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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14일 서울 홍릉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TRIGA MARK -Ⅱ)’ 기공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첫 삽을 뜨고 있다. 왼쪽이 범산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 |
지난 1월 6일
북한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4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북핵문제는 사실상 통제불능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진위
여하와는 별개로, 북의 핵 능력은 소형화·경량화 단계를 뛰어넘어 다종화·다수화의 단계에 진입한 것을 의미한다.
중국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미 핵탄두를 20개 정도 보유하고 있고, 2016년에는 20개를 추가로 만들 만큼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감행 이후 여권을 중심으로 자체 핵무장론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새누리당 원유철(元裕哲) 원내대표는 최근 “북한의 공포와
파멸의 핵에 맞서서 우리도 자위권 차원의 평화의 핵을 가질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춘근(李春根)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대한민국의 핵무장은 일본의 핵무장을 초래할 것이며, 일본이 핵무장을 결심할 경우 세계 패권국을 지향하는 중국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일본이 핵무장을 할 경우 중국은 세계는커녕 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도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반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중국은 자국이 보유한 지렛대로 북핵을 폐기시키면 되는 일”이라며 “미국은 이스라엘처럼
우호국이 핵무장하는 것을 막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급부상을 핵무장한 동맹국 한국이 막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국의 핵 능력, 1960년대 중국보다
뛰어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장관급)을 지낸 박익수씨. |
지금까지 핵 보유국들은 핵개발을 결심한 이후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원자로를 보유한 후 핵실험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10개월, 소련 14개월, 영국 27개월, 프랑스 49개월, 이스라엘 40개월
미만, 중국 26개월이 걸렸다.
현재 한국의 핵 능력은 1940년대의 미국, 1960년대의 중국보다 뛰어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리 원전에 쌓인 사용 후 핵연료는 1만 톤에 육박하고, 이 중 플루토늄이 수십 톤으로 핵폭탄 한 발 제작에 8kg이 필요하므로
플루토늄 폭탄을 대량 생산할 수도 있다. 원자력 전문가 K씨는 “국가가 결심하면 2년 이내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서균렬(徐鈞烈) 교수는 “한국의 원자력 기술을 종합해 세계 5위, 운전기술 세계 1위, 그리고 핵폭탄 제조 잠재력
세계 10위권”이라면서 “핵개발을 위한 기술력과 경제력을 종합해 보면, 한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이 오늘날 ‘원자력 기술 세계 5위, 운전기술 세계 1위,
그리고 핵폭탄 제조 잠재력 세계 10위권’이라는 원자력 강국의 반열에 올라선 것은 세계 과학계에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원자력계 인사들은
“사실상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역사는 원자력 개발의 역사”라며 “해방 후 원자력 기술 개발의 역사를 훑어보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미친 영향이
실로 막대하다”고 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
한국의 원자력 산업을 이해하려면 세계 원자력 산업의 변화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무기로 등장한 핵이 발전을 하는 동력원으로 변모한 데는 국제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요동치는 세계 정치의 환경
속에서 한국은 미련스러울 만큼 원자력 발전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미국으로 대표되는 원자력 강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했다. 반면 북한의 지도자는
처음에는 원자력 발전에 주력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핵개발에 전력함으로써 세계의 이단아로 전락했다. 한국은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등 원자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지도자들을 만난 덕분에 세계적인 원자력 강국으로 부상했다.
《월간조선》은
박익수(朴益洙)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2006년 작고)의 비망록(《한국원자력창업비사》)을 입수해 그 내용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원자력
창업 비사(祕史)’를 싣는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1955년 한미원자력협정 가조인 순간부터 1999년까지 자신이 경험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기록했다.
1948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강대국을 중심으로 핵개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1952년 처칠의 영국,
1960년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가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1964년 마오쩌둥의 중국도 핵실험에 성공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미국은 진화에
나섰다.
