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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를 불 사르라! (레 1:1-9)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말론 브랜도가 주연한 영화로서 월남전을 배경으로 했던 아주 흥미진진한 영화입니다. 월남에 파병된 거츠 대령이 전쟁을 하다가 그만 전쟁광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전쟁을 예술화했던지 전쟁에 심취하여 본국에 귀국하지 않고 캄보디아 어느 깊은 산속에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황제처럼 군림하면서 온갖 악을 다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본국에서 이 거츠 대령을 제거할 작전을 수행합니다. 반국가적이고 반법률적이고 반인류적인 거츠 대령을 제거하라고 윌러트 대위를 파송합니다.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윌러트가 거츠 대령을 제거한다는 스토리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너무도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의 악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거기서 우리를 전율케 하는 무서운 악을 보여줍니다.
논리적인 악
그런데 문제는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논리적인 악으로 악이 아니라고 해석을 하는데 있습니다. 이번의 테러도 하나의 큰 악입니다. 인류를 향한 악이며 하나님을 향한 악입니다. 그러나 테러를 저지른 그 사람들 편에서는 결코 그것을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 지구촌에 없어져야 할 적은 미국이라고 보고 미국을 향하여 우리가 하는 이 일은 하나도 악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당했던 일에 대한 정당한 행위이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즉 미국이 테러를 당한 것은 자기들이 믿는 알라신의 보복이라고 논리적인 악을 가지고 악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적인 악은 역사 속의 하나의 사조로 철학과 이념으로 계속 전수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와 벌」에 보면 라스꼴리니코프라는 남자 주인공이 논리적인 악을 저지릅니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의 할머니 같은 저런 인간은 살 이유가 없다, 저 노파의 돈을 가지고 선한 일에 쓰면 얼마나 좋으냐 그래서 그는 노파를 죽입니다. 이와 같이 라스꼴리니코프가 갖고 있는 논리적인 악은 소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현실 속에 악을 정당화하는 철학과 이념이 있습니다. 악을 정당화하면 그 악에 대한 책임을 전가합니다. 악을 저지른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떠넘깁니다. 그리고 자기는 악을 저지른 일에 대해서 성취감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논리적인 악입니다. 오늘 우리는 레위기에 계시한 하나님의 제사법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죄 때문에 제사가 필요
하나님이 주신 이 제사는 왜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제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죄인이 아니라면 예배를 드릴 이유도 없습니다. 죄인에게는 제사가 있어야 됩니다. 죄 때문에 제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시기 위해서 제사법을 주신 것입니다. 죄인을 상대하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예배를 주신 것입니다.
의사는 환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직업상 의사는 환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환자의 가장 추한 상처 부위를 만지고 보고 코로 냄새 맡아야 됩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직업상 상대하는 사람은 깨끗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닌 환자들입니다. 그것도 고름이 나고 피가 흐르는 그 부위를 직접 만지고 치료해야 되는 게 의사입니다.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 같은 법조인들은 피의자들을 상대합니다. 죄를 지은 피의자 중 어쩌다 실수한 피의자도 있겠지만 흉악범이나 상습범들은 그 눈길이나 표정을 봐도 두 번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런 피의자들을 대해야 되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들어야 되고 분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죄인을 상대해야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
제사는 제물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물을 장만하고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사를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사는 받지아니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제사를 받기 전에 제사드리는 사람을 먼저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벨을 먼저받고 제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제물보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아주 중요합니다.
