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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이성과 감정의 고통
복잡한 일이 있으면 머리가 아픕니다. 무언가 꼬여있는 일을 대하고 있노라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픕니다. 심한 경우에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는 말도 합니다. 시험문제를 앞에 두고 있으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문제들은 머리로 풀어야 하나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는 ‘이성’의 상징처럼 되어 있을 겁니다. 냉철한 이성은 머리에서 나옵니다. 머리가 좋다는 말에는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죠.
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떠나가거나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가슴이 아픕니다. 만약 불쌍한 이를 보고 머리가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가난을 해결해 줘야 하는 정치인이나 관리가 아닐까요? 사랑을 하면서 머리가 아픈 경우는 양다리를 걸쳤거나 돈이나 지위를 먼저 생각할 때가 아닐까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심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합니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저절로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보면 저절로 가슴이 아려 옵니다. 이것은 자동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가슴’은 저절로 일어나는 반응이기에 ‘따뜻함’의 상징이 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생각을 옮기는 것이 참 어렵다는 어떤 분의 말씀이 뜻 깊게 다가옵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옮겨오는 것은 더 어렵다는 말을 그 때 그 분은 덧붙였습니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행동의 차이를 보여주는 귀한 비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머리의 힘보다는 가슴의 힘을 믿습니다. 머리는 거짓을 행할 수 있지만, 가슴은 거짓을 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척 있어도 가슴이 떨려 옴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요? 잘못한 일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고,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뻔히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것은 다 머리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머리의 판단을 믿지 말고 내 가슴이라는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면 가슴이 아파 올 것입니다. 저는 가슴이 아파야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배가 아픈 것은 질투와도 관련이 되나 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거나 하면 배가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배알이 꼬인다’, ‘장이 뒤틀린다’라는 표현도 쓰는데 아마도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다른 이가 이루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장을 경직시키는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배가 아픈 것’은 별로 아름다운 아픔은 아닙니다.
아픈 일에는 치료의 방법도 있어야 할 겁니다. 머리가 아픈 것은 그 일이 해결 되면 그야말로 씻은 듯이 낫게 됩니다. 문제가 풀렸을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가슴이 아픈 것은 해결이 좀 어렵습니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경우가 많고, 어떤 경우에는 부끄러운 일을 회개하거나 속죄하는 행동을 해야 해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말 ‘아프다’와 관련된 표현들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겁니다. 새삼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결심을 해 봅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
한국인들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가능하면 좋게 해석하려고 한다. 우리말을 들여다보면 그런 태도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액땜’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분명히 안 좋은 일인데도 더 나쁜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 생긴 일이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참으로 긍정적인 민족이다. 무조건 액땜이라고 생각하면 나쁜 일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예방주사의 역할을 하는 거다. 내가 지금 아픈 것도, 내가 지금 실패한 것도 다 건강과 더 큰 성공을 위해서 생긴 일이다. 맞는 말이다. 이 아픔과 실패를 교훈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단순히 재수 없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간극은 한없이 넓다.
사고가 났을 때 병문안을 온 사람이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말을 한다. 다행이라는 말은 행운이라는 뜻인데 사고가 난 사람에게 행운이라니 어색한 표현처럼 보인다.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현 상태에 만족하라는 말이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사고로 죽다가 살아난 사람에게 ‘다행’이라는 말은 좀 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말 속에서 우리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더 다치지 않아서 고맙고, 너무 심하지 않아서 고맙고,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이 아닌가.
아픈 사람에게는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엎어졌을 때 쉽게 좌절한다. 빨리 뛰어가야 앞 사람을 잡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한다. 땅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넘어졌을 때조차 아쉬워하지 말고 쉬었다 가라고 우리말은 충고하고 있다. 아픈 거야 어쩔 수 없으니 이때 쉬면서 몸을 보충하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가 아픈 것은 그동안 쉬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병은 쉼 없이 달려온 인생에 주의를 주는 신호등 역할을 한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꼭 의사들은 요즘 바빴냐고 묻는다. 피곤한 일이 많았냐고 묻는다. 신경 쓸 일이 많았냐는 질문도 덧붙인다. 당연한 질문처럼 여겨지지만 맞는 질문이기도 하다. 삶의 리듬이 깨어지면 병이 난다. 이럴 때는 쉬어야 한다.
