은 교회의 존폐를 가늠한다고 여기고, 공동(합심) 기도를 뜨겁게 한 것 같다(마태18,19-20).
하느님께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 편에 서 계신다. 따라서 밤, 쇠사슬, 감옥 등은 결코 속박이나 잃어버린 상태가 될 수 없다. 빛, 천사들의 출현, 살아 움직임, 사슬같은 장애물의 제거, 문이 열림 등은 바로 구원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표징이다.
공동체의 뜨거운 합심기도로 '감옥문이 열려 갇힌 이들이 신기하게 풀려나오는 기적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하느님의 권능이 국가 권력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믿음을 드러낸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천사를 통해 구출되어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도달했을 때 아직도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본다(사도12,12). 그녀의 집은 당시 그리스계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던 집으로 여겨지며, 현관문과 여종이 거론되는 것을 볼 때 귀족적인 집으로 묘사된다.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제2독서(2 티모 4,6-8.17-18)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우신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6-8)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바른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6ㄱ)
티모테오 후서 본론 부분인 1장 6절에서 4장 8절 전체를 마치는 4장 6-8절에서는 죽음을 예견한 바오로의 유언적 신앙 고백과 승리 선언이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에고 가르'(ego gar)로 시작되는데, '나는' 으로 번역된 '에고'(ego)는 주격으로 사용된 단수 일인칭 대명사로서,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어 문두에 등장하고 있으며, 접속사 '가르'(gar; 영어로는 for에 해당)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데, 앞의 1-5절의 권면을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바오로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목을 대신할 후계자 티모테오에게 그와 같이 간곡하게 명령한 것이다.
여기서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을 단순히 '죽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스펜도마이'(spendomai)를 번역한 것으로, '제주(祭酒)를 붓다', '제주를 들이키다' 라는 뜻을 지닌 원형 '스펜도'(spendo)의 현재형으로, 민수기 15장 1-10절에 언급된 제사를 연상시킨다.
거기에는 화(火)제물('잇셰' ; isheh ; an offering by fire ; 제단 위에서 제물을 불태워 그 향기를 드리는 모든 제사를 총칭하는 단어)이나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칠 때, 어린양일 경우는 포도주 1/4 힌을 제주로 바치고, 숫양일 경우는 포도주 1/3 힌을 제주로 바치며, 수소일 경우는 포도주 1/2 힌을 제주로 각각 올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민수15,5-10).
'힌'(hin)은 '작은 항아리'를 뜻하는 이집트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액체의 양을 재는 단위이다. 성경에서는 주로 제물로 쓰이는 기름이나 포도주, 물의 양을 잴 때 쓰였다. 1힌은 약 3.8리터, 즉 2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며, 예를 들어 포도주 1/4 힌이면 약 0.95리터에 해당한다.
'제주(祭酒)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란네셰크'(lannesek)인데, '제주를 위해서'(for a drink offering)로 직역할 수 있다.
'제주'란 '(포도주나 독주를) 붓다'(호세9,4)라는 뜻의 동사 '나싸크'(nasak)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제주'는 번제물이나 화제물 위에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서 드리던 구약의 제의(祭儀)형식을 말한다(탈출29,40). 포도주를 비롯하여 독주, 물, 기름등을 제단 주위나 제물 위에 붓는 제사였다.
이것은 제단 주위에 뿌려졌던 번제물의 피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봉헌자가 그의 모든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을 상징하였다. 즉 '제주'는 하느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리기 위한 제사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 후서 4장 6절은 바오로가 자신의 죽음을 희생 제사의 마지막 의식으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피 한방울마저도 하느님의 제단에 쏟아붓고 가겠다는 결연한 순교의지를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는 이미 로마서 12장 1절에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본절은 이제 그의 산 제사로서의 믿음의 경주가 종착지에 도달했음을 그가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6ㄴ)
여기서 '떠날 때'로 번역된 '호 카이로스 테스 아날뤼세오스'에서 '카이로스'(kairos)는 '기회', '때'를 의미하는 명사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어떤 일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시점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떠날 때'에서 '떠날'로 번역된 '아날뤼세오스'(analyseos)는 본래 '느슨하게 만들다', '풀어 놓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날뤼오'(anallyo)에서 파생한 명사로, '선원이 배를 바다로 출항시키기 위해서 정박해 두었던 배의 줄을 푸는 것', 또는 '여행자가 새로운 행선지로 향하기 위해 자신이 기거하던 텐트를 걷는 것' 과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을 배가 여행을 위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것, 혹은 여행자가 새로운 행선지로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필리1,23)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7)
앞서 6절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7절에서는 바오로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서, 8절과 함께 암송까지 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세 가지 단언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는 '내가 훌륭히 싸웠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싸우고'로 번역된 '에고니스마이'(egonismai)는 '싸우다','투쟁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고니죠마이'(agonizomai)의 현재 완료형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9장 5절이나 콜로사이 1장 29절 등에서 나타나듯이 바오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며, 바오로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투쟁의 삶을 살았음을 나타내준다.
