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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섰는데 들리는 소리.
홍삼: 엄마, 자전거 아저씨야.
홍연 모: 으잉? 뭐라고 했음.
뒤채에서 당황한 얼굴로 튀어나온 이는 홍연 모.
손수건으로 시퍼런 눈 쭉을 얼른 가리며 고개 숙이는 수하.
홍연 모: 아이고, 선상님! 이 먼 데까지 오시게 해서 어쩐다지미. 글쎄, 어찌된 영문인지 에미나이래 아무리 나무래도 말을 듣지 않음매. 왜 도대체 별안간 핵교를 그만두겠다는 것인지. 속상해 콱 죽어버리고 싶은 거이……. 이 어찌 하면 좋을지.
수하: 홍연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홍연 모: (욕지거리라도 튀어나올 듯 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아이, 방금 전까지도 여깄었는데……. 이, 이, 에미나이래 어데 갔지비?
언제 나와 섰던지 홍일이가 씩 웃으며.
지만: 뒤안에 숨었대요.
하고 홍삼 이와 물총싸움을 한다.
홍연 모: 으이, 이 망할 것이! 선상님이 오셔 는데 숨긴 왜 숨지비! 선상님! 그 에미나이 핵교에서 뭔일 저질렀음?
수하: 아뇨!
홍연 모: 아 그런데 왜 핵교를 아니 다닐라 그러지요? 망할 에미나이래 공연히 어미 속 썩이려고 그러나! 선상님이 좀 팡팡 두들겨줍세!
뒤꼍을 향해 돌아서는 홍연 모.
홍연 모: 홍연아. 선상님 오셨다!
수하: 제가 한 번 가보죠.
씬 78. 홍연네 뒤꼍/같은 시각.
슬금슬금 뒤꼍으로 들어서는 수하.
그 뒤로 순철 이와 홍연 모가 따라 온다.
홍연 이는 빨갛게 익어 가는 앵두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로 땅바닥을 긁적이고 있다.
홍연에게 다가가는 수하.
수하: (다가서) 홍연아! 뭐하니?
홍연,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수하, 짐짓 조금 엄한 목소리로.
수하: 윤 홍연! 왜 이틀씩이나 무단결석을 했지?
여전히 죽은 벌레처럼 꼼짝도 앉는 홍연.
홍연 모: (몸 둘 바를 몰라) 아니 저, 저……. 저 버르장머리 봅세…….
약간 긴장된 얼굴로 곁에서 지켜보고 섰던 순철이가 갑자기 키하고 웃자, 홍일, 홍삼과 몇몇 뒤따라온 동네 아이들도 한켠에 붙어 서서 킬킬 웃어댄다.
수하: (아이들을 돌아보며)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거라. (홍연 모에게 나지막하게) 미안하지만 홍연이 어머님도 좀 자리를 비켜 주세요. 둘이서 얘기를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홍연 모: 예, 예! (홍연 모, 아이들을 몰고 앞마당 쪽으로 돌아 나가다 홍연 쪽을 눈 흘겨 보며) 선상님! 그 에미나이래 말 안 들으면 쾅쾅 늘씬하게 두들겨 줍세! 날래날래 갑세. 날래날래가.
홍연 이는 여전히 꼼짝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았다.
수하: 홍연아!
홍연: …….
수하: 고개 들어봐. 선생님이 이렇게 일부러 집까지 찾아왔는데 대답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그런 법이 어딨어? 어머니가 너 말 안 듣거든 쾅쾅.
그제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쳐들고, 손수건으로 한눈을 가리고 선 수하를 치켜 올려다보는 홍연.
수하: (소리) 두들겨주라 그런 거 들었지?
홍연: (약간 놀란 얼굴로) …….
수하: (빙그레 미소 지으며 옆에 쪼그려 앉으며) 하지만 선생님이 홍연일 때릴 턱이 있나……. (다정히) 홍연아?
홍연: …….
수하: 학교에 안 나오면 쓰나. 어제 오늘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어디가 아픈가, 무슨 사고가 생겼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라.
순간 홍연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며 두 눈에 눈물이 어른거린다.
수하, 웃기려는 듯 손수건으로 가렸던 시퍼런 눈두덩을 드러내면.
홍연: (입 가리고 웃음을 참느라) 흐흐흐…….
수하 일어선다.
수하: 그럼 내일부턴 학교 잘 나오는 걸로 알고 선생님은 간다. 홍연이가 없으면 어쩐지 허전한 게 ('아차' 하고 말머리 돌리며) 야, 앵두가 참 탐스럽게 열렸다.
돌아서서 가는 수하. 생기가 도는 얼굴로 살포시 일어서는 홍연.
씬 79. 홍연네 마을 어귀/황혼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전거로 언덕길을 오르는 수하.
그 뒤 멀리, 동구 밖 콩밭 머리에서 지켜보고 선 홍연.
수하가 한번 뒤돌아보자, 얼른 콩밭 사이로 숨듯이 주저앉아버리는 홍연.
