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6) 공부하는 신앙
신앙 공부, 모든 일에서 하느님 뜻 찾고 예수님 방식 실천하는 일
공부의 즐거움
한 해를 마감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기보다는 그저 신앙 안에서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조금 즐겁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탄식과 회한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삶은 주어지는 것과 만들어가는 것의 이중주다. 운명으로 주어지는 것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 생의 즐거움들은 주로 감각과 관련이 있다. 보는 눈이 즐겁고, 듣는 귀가 즐겁고, 먹는 입이 즐겁고, 만져지는 느낌이 즐겁고, 좋은 내음이 우리를 평안하게 한다. 오늘날 여행과 식도락에 대한 프로그램이 발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비정한 자본주의 시대에 감각과 욕망의 즐거움들은 돈과 시간을 요청한다. 돈이 없는 사람,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잘 즐기지도 못한다. 하지만 진정한 즐거움은 감각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소비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를 누릴 줄 아는 향유의 즐거움이다. 비용도 들지 않고 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공부와 산책이다. 그저 배우려는 태도와 마음의 여유만 있으면 된다.
공부는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다. 젊은 날의 공부는 성취와 인정과 권력을 향하기 쉽다. 오히려 늙은 날의 공부가 배움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더 겨냥할 수 있다. 늙어갈수록 더 공부해야 한다. 잘 늙어가기 위해서, 순수한 앎의 즐거움을 위해서, 겸손하고 온화한 노년을 위해서 공부가 더 절실히 요청된다. 학문으로서의 공부든 삶을 향한 인생 공부든 말이다. 노년의 공부가 좋은 이유는 참 많다. 사실, 지식과 권력의 역학 속에서 학문으로서의 공부는 변질되고 퇴화될 위험이 늘 있다. 권력을 향한 지식인들의 변절과 흑화를 우리는 정치의 장에서 쉽게 목격하지 않는가. 노년의 학문 공부는 학문 그 자체의 목적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순수한 앎과 지식의 즐거움을 향유하기가 더 쉽다는 뜻이다. 더욱이 탐구와 호기심으로서의 공부는 우리를 언제나 젊게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상 삶을 향한 인생 공부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한다. 청년과 중년의 인생 공부 역시 사람을 성숙하게 하지만, 노년의 인생 공부는 우리를 원숙함과 지혜로 나아가게 한다. 노년의 공부는 지식 탐구보다 지혜 연마에 무게 중심이 있다.
공부의 방식
모든 공부는 바르게 알기 위해,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지적질하기 위해, 즉 권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위한 문법 공부조차도 원래의 목적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작고한 평론가 황현산 선생도 트위터에서 위트있게 말을 날렸다. “잘못된 말을 지적하여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법 공부는 꼰대질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말이나 남의 말이나 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공부하는 행위는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다. 다양한 책을 읽고, 읽은 것을 매개로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생각과 말을 글로 옮겨보는 일이다. 공부의 행위 안에는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읽는 즐거움, 자신의 생각을 벼려가는 즐거움, 자기의 말과 글을 사용하는 작가가 되는 즐거움이 들어 있다. 물론 생각하기와 글쓰기는 자주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이 되기도 한다. 공부의 행위는 듣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공부는 배우고 경청하는 일이다. 공부는 일방적인 강의를 듣는 일이 아니다. 공부는 책과의 대화를 통해, 타자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공부는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떻게 공부하는가의 문제만큼 누구와 함께 공부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공부란 곧 동학들 사이의 대화적 긴장과 그 상호모방의 호혜성에 빚지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김영민)
공부의 기쁨과 즐거움은 성취의 결과물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공부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공부하는 과정 그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이다. 참다운 공부란 머리와 마음과 몸을 관통하는 공부다. 참 공부는 언제나 삶을 겨냥한다. 물론 순수한 앎의 공부도 있다. 앎 그 자체의 즐거움도 크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을 움직여서 하는 공부가 마음을 건드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공부의 여정은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현하는 과정이다. 머리와 마음과 몸으로 하는 공부, 삶으로 하는 공부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며 겸손하게 만든다.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황현산)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신앙 공부
신앙도 공부가 필요하다. 신학은 신앙에 관한 학문적 공부다. 신학 행위는 신앙을 탐구하고, 교회를 성찰하며,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이다. 신학은 ‘지혜’이며, ‘합리적 지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실천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신학 공부가 소수의 전문가에게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 공부는 신앙인 모두가 할 수 있는 공부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미 신학을 표현하고 있다.”(필립 클레이튼) 신앙인은 누구나 ‘신학적 에로스’를 갖고 있다. “즉, 인간 실존과 세계의 운명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들과 씨름하도록 하느님께 부름받았다.”(미로슬라브 볼프)
신앙 공부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다. 오늘의 성경 공부는 성경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공부하는 역사비평적 접근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저자만큼 성경 독자의 문맥을 중요시한다. 일종의 수용비평적 성경 공부다. 두 이야기(성경 이야기와 오늘의 우리 이야기)가 만나고 합류하는 지점을 공부한다. 성경이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삶을 공부해야 한다. 넓은 의미의 인문 성경 공부다. 신앙의 빛으로, 성경에 비추어 세상을 읽는 일 역시 신앙 공부의 한 요소다.