1953년 12월 8일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며, 원자력 발전 등 평화적 목적으로 핵을 이용하려는 나라에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아이젠하워의 발언은
원자력에 관심이 있는 나라들에 큰 호응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미국 지지세력을 크게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설 제안과 함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적 협조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54년 8월 30일 새로운 원자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국제협력과 민간협력에 관한 조항을 담고 있었고, 제123조에 ‘대통령은 30일 전에 의회에 예고한 후 일개 국가(우방국)
또는 일개 지역방위기구(NATO, SEATO)와 원자력 협력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고 규정해 향후 외국과의 원자력 협정의 통로를
마련했다.
국제 전력계의 巨物 시슬러
한국에 원자력의 씨앗을 뿌려준 워커 시슬러 씨(왼쪽 세 번째). |
아이젠하워 연설에 따라 세계 각국은 IAEA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했고, 1957년 IAEA는 유엔 산하기관으로 창설됐다. 한국은 당시 유엔 가입국이 아니었으나 1956년 IAEA 헌장에
서명함으로써 이 기구의 창립 회원국이 됐다. 1956년 10월 26일 정부는 유엔본부에서 열린 IAEA 협약문 제정 총회에 임병직(林炳稷)
유엔대표에게 서명하도록 했고, 1957년 6월 17일 국회는 국내 원자력 연구를 활성화하고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사국에 진출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한국은 1957년 8월 8일 IAEA에 정식으로 가입했고, 같은 해 10월 5일 극동지역 이사국으로 선출됐다.
해방 직전 남북한의 발전량을 비교하면 남북한 전체 145만9000kW의 시설용량 중 남한이 차지한 비율은 14%(20만6000kW)에
불과했고, 나머지 86%(126만3000kW)에 달하는 발전시설은 북한에 편재돼 있었다. 남북의 산업구조상 남한은 농산물과 식료품을 중심으로 한
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북한은 전력을 비롯한 광공업 등이 중심을 이뤘다. 특히 유연탄 등 거의 모든 광산물이 북한에 편중돼 있었고,
발전시설은 거의 전부가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5월 4일, 북한은 남한으로의 송전을 일시에
끊는 이른바 ‘5·14 단전’을 감행했다. 5·14 단전으로 미 군정하의 남한은 심각한 전력난에 빠졌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인물이 워커
시슬러(Walker Lee Sisler·1897~1994)였다.
시슬러는 코넬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미 정부
전쟁물자생산국에서 전력생산과 관계된 일을 한 국제 전력계의 거물(巨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아이젠하워 유럽주둔군 총사령관 휘하에서 전후
유럽의 전력계통에 대한 복구사업의 총책임을 맡아 유명세를 떨쳤다. 그는 전후 디트로이트의 에디슨사 회장, 세계에너지회의(WEC) 의장, 미국
원자력산업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단전 소식을 들은 시슬러는 자신이 미 정부에 근무할 때 건조한 발전함을 보내 줄
것을 미 정부에 건의했고, 미 정부는 자코나 발전함, 엘렉트라 발전함을 각각 부산과 인천항에 급파해 전력을 공급하도록 했다. 6·25전쟁 당시도
한국은 심각한 전력난에 허덕였다. 그때 미국이 파견한 3만kW급 발전함 레지스탕스도 시슬러가 미 정부 전쟁물자생산국에 재직시 건조한
것이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한국 정부가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 2만5000kW급 3호기 건설을 추진할 때,
시슬러는 마셜플랜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차관(AID)을 주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한국은 1956년 3월 3호기를
준공해 부족한 전력을 메울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1956년 7월 시슬러를 초청했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전력 문제가
심각했고, 그의 자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조선전업(한국전력의 전신), 서울대 등을 방문해, ‘원자력 발전의 실용화’에 대해 강연했다.
시슬러는 7월 8일 이 대통령과 만나 한국의 전력사업 개황을 듣고 “한국도 원자력 발전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고, 언제쯤 실현 가능하냐”고 물었고, 시슬러는 “정부 안에 원자력 전담기구를 설치해 정부
차원의 원자력 발전 업무를 추진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해 원자력에 관한 연구를 맡기고, 50명 정도의 과학자를 선진국에 보내 원자력 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다.