본문에 보면 제사를 드리는 절차가 나와 있는데 먼저 제물을 구분해야 됩니다. 양이나 소나 염소 가운데서 제물을 구별해야 합니다. 흠없는 것, 깨끗한 것, 건강한 짐승을 구별해야 됩니다. 그리고는 그 짐승을 끌고 제사장에게 와서 본인이 그 짐승 머리에 안수를 해야 됩니다. 사실 제사는 내가 드리는데 죄값으로 짐승이 대신 죽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머리에다 안수해서 나의 죄를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앞에서 그 제물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짐승을 죽이고 피를 받고 각을 뜨고 가죽을 벗겨 제물을 장만하는 작업을 여호와 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제사장의 지도 아래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잡은 짐승의 피를 회막 문 앞에 있는 그 사면에다가 뿌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단에 나무를 벌여놓고 기름을 붓고 제물을 다 올려놓고 불살라서 전부 불태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제사의 절차를 보면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가 준비하는 것이 네 가지입니다. 제물을 선택을 해야 되고 제물 머리 위에 안수를 해야 되고 그 제물을 죽여서 피를 받아야 하며 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장만해야 되는 것은 제사드리는 본인이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본인이 할 수 없는 것을 제사장이 하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제사 드리는 장소에 있는 회막 문 앞에다 뿌립니다. 피를 뿌리는 일은 제사장이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물을 제단에다 차리는 작업도 제사장이 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불살라서 전부 여호와께 드리는 마지막 절차까지 그 제사를 집행하는 일을 제사장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역할이 묶어져서 제사가 됩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이 두 역할이 필요합니다. 홀로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도 제사장이 있어야 하며 제사장도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함께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곧 제사와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자와 중보자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죄인이기 때문에 드립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뵈어야 되고 우리의 죄 사함을 받아야 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움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반드시 예배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함께 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우리의 찬송도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집니다. 우리의 정성과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예배의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함께 성령 안에서 역사함으로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이 제사안에 나타났습니다. 제물은 반드시 자기 것으로 장만해야 됩니다. 빌려서 하면 안됩니다. 제물을 구할 때 반드시 값을 지불하고 자기가 사서 자기 것으로 제물을 삼아야 됩니다. 그리고 흠없고 깨끗한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잠언 3장 9절 "네 제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처음 익었다는 말은 순서상 처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말의 개념은 가장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감이나 과일 재배를 해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만 첫 과일은 충실하지 않습니다. 돼지 새끼도 제일 먼저 나온 놈이 부실합니다. 강아지도 그렇습니다. 꼭 처음 나왔다해서 제일 우수한 게 아닙니다. 처음 열매로 드리라는 말은 가장 좋은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논에 벼가 익었는데 제일 먼저 익은 것을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농사를 해보면 같은 논인데도 어느 부분은 열매가 부실하고 어느 부분은 아주 고르고 충실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논밭의 가장 충실하게 익은 그 부분을 베어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입니다.
메시야의 조상을 보아도 장자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장자가 아닙니다. 다윗도 장자가 아닙니다. 유다도 장자가 아닙니다. 처음 것으로 드리라는 말은 꼭 서열상 첫째를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흠없는 가장 건강한 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는 제사
그런데 제사에는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고 어떤 사건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제사에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습니다. 제물이 죽어야 제사가 성립됩니다. 양과 소와 염소를 죽이지 않고는 제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제사가 성립됩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이 있어야 제사가 성립됩니다. 생명은 피로 상징되었습니다. 짐승이 죽으면 고기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짐승이 흘린 피를 제사장이 회막 문에 바름으로서 이 짐승의 피가 곧 생명의 계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어야만 제사가 성립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죽어야 됩니다. 죽지 않고는 죄 문제의 해결이 안됩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입으려면 죽음이라고 하는 이 절차가 없이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죄로 죽어야 내 죄도 해결이 되는데 감사하게도 속죄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음으로 내가 죽지 않아도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예수가 죄 가운데서 우리를 살리셨고 자기도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생명을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찬송 속에 설교 속에 우리의 예배 전체 속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고백되고 확인되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이라고 하는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줍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끝냅니다. 죽으면 빚을 받으러 갈 수도 없습니다. 또 채무자가 죽어도 끝납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버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죽음이 있어야 예배가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를 은혜롭게 드렸다면 끝낼 것은 끝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데도 끝이 잘 안납니다. 