공부하는 신앙, 살아있는 신앙, 삶을 흔들고 변화시키는 신앙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명확하게 설명한다.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성장해야 할 신앙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잠든 우리를 깨우지 않는 신앙은 깨어나야 할 신앙이다. 우리를 뒤흔들지 않는 신앙은 뒤흔들려야 할 신앙이다. 머릿속에만 머물며 미온적인 신앙은 ‘신앙’이라는 개념일 뿐이다.”(2017년 12월 21일 연설)
성모님은 신앙 공부의 모범을 보여준다. 신앙 공부란 질문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태도로(루카 1,29.34),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섬세한 시선으로(루카 2,19.51),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다.(요한 2,5 참조)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4) 삶, 체험, 앎
하느님 닮은 삶을 살고 체험하는 것이 앎보다 더 중요하다
머리, 마음, 몸
어쭙잖은 학자로 살고 있다.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다. 머리를 많이 사용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머리 중심으로 살다 보니 마음과 몸이 점점 빈약해진다는 사실을 요즘 자주 확인한다. 오랫동안 알량한 지식인으로 살아서,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살아내는 일에 둔감해져 가는 나를 쉽게 발견한다는 의미다. 마음이 없는 공허한 지식인, 삶이 없는 위선적 지식인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지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다. 머리로 안다는 것,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 몸으로 실천한다는 것의 간격과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거듭 절감한다.
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명사적으로 사유하기보다 동사적으로 사유하라고 자주 강조했다. 명사, 특히 추상 명사를 중심으로 신학을 하면 아무래도 신학적 작업이 추상적이 될 위험이 많다. 동사적으로 생각하고 문장을 만들어서 사유하면, 신학적 서술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담게 된다.
감정과 정서, 의지와 몸보다 이성과 사유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왔다. ‘안다’와 ‘생각한다’, ‘느낀다’와 ‘체험한다’, ‘행한다’와 ‘실천한다’라는 동사들 사이에서 나에게 친숙한 것은 아무래도 ‘안다’와 ‘생각한다’이다. ‘머리로 안다’, ‘머리로 생각한다’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는 뜻이다. 물론 머리와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 역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무게 중심을 두는 영역이 조금 다르다. 이성적 사유가 뛰어난 사람, 정서적 공감을 잘하는 사람, 의지적 실천이 훌륭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앎의 방식도 다양하다. 머리로 아는 사람, 마음으로 아는 사람, 몸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머리와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체험과 삶으로 먼저 아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낫고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와 지식으로 아는 것이 가장 꼴찌라는 생각이 든다.
신앙, 종교, 영성
가끔 신자들에게 말한다. 종교생활보다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물론 신앙생활은 종교생활과 영성생활을 포함한다. 신앙, 종교, 영성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 한다’고 말할 때, 종교생활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좁은 의미에서 종교생활이란, 종교적 가르침과 관습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교리적 가르침을 따르고 종교 제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혼 없는 종교생활’, ‘신앙과 영성이 없는 습관적 종교생활’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서술을 가끔 사용한다. 하지만 건강한 의미의 종교생활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다. 신앙생활은 그 종교가 갖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그 종교가 시행하는 제의에 참여하며, 그 종교가 가르치는 일상의 윤리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앙생활이 곧 종교생활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 영성생활이고, 집단적이고 관습적인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종교생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성생활은 마음의 신앙생활이고, 종교생활을 몸의 신앙생활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이 가장 큰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영성생활과 종교생활은 신앙생활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신앙생활은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행동하는 삶이다. 신앙은 생각과 체험과 행동,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삶이다. 신앙은 앎과 체험과 행동을 포함하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살아내는 일이다. 신앙은 삶이다.