병에 대한 의사의 해결책도 단순하다. 좀 쉬란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란다. 많은 병이 면역 결핍에서 비롯된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곧 병으로 이어진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면 면역력이 약해진다. 이럴 때는 쉬는 게 약이다. 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피는 게 약이다. 그래서인지 아프면 가족 생각이 많이 난다. 부모님 생각이 나고 아내나 남편이 생각나고, 자식들이 생각난다. 그래서 혼자 타지에 있을 때 아프면 더욱 서럽다. 쉬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 날 수도 있다. 우리 몸은 여러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종종은 아픈 게 고맙다.
우리말 속에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다. 긍정의 힘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강요하는 말투도 아니다.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말들을 살펴보면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무엇이든 불만스러워 해서는 살 수가 없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 하는 불평으로는 병을 이겨낼 수 없다. 누구한테나 일어나는 일이고, 나에게 더 큰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보여주는 신호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힘들수록 쉬어 가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엎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 삶을 다시 되돌아보라. 어차피 엎어진 사람은 일어날 일만 남아있지 않은가.
최근 한동안 좀 바빴다. 몸에서 금방 신호가 왔다. 전보다는 신호가 길게 나타났고 강했다. 며칠 간 몸이 좋지 않았다. 왠지 깊이 가라앉는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 들려온 표현이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였다. 좀 쉬어야겠다.
장끼와 까투리의 숨은 모습
‘꿩’ 보기가 참 어렵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산에는 꿩이 많았다. 꿩을 잡아오는 아저씨들도 볼 수 있었다. ‘꿩 먹고 알 먹고’ 라는 속담이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지 생각해 보라. 꿩은 그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였다. ‘꿩고기’라는 말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꿩은 우리의 음식 이름이기도 했다.
매는 주로 꿩 사냥을 위해서 필요한 새였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도 그래서 나왔다. 이북의 냉면에는 꿩고기가 들어간다. 생각해 보면 ‘매’나 ‘솔개’도 이제는 잘 안 보이는 새가 되었다.
새의 이름이 따로 있고, 암컷과 수컷의 이름이 따로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다. 영어의 닭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치킨(chicken)과 콕(cock), 헨(hen)이 닭, 수탉, 암탉을 나타낸다. 우리말에서는 ‘꿩’이 그렇다. 수꿩은 ‘장끼’라고 하고 암꿩은 ‘까투리’라고 한다.
모든 동물의 이름이 이와 같이 구별되어 있다면 머리가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외국인들이 아예 한국어 배우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꿩의 이름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복잡함이 걱정스러움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꿩’이라는 이름은 꿩의 울음소리 즉, 의성어와 관계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꿩의 소리가 ‘꿩’하고 나기 때문이란다. 의성어란 게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들어서 그렇게 들리는 경우도 많다. 개구리는 정말 ‘개굴개굴’ 하는가? 귀뚜라미는 정말 ‘귀뚤귀뚤’ 하는가? 꿩 소리도 ‘꿩’이 아닐까 하고 들으면 그렇게 들린다. 많은 의성어를 떠올려 보라.
장끼와 까투리의 어원을 생각해 보면서 예전에 서정범 선생님께 어학을 배울 때 생각이 났다.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었나 보다. 오늘 설명하는 ‘장끼와 까투리’의 어원은 선생님의 말씀이 내 생각을 맴돌아 나온 것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제 글에는 제 생각인지 선생님 말씀인지 구별이 안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그 때 그냥 웃으셨다. 선생님 생각을 하며 글을 쓰는 오늘의 행복이 고맙다.