씩 웃고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을 주어 석양이 붉게 물드는 언덕길을 넘어가는 수하.
씬 80. 수하 하숙집 마당/낮.
마당 우물가에서 풋것을 씻는 상주 댁.
노래를 하는 상주 댁.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
운동복 차림으로 대문을 들어서던 수하, 방문 앞에 놓인 하얀 보시기를 들추면 빨갛게 익은 앵두가 소복이 담겨 있다.
그릇에 담겨 있는 앵두.
상주 댁: (소리) 어떤 여학생이 놓고 갔어예.
마당 우물가에서 풋것을 씻던.
상주 댁: 이름이 뭐고, 몇 학년 몇 반이고 물어싸도 대답도 않고 그저 웃기만 하던데, 마 큼 각시같대예.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수하: 예.
하, 미소를 지으며 앵두 하나를 소중히 집어 들고 입속에 집어넣는다.
씬 81. 학교 우물가/늦은 오후.
땀과 흙이 범벅이 된 얼굴로 두레박을 길어 올리는 수하.
인기척에 돌아보면 양동이를 든 홍연이가 수줍게 웃고는 좀 멋쩍은 표정으로 수하의 옆에 선다.
수하: 지난 번 앵두……. 잘 받았다.
히히 웃던 홍연, 수하가 두레박을 바닥에 내리고 쪼그리고 앉자 재빨리 두레박을 집어 든다.
수하, 홍조 띤 얼굴의 홍연을 잠시 바라보다 두 손을 내밀면 조금씩 물을 부어주는 홍연.
물로 북북 얼굴을 문지르는 수하.
세수를 마치자 재빨리 손수건을 내미는 홍연.
하, 잠시 망설이다 홍연의 손수건을 받아 얼굴의 물기를 닦는다.
홍연 살짝 미소를 머금고 우물물을 길어 올려 양동이를 가득 물을 채운다.
다가서며.
수하: 자, 나하고 같이 들고 가자!
홍연: (손을 내저으며) 아녜요, 저 혼자 들고 갈대요!
수하: 혼자 들면 무겁잖아!
홍연: 괜찮아요. 선생님.
서로 밀치다 자연스럽게 손길이 맞닿은 수하와 홍연.
얼굴이 빨개져 얼른 손을 뒤로 거두는 홍연.
멋쩍은 표정으로 양동이 한쪽을 쥐고.
수하: 들어, 자 어서 들어. 가자.
쑥스러운 듯 주위를 힐금 돌아보고 양동이 한쪽을 쥐는 홍연.
두 사람 함께 양동이를 들고 교실을 향해 간다. 교실 가까이 이르자.
홍연: (속삭이듯) 선생님, 이제 이거 놓으세요, 저 혼자 들고 갈께요. 남들이 봐요!
수하: 보면 어때서?
홍연: 싫어요!
헛웃음을 웃고 양동이 한쪽을 내려놓는 수하.
안가고 그냥 버텨선 홍연을 의아해 쳐다보자.
홍연: 선생님 먼저 가세요!
수하: 허 참!
수하, 하는 수 없이 혼자 가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낑낑대며 혼자 양동이를 들고 오던 홍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듯 얼른 손을 놓고 꼼짝 않고 섰다.
씬 82. 읍내/늦은 오후.
약장수를 겸한 유랑극단 선전패가 나팔을 불며 돌아다니고, 그 뒤를 줄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아이들.
"~여러분을 모시고자 합니다. 자 아주머님들은 손수건 준비하시고~"
씬 83. 수하 하숙방/초저녁.
허밍을 해가며 오선지에 음표를 메꾸어가는 수하, 맘에 들지 않는지 계속 악보를 고친다.
들려오는 확성기의 유행가와 나팔 소리에 잠시 펜을 내려놓고 어둑어둑해지는 창밖을 내다보다 시각을 확인하고 허전한 얼굴을 한다.
느릿느릿 일어서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수하.
발을 걷어 밖을 보는 수하.
일찌감치 저녁을 챙겨 먹은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나팔 소리가 들리는 학교 운동장을 향해 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된 듯 확성기 소기 멎고, 운동장 쪽에선 이따금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터지기도 한다.
씬 84. 운동장/초저녁.
관객들 너머 보이는 무대 위의 피에로.
무대 위.칼춤.
무대 위.
불 쇼 "와 와" 거리는 관객들.
구경꾼들 뒤에 와 서는 수하.
무대 위에서 떠드는 단장.
염소 똥에다 설탕물을 섞어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 파는 사기꾼 약장수도 아니요,
백옥같이 흰 살결을 소발바닥 처럼 갈라놓는 엉터리 동동구리 장수도 아닌, 바로 눈물과 웃음의…….
연기하는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
낙랑공주: 왕자님, 도망간들 부모님들의 전쟁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각한 표정의 관객들.
무대 위의 싸우는 무사들.
사람들 뒤에서 구경하는 수하.
북을 찢는 무대 위의 낙랑공주.