하느님 - 앎, 체험, 삶
이번 학기 신학생들과 삼위일체 신관을 공부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학자들의 현란한 사유들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느님에 관한 앎(지식, 인식), 하느님 체험, 하느님을 닮은 삶은 긴밀히 연결된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사변적인 앎만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사유하고, 하느님에 관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느님 체험은 환시와 환청을 통한 특별한 체험인가? 하느님 체험은 내면의 영적 체험인가? 탁월한 신비주의적 영성가들만 하느님 체험을 하는가? 평범한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은 무엇인가? 하느님에 관한 앎은 신학자들이, 하느님 체험은 신비주의적 영성가들이 전문가인가?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통해 하느님에 관해 알 수 있다. 말씀과 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다. 비록 하느님에 관한 확연한 앎이 부족하더라도, 비록 하느님 체험이 강렬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에 관해 조금씩 알게 되지 않을까?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온몸으로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다 보면,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고 머리로 하느님을 알게 되지 않을까? 몸에서 마음을 거쳐 머리로 가는 순서가 아닐까? 삶에서 체험으로 그리고 앎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하느님을 잘 체험하지 못한다 해도, 그저 악착같이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느님을 안다, 하느님을 느낀다,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산다. 분명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물론 그 셋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일이 아닐까?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 안에는 하느님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잘 알지 못하고 잘 느끼지 못한다 해도, 그저 충실히 살다 보면 느끼게 되고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삶이 먼저다.
전례는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삶의 변화를 겨냥한다
몸과 마음이 머리보다 더 중요하다. 삶과 체험이 앎보다 더 중요하다. 신앙이 교리적 앎, 신학적 앎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정한 앎은 삶과 체험에서 온다. 물론 관찰과 실험과 논리에 따른 순수한 앎도 있다. 하지만 신앙적 앎은 삶과 체험에서 온다. 신앙의 앎은 머리의 앎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의 앎, 삶과 체험의 앎이다.
생각과 느낌도 몸을 통해 온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현대 문화는 생각과 의도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내면의 심리적 기제는 언제나 변덕스럽다. 오히려 상징적 행위의 반복을 통한 몸의 단련이 우리를 변화로 이끈다. 철학자 한병철이 “형식의 우위를 복원하는 리추얼적 전환”(「리추얼의 종말」)을 강조하는 이유다. “리추얼은 체화과정이며 몸-연출이다.”(「리추얼의 종말」) 가톨릭 신앙이 성사 전례를 강조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앎은 몸을 통해 내면화될(체화될) 때만 삶이 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3) 인정 욕망, 자기 존엄성, 신앙 공동체
교회는 오직 신앙 안에서 모든 타인을 인정·포용하는 공동체
생은 인정 투쟁의 장
인간은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 존엄성을 확보한다. 독일의 사회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사유를 풀어서 설명하면, 인간은 타인과의 사랑을 통해 정서적 배려를 받고, 타자와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권리가 존중되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가치가 인정될 때 행복해한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오규원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주목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한다. 자기확인 욕망, 인정 욕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욕망이다. 세속의 기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흔히 권력이나 돈이나 직책이나 지식 등을 가져야 하고 외적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이 가진 자본(물적 자본이든 상징 자본이든)과 권력과 세속적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인정을 추구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 자기확인과 인정 욕망에 붙들려 살아왔다. 세속의 권력과 교회 안의 어떤 직책과 권력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공부와 책 읽기를 통해 남과 다르다는 자기확인 욕망과 공부 잘하는 신부, 책 많이 읽는 신부라는 이름과 명예를 은연중에 추구하며 살았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속물이 아닌 척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름과 명예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고, 지적 성취를 통한 자기확인과 인정욕구에 얽매어 종살이하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해왔고, 세속의 기쁨이 아닌 복음의 기쁨이 내 삶을 관통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해왔다. 