시슬러는 휴대하고 다니는 ‘에너지 박스(Energy Box)’를 이 대통령에게 선보였다. 그는
박스에서 3.5파운드 무게의 핵연료 막대기를 꺼냈다. 시슬러는 “3.5파운드 무게의 석탄을 태우면 4.5kW/h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3.5파운드의 우라늄을 태우면 1200만kW/h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며 “무게는 같지만 우라늄은 무려 300만 배나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은 언제쯤 원전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20년 후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예언대로 한국은 21년이 지난 1977년 고리 1호기 시운전에 들어갔다. 미국에 유학해 원자력의 힘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시슬러의 원자력 권유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소련의 상업용
원자로 ‘오브닌스크’
1955년 8월 제1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당시
원자로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 소련, 프랑스, 캐나다 등 5개국에 불과했다. 동서 냉전의 와중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과 우방국에 대한 원자력 에너지 기술 제공 제안에 소련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1951년 9월 소련은 모스크바
남서쪽 100km에 위치한 오브닌스크(Obnin-sk)에 5000kW급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전(흑연감속로)을 건설하기 시작해 1954년 6월
준공했다. 한국이 두 번째로 도입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Ⅲ의 열출력이 2000kW인 것에 비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소련은
오브닌스크 원자로에서 생산한 전력을 판매했기에 이 원자로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소련은 원전
준공식에 인도의 네루 총리, 유고의 티토 대통령, 베트남의 호찌민(胡志明),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등을 초청했다. 김일성이 오브닌스크 원전
준공식에 참석한 것은 북한도 일찍이 원자력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당시 서방 세계는 누가 대용량 상업용 원자로를
먼저 제작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1955년 ‘제1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한 이듬해 영국이 그 주인공이 됐다.
영국은 1956년 10월 17일 콜더홀에 9만2000kW급 가스냉각로형 원자로 두 기를 준공했다. 출력 9만2000kW는 당시로서는 대용량이어서
상업용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듬해 1957년 12월 미국은 펜실베이니아주 시핑포트에 10만kW급(가압경수로형) 상업용 원전을 준공했다.
이어 미국은 1961년 세계 최초로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진수했다.
원자력 스터디그룹의 탄생
연희전문학교 數物科(자연계열)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박철재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왼쪽). 문교부 초대 원자력과 과장을 지낸 고 윤세원 박사. |
한국 정부가 원자력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첫 계기는 1955년 2월
2일 유엔에서 날아든 한 통의 초청장 때문이었다. 1955년 8월 8일 미국은 유엔을 통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73개국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주목할 것은 그때까지 기밀로 취급되던 원자력 관련 논문 1132편이 쏟아져
나왔다.
세계 원자력계의 흐름에 올라타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한국은 이 회의에 박철재(朴哲在)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윤동석(尹東錫) 서울대 금속공학과 교수, 이기억(李基億) 서울대 문리대 교수를 참석시켰다. 회의에서 우리 대표단은 한국의 전력수급 전망과
우라늄·토륨 등 지하자원 분포 실태에 대해 발표했다. 박철재는 귀국 길에 미국 오크리지(Oak Ridge) 국립연구소에 들러 원자력 연구시설을
둘러봤다고 한다.
박철재는 귀국 즉시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윤세원에게 제네바회의의 내용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연구활동을
설명했다. 이때 갖고온 서적과 논문을 보여주면서 원자력 연구개발에 동참하기를 권유했다. 박철재는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정리하기 위해 원자력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스터디그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윤세원은
국방과학연구소의 김준명(金俊明)과 상의해 서울대 문리대와 공대를 졸업한 30대 전후의 후배들을 모아 비공식 세미나 그룹을 만들었다. 처음
스터디그룹은 윤세원, 김준명, 김희규(金熙圭), 이병호(李炳昊), 민광식(閔光植), 정구순(鄭求珣), 이진택(李鎭澤), 이수호(李洙灝),
현경호(玄京鎬) 등 10명으로 구성했다. 이른바 ‘1세대 원자력 과학자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박철재가 갖고온 미
원자력위원회 발간 《Research Reactor(연구용 원자로)》, 김준명이 소개한 레이먼드 머레이의 《Introduction to
Nuclear Engineering(원자력공학개론)》을 교재로 박철재 문교부 국장실과 국방과학연구소 회의실을 교대로 이용하며 토론을 벌였다. 또
원자력 관련법과 원자력의 연구개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선진국의 원자력 관계 법령을 입수해 번역 토론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는
이후 원자력법을 개정하는 기초자료로 활용했다. 초창기 원자력의 기초연구와 외국의 관련 법규 조사는 정부 공식적 기구에서 추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친분으로 모인 비공식 그룹이 진행했다. 후에 이 그룹을 ‘스터디그룹’이라 불렀다.