죽음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렸는데도 왜 자꾸 미워합니까? 미움이 끝나야 합니다. 시기가 끝나야 합니다. 의심이 끝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으로 확실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주 안에서 의심하는 것을 다 끝내야 됩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연상해 보십시오. 죽었다 살아난 생명은 다른 생명입니다. 삼일간의 이별연습을 한 마흔 두 살의 중년 남자의 생생한 고백입니다. 그가 독성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죽는구나 싶어서 가족에게 이별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다시 검사를 해보니까 오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친구가 삼일동안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도무지 못하고 후회스러웠고 부족했던 것을 삼일동안 반성했습니다. 그것을 이제 살아나서 결심을 합니다. 그렇게 못 끊던 술과 담배를 깨끗이 끊겠다는 것입니다. 또 매일 매일 감사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매일 불평하고 원망하고 직장에서 부딪히며 인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죽었다가 살아나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결심을 했습니다. 기회있는데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결심이라야 실천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렸다 는 말은 영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죽었다가 살아난 자처럼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기도생활 하십시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복음을 전하십시오.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희미하게 살 수 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머뭇거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있는 예배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전부를 불사르는 제사로
그 다음에 제사 중에 제일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9절에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정보를 단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
번제 드리는 장면을 한번 연상해 봅시다. 제일먼저 번제의 제물을 불태울 나무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올리브 기름을 붓는다고 했습니다. 제물을 그 위에 올려놓고 불태웁니다. 그래서 그 불타는 제물이 향기를 피웁니다. 제물을 불태울 때 일어나는 그 향기가 여호와가 우리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제물을 완전히 불사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예배의 메시지 안에 가장 강조되는 대목입니다. 제사를 드리더라도 전부를 불살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에 땔감 나무로 불을 지피면서 살았습니다. 장작이 우리 뒤뜰에 항상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이 산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집보다 장작이 많았습니다. 그냥 노천에다가 장작을 재놓고는 거기 소나무 가지 얹어놓고 짚을 얹어놓아 비를 피합니다. 그러나 장마가 지면 물이 스며들어서 장작이 젖습니다. 그런 물기 있는 장작을 가지고 또 사용해야 됩니다. 연탄이나 가스 같은 대체 연료가 없기 때문에 물기가 있다 해서 불을 안지피면 밥을 못해 먹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다 알지만 나무는 완전히 불타야 장작이 활활 타서 열이 높은 것입니다. 장작이 물기가 있어서 불이 붙었다가 꺼졌다 하면 장작이 완전하게 타지 않습니다. 결국은 다 타지 않고 남게 됩니다. 그러면 부엌이 지저분해 집니다.
물기 있는 장작으로 불을 피우면 타지도 않을 뿐더러 연기가 독합니다. 활활 붙는 불에서 나는 연기는 향기가 납니다. 연기라고 다 매운 게 아닙니다. 장작이 활활 탈 때 나는 연기는 별로 맵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물기 젖은 땔감이 불 탈 때는 그 독성이 연소가 안되기 때문에 눈에 들어가면 따갑고 아픕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전부를 불사르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깨끗하게 전부를 불살라 드리기 바랍니다. 타다가 남은 장작개비처럼 지저분하게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도 남지 않고 깨끗이 연소해버린 장작개비처럼 번제물이 여호와께 전부를 불살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찌꺼기가 내일도 걸리고 모레도 걸리는 생활로 살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애가 깨끗하게 불살라지는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남자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산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죽은 애인을 못잊는 러브 스토리입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은 완전하게 죽은 자로 보내야 됩니다. 죽었는데 산 사람에게 걸쳐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왜 자꾸 걸치고 삽니까? 인생이 끝나면 깨끗이 불타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내 생애가 전소되어 버려야 합니다. 자손을 괴롭히면 안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런 원리로 해야 됩니다. 내가 일을 했는데 찌꺼기가 자꾸 남아서 뒤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도록 그렇게 일하지 마십시오. 전부를 불살라 버리십시오.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타다 남은 게 있으면 안됩니다. 전부를 불살라 드리는 신앙생활은 크게 하느냐 작게 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조그만한 봉사라도 깨끗하게 전부를 불살라서 봉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십니다. 전부를 불사르지 않으면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제물이 깨끗하게 타지 않으면 향기가 나는 게 아니라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의 임종 장면을 묵상해 봅시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임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두 마디 기도만 하면 임종을 합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임종기도가 무슨 뜻입니까? 다 내가 불살라 여호와께 드려졌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받으시기에 다 불살라진 제물이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그것은 완전히 불살라진 인생이라야 됩니다. 지저분한 것을 땅위에 남겨두고는 그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애 전부를 불사르는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