새 성경은 그냥 '훌륭히'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톤 칼론 아고나'(ton kalon agona: a good fight)로서 '선한 싸움을' 이란 말이다. 여기서 '싸움'이란, 이어서 등장하는 '달릴 길'이란 어구를 참조할 때, 바오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싸움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운동 경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올림픽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고,이제 그것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 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달릴 길'로 언급된 '드로몬'(dromon)은 일반적으로 '경주 코스'를 뜻하는데, 이는 본문이 운동 경기 가운데서도 마라톤 경기와 관련된 비유임을 암시한다. 바오로는 마치 마라톤 선수가 그 긴 거리를 완주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마라톤 경주를 마쳤다고 회고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다 달렸다'로 번역된 '테텔레카'(teteleka)가 본래 '끝내다','완수하다'는 뜻을 지닌 '텔레오'(teleo)의 현재 완료형이란 점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한 그 영광스러운 복음 전파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왔고, 이제 드디어 그 일을 완수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즉 본문의 핵심은 바오로가 그다지도 긴 믿음의 코스를 완주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세째로,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틴'(pistin)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신실성'을 의미한다.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한번도 굴하지 않고 줄곧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켜왔던 것이다. 이것은 '지켰습니다'로 번역된 '테테레카'(tetereka)가 '지키다','보존하다'라는 뜻을 지닌 '테레오'(tereo)의 현재 완료형이란 사실이 보여 준다. 이 단어는 경기하는 자가 자신이 참가한 종목에서 경기 규칙을 지키는 것, 군인이 군대와 그 상관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지키는 것, 나아가 청지기(집사)가 자신의 주인이 위탁한 재산을 지키는 것과 결부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정리하면, 죽음에 즈음한 바오로가 자신의 과거의 생을 돌아 보건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만큼은 당당히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8)
'이제는'으로 번역된 '로이폰'(loipon)은 문자적으로는 '이제 남은 것은'이란 의미이다. 바오로는 6절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7절에서 자신의 과거 상황에 대해 언급한 반면, 이제 8절에서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믿음에 관한 한, 떳떳한 인생을 살아온 바오로의 미래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오로는 그것을 '의로움의 화관'으로 지칭한다. 여기서 '화관'으로 번역된 '스테파노스'(stephanos)는 일반적으로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인 월계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주어질 '의로움의 화관'이란, 결국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해 두신 것으로,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에서 수여되는 영원한 생명과 충성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1티모6,12; 야고1,12; 1베드5,4; 묵시2,10).
한편, 본절에서 '마련되어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포케이타이'(apokeitai)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쓰였다. 이것은 '의로움의 화관'이 수여되는 시점이 미래이지만, 현재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바오로는 여기서 자신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수여할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것은 바로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이다. 여기서 '의로운 심판관'에 해당하는 '호 디카이오스 크리테스'(ho dikaios krites)는 문자적으로 '정직한 재판장'(the righteous judge)이란 의미에 가까우나, 문맥상 '일체의 오류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인류 곧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분(2티모4,1),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의미한다.
그 의로운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날'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재림의 날에' 바오로를 비롯한 주님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수여하실 것이다.
여기서 '애타게 기다린'으로 번역된'에가페코신'(egapekosin)은 본래 '사랑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가파오'(agapao)의 현재 완료 분사 복수형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상급을 받을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의로움의 화관이 주어질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6월 29일 월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 주셔서 그분의 길,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요한3,16참조)
(사도8,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 성령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병을 고쳐주고 빵을 주시는, 또 세상적 마음의 평화를 주는 기적과 능력의 평화를 주는 예수님을 선포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으로 대신 죽으셔서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하늘의 생명을 받게 되었다는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참 신앙인’입니다.