해방 직후 국내 과학기술계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일제가 남긴 과학기술 관련 기관이라곤 이공계 대학인 경성제대 이공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몇 개의 전문학교를 포함한
교육기관, 중앙공업연구소, 중앙지질조사소, 농산물검사소 등에 불과했다. 과학자의 수는 100명 남짓이었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문교부 내 실업교육국(1950년 기술교육국으로 개편), 상공부에 광무국·수산국·전기국·공업국을 설치했으나,
이 기관들은 체계적인 과학기술진흥 계획 아래 행정을 수행할 기능을 갖지 못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폐교되고 경성대로 되었다가 1946년 국립대학설치령에 따라 국립 서울대가 탄생했다. 경성대 이공학부는 관립 경성공업전문학교와 합병해 서울대
공과대학이 됐다. 종전 직후였던 당시, 원폭을 비롯해 각종 신무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공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 수많은 인재가 서울대 공과대학으로
몰려들었다.
원자력에 대한 갈증은 6·25전쟁 때 미군이 진주하면서 해갈됐다. 원자력공학을 전공한 미군 장교들이 당대의
원자력 석학인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의 레이먼드 머레이(Raymond L. Murray) 교수가 쓴 원자력 교과서를 들고 들어온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70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시슬러의 조언을 귀담아
원자력 인재 양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57년 원자력 전문가를 키우기 위해 국비 유학생 제도를 도입하라고 지시했다. 원자력 공부에
목말라하던 인재들이 대거 지원했다. 선발된 인재들은 여러 해에 걸쳐 총 237명이 차례로 출국했다. 그들의 절반은 영국으로, 나머지는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유학생으로 가장 먼저 선발돼 도미한 유학생 대표는 윤세원(尹世元·전 선문대 총장, 2013년 작고)이었다.
1950년대 실무 차원에서 한국원자력의 토대를 마련한 두 사람은 박철재와 윤세원이었다. 연희전문-교토제대 동문 관계로 얽힌 두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한국 원자력의 토대를 만들었다.
한미원자력협정
체결을 둘러싼 自主權 논쟁
IAEA 설립과는 별도로 미국과 소련은 자국과 우호관계에 있는 국가들과
원자력협력협정을 경쟁적으로 체결하기 시작했다. 실험용 원자로용 농축우라늄의 제공과 원자로 건설을 위한 자금의 부분적 원조를 약속한 것이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을 계기로 터키를 시작으로 우방국들과 원자력협정을 맺어 온 미국은 1956년 2월 3일 한국과 협정을
체결했다.
1955 7월 1일 양유찬(梁裕燦) 주미 한국대사가 워싱턴에서 월터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미 국무부 차관보,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L. Strauss) 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과 ‘한미원자력협정’에 가조인을 했다. 협정의 정식
명칭은 ‘원자력의 비군사적 사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이었다.
