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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부산불교신도회관 6층 대법당에서 열린 부산불교거사림회 928회 대중법회에서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스님(영축총림 통도사 반야암)이 ‘발심수행’에 대해 법문하고 있다. 스님은 “삼천대천세계에서 칠보나 금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발심하는 공덕이 낫다”는 대목을 소개하면서 ‘발심’의 중요성을 풀어나갔다. |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는 사람이 곧 법왕자
‘부처님이 되려는 보살’과
같다고 했습니다
세속의 즐거운 낙을 버리면
성인처럼 신뢰받고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내면
부처님처럼 존경받을 수 있어
원효스님은 수행을
입산수도에 한정하지 않아
발심만 잘되면 세속에서도
도를 닦을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 놓았습니다
선행을 부지런히 닦고
욕락에 휩쓸리지 말며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감당하며
은혜를 베푸는 보시행을 닦으면
그것이 곧 보살의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장수 대중법회인 부산불교거사림회 정기 대중법회가 928회를 맞아 지난 11일 부산불교신도회관 6층 대법당에서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지난 1972년 7월31일 창립돼 41년간 지속된 부산불교거사림회 대중법회에서 상임지도법사인 지안스님은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인용해 발심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불교를 만나는 인연은 아주 귀하다. 인연에는 흔한 인연이 있고 귀한 인연이 있다.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스치고 지나간 것을 예로부터 500생의 인연이 있어서 만난다고 했다. 과거 500생 동안 왔다 갔다 한 인연이 있어서 옷깃을 스칠 정도로 가까이 하게 된 것이다. 이보다 깊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같이 와서 법당에 앉아서 같은 자리에 앉아 법회를 여는 것이다. 원래 세속 인연은 1만생을 안 넘어 간다. 그런데 불법을 만나는 인연은 만생 인연이라 해서, 세속인연보다 불법을 만난 인연이 깊고 소중하다. 그런 불교가 내게 소중하고 귀한 인연이라서 절실하게 느껴지고, 더없이 필요한 가르침이라는 자각심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불교는 시작하는 마음이고 항상 시작하는 종교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을 발심(發心)이라 한다. 마음을 낸다는 ‘발심공덕’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삼천대천세계에서 칠보(七寶)나 금을 남에게 보시하는 공덕보다 발심하는 공덕이 낫다’고 했다.
세간의 인연은 잘못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좋아도 나중에 좋지 않을 수 있으나, 불법의 인연은 나쁘게 되는 것이 없고 좋은 쪽으로만 전개돼 간다. 정신세계를 개척하는데 있어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원효스님은 사상가로서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가장 세계만방에 떨치는 역할을 했다. 당나라의 석학들이 중국에 가지도 않았던 원효스님 글을 인용하고 칭송했다. 행수법장 화엄학 완성자로 평가되며, 최고의 학덕과 수행을 갖춘 법사이다.
‘발심하여 수행하라’는 의미의 ‘발심수행장’ 첫머리는 ‘부처와 중생은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이 다르다’는 의미로 시작된다. 원문은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를 명료하게 제시한다. 곧 ‘모든 부처가 적멸궁(寂滅宮)을 장엄한 것은 오랜 겁을 두고 인용하고 고행한 탓이고, 중생마다 불난 집을 윤회하는 것(於多劫海)은 한량없는 세상을 살아오며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捨欲苦行)’이란 어귀로 시작된다.
그렇다고 마음이 원칙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원래 부처의 길과 중생의 길은 똑같은 마음에서 일으키지만, 일어나는 의지의 방향만이 다를 뿐이라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발심수행자에게는 세속의 욕락(欲樂)이 도(道)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일어날 수 있다. 다만 중생은 ‘불난 집 문(火宅門)’을 윤회하면서 한량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서 ‘불난 집’은 <법화경>의 ‘중생이 윤회하며 세 가지 세계가 편치 못한 것은 불난 집과 같다(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서 인용해 삼계윤회고(三界輪回苦)를 말하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출가의 정신이 초지일관하는 살아있는 자세가 우선이다. 원효스님은 그것을 ‘번뇌의 집을 벗어나 열반의 성(城)으로 가고자 하는 굳건한 의지를 세워 물러남이 없는 수행의 행보를 꾸준히 계속해 나아가는 것’이라 말했다.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이를 ‘무유악도(無誘惡道)에 다왕입자(多往入者)는 사사오욕(四蛇五欲)으로 위망심보(爲妄心寶)니라’고 썼다. 그 의미로는 꾀지 않은 악도에 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네 마리 독사와 다섯 가지 욕락으로 진심이 아닌 망심의 보배를 삼았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여기서 ‘사사(四蛇)’란 사람의 신체를 구성하는 네 요소인 지.수.화.풍을 말하고, ‘오욕(五欲)’은 재욕 색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 다섯 가지로서, 이 오욕을 추구하다가 악업을 지어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고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원효스님은 수행을 반드시 입산수도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애욕에 빠져 입산수도를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발심만 잘되면 세속에서도 도를 닦을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 놓았다. 선행을 부지런히 닦고 욕락에 휩쓸리지 말며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서 은혜를 베푸는 보시행을 닦으면 그것이 곧 보살의 삶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발심수행장’에서는 이를 ‘세속의 즐거운 낙을 버리면(自樂能捨) 성인처럼 신뢰받고(信敬如聖),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내면(難行能行) 부처님처럼 존경받을 수 있다(尊重如佛)’라고 표현하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는 사람은 법왕자와 같다’고 말했다. 법왕자(法王子)란 ‘부처님이 되려는 보살’이란 의미이다.