그런데 곰곰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이름과 명예와 인정욕구라는 속물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하느님을 말하고 신앙을 언급하지만, 실제 삶과 행동에서는 여전히 하느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종교인으로 살아서 웬만한 세속의 일에서 별다른 이해관계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욕심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의식 안에 아니 실제 의식 안에서 늘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나를 목격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계속해서 오해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피력한다. 세 번에 걸친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욕망만을 말하고 예수를 따름에 대한 보상과 인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4)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7)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마르 10,41) 인정 투쟁과 시기와 질투의 모습이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길은 세속적 인정 투쟁의 여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기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은
생은 때때로 잔인하고 운명은 자주 불공평하다. 생이라는 인정 투쟁의 장에서 많은 이들이 낙오된다. 경쟁과 투쟁의 장에는 경멸과 무시, 혐오와 배제, 굴욕과 모욕, 시기와 질투, 분노와 폭력이 난무한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인정에 휘둘리는 현대의 삶은 때때로 자기 부정과 자기 파괴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기적인 자기애가 아닌, 건강한 자기 존엄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능력주의가 강화되고 불평등이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시대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끊임없이 무시되고 도태된다. 세습된 자본도 타고난 능력으로 포장되는 시대에,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별다른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다. 자기 존중, 자기 긍정, 자부심에 관한 담론들이 많아지는 역설적인 이유다.
건강한 자아실현, 긍정적 자기의식, 행복한 삶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긍정과 인정을 통해 건강한 자부심을 확보하며, 그 건강한 자긍심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타인의 관심과 인정,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속적 관점에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개성과 능력을 사랑하고 자기를 존중할 수 있을까?
자존감은 주체 되기에서 시작된다. 자존감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식과 경험과 행동의 주체로 살아가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행동한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피터 비에리)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부심의 아름다움이자 위안이다.”(리처드 테일러) 주체로서의 인간은 타자와 세상을 위한 수단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람이다. 타자와 세상이 제시하는 무엇이 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신앙인은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다른 어떤 능력과 특성으로서 하느님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저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이다. 신앙인 역시 마찬가지다. 신앙인은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의 인정을 통해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정체성과 존엄성의 기원은 오직 신앙에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인정만으로, 오직 신앙만으로 충분히 주체적 존재가 되고 또 자기 존엄성을 확보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교회와 건강한 인정 공동체
교회가 된다는 것은 신앙의 인정 공동체가 된다는 뜻이다. 교회는 신앙 안에서 모든 타인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공동체다. 타자의 건강한 관심과 인정은 고단한 생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도 한다.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타인의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요청한다. 건강한 관심과 사랑과 인정은 우리를 주체 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모든 단체와 공동체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 때로는 감정적 친밀성이, 때로는 혈연적 관계가, 때로는 다양한 인연의 깊이가 인정시스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세속의 일반적 인정시스템은 대부분 자본과 권력과 능력에 기반한다. 초기교회 시절 교회 공동체는 독특한 인정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세속의 인정 방식이 아닌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실천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귀족이든 노예이든,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로 살아갔다.