‘장끼’는 ‘장 + 끼’의 구조로 되어 있다. ‘장’은 사내라는 뜻이고 ‘끼’는 새라는 뜻으로 보인다. 비둘기, 갈매기의 ‘기’도 새의 의미를 가진 접사로 보인다. ‘기’가 들어가는 새 이름을 더 찾아보시라. ‘까투리’는 ‘갓+두리’의 구조로 볼 수 있다. ‘갓’은 암컷의 의미이고, ‘두리’는 새의 의미가 된다. ‘가시’가 여자의 의미이므로 ‘갓’은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가시내, 가시집(처갓집), 가시아버지(장인), 가시버시(부부)’ 등에서 ‘갓’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두리’는 일본어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도리(tori)’가 ‘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어 새 이름에는 한국어 ‘새’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까마귀의 일본어는 ‘가라스(karasu)’이다. 여기에서 ‘스’를 ‘새’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우리말의 속담이나 표현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이 보인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새이고, 잘 먹지 않는 고기가 되었지만 예전에 꿩은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있었다. 속담이나 표현에 꿩이 많이 등장하는 것과 꿩의 명칭이 세 개로 나뉘는 것을 보면 미루어 알 수 있다. 주변의 단어를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나랏님 욕도 한다
이 글의 제목만 보고 혹시 정치적인 글이 아닐까 생각했다면 의도치 않게 꼬인 셈이 되었다. 정치하고는 상관없는 글임을 밝혀둔다.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어른들은 늘 대통령 욕을 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대통령 욕은 술자리 단골 메뉴였다. 독재정권이든, 문민정부든, 국민의 정부든, 참여정부든 간에 별로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대가 지날수록 욕이 많아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통령마다 욕먹을 일이 있었기도 했겠지만 안 보는 데서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 구석에 있었던 듯하다. 아마도 대통령 앞이라면 절대로 안 했을 가능성이 높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재미있게 본 서양 영화중에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라는 게 있다. 다른 여자가 생각하는 것이 모두 귀에 들린다는 황당한 소재의 영화였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런 바람들이 이 영화의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남의 마음을 엿듣는 일이 처음에는 즐거운 일이었다. 원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사 주거나 해 주면 그 사람을 쉽게 기쁘게 할 수 있다. 상대의 마음에 드는 일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야말로 환심을 사기에 딱 좋다. 그러나 마음을 읽는다는 것에는 부정적인 생각도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나에 대한 험담도 들려온다. 내 가족에 관한 이야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도 들려온다. 귀를 막고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 사람의 부정적인 생각이 귀에 들린다. 상사를 욕하기도 하고, 엉큼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청순해 보이는 사람이 음란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던 사람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섭섭함이나 배신감은 허탈함을 넘는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안 보이는 데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는 속담은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의미처럼 이야기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서 ‘용서’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를 100% 좋아하기는 힘들다. 어떤 경우에는 그게 부모자식 간이어도 100%는 안 된다. 부모도 자식을 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식도, 부부간에도, 형제 자매간에도,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도 욕을 할 수도 있다. 100%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서운해 할 일은 아니다. 99% 좋아하는 사이에서도 1%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게 사람 사이다.
우리는 우연찮게 누군가가 내 험담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나에 대한 험담을 몰래 전해 주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믿었던 사람에 대한 서운함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복수심에 불타기도 한다. 어떻게 나를 욕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용서가 안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게 한다. 내가 뒤에서 누구의 험담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점이 싫은 것은 아니다. 또 어떨 때는 그저 다른 사람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멀어지는 장면을 보면 이런 작은 오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나를 존경한다고 하던 사람이 뒤에서 나를 흉본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를 내게 되고, 안 보게 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리 내 욕을 한 이가 자기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도 용서가 안 된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나를 좋게 보지 않는 마음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용서해야 한다. 안 보는 데서는 나랏님도 욕한다지 않는가? 우리가 나랏님 정도도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욕을 해라
‘욕’은 모욕적(侮辱的)인 말이다. 한국어에 욕이 발달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경우도 있는데 욕에도 발달이라는 말을 써야하는지는 좀 씁쓸하다. 남을 모욕하는 말이 점점 진화하여 발달하였다고 표현하는 게 과연 좋은가? 다만 욕에 해당하는 표현이 많은지 적은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가능하리라 본다.
