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죽음
1902년, 방에 피워둔 난로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1898년 6월, 드레퓌스의 재심진행이 결정되자 망명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후 졸라는 마지막 편지 《공화국 대통령 무슈 루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간첩조작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한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을 피력했다. 그 후 그는 자택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다. 훗날 암살자가 붙잡히는데 그는 굴뚝 청소부였고 누군가의 지시로 굴뚝을 막아 놓았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연을 끊고 지내던 세잔느에게 전해지자 통곡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졸라의 장례식에는 수만명의 군중들이 몰렸다. 특히 광부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혈 앞을 돌면서 “제르미날!”(졸라의 소설 제목-제르미날은 광산촌의 노동자이다.)을 연호한 것은 노동자들이 이 위대한 리얼리스트에게 품고 있던 경의를 나타낸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졸라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에밀 졸라의 생애는 1938년에 제작한 미국의 전기 영화 ‘에밀 졸라의 생애’가 유명하다.
그의 죽음은 예수회에 의하였다는 의혹과, 굴툭 청소부가 누구의 청탁으로 죽였다는 등의 이야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민감한 시기에 죽었기 때문이다.
1908년에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인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