최초의 한미원자력협정은
전문과 본문 10개조로, 원조의 목적, 수입국의 혜택과 의무, 협정의 효력 부분으로 구성했다. 협정문은 첫째 ‘연료를 대체할 때는 사용된 연료의
형태와 내용을 변경하지 않고 반환해야 한다’며 원자로에서 생산되는 플루토늄의 관리를 엄격하게 했다. 둘째, ‘대한민국 또는 미합중국의
사인(私人)과 사적 기관은 타방 국가의 사인 및 사적 기관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고 했다(제4조). 이 규정은 양국 원자력 업자의
국제적 상행위의 법적 근거가 되는 동시에 미국 원자력 업자를 한국에 진출시켜 한국 원자력 자원과 원자력 시장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셋째, ‘연구용 원자로를 포함하지 않는다(제10조 다항)’고 규정했다. 연구용 원자로가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
어처구니없는 조항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원한 한국 정부는 협정 전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원자력의 평화적 및 인도적 사용을 구현하기 위해 연구 및
발전계획을 실현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이 계획에 관해 미합중국 정부와 미합중국 공업으로부터 원조를 바라고 있으므로’라고 명기했다. 따라서
협정체결을 전적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은 수동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1955년 7월 1일 가조인했던 한미원자력협정은
1955년 12월 9일 국회동의를 거쳤으나, 1956년 6월 11일 미 정부의 수정 제의가 있었다. 미국 원자력위원회는 원래 협정문에 있던
‘대한민국 정부 또는 그 관할하에 허가를 받은 자에게 연구용 원자로의 건조와 운영에 필요한 원자로용 물질을, 특수물질을 제외하고 위원회가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방법으로 대여한다’고 한 조문을 수정하자고 한 것이다. 서독, 네덜란드 등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은 국가들이 특수핵물질에
대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는 수정안에서 ‘원 협정에서 제외됐던 특수핵물질을 비롯해 원료물질, 부산물 기타
방사성 동위원소 및 안정동위원소를 포함한 중요물질까지 상호 합의하는 분량과 조건하에 매도 또는 대여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은 서독
등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하한 경우에도 일시에 우라늄235 100g, 플루토늄 10g, 우라늄233 10g을 초과하여 대여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한미원자력협정은 1957년 8월 10일 국회동의를 통해 최종 비준됐다.
한국은 당시
국제원자력회의에 참석하고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등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세계적 흐름에는 동참하고 있었으나, 국내 경제적 여건과
과학기술계의 상황은 이를 뒷받침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또한 원자력법의 제정 등 제도적 장치와 구체적 사업의 방향도 모호한 상태였다. 잡지
《새벽》은 1955년 송년호에서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원자력 특집을 꾸밀 정도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됐다. 그러나 1955년 7월 25일 한미 간 협정 전문이 일간지에 보도되자, 원자력계에서는 논쟁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동아일보》(1955년 7월 30일)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소견’이라는 칼럼을 통해 “지성의 최고 대표기관인
학술원이 의당 적극적인 관심과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장래원(張來元) 사무총장과 스터디그룹의
대표이자 초창기 한국 원자력 사업을 주도한 윤세원 문교부 원자력과장 등 세 사람이 원자력 발전의 자주성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장래원 총장은 “미국의 원자력 원조가 농축우라늄의 대여량을 제한하고, 방사성 동위원소의 직접적인 이용을 막기 때문에 ‘원자로
운전기술자 양성’에는 적당하나, 한국 원자력 연구개발의 지상과제인 ‘원자력 발전 연구’에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의 협정제의가
원자력 국제시장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면서, “미국의 의도에 맞서 한국은 연료를 미국 측이 제공하는 농축우라늄에 의존하지 말고 국산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는 방안을 세우는 등 자주·자립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래원의 지적에 대해 윤세원 과장은
“‘원자력=전력’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비록 소형이긴 하지만 연구용 원자로의 가동에 의해 많은 수의 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성자의 이용, 원자로에서 나오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이용 등 많은 이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연우라늄을 이용한 원자로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학적 성과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의 과학적 수준을 고려할 때 미국에서 제공하는 원자로를 먼저 받아들여 원자로에 대한
경험을 쌓은 후에 자력으로 건설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고 주장했다.
장래원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협정내용의 수정을 제의한
반면, 윤세원은 협정 자체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미국이 제공하는 것을 우선 받아들여 한국의 원자력 산업을 키워 보자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의
논쟁을 지켜보던 박익수 전 위원장은 “국가간 협정이나 정책은 이해관계가 전제되는 것이므로 이번 미국의 세계 원자력정책이 결과적으로 미국이나
우리도 공히 이익이 될 것”이라면서도 “우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주권국민으로 당연한 태도”라고
했다.