(묵시3,12) 승리하는(믿는) 사람은 내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아 다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 그리고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에게 새겨 주겠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살과 피- 육의 생각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야 알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곧 하느님의 진리의 영,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말씀이 참 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14,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 반석-생명수가 나오는, 곧 생명의 말씀(물)위에 교회가 세워지면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하지만, 사람의 말, 사람의 규정과 교리, 도덕과 윤리 그 계명위에 세워지면 저승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는, 아니 모두 저승으로 넘겨지는 것입니다.
(마태23,13.15)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온 세상)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말씀을 제사와 선악의 도덕과 윤리로, 곧 하늘의 대속의 진리를 땅의 선악의 진리로 만들어 세상에서 제일 착하게 살았던 그들이 그 착함으로 오히려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버린답니다.
왜?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완전한 사랑, 완전한 의로움을 살 수 없기에 그 인간의 착함으로는 절대 하늘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야고2,10참조)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1요한1,10참조)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늘나라를 여는 열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12,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로마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 그러나 말씀을 땅의 것, 도덕과 윤리로 인간의 계명으로 읽고 말하면 당연히 심판이 따르는 것이지요. 땅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성(로마1,20), 곧 그리스도(십자가)를 통한용서, 그 이타의 사랑, 그 약속을 깨닫는 다면 그에게 하늘은 열려 있는 것입니다.
(히브3,18-19 4,1) 18 또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믿지)않은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19 우리가 보듯이, 과연 그들은 불신 때문에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4,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아멘.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복음 (마태16,13-19)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16)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에서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이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그들에게'에 해당하는 '아우토이스'(autois; to them)이 나온다. 그리고 '물으시자'에 해당하는 '레게이'(legei; he asked)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레고'(lego)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희랍어의 현재형은 단순히 현재 뿐만 아니라 현재의 계속적 동작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질문이 모든 세대의 믿는 이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물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서 '그러면'에 해당하는 접속사 '데'(de; but)는 이 질문이 앞의 대답과 대조됨을 나타낸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기대와 욕구에 따라 그들에게 현세적 부귀영화를 가져다주고,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야로만 보지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일반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대답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사랑하는 당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소망이 엿보이는 질문이다.
그리고 '하느냐?'에 해당하는 '레게테'(legete; say)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레고'(lego)의 복수2인칭으로 '너희는 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에 '너희는'에 해당하는 인칭 대명사 주격 2인칭 복수형인 '휘메이스'(hymeis; you)를 첨가하여 '너희'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셔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당신의 메시야적 정체성(Identity)의 명백한 고백을 제자들로부터 도출시키기 위한 질문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앞의 마태오 복음 16장 13절의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는 질문은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의 질문을 이끌어 오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군중들의 생각과 관심보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직접 받던 제자들의 생각과 고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질문은 동시에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스승님'으로 번역된 '쉬'(Sy; You)는 인칭 대명사 주격 2인칭 단수형으로 '당신'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에이'(ei; are)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 동사의 2인칭 단수형으로, '당신은 ~ 이십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스승님'으로 번역된 '쉬'(Sy)는 강조형으로 고백의 대상이 되는 '당신', 즉 예수님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원문에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christos; Christ) 앞에 정관사 주격 남성 단수인 '호'(ho; the)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오실 메시야로 예언된 바로 그분이심을 뜻한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비로서 여기서 처음으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살아계신'에 해당하는 '존토스'(zontos; living)는 '살다'는 뜻을 가진 '자오'(zao)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이것은 이방의 죽은 신들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영원토록 자존(自存)하시는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근원되신 분이시고, 그리고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원문에는 '아드님'에 해당하는 '휘오스'(hyos; son)앞에 정관사 '호' (ho; the)가 기록되어 있어, 직역하면 '살아계신 하느님의 그 아들' (the son of the living God)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예수님께서 영원자존자이신 하느님의 독생성자 되심을 나타낸다(요한1,14.15; 3,18; 1요한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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