무대 위에서는 낙랑공주가 북을 찢고 있고 수하는 아는 이의 눈에라도 띄면 체면이라도 깎일까 봐.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씬 85. 운동장 구석의 놀이터/같은 시각.
영감이 막 솟구치는 대음악가라도 된 듯 팔짱을 끼고 명상에 잠겨 운동장을 빠져나오던 수하, 벤치에 혼자 앉은 여학생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다가가며.
수하: 거기 누구야?
정물처럼 가만히 앉은 여학생.
수하, 홍연임을 알아보고 반색을 한다.
수하: 아니, 홍연이 아니냐?
홍연의 앞에 와 서는 수하.
홍연: (일어서 꾸벅 머리 조아리며) 선생님, 안녕하셔요!
수하: 아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홍연: (고개 숙인 채) …….
수하: 연극 구경하러 왔느냐?
홍연: …….
수하: 무섭지도 않니? 여기 혼자 이렇게 앉아서…….
홍연: …….
수하: 응, 홍연아?
홍연: 안 무서워요…….
수하: 그래? 앉거라.
수하, 홍연의 옆에 나란히 앉자, 홍연, 수하의 얼굴을 살짝 쳐다본다.
수하는 멀리 환하게 붉을 밝힌 무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홍연: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며) 히힉…….
수줍어하는 한편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숨을 한번 크게 내쉬는 홍연.
그때 운동장 쪽에서 다시 와.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수하: (그 웃음소리에 덩달아 미소 짓더니) 야! 달이 참 밝아서 좋다!
달.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수하: 홍연이 너 혹시 누구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홍연, 얼른 눈길을 돌려 고개를 숙인다. 대답을 기다리다가) 아니야?
홍연, 수하를 가볍게 흘겨보다 다시 고개 숙이고 쿡쿡 웃는다.
수하: 아니 왜 웃는 거야?
정말 몰라서 그러냐는 듯 야릇한 표정으로.
홍연: 선생님 바보!
다시 쿡쿡 웃는 홍연.
그러나 의외로 수하가 아무 대꾸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문득 웃음을 멈추고 땅바닥에 시선을 꽂은 채 꼼짝 않는 홍연.
홍연을 바라보던 수하, 차츰 숨결이 더워지며 두 눈에 열기가 돈다.
수하의 시선에 긴장하는 홍연.
슬그머니 궁둥이를 홍연 쪽으로 움직이는 수하.
잠시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데, 갑자기 비명과 함께 자기 뺨을 때리는 수하.
깜짝 놀라 쳐다보는 홍연.
수하: 이 놈의 모기가…….
홍연: 깜짝이야. 난 또……. 모기 가지고……. 호호호!
수하: 그놈의 모기 엄청 크네.
홍연: 고거 쌤통 이예요!
수하: (눈을 크게 뜨고) 뭐야, 쌤통?
순간 당황한 홍연, 수하의 기색을 살피다가, 수하가 참던 웃음을 터뜨리자, 덩달아 웃음을 터뜨리는 홍연.
마주보고 한동안 실없이 웃어대는 수하와 홍연.
나란히 앉은 수하와 홍연 너머 운동장 무대 쪽 박수치는 관객들 감미롭고 야릇하던 둘만의 분위기가 확 풀리자, 정신이 번쩍 드는 수하.
수하: (독백) 이러다 누구 눈에라도 띄면……. (기지개를 켜며 홍연에게) 이제 가서 자야겠다. 잠이 쏟아지네.
홍연: (아쉬운 듯) …….
수하: 혼자 앉았지 말고 가서 연극구경 하던가, 집에 들어가든가. 그럼 선생님은 간다.
수하 일어서 간다.
건들건들 걸음을 옮겨가던 수하, 미심쩍어 뒤돌아보면 홍연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았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겨 걷는 수하.
씬 86. 운동장/오후.
"~청군이겨라, 백군이겨라,~" 만국기 날리며 북소리가 드높고, 운동장 한쪽의 장사치들.
상대편 박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
본부석에 앉아 구경을 하는 정 주사 등등.
콩 주머니를 던져서 박을 터뜨리는 아이들.
흰 박이 터지자 환호하는 아이들 달리기 준비하는 홍연, 난희, 강주 등.
황 교장: (소리) 준비.
'탕'
하는 총소리 들리면 출발선에 서 있던 홍연, 강주 등의 5학년 여학생들.
일제히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는 여학생들.
달려오는 여학생들.
넘어지는 한 여학생.
코너트랙을 도는 여학생들.
트랙에 마련된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펼치면.
쪽지 "엄마와 함께 달리기"
쪽지 "최 헌몽 선생님과 달리기"
쪽지를 들고 제각기 흩어지는 아이들.
난희는 돌을 주워든다.
홍연, 근처에서 행사 진행 중인 수하의 팔을 재빨리 낚아채 달린다.
수하를 끌고 뛰어가는 홍연.
달리는 수하와 홍연.
수하와 홍연, 결승선에 선 은희와 유 선생 앞으로 조 선생 팀을 간발의 차로 앞질러 1등으로 들어온다.