한미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난 직후인 1956년 3월 9일, 정부는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윤세원의 해외연구 관계로 초대 과장은 즉각 임명하지 못했다. 정부는 윤세원 교수를 문교부 원자력과 설치 1년 7개월 만에 초대 과장으로
임명했다. 원자력과의 당면과제는 조속히 원자력법을 제정해 원자력 행정기구와 직제를 만들고, 원자력연구소 부지를 정하는 한편, 연구용 노형을
결정해 도입하고, 원자력 훈련생을 해외에 파견하는 등 할 일이 산더미였다.
“원자력연구소 지을 곳 없으면 진해 해군기지도 고려해 봐”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 산업에 얼마나 야심을 가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박익수 전 위원장 비망록에 등장하는 윤세원씨의 회고다.
〈과장으로 부임한 지 1개월이 지난 1957년 11월경으로 기억합니다.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경무대로 들어오라는 시간에 들어갔더니, 첫마디가 “우리나라에서도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만들 수 있나”라고 물어서,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구를 계속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그럼 자네 원자력에 대한 계획을 잘 세우고 그러면 정부도
자네가 하는 일을 잘 밀어 줄 거야. 연구소를 지을 장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고 보안도 잘되는 곳이 좋아. 만일 적당한 장소가 없으면 진해
해군기지가 있는 곳도 찾아봐요”라고 하셨습니다.〉
원자력을 연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용 원자로가 있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을 근거로 윤세원 과장이 올린 ‘연구용 원자로 구입’ 품의서를 결재했다. 1958년 8월 16일 정부는 연구용 원자로
구매단을 구성해 미국에 파견했다. 단장은 박철재 소장, 구매단원은 윤세원, 김희규, 이진택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던 이기억,
유학 중인 전완영, 이병호를 합류시켜 협조를 받았다.
조사단은 미국에서 처음 본 원자로 가운데 제너럴 아토믹(GA)의 트리가
마크-Ⅱ 스위밍풀형이 구조도 단순하고 가격도 마음에 들어 기초연구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트리가 마크-Ⅱ는 1958년 제네바 제2차
원자력평화이용회의에서 가장 호평을 받은 제품이었다. 조사단은 1958년 12월 27일 제너럴 아토믹사의 ‘트리가 마크-Ⅱ’를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서를 이 대통령에게 올렸다.
트리가 마크-Ⅱ의 도입비용은 73만2000달러로 결정됐다. 원자로 계약대금은
33만1000달러였고, 여기에는 핵연료 대금이 빠져 있었다. 당시 핵연료는 미국 원자력법상 국가에서 통제관리하는 물자로 판매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핵연료는 별도로 미국 정부와 리스협정을 맺고 임차 형식으로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원자로 구입을
위한 충분한 자금이 없었다. 고민하던 한국 정부는 1958년 7월 24일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미국 정부의 원자로 구입대금 무상원조에 대한
지출교섭을 우리보다 교섭능력이 뛰어난 제작사 제너럴아토믹사에 맡겼다.
달러 부족에 허덕이는 한국의 사정을 알아챈 미국도
절반에 가까운 35만 달러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미국에서 받은 무상원조 자금 35만 달러 중 계약금 33만1000달러를 제외한 잔여금
1만9000달러와 원자로 건설을 위해 한국 정부가 부담할 35만 달러, 그리고 중앙산업의 하청공사비 약 3만 달러 등 총 40만 달러는 재무부
이한빈(李漢彬) 이재국장(경제기획원장관 역임)의 노력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은 40만 달러를 미국의 양유찬 대사
명의로 미국은행에 예치해 놓고 주로 연구기기 구입대금으로 전결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도입 계약은 한국을 대표해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해럴드
밴스(Harold S. Vance) 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과 체결했다.
100kW 용량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를
도입하면서 운전 인력도 필요했다. 1959년 봄 정부는 미국 시카고의 알곤 원자력연구소 부설 국제원자력학교를 8기로 수료한 양흥석, 이관,
이창건, 장지영, 정운준, 한희봉 등 6명을 제너럴아토믹사로 보내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운전기술을 배우게 했다. 이들은 두 달 후 트리가
마크-Ⅱ의 운전면허증을 받고 귀국해 한국인 최초의 원자로 운전 면허자가 됐다.
