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 고자검(高自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官軍)을 모았다.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도록 했다.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과 의논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종사관에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양대박(楊大樸),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양희적(楊希迪)을 각각 임명했다.그리고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梁山璹)·곽현(郭玄)으로 하여금 서해를 경유해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담양을 출발해 북상을 개시했다.
의병군이 태인에 이르렀을 때,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고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금구(金溝)·임피(臨陂)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했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楊大樹)에게 전마(戰馬)를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해 고인후에게 수백 명을 인솔하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해,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했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이곳에서 고종후·고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발송했다.
27일 은진에 도달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황간·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당초의 북상 계획을 변경, 7월 1일연산(連山)으로 회군했다.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荊江)을 건너 합세해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한 뒤, 9일 진산을 경유해 금산에 도착,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했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10일 곽영과 합세해 왜적과 대회전을 시도하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로 선제 공격을 했는데, 왜적은 먼저 약한 관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에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했으며,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고경명은 후퇴해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체를 수렴해 금산 산중에 매장했으며, 10월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고, 그 뒤 장성의 오동촌(梧桐村)에 이장했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白仁傑)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 고경명을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뒤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유집(遺集), 무등산 기행문인 『서석록(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의병장, 제봉 고 경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