1등 도장이 찍히는 쪽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수하, 홍연.
은희: 잘했어 홍연아.
쪽지를 확인한 유 선생, 홍연에게 꿀밤을 먹이며,
유 선생: 이런…….
쪽지 "교장 선생님과 함께 달리기"
줄다리기를 하는 수하, 은희, 아이들 청군.
줄다기리극 하는 유 선생, 조 선생, 아이들 백군.
줄다리기 하는 청군.
난희는 반대로 줄을 당기고 있다.
다리기 하는 청군과 백군의 모습.
만국기 사이로 보이는 본관 교사.
씬 87. 교무실/낮.
하모니카로 '메기의 추억'을 불고 있는 은희 뒤에 수하가 몰래 듣고 서 있다가 연주가 끝이 나자 박수를 친다.
은희: (놀란 눈으로 돌아보며) 어머, 강 선생님!
수하: (짐짓) 양 선생님, 일요일에 어쩐 일이세요?
은희: 저, 일직이에요. 그러는 강 선생님이야말로…….
수하: 네, 저, 그러니까…….
거꾸로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수하: 아! 여깄었구나! 이걸 한참 재밌게 읽던 차에 제가 그냥.
<교무행정원론> 책 표지.
수하: (소리) 두고 갔지 뭡니까.
<교무행정 원론>이란 책표지에 어이없어하며.
은희: 그런 책이 무어 그리 재밌대요?
뒤늦게 책표지를 보고 '아차' 싶지만.
수하: 왜요, 이거 그래도 읽다 보면은요 재미있어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부끄럽지만 제가 곡을 하나 써봤거든요.
풍금 쪽으로 가는 수하.
자작곡을 연주하며 간주 부분에 힐금 양 선생 쪽을 돌아보면 양 선생 조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연주를 감상하던 은희, 일어선다.
연주하는 수하의 뒤에 다가서는 은희.
풍금 치는 수하의 옆에 앉아 같이 연주하는 은희.
수하의 자작곡에서 자연스럽게 '젓가락 행진곡'으로 넘어간다.
연주하는 건반위의 손가락.
풍금을 연주하는 수하와 은희의 뒷모습.
페달을 밟는 두 사람의 발.
씬 88. 5-1반 (수하의 상상)/오후.
환경미화 정리하던 수하, 돌아보면 커튼을 들고 들어오는 은희.
커튼을 다는 수하와 은희.
왈츠를 추는 수하와 은희.
풍금을 치는 수하와 은희.
곡이 끝나자 상상에서 깨어나는 수하.
일어서려는 은희의 팔을 붙잡는.
수하: 아니, 한 곡만 더…….
양 선생 맨살의 탱탱한 촉감에 그만 얼굴이 괜히 벌겋게 달아오르고 콧김이 뜨거워지는 수하.
당황해 양 뺨에 홍조를 띤 양 선생.
은희: (팔을 빼려고 애쓰며) 저 강 선생님…….
수하: (팔을 꽉 붙들고) 아니, 양 선생님……. 저는 그냥…….
그때 키득키득하는 웃음소리가 운동장 창문 쪽에서 들려온다.
수하와 양 선생 놀라 돌아보니, 여섯 정도의 아이들이 창문턱에 까치발을 하고 붙어 서서 훔쳐보다가 얼른 달아난다.
깜짝 놀란 양 선생 와락 수하를 밀치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의자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빠지는 두 사람.
씬 89. 숙직실/오후.
나른한 표정으로 목침을 베고 침상에 누워 기지개를 길게 켜며 하품을 하는 수하.
스르르 눈을 감는데 귀를 파고드는 계집아이들의 키득대는 목소리.
아이1: (소리) 너희 담임하고 강수하하고 연애하는 거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수하 눈을 번쩍 뜨고, 계속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아이들 목소리.
아이2: (소리) 일요일날 학교 나와서 교무실 지켜보려무나.
아이3: (소리) 그러면 연애하는 거 볼 수 있을까? 이번에도 또 불끈 안을라나?
아이4: (소리) 히히히! 정말 불끈 안았대?
아이2: (소리) 그랬대! 둘이 풍금 치면서 노랠 하다가 강수하가 너네 담임을 뒤에서 불끈 안더래!
얼굴이 노랗게 질려 침상에서 일어나 앉는 수하.
발 사이로 훔쳐보는 수하 너머 아래쪽 나무그늘 아래 모여 앉아 공기놀이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1: (소리) 그런데 왜 뒤에서 안지? 안으려면.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
멀리 숙직실 문 입구에 내려진 발 사이 훔쳐보는 수하.
아이1: 이렇게 (제스처 흉내 내) 앞에서 안아야 진짜 연애가 되지. 그지?
수하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
아이3: (소리) 맞아. 앞에서 안아야 입도 맞추고…….
박장대소하는 계집애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안절부절못하는 수하.
아이1: 우리…….
수하 시접으로 보이는 아이들.
아이1: 이번 일요일 정말 학교에 와볼까?