오늘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어떤 방식의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가?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혹시 세속의 인정시스템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올바른 인정시스템을 우리는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6) 신앙의 시선으로 읽기 - 읽기의 신학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은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
읽는 즐거움
늘 읽어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적어도 나에게 산다는 것은 읽는 일이었다. 나에게 익숙한 동사는 ‘읽는다’와 ‘걷는다’이다. 모두가 잠든 밤늦은 시간,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아, 참 행복하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저녁 무렵 동네를 산책하는 일은 또 얼마나 평안한 즐거움인지. 물론 ‘사제로 살아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하는 미안함도 있다. 가끔 상상한다. 더 늙어, 요양원에 누워 걷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저 건강히 살아, 읽고 걷다가 며칠만 누워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의 운명은 주님의 몫이니, 내 생의 마지막 모습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읽기의 주된 대상은 책, 신문, 잡지라는 텍스트다. 오늘날 사람들은 유튜브와 시청각 매체를 좋아한다. ‘읽기’보다는 ‘보기’와 ‘듣기’가 대세인 시대다. 얼핏 생각하면 읽기와 보기는 인간의 시각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지만, 텍스트를 읽는 것과 영상을 보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나는 활자와 인쇄 매체를 사랑하는 옛 시대 사람이다. 전자책보다는 종이라는 물성을 더 좋아한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글 읽기도 좋아한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블로그 읽기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사유와 정서를 읽었고,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타인의 글을 읽는 일은,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그를 만나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몸의 행동반경이 좁은 나에게 블로그 읽기는 체험과 이해의 확장을 뜻했다. 요즘은 페이스북을 더 많이 읽는다. 블로그의 글은 시간의 숙성과 성찰의 과정을 거친 것들이 많다. 페이스북의 글은 시간적 민첩성과 정서적 반응의 성향이 더 강하다. 물론 블로그에서든 페이스북에서든 나는 소위 말하는 ‘눈팅족’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은 적어도 나에게는 자신의 글을 쓰는 장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글을 읽는 장이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이기적 읽기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일은 이승의 생에서 내가 누리는 작은 즐거움이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다
읽기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대화다. 읽기는 저자와 독자, 텍스트와 독자의 대화다. 또 한편으로, 읽는 행위 안에는 언제나 읽는 사람의 생각이 투입된다. 읽기는 일종의 해석이다. 왜 읽기라는 대화와 해석을 나는 좋아하는가? 나에게 읽기는 삶과 인간에 관한 관심과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삶과 인간을 알고 싶어 읽는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인간과 삶을 알려주는 텍스트다. 문학과 철학과 사회과학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연과학의 텍스트 역시 인간과 삶에 관한 이해를 확장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과 삶에 관해 정색하고 쓴 글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의 시답잖은 것 같은 기사 역시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을 때때로 더 많이 알려주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읽는다.
‘읽는다’는 동사는 다양한 함의를 갖는다. 읽는 행위 안에, 보고 듣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포함된다. 읽기는 공부다. 학문의 세계에서 많이 읽는 사람을 못 당한다. 읽기는 관심이다. 타자를 읽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다. 읽기는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는다. 관심과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읽지 않는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읽는 일이 아니다. 말과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을 읽는 일이다. 문자와 표지 너머의 행간을 읽는 일이다. 생의 이면과 세상의 이면을 읽는 일이다. 사람을 읽는 일은 결국 마음을 읽는 일이며, 세상을 읽는 일은 감춰진 이면을 읽는 일이다. 한편으로,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은 세상 속의 기쁨과 즐거움, 아픔과 슬픔을 읽는 일이다. 아픔과 슬픔을 읽는 일은 읽기의 윤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읽기는 결국 타자와 세상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읽는 일이다. 세상을 읽고, 타자를 읽고, 나를 읽는다.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읽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시대의 징표를 읽는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자세와 태도를 성찰하는 말이다. 선교와 사목의 현장인 세상을 정확히 읽을 때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대해 교회는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징표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읽는 일이 필요하다.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실재(reality)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청된다는 의미다. 교회와 신앙은 추상적 개념(idea)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 실재다. 오늘의 교회가 사회교리나 사회적 사목의 맥락에서 세상을 읽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읽는 일에는 소홀한 느낌도 든다. 반성과 성찰은 뼈아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읽기의 거룩함
읽기는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다. 누가 읽느냐,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즉, 읽는 주체와 읽는 대상이 중요성과 거룩함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언제나 문제는 ‘어떻게 읽고 있는가’, ‘어떤 시선으로 읽는가’이다. 명사와 동사가 거룩함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부사가 거룩함을 표현한다. ‘열린 마음으로’ 읽을 때, ‘편견 없이’ 읽을 때, ‘정확하게’ 읽을 때, ‘식별하며’ 읽을 때, ‘정직하게’ 읽을 때, ‘따뜻한 마음으로’ 읽을 때, ‘공감하며’ 읽을 때, ‘공명하며’ 읽을 때, 바로 그때 읽기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 ‘읽는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가 무엇인가에 따라 읽기의 거룩함은 그 농도가 달라진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읽는다. ‘신앙의 시선으로’ 읽는다. 교회와 신앙인의 읽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신앙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교리와 윤리적 규범의 틀로 읽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로 읽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마르 6,34)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십자가의 슬픔에서 우리는 배운다. 슬픔은 슬픔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원은 슬픈 응시와 기억하고 호명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신앙인의 읽기는 슬픈 시선의 읽기다. 연민과 연대의 읽기다. 그 슬픈 읽기는 슬픔을 기억하는 행위와, 슬퍼하는 사람들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행위를 포함한다. 신앙인의 읽기는 응시와 기억과 호명의 행위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5) 삶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 이야기 신학