한국어는 욕이 많은 언어냐고 묻는다면 아마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라는 말이 나쁜 의미로 쓰이지 않을 정도로 욕은 우리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기도 한다. 욕은 분명 모욕적인 말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기도 한다. 욕은 그저 언어의 윤활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어의 감칠맛을 욕에서 찾는 이가 있을 정도다. 한국어 표현에 ‘욕먹어도 싸다’라든지 ‘욕먹을 짓을 한다.’는 표현이 있어서 욕을 하는 행위가 매우 일반적임도 보여주고 있다.
욕은 음성적 행위여서 귀로 듣는 것이 일반적일 듯한데, 욕을 ‘먹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이 욕을 먹는다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하긴 한국 사람이 먹는 게 어디 욕뿐인가? 마음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귀도 먹고, 애도 먹고, 심지어 화장도 먹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보통 먹었다고 표현할 때는 몸속에 스며들어 와 있음을 의미한다. 듣는 것보다는 깊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한 귀로 들은 것은 한 귀로 흘러 보내도 될 것 같은데, 먹은 것은 우리 속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한국어의 욕을 보면 다양한 주제로 표현되고 있다. 학자들은 일본어와 대조하여 한국어에는 욕이 많은데 일본어에는 욕이 적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욕은 표현의 방식이기 때문에 언어에 따라 욕의 수나 종류가 다를 수 있다. 물론 욕이 많다고 해서 인성(人性)이 거칠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정확한 상관성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욕은 잘 안하지만 생각과 행동이 거친 사람도 많다. 반면에 욕은 자주 하지만 정이 많은 사람도 있다.
욕의 내용을 보면 듣는 이가 가장 기분 나쁠 만한 이야기를 주로 소재로 삼는다. 욕에 가족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님을 욕하면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서로 욕을 하다가 살인까지 이르렀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욕은 극도의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또한 욕에는 종교적인 내용도 많다. 사실 종교적인 욕은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신의 저주를 받으라느니, 지옥에나 떨어지라느니 하는 말은 종교에서는 금기시되는 말이다. 신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신을 들먹이면서 협박까지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라는 종교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굳이 신을 언급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축복할 때여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에는 ‘차라리 욕을 해라’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이 표현이 참 재미있다. 사람들은 욕이 나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욕보다 더 나쁜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욕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고 하는 말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온갖 미사여구를 썼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쁜 경우가 있다. 욕은 하지 않았지만 비꼬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욕이 아닌 말이 오히려 상처를 깊게 남기기도 한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쌓아두었다가 기어이 분노의 행동으로 폭발해 버리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인이 화가 많은 민족이라는 말도 있는 데 어찌 보면 화가 많은 사람들은 욕을 담아두고 사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욕을 한바탕 하고’ 나니 시원해졌다는 사람도 있고,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욕이든 욕이 아니든 간에 담아둔 화가 폭발하여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아마도 ‘배고픔’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배고픈 것은 자신이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옆에 있는 가족이 배고픈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심지어 죽음과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굶어죽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도 배고픔의 엄중함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 속담에는 배고픔과 관련된 것이 여러 가지 있다. 그 중에서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의 경우에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 오해가 발생하는 듯하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사흘을 굶게 되면 도둑질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사흘을 굶었다고 도둑질 하는 것이 잘 하는 일인가? 분명 잘못 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런 속담을 사용하는 것일까?
나는 이 속담을 들을 대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속담은 도둑질하는 사람이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도둑질하는 사람이 이야기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속담이다. 이 속담은 나라를 책임진 사람, 마을을 책임진 사람, 배고픈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들어야 하는 이야기고, 하여야 하는 이야기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윤리 의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 남의 집 담을 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내 아이가 굶고 있다면 어떡할까? 내 가족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면 어떡할까? 아마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사흘 굶으면 안 나는 생각이 없다.’는 속담도 그래서 생긴 것이리라.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막아야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흘 굶으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선택을 할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따라서 나라나 마을을 책임진 사람이라면 최소한 사흘은 굶지 않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우리들도 주변에 굶는 사람은 없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굶주림이 범죄가 되지 않는다. 범죄의 원인에는 나라가 자리하는 경우도 많다. 조금만 미리 보살폈다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수 있다.
