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실학 풍경(1) :
경학(經學)과 강경(講經) 사이
이 경 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
역사용어 이전의 실학
우리에게 익숙한 실학은 18세기 전후 학자들의 실용적이고 개혁적인 학문이다. 실학자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 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들은 실학이란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실학자’, ‘실학파’란 말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사실 실학은 20세기 초에 정인보를 비롯한 국학자들이 ‘조선후기에 경세, 실용, 실천을 중시했던 학자들의 학문’으로 계보화한 근대의 역사용어이다.
그렇다면 역사용어 이전의 실학이란 말은 어떠했을까? 실학은 원래 ‘진실한 학문’ 또는 ‘실질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보편적인 뜻이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쓰였다. 비록 용례가 많지는 않지만 옛 중국의 문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학을 학문 개념으로 제법 정형화해서 쓴 이들은 성리학자들이었다. 정이(程頤)의 《중용》에 대한 평이다.
“이 편은 공자의 문하에서 전수한 심법(心法)이다. … 처음에는 일리(一理)를 말하고 중간에는 흩어져 만사(萬事)가 되었다가 끝에는 다시 합하여 일리가 되었다. 풀어놓으면 상하사방[六合]에 가득차고 거두면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다.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 실학(實學)이다.”
정이의 이 말은 주희(朱熹)가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인용하였다. 《중용장구》는 조선시대 유학자라면 거의 암기하다시피 할 정도였으니, 조선의 대부분 유학자들은 실학이란 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실학은 《중용》과 같은 유교 경전에 대한 공부 또는 성리학 자체였다. 우리는 실학을 조선 후기 ‘탈(脫)성리학의 학문’으로 쓰고 있는데, 정작 조선시대에는 실학이 유학-성리학이었으니, 지금과는 사뭇 다른 실학의 전사(前史)가 있었던 셈이다.
실학의 등장
한국의 문헌에서 실학은 고려 후기의 유학자 이제현(1287~1367)이 충선왕에게 올린 건의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도 나온다. 대체로 실학을 진흥시켜 사회 기풍을 혁신하고, 당시 폐단이 많았던 불교를 반대하자는 의미로 쓰였다. 실학은 성리학의 의미로 등장한 것이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실학은 또 다른 의미를 확보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에 기반한 국가 시스템 마련이 중요했다. 교육과 관료 선발과 관련해서 성균관을 비롯한 학교가 설립되고 과거 제도가 정비되었다. 그 무렵 실학은 한층 구체적인 의미가 되었다. 1452년 단종 즉위년에 중국 사신 진둔(陳鈍)이 성균관에 들러 유생에게 경서를 시험 보는 장면이다.
- 성균관 유생 김석통 : “사서(四書)와 《시경》, 《서경》, 《주역》, 《춘추》, 《통감》을 읽겠습니다.”
- 진둔 : “너무 많지 않은가?”
- 병조참판 이변 : “모두 실학(實學)이니, 많은 것이 아닙니다. 대인이 강(講)하면 곧 알 것입니다.”
(《단종실록》 즉위년 8월 23일)
성균관 유생 김석통은 중국 사신에게 사서, 경전, 역사서 어느 것이나 좋다고 자신만만해했다. 진둔이 오히려 난감해 하는 듯하다. 병조참판 이변도 거들고 나섰다. 그는 텍스트들이 ‘모두 실학[皆實學]’이라고 했다. 이 때 실학은 유교 경전 또는 경전에 대한 공부 즉 경학(經學)이었다. 그리고 경전에 대한 시험이었으니, 과거에서 경학을 공부한 인재를 뽑는 강경(講經)이기도 했다.
경학 ≒ 강경
경학이 실학이고, 강경도 실학이었다. ‘경학-실학’이 중요했으므로 과거에서 ‘강경-실학’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지금 우리가 교육의 목표로 ‘인간됨’을 내걸지만 현실에서 입시 공부가 대세가 되는 것하고 비슷했다. 시간이 흐르자 강경 준비자들은, 원론적인 경학 공부보다는 합격을 위한 암기에 매달리게 되었다.
강경-실학의 폐단이 생기자 이를 두고 경학-실학의 본지를 망각했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었다. 중종 대에 조광조 등이 과거를 개혁하려 할 때도 그 논리에 기반했다. 1517년(중종 13) 중종이 조광조와 나눈 말이다.
“삼대(三代)의 학문은 다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인데, 후세에는 입으로만 외울 뿐이니 누가 인륜을 밝히는 것을 알겠는가? 학문을 하되 인륜을 밝히는 것을 알면 이것이 실학(實學)이다.” (《중종실록》 13년 7월 27일)
삼대의 학문 즉 경학 공부의 취지를 망각한 강경 공부를 비판하고, 경학 공부를 충실히 한 선비를 뽑자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마침내 1518년에 현량과(賢良科)가 실시되었다. 강경-실학을 비판하고 경학-실학의 취지를 살린 것이다.
하지만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 등은 숙청되었다. 기존의 강경-실학을 지지하는 측에서 현량과 즉 경학-실학을 비판하고 나섰다. 기묘사화를 주도하였던 남곤이 1520년에 한 발언이다.
“오늘날의 유학자는 스스로 이치를 탐구한다며 책을 펼쳐 묵시(默視)하고 구두(口讀)하는 학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고원한 의론에만 힘쓰고 실학(實學)을 일삼지 않기에 이렇습니다.” (《중종실록》 15년 5월 15일)
이번에는 공수(攻守)가 역전되었다. 남곤은 이치를 탐구한다는 경학-실학이 고원한 이론에만 힘쓰고, 강경-실학 공부를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였다.
성리학으로 등장했던 실학은 ‘경학-실학’과 ‘강경-실학’을 사이에 두고 일종의 공론장까지 형성했던 것이다. ‘진실한 학문’을 둘러싼 논란 한편에서 실학은 점차 일상에서도 쓰는 말로 굳어졌다.
(다음에 계속)
▷ 실학은 원래 ‘진실한 학문’ 또는 ‘실질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보편적인 뜻이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쓰였다.
▷ 정작 조선시대에는 실학이 유학-성리학이었으니, 지금과는 사뭇 다른 실학의 전사(前史)가 있었던 셈이다.
▷ 실학은 유교 경전 또는 경전에 대한 공부 즉 경학(經學)이었다. 그리고 과거(시험)에서 경학을 공부한 인재를 뽑는 강경(講經)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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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 경 구
- 한림대학교 교수, 한림과학원장
[주요 저서]
『조선후기 안동김문 연구』(2007),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2009),
『조선 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2013),
『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20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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