복음이 ‘살아있는 이야기’로 선포되면 말씀 실천으로 이어진다
자기를 말하는 일
신부로 살면서 자기를 말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강론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자기의 생각과 경험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물론 자기를 말하는 것과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서로 다르다. 신학생 시절 하느님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귀따갑게 들었다. 교만의 죄와 겸손의 미덕에 대해 숱하게 말하고 들었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앞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정직한 생각과 느낌을 먼저 성찰한다는 맥락이다. 자기 생각과 자신의 정직한 느낌을 말하지 않고, 객관적이라는 명분 안에서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말을 반복하는 것만큼 지겨운 일도 없다. 말의 힘은 화려한 수사와 매끄러운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발화되는 말 안에 그 사람의 정직한 생각과 느낌과 체험이 들어있다면, 그 말은 살아있는 말이 된다. 오늘의 세상 안에 공허한 말들, 추상적인 말들, 윤리적 당위의 말들, 죽어있는 말들이 너무 많이 떠돌고 있다.
공적 이야기 안에 사적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은 선포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적 서사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적 서사가 실제적인 힘을 갖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와 결합해야 한다. 어떤 공적 주제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체험을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그 개인을 매개로 그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한편으로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와 결합해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체험은 편파적이고 일방적일 수 있다.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공동체의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공적 서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적 서사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선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와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포함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이야기와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만날 때 진정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다. 살아있는 이야기로 전달될 때 우리는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실천할 수 있다.
공적 서사에서 자기를 말하는 것이 중심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필수적이다. 자신의 정직한 질문과 자기 이야기가 없는 모든 말과 글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물론 자기를 말하는 일에는 자기 정당화, 자기 미화, 자기 확인 욕망, 과장과 확대의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을 늘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모든 말과 글에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그 사람의 생각과 해석이 담겨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직하게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한다는 의미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타자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먼저 자기를 개방한다는 뜻이다.
이야기로서의 성경
학문적 관점에서 보면, 성경 안에는 신학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과 문학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 성경 신학, 성경의 역사적 비평, 양식 비평과 편집 비평 등의 용어를 자주 접한다. 성경 안에는 신앙적 진리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서술이 서로 섞여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은 이야기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이야기, 하느님과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 하느님을 체험한 개인들의 이야기다. 성경은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을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체험과 삶의 이야기다.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우리가 성경을 문학 비평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학자의 일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이야기로서 즐기는 법을 배울 때 그들(성경 저자들)이 우리에게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의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로버트 알터) 성경은 우리 신앙인에게 언제나 살아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 이야기와 지금 나의 이야기와 만날 때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
자기를 말하고 기록하는 일 – 자서전적 삶
자기를 말하는 것과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구술성과 문자성은 비록 결이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로써 자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 자기 생애를 말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 일종의 ‘존재 확인’이 된다. 자기의 말을 갖지 못해서, 자기 삶을 이야기화하지 못해서 소외되고 잊혀 가는 사람들이 구술 작가들의 문자화와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영상과 녹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최현숙의 저서 「할배의 탄생」과 「할매의 탄생」, 김재환의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 말과 이야기는 존재의 탄생을 의미한다. 존재는 말과 이야기로 자기를 드러낸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이야기한다.”(유호식)
자기 삶을 기록한다는 것, 자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기술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자서전적 글쓰기다. 모든 글쓰기는 자서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소설가 이청준은 소설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글쓰기는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에서 출발한다고 고백한다. 자기 글쓰기는 자기 삶을 텍스트화해서 이해하는 행위다. 자신을 말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을, 자기의 삶을 냉정하게 살펴보고 거짓 없이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정직한 자기 고백은 그 고백의 행위만으로도 상처를 위로하고 자기를 구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찰과 고백이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진정한 구원은 하느님만이 이루시는 일이지만 말이다.