“아예 과학부를 만드는 것은 어때?”
연구용 원자로 도입이 가시화하자 시슬러가
방향을 제시한 대로 정부 차원에서 원자력 업무를 할 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문교부 기술교육국의 원자력과로는 원자력 업무를 제대로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세원 과장은 1956년 1월 14일 일본 원자력법을 참고해 ‘원자력법’의 초안을 잡았다.
이승만 정부는
원자력법을 집행할 기구로 ‘원자력원’ 창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원자력원 산하 원자력위원회가 행정기관이 될 수 없다는 점(정부조직법 저촉)과
원자력 행정기관인 원자력원을 문교부장관 감독하에 둘 것이 아니라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두어야 하는 문제점 때문에 국회와 정부가 해를 넘겨 가며
대립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교부와 국회가 절충을 시도하여 원자력법은 1958년 2월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이 제정된 해에 한양대
공과대학이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만들었다. 이듬해인 1959년 서울대 공과대학도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했다.
원자력법은
원자력원을 대통령 직속의 독립기관으로 하는 동시에, 원자력의 전반적 정책 입법의 심의의결기관인 원자력위원회, 사무를 담당하는 사무총국, 원자력
연구개발을 주임무로 하는 원자력연구소로 구성하는 것이 골자였다. 원장은 국무위원급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원자력법이 1958년 3월
11일 공포되자 문교부는 이를 토대로 1958년 10월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원자력원을, 같은해 2월 3일 그 산하기관으로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어느날 박철재 국장이 윤 과장을 불러 “원자력원은 규모가 작으니 이 기회에 문교부처럼 과학부를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했고, 윤 과장이 당시 이재학(李在鶴) 국회의장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재학 의장은 윤 과장에게 “이 사람아, 한꺼번에
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해. 처음부터 크게 만들었다가 할 일도 없으면 곤란하지 않아?”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1959년
1월 21일 원자력원을 설립한 정부는 초대 원자력원장에 프랑스 유학파로 불교계의 거목이자 자유당 3선 의원인 김법린(金法麟·1899~1964,
동국대총장 역임)씨를 임명했다. 사무총장은 조달청 출신 김대만(金大萬), 기감(技監)에는 서동운(徐同運) 서울대 교수를 임명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회고다.
“원래 원자력 사업에 관한 중요사항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외무부, 재무부, 부흥부, 국방부, 문교부
장관으로 구성된 5부 장관회의에서 협의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문교부장관이 책임지고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원자력원이 발족하면서 이런 절차와 5부 장관회의에서 벗어나 문교부장관의 소관 아래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원자력원은 발족 두 달 만인 1959년 3월 1일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어 초대 소장에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인 박철재씨를 임명했다.
원자력연구소는 해방 이후 한국에 만들어진 최초의 연구소다. 박 소장은 원자력연구소의 핵심인 원자로부장에 윤세원 과장을 임명했다. 기초연구부
김영록 부장, 방사성동위원소연구부 한준택 부장 등을 1급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높은 직급은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원자력연구소는 1959년 3월 1일 홍릉에 있는 서울대 공과대학 4호관을 빌려 출발했다. 3·1절을 택해 원자력연구소를 개소한 것이
심상치 않았다. 힘이 없어 당한 식민지배를 설욕하겠다는 이승만 정부의 의지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행정은 서무와 건설, 두 과로 구분해
운영했다. 연구소 초기 시절, 해외에서 훈련받은 20여 명의 연구관을 주축으로 출발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1961년
10월 연구소 조직은 3개 부에서 6개 연구실로 개편됐다. 이렇게 출범한 원자력연구소는 당시 최고의 대우를 해 주면서 인재들을 불러모았다. 이때
연구소에 들어간 이창건(李昌健) 박사에 따르면, 원자력연구소 근무자는 본봉의 100%씩 연구수당과 위험수당을 더 받았기에 본봉만 받는 원자력원
근무자에 비해 월급이 세 배나 많았다고 한다.