아이2: 그럴래?
아이3: 그러자!
발 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하.
아이4: (소리) 난 도시락 싸오란다. 도시락 까먹으면서 하루 종일 지켜 볼란다.
아이3: (소리) 나도 싸올게!
아이1: (소리) 히히히, 나도!
아이2: (소리) 나도!
발을 거머쥐었다가 뒤로 돌아섰다 갈팡질팡하는 수하.
순간 발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수하.
뜻밖에 숙직실의 수하를 발견하고 "옴마야" 일제히 흩어져 달아나는 계집아이들.
씬 90. 5-1반 교실/낮.
부지런히 시험지를 메워가는 순철 등의 연필 긁적이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멀쩡한 얼굴로 뒷짐 지고 건들건들 책상 사이를 걸어 다니는 수하.
시험지는 건성으로 놓고 의심 가득한 얼굴로 수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뜯어보는 홍연.
수하가 옆을 지나치면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다가도, 돌아서면 재빨리 시험지에 고개를 묻는 강주, 범수, 범호 등.
씬 91. 화장실/낮.
급히 바지춤을 열고 소변을 보던 수하, 눈에 들어오는 크게 휘갈겨 쓴 낙서들.
낙서.
안았네, 안았네, 뒤에서 안았네.
'강 수하 + 양 은희 = 아이새끼' 등등…….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하는 수하.
급히 바지춤을 여미고 화장실 안을 구석구석 누비며 깨알같이 써진 낙서들을 일일이 살피며 낯이 붉어지는 수하.
주위를 재빨리 살피고 구두 한쪽을 벗어 든 수하 구두바닥에 침을 '퇘퇘' 뱉더니.
지워지는 낙서.
'강 수하 + 양 은희 = 아이새끼' 라는 문구에서 '강 수하' 쪽을 구두바닥으로 박박 문질러 지운다.
수하, 허둥지둥 빠져나가다 문득 멈춰 선다.
다시 재빨리 되돌아와 이번엔 낙서 문구에 남은 '양 은희' 쪽을 막 지운다.
지워지는 낙서 '양 은희'
갑자기, 인기척에 놀라 동작을 멈추면.
조 명구 선생이 대변 칸에서 나온다.
수하, 깨금발로 서서 구두한쪽을 툭툭 털곤, 뚱해서 쳐다보는 조 선생 곁을 스쳐 재빨리 나간다.
홍연: (소리) 양 은희선생을 뒤에서 안았다는 게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선생님은 바보야. 바보. 바보. 정말 보기 싫고 밉기만한 바보멍텅구리야.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노처녀라는 것을 모르시는 걸까?
씬 92. 복도/오후.
실습교재(주판)을 안고 낑낑대며 가던 홍연, 앞에서 다가오는 은희에 외면하며 옆으로 비켜선다.
머리 쓰다듬어주며.
은희: 무겁지 않아?
지나가는 은희의 터질 듯 한 가슴이 눈에 꽉 차게 들어오자, 자신의 가슴을 슬쩍 내려다보는 홍연.
홍연: (소리) 호적상으로는 스물다섯 살이라고 하지만 내 보기에는 스물일곱이나 여덟 살은 틀림없이 된 것 같다. 선생님은 스물 하나니까 일곱이나 여덟 살 더 먹었다. 그렇게 늙은 여자를 뒤에서 불끈 안 다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고 속이 상해 죽겠다. 선생님 바보 멍텅구리, 바보, 바보…….
씬 93. 수하 하숙방/저녁.
헛웃음을 웃으며 홍연의 일기를 읽는 수하.
홍연: (소리) 오늘 보니까 양은희 선생님은 입술에 루주를 꽤 짙게 칠하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얼굴에 분도 더 바른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다 되어가는 노처녀 선생님이 화장을 그렇게 짙게 할게 뭐람. 그렇게 짙게 한다고 더 젊어지나. 정말 꼴불견이셨다. 자기보다 열 살 쯤이나 적은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하다니, 같잖고 아니꼽다.
씬 94. 5-1반 교실/낮.
창 너머 복도로 고개를 곧추 세운 은희가 지나가자, 교단 위의 수하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곁눈질로 은희를 쫓고.
자리의 홍연은 수하를 주시하며 연필을 깨물어 씹는다.
강주, 은근히 홍연을 꼬집고.
홍연: (소리) 설마 열 살이나 밑인 선생님하고 결혼할 생각은 아니겠지? 결혼은 자기보다 서너 살 위의 남자와 하는 것이 마땅하지, 열 살 가까이나 아래의 남자와 하려는 건 말도 안 된다. 선생님도 그 점은 잘 아시고 계시겠지. 설마 열 살이나 더 먹은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시겠지?
씬 95. 교무실 앞 복도/퇴근 무렵.
창밖에서 홀로 교무실 복도 쪽을 지켜보고 선 홍연.
한 둘씩 교무실을 나와 신발장에서 자기 신발을 찾아 들고 교사 밖으로 빠져나가는 교직원들.