정직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말하고 쓰는 시대를 살고 있다.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말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서전적 서술의 과잉이다. 자기 서술을 통해 인정 욕망을 충족하려는 시대다. 정직한 자기 서술에 머물기보다는 꾸밈과 과장과 거짓 서술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더, 진솔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다. 말과 글로 서술된 이야기보다 몸과 삶으로 표현하는 이야기가 더욱 그리운 시대다.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다. 삶은 이야기다. 문제는 어떤 이야기인가에 달려있다. 화려한 이야기보다 진솔한 이야기가 힘을 갖는다. 정직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 쓰고 살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4) 나는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가 – 정체성의 신학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결정한다
정체성 질문
나는 나를 누구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는 같은 사람인가? 정체성은 ‘나’라는 인식인 동시에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실제 삶에서 나를 타인에게 표현하고 있는 나가 언제나 같은가? 내가 생각하는 나, 타인이 규정하는 나, 내가 표현하는 나, 이 셋의 미묘한 불일치가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정체성의 문제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로 타인에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정체성의 규정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와 유사한 것과 나와 다른 것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성취된다. 정체성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정체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타인과 나누는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혹은 넓은 의미의 환경과 문화에 달려 있다.” “정체성은 타인들이 우리의 몸에 새겨 넣은 특성들의 집합으로, 대개 우리의 출신과 운명에 관한 견해들의 총체이다.”(파울 페르하에허) 정체성은 끝없이 타자와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타자란 누구인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로서의 하느님, 타자로서의 사람들, 또 하나의 타자로서의 나 자신. 우리의 정체성은 이 셋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고 구성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젠더와 민족과 국가와 인종적 요소들이 있다. 한 개인은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산다. 한 개인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복합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더 고려해야 할 정체성이 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일종의 종교적 정체성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성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계급적 정체성을 뛰어넘어 우선성을 갖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에게 신앙은 삶의 자리에서 일차적이거나 중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또는 삶의 한 장식품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 닮고 재현하는 일이다. 신앙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이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종교적 행위와 관습에 익숙해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고 재현하는 데에 기초한다. 오늘날 신앙을 말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과 태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찾기가 점점 어렵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외형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외적 신앙생활(종교생활)은 하고 있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신앙의 방식이 아니라 세속의 논리(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살아가는 경우다. 정체성의 분열과 괴리다.
나는 사제로 살아간다
사제의 정체성은 부르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제의 정체성은 직무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참여한다는 것과 사목자라는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의 정체성을 묻기보다는 일반적 관점에서 묻고 싶다.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는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이 시대의 사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예수와 늘 일치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더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제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기보다는 때때로 종교권력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슬픈 일이다.
나를 봐도 그렇다. 사람들이 정말 나를 보고 예수를 떠올릴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내 삶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그 어떤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 저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서 확실히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느낄까? 부끄러운 일이다.
성경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교회 전통 안에서 전해진 신앙의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또한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거행하고 있지만, 정작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용하는 말들과 용어들은 신앙적이지만 구체적 내 삶은 예수를 닮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삶이 종교적이긴 하지만 복음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아픈 일이다.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체성은 고유성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유 방식과 행동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자신의 사유, 감정과 정서, 욕망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정확하게 이해하며 성찰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나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떤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문장을 쓰고 있는가? 내가 쓰는 문장의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는 무엇인가? 명사는 존재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동사는 행위다. 나는 어떤 행위들을 하며 살고 있는가? 형용사는 성격과 특성이다. 나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부사는 동사와 형용사를 수식한다. 진정한 정체성은 언제나 부사에 있다.
내가 어떤 명사(신분, 지위)인지, 내가 어떤 동사(행동과 일)와 관련이 있는지, 내가 어떤 형용사(특성)로 수식되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부사) 내 직무와 일을 수행하는가에 있다. 성직자, 신학자라는 명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 미사를 거행한다고, 신학을 연구한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나의 거룩함을 결정한다.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이다. 삶의 자세와 태도가 진정한 정체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