나는 궁극적으로 이 속담은 ‘복지(福祉)’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사흘 굶었다고 남의 담을 넘는 사람을 정당화하기 위한 속담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둑질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사람이 굶어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막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속담을 보면서 ‘먹는 복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이 속담도 참 어렵다. 가난을 나랏님도 구제 못하면 누가 한다는 말인가? 왕도 대통령도 구하지 못할 가난은 무엇일까? 물난리나 큰 가뭄이 든다면 왕도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물론 잘 대비하여야겠지만 왕이 신이 아닌 이상 가난을 막기는 힘들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나라에 의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나라마저 가난을 해결하는 데 아무 일도 못한다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가난이 든 것 자체는 나랏님이 어찌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성이 굶지 않도록 노력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굶고 있는데, 누구의 배는 부르고 누구의 곳간은 차고 넘쳐서는 안 된다. 한쪽에서는 풍악이 울리고, 한쪽에서는 곡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백성이 사흘 굶어서 남의 담을 넘는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가 아니다.
나다와 들다
우리말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의 사고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며칠 동안 저는 계속 ‘나다’와 ‘들다’라는 단어에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나다’는 ‘나가다’의 의미와 ‘생기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들다’는 ‘들어오다’의 의미입니다. 나다와 들다가 합쳐진 단어로는 ‘나들이’가 있습니다. 주로 외출이나 소풍을 의미할 때 쓰는 말입니다. 외출(外出)이라고 할 때 한자로는 ‘나가다’의 ‘출(出)’만 있는데, 나들이의 경우에는 나갔다가 들어온다고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늘 나갈 때 들어올 것을 염두에 둡니다. 이미 지적한 분들이 있지만,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갔다 올게, 잘 갔다 와’ 등의 표현에서 정겨움이 느껴지는 것은 항상 돌아옴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언어에는 이와 같은 인사표현이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나다’와 ‘들다’는 반대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말들을 잘 들여다보면 한국인의 사고를 알 수 있습니다. 나다와 들다가 쓰이는 예로는 우선 ‘생각이 나다’와 ‘생각이 들다’가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나는 것’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고, ‘드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했을 때나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들은 ‘생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났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나서 느낌이 생기는 것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라는 표현에서는 외부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나다와 들다가 정확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병’에 관한 표현을 볼 때입니다. 병은 나기도 하고, 들기도 합니다. 병이 나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요? 병이 드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요? ‘향수병’이나 ‘상사병’은 병이 나는 것입니다. 누구를 너무 그리워하여 내 속에서 생기는 병이 상사병이 아닌가요? 한편 ‘전염병’이나 ‘감기’는 병이 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고되게 했을 때, 자기 능력 이상으로 일을 했을 때 ‘병이 났다’고도 합니다. 병이 나는 것은 어찌 보면 자기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몸의 한계를 지키지 못해 생기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저러다 병 나겠네!’하고 걱정하는 말은 항상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병이 드는 것은 외부의 요인이지만, 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일은 나에게 달린 것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항상 손발을 청결히 하고,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들다’가 쓰이는 장면이 참 많은데, 우리의 사고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물이 들다’라고 표현하고, ‘철이 들다’라고 표현합니다. ‘단풍이 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나뭇잎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색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햇살과 바람과 비를 만나면서 서서히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철이 드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모름지기 사람은 계절이 바뀌면 계절이 바뀌는 대로, 그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리 살지 않으면 철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병이 나고 드는 것도 철을 모르고 한 일 때문일 것입니다. 철 모르고 하는 행동들은 다 후회가 되는 법입니다. ‘철’은 순리대로 사는 법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나다와 들다가 나오는 표현들을 만나면, 왜 그런 표현들을 쓰게 되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것입니다. ‘잠이 들다, 마음에 들다, 힘이 들다, 정신이 들다’ 등의 표현은 왜 그렇게 쓰게 되었을까요? ‘빛이 나다, 맛나다, 힘이 나다, 기운이 나다’ 등은 왜 그렇게 쓰게 되었을까요? 궁금증을 한 아름 안겨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