美, 한국의 연구소 부지
선정에 불만 표출
1959년 3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서울 공대 4호관에서 개최된 원자력연구소 개소식. 앞줄 왼쪽에서 6번째가 박철재 초대 소장, 다음이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 원장. |
원자력연구소의 부지 선정은 이승만 정부가 연구소를 어떠한 용도로 활용하려고
했는가를 보여주는 좌표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 고위인사들은 원자력연구소를 군의 경호를 받을 수 있는 강원도나 진해 등에 두려고
했다. 반면, 상공부는 전기·수도·도로망이 완비된 충주비료공장이 있던 충주를 희망했고, 원자력과를 품고 있던 문교부는 안양과 군포 사이에 있는
수리산의 박달리(博達里) 일대를 추천했다.
한국의 모든 정부기관은 원자력연구소를 후방지역의 안전한 곳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정부는 원자력연구소를 군사적 용도로 쓰고 싶다는 의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박달리는 일본군 탄약고가 있던 22만평 부지로,
정락은(鄭樂殷) 국방과학연구소장의 안내로 최규남(崔奎南) 문교부장관, 박철재 기술교육국장이 현지를 답사해 크게 만족했다는 것이다. 윤세원 부장은
박익수 전 위원장의 비망록에 이러한 증언을 남겼다.
“1958년 4월 미국 극동과학담당관(미국 주재)인 페닝턴(W. H.
Penning-ton)이 서울에 왔는데, 부지를 선정해 놓았다고 하니까 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와 동행한 미시간대학의 G. H. 위플
교수와 함께 박달리를 구경시켜 주었는데, 이곳을 본 이들의 첫마디가 ‘왜 이런 오지에다 정하느냐. 대학 근처에 사람들이 왕래하기 편한 곳에
정하는 것이 좋을 텐데’ 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리들이 ‘대한민국은 발전속도가 빨라 머지않아 서울에서 30~40분 거리가 될
것이다. 일본의 도카이무라(東海村)도 처음에는 시골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무자들이 현지를 다시 답사했습니다. 어느 사이 미8군 팻말이 붙어 있었고,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어요. 5부장관회의에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당시 김일환(金一煥) 국방부차관이 ‘미8군에서 사용하겠다는
청원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미국 측의 강력한 반대로 원자력연구소 부지는 서울대 공과대학 근처
육군공병대 불도저연습장으로 낙점됐다. 국방부가 나서 여러 후보지를 놓고 안보평가를 한 끝에 그곳에 짓기로 한 것이다. 국방부가 부지를 선정한
것은 한국 정부가 원자력연구소를 안보시설로 보았다는 뜻이다.
원자력연구소 담당자들은 서울대 윤일선(尹日善) 총장을 찾아가
연구소의 부지시설계획과 공과대학과의 연구협력을 설명하며 13만평을 원자력연구소 부지로 할애해 달라고 했고, 인접 사유지 12만평을 합쳐 약
25만평의 연구소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이 대통령이 처음부터 원한 장소는 아니지만 최초의 연구기관은 서울 근교에
건설하고 계속해서 대전 이남에 분산 건설하겠다고 보고해 결재를 받은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라고 했다.
트리가
마크-Ⅱ 도입을 결정한 정부는 1959년 7월 14일 서울시 공릉동의 원자력연구소 부지 안에서 원자로 건설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원자로 건물
설계는 당시 촉망받던 건축가인 김중업(金重業)씨가 맡았다. 김중업은 설계를 위해 2개월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를 돌며 방사선
차폐시설, 방호시설, 동위원소 생산시설 등에 대한 구조물을 시찰하고 두 권의 노트로 정리해 보고했다.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3부 요인과 함께 참석해 직접 역사적인 ‘시삽’을 했다. 이 대통령은 훈시를 통해 “장차 원자력연구소는 훌륭한 아토믹 머신(Atomic
Machine)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당시 이 대통령이 말한 ‘아토믹 머신’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첫
삽을 뜬 원자력연구소 내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공사는 4·19와 5·16이라는 정변을 겪고도 1962년 3월 30일부터 정상 가동했다.
원자력을 향한 한국민의 열망을 그 어떤 정변도 막지 못했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3&nNewsNumb=20160219452&nidx=19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