마침내 은희가 모습을 드러내자 홍연, 뭔가 기대에 부푼 표정을 하는데.
은희, 실내화를 신발장에 넣고 자기 신발을 찾아들고 사라지자.
홍연, 뜨악한 표정으로 감춘 구두 한 켤레를 들여다보다 놀란 표정으로 창문에 붙어 선다.
어느새 나타난 유 선생, 신발장의 신발을 죄다 꺼내 엉클어 놓고 난리다.
영문 모르는 조 선생과 급사, 유 선생의 신경질을 받으며 함께 신발장을 뒤지느라 진땀 뺀다.
유 선생: 미자야, 너 내 신발 치웠니.
미자: 아니요. 이거 아녜요.
유 선생: 아우 그게 얼마나 비싼 구둔데.
흥분해서 부르르 떠는 유 선생.
홍연, '엄마야' 재빨리 구두를 내던지고 꽁지가 빠져라 달아난다.
홍연: (소리) 화장을 짙게 한 양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난 기분이 나빠진다. 왜 우리 학교로 오게 돼서 야단일까. 서른 살이 다 되도록 시집도 안 가고서 말이다. 보기 싫게…….
씬 96. 교사 앞/잠시 후.
맨발의 유 선생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낑낑대며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조 선생.
나무 뒤에서 지켜보던 홍연, 길게 숨을 뱉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씬 97. 교무실/같은 시각.
열심히 물동이를 길어 나르며 물청소 중인 강주, 두태 등 대청소로 시끌벅적.
어수선한 와중에도 책상 정리 중인 은희, '엘피수하가 제일 아끼는 판'을 손에 들고 수하 책상 쪽을 돌아보면 자리 비어있다.
은희, 잠시 망설이다, 책가지로 엘피판을 덮어놓고 자리를 일어선다.
가까이에서 건성으로 걸레질하며 은희의 동태를 유심히 살피는 두태.
씬 98. 교사 뒤편, 화장실께/잠시 후.
'수하의 엘피판 구멍에 연필을 끼워 팽이처럼 돌리며 희희낙락하는 두태와 이를 구경하는 패거리.
두태패1: 야. 나도 좀 해봐 비켜봐.
두태가 돌리던 판을 빼앗아 던지기를 하는 패거리.
판을 던지고 받으며 노는 패거리.
두태패2: 야, 나 좀 줘. 여기여기.
서로 받으려는 패거리.
패거리들에게 판을 던지는 두태.
화장실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 떨어지는 엘피판.
화장실을 청소하던 범수와 범호, 놀라 바라보고 두태 패거리 화장실 깨진 유리창을 살피다 달아난다.
음반 조각을 집어 들고 '이게 뭐야?'하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데.
최 헌몽: (소리) 어이! 니들, 그거 이리 내봐! 으이.
씬 99. 교무실/잠시 후.
교무실로 들어서던 수하.
최 헌몽: (소리) 너희 이거 뭐하는 물건인지 알아. 강 선생! 이리 좀 와 봅소! 이 이거, 강 선생 꺼 아뉴, 으이? 요걸.
수하 다가가 보면.
조각난 음반을 들어 보이는 최 헌몽과, 그 앞에 잔뜩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고 선 범수, 범호다.
최 헌몽: 요절을 냈구만, 그래.
애지중지하던 '조각난 LP음반'을 받아든 수하, 거의 넋 나간 얼굴로 범수, 범호를 쳐다보자.
최 헌몽: 요절을!
범수: 정말 우리 아녜요!
최 헌몽, 막대기로 범수와 범호를 찌르며,
최 헌몽: 뭐여? 인석들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거짓뿌렁이냐, 거짓 뿌렁이, 거짓뿌렁이.
범호: 으이씨,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그냥 땅에 떨어진 거 줏었단 말예요!
주판을 거머쥐고 범수, 범호의 머리통을 주판알로 무자비하게 문질러 대며.
비명을 지르며 머리통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이리저리 피하는 범수, 범호.
최 헌몽: 뭣이 으이씨? 으이씨. 이 거짓말쟁이 놈들, 말솜씨 좀 봐! 아구 아구.
조각난 음반을 만지작거리며 비통한 표정으로 선 수하.
유 선생과 웃음꽃을 피우며 교무실을 들어서던 은희, 소동에 다가오는데.
수하 손에 들린 조각난 음반과 범수 형제를 번갈아 보고 사태를 짐작하고.
은희: 어머, 이거 어떡하면 좋아. 죄송해요, 강 선생님! 진작 돌려드렸어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죠.
수하: (눈물을 머금고 애써 웃으며) 핫핫! 사실 이 엘핀 양 선생님께 드렸던 건데…….
머리를 문지르고 선 범수, 범호 옆에 선.
수하: (애써 웃으며) 애들을 잘못 가르친 제 탓이 크죠!
은희: 어머, 아니에요!
수하를 바라보며.