출가사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모든 애착을 떠난 이를 사문이라 하고, 세속을 연연하면 출가라 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더구나 ‘도인이 연정을 품는 것’을 두고 ‘고슴도치가 쥐 집에 들어가는 격(蝟入鼠宮)’이라 힐난했다.
재능과 학식이 높으면서 수행에 게으른 경우에 대해서도 적절한 표현으로 압축 표현했다. ‘재주와 학식은 있으나 계행이 없는 사람을 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려해도 그가 일어나서 가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며, ‘행(行)과 지혜를 갖추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나를 이롭게 하면서도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라 표현했다. 여기서 대승의 수행이 가야할 방향이 분명해진다. 대승 수행은 독선적 자리에 치중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나와 남을 동시에 이롭게 하는 완전한 덕행, 곧 완덕(完德)이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가 공양물을 받는 것과 계를 지키는 것의 ‘상의상관’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원효스님은 ‘계를 파하고 남의 복전이 되려는 것은 날개 꺾인 새가 거북이를 업고 공중을 나는 것’이라며 ‘나의 죄를 벗어버리지 못하면 남의 죄를 사할 수가 없으니, 어찌 계를 지켜 수행하지 않고도 남의 공양 사주를 받을 수 있는가’라고 수행을 강조했다.
원효스님은 수행자란 긴 세월의 괴로움을 참고 살고 욕락을 등지고 살아야 한다고 거듭 말하며, 그 마음이 깨끗하면 하늘이 함께 칭찬하지만 도인이 색(色)을 그리워하면 수행을 도와주는 선신(善神)들이 떠나버린다고 표현했다. 선신이란 수행을 도와주는 역할의 신이다. 그 반대가 마군(魔軍)으로 흔히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이다.
이처럼 수행을 강조한 원효스님의 표현을 직접 인용하면 ‘도 닦는 이가 탐심을 가지는 것은 수행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이고, 출가한 사람이 부를 누리는 것은 군자의 비웃음거리’라고 한다. 특히 스님은 ‘부서진 수레는 가지 못하는 법이며, 늙어지면 수행하기 어려운데 누워서 게으름을 내고 앉아서 어지러운 생각만 일으키는구나’라며 미루지 말고 수행을 게을리 말 것을 당부했다. 사람은 제때하지 않은 일 때문에 나중에 가서 후회하는 일이 많다. 그 때 내가 왜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던가 하는 후회는 게으른 사람들의 상투적인 후회이다. 좋은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 것이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는 말이 있다. 시간의 진행을 따라 통과하는 것이 무상(無常)의 소식이고, 그것은 결국 업에 묶이는 윤회의 사슬이 된다. 이를 명확히 표현해 온 선사의 게송이 있다.
‘삼계유여급정륜(三戒猶如汲井輪) 백천만겁역미진(百千萬劫歷微塵)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해석하면 ‘삼계가 마치 물 긷는 두레박 같고/ 백천만겁을 미진수 만큼 지내왔으니/ 이 몸을 금생을 향해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하리오’라는 의미이다. 중생이 윤회하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오르내리는 것이 옛날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 사용하던 두레박과 같이 백천만겁을 지내오면서 가는 먼지의 숫자만큼 많은 생을 윤회해왔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이렇게 오래 윤회 속에 살아온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가지라는 법문이다.
옛날 인도 수행자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상을 느끼고 수행을 했다고 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때 남은 생애에서 몇 번의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다는 의미다. 무상은 산스크리트어 아니탸(Anitya)를 번역한 말로, 이 세상 모든 것이 생멸 변화하여 상주하는 현상이 없음을 말한다.
수행자는 무상을 뛰어넘어 영원한 것을 찾는 자이다. 또 수행자는 고행을 감당하는 인욕 정신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도 500생을 인욕 정신으로 살았다는 이야기가 <금강경>에 나오는 것처럼 참지 못하면 수행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부처가 되기 위한 일념으로 관능적인 자극을 피하고 세상의 욕락을 버릴 때 수행자로서의 위신이 갖춰지게 된다. 그렇게 수행자는 육신의 무상함과 함께 세월의 무상함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불교신문2923호/2013년6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