은희: 애들 눈에 안 띄게 잘 놔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머리통을 두 손으로 매만지며 앓는 소리를 내던 범수, 범호 '미치겠네.' 어쩌구하며 궁시렁거리자, 수하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지만, 오히려 원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마주보는 범수 형제.
씬 100. 복도/퇴근 무렵.
아이들 거의 빠져나가고 호젓한 복도 한가운데. 수하, 4-2반 교실 앞문께는 들여다보면 은희 혼자 남아 교실 정리 중이다.
'옳다구나'하고 수하, 막 들어서려는데, 은희에게 등기 우편 한 통을 건넨 후 도장을 받고 나오던 우체부와 마주친다.
우체부 가고 나서 보면.
은희: 수고하셨어요.
우체부: 안녕하세요.
편지를 뜯어 진지한 표정으로 읽는 은희.
망설이며 선 수하.
씬 101. 인서트/홍연네 집 전경.
홍연네 집 전경/가을 풍경.
씬 102. 홍연네 안방/이른 아침.
앞 다투어 찬합에 담긴 김밥에 손을 대는 고사리 손.
동생들의 손목을 치는 홍연의 손.
가방을 챙기던.
홍연: 그만 들 좀 먹어라! 도시락 쌀 게 없잖아.
홍연 모: 이 에미나이가, 동생들 입은 입이 애인줄 암매?
김밥을 말고, 썰고 하며 도시락에 차곡차곡 담아 넣던 홍연 모, 홍연을 도끼눈 해본다.
못 본 척 칠성사이다, 영양갱, 크림빵, 삶은 달걀, 물통 등을 륙색에 차곡차곡 챙겨 넣는 홍연.
마지막으로 새로 산 흰 운동화를 신고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모양을 살핀다.
홍연 모: 저, 저……. 안방이 무시기 운동장임매……. 날래 그 신발 벗지 못하겠음매.
홍연: 새 신인데, 뭐.
홍연 모: (손을 놓으며) 도시락 안 싸가겠음매?
하는 수 없이 신발을 벗어 들고, 쪼르르 홍연 모 옆에 쪼그리고 앉아 도시락을 들여다보다.
홍연: 엄마…….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홍연: 김밥 가지곤 좀 부족하지 않을까?
홍연 모: 선상님 점심 싸가는 게 어디 니 하나 뿐이겠음매?
홍연: 그러지 말구……. 엄마 우리 닭 한 마리만 잡자!
홍연 모: 무시기?
홍연 모, 확 밀치면 뒤로 나자빠지는 홍연.
홍연 모: 이거 소풍가는 게 아이라, 무슨 나랏님 진상 가는 줄 암매?
씬 103. 교외/아침.
화창한 날씨.
등에 짊어맨 홍연의 륙색에서 닭 우는 소리가 간간이 해어 나오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이들.
홍연, 아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간다.
황 교장, 양 주사 등을 따라 줄지어 걸어오는 산리교 아이들.
5-1반 뒤에서 동요를 부르며 지나가는 은희와 4-2반 아이들.
걷다가 미끄러지는 유 선생을 잡아주는 조 선생.
씬 104. 숲 속/낮.
숲 속에 넓게 흩어져 제각기 그림도 그리고, 글짓기도 하고 자유시간을 갖는 아이들.
그 주위를 부지런히 누비고 다니는 사진사, 아이스케키 장사치 등.
술 취한 조 선생과 양 주사,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부르고 황 교장과 유 선생은 박수치며 구경한다.
씬 105. 개울가/같은 시각.
홀로 개울가에 발 담그고 앉아 단풍잎을 띄우는 은희를 발견한 수하, 머뭇거리다 그 옆에 다가간다.
인기척에 뒤돌아본 은희의 무심한 얼굴에 쑥스러워진 수하.
수하: 저……. 땀 좀 씻을까 하고 왔어요.……. 양 선생님 계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진짭니다!
소리 죽여 웃는 은희에 수하, 제발이 저려 얼른 주저앉아 개울물에 건성으로 얼굴을 씻는다.
세수하는 수하에게.
은희: 강 선생님?
수하: 예?
은희: 저, 지난 번, 판 깨진 거…….
수하: (말을 자르며) 아, 글쎄 정말 괜찮다니까요. 뭐 그런 걸 갖고……. 참.
팔을 크게 내저어대다 몸의 균형을 잃고 자칫 물에 빠질 뻔 한 수하.
씬 106. 개울가 상류/같은 시각.
륙색에서 닭을 꺼내는 홍연의 손.
홍연, 마른 나뭇가지를 잔뜩 모아놓고 불을 피우는 강주에게 다가가서.
홍연: 너 진짜루 닭 잡아 봤지?
강주: 야,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우리 집이 식당만 10년 넘게 한 거 너 몰라? 빨리 나와 내가 잡을게.
강주에게 건네던 닭을 홍연이 놓친다.
홍연, 쫓아가면 달아나는 닭.
씬 107. 개울가/같은 시각.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수하: 저……. 양 선생님? 아이들 사이에 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미소를 머금고 얘기를 듣는 은희.
수하: 아시나요?
은희: …….
수하: 양 선생님과 나하고.
은희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말을 잇는.
수하: 연예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은희: …….
수하: 아세요, 모르세요?
은희: 알고 있어요.
수하: 전 괜찮은데. 양 선생님이 곤란하실까봐…….
은희: …….
수하: 별의 별 소문에, 화장실 낙서까지 등장했다구요.
은희: 봤어요. 저도.
수하: 그렇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죠?
덤덤하게 말을 받는.
은희: 아이들이 하는 말에 뭐 그렇게 신경 쓰세요. 그러다 제 풀에 지쳐 시들 해지겠죠, 뭐.
무안해진.
수하: (얼굴 붉히며) 그렇긴 하죠……. (건성으로) ……. 아, 왜 이렇게 덥지.
개울물에 얼굴을 씻고 또 씻는 수하를 보며 웃음을 참는 은희.
씬 108. 개울가 상류/같은 시각.
필사적으로 닭을 쫓는 홍연과 강주.
씬 109. 개울가/같은 시각.
수하, 은희 사이를 두고 앉아 흐르는 개울물을 내려다 보다 거의 동시에 서로 쳐다보고 말문을 열려다 입을 다문다.
동시에.
수하: 양 선생님 먼저…….
서로 피식 웃는 두 사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은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수하.
은희: 저……. 사실은…….
수하,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꿀떡' 침 삼키는데.
순간 계집애의 째지는 비명 소리.
놀란 수하와 은희, 일어나 비명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간다.
수하: 아니 저기!
뛰어온 수하와 은희.
은희: 홍연이 아녜요. 어머 어떡해!
다급히 개울물에 내려서려는 은희를 붙잡은 수하, 눈을 질끈 감고 엉성한 몸짓으로 개울로 뛰어든다.
용을 쓰며 홍연 이를 향해 엉성한 개헤엄으로 철푸덕대며 다가간 수하.
발을 동동 구르는 은희.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홍연에게 다가오는 수하.
안타까워하는 은희.
은희: 홍연아!
수하, 겨우 홍연을 붙잡지만 물귀신처럼 홍연이가 엉겨 붙는 통에 같이 물을 먹고 물속을 오르내리며 허우적댄다.
강주와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른다.
씬 110. 동 부근 바위 위/잠시 후.
젖은 옷을 짜서 너는 수하.
그 옆으로 닭을 안은 채 쭈그리고 앉은 홍연에게 뜨거운 물을 따라주는 은희.
은희: 큰일 날 뻔했어! 많이 놀랬지?
홍연, 의식적으로 은희의 시선을 피하며 받아든 물 잔을 수하에게 내민다.
홍연과 은희 옆으로 다가와 앉는 수하.
수하: (은희를 의식하고) 물살이 어지간히 거세야지……. 수영이라도 못했으면 아주 큰일 날 뻔 했어요.
은희: (목에 걸고 온 수건으로 홍연 닦아주며) 춥지 않니?
홍연: (슬며시 몸을 빼며) 괜찮아요.
수하: 하하하. 아무튼 고맙습니다. 양 선생님.
그런 수하와 자리를 떠날 생각도 않고 앉은 은희 모두에 못마땅한 홍연.
씬 111. 산 정상/해질녘.
기념촬영 하는 교사들.
사진사: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씬 112. 홍연네 방/저녁.
동생들과 함께 송편을 빚고 앉은 홍연 모, 혀를 차며 돌아보면.
일기장을 펼치고 앉아 창밖 나뭇가지에 걸린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넋 놓고 바라보는 홍연.
둥근 달이 환히 웃음 짓는 수하의 얼굴로 보인다.
씬 113. 수하 하숙방/저녁.
눈웃음치는 양 선생의 얼굴로 보이는 보름달.
책상 창문 너머 보름달을 넋 놓고 바라보던 수하,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고개를 내리고 하연 편지지 위에 펜을 든 손을 까불대보는 수하, 문장을 떠올리느라 고심 중이다.
수하: (독백) 전 그대를 제 목숨보다 사랑합니다. 진정입니다……. 아냐……. 양 은희씨,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제 가슴 속엔 어찌할 수 없는 사모의 정이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 (머리를 도리질하며) 아냐! 너무 노골적이야!
편지지를 구겨버리고 다시 새 편지지를 메꿔가는 수하.
책상 위로 파지가 쌓여가며 동창이 밝아온다.
씬 114. 수하 하숙집 마당/아침.
방문이 열리고 제일 아끼는 양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은 수하가 콧구멍 한쪽을 솜으로 틀어막은 채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루에 걸터앉아 구두코를 반들반들하게 닦던 수하, 문득 품에서 연애편지를 넣은 두툼한 봉투를 꺼내 만족스러운 듯 매만지면서 내려다본다.
부엌문을 나서던 상주 댁이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간다.
얼른 편지 봉투를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일어서는 수하.
씬 115. 교무실/아침.
설레이는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하.
급사: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멋있게 나왔네.
뭔가 술렁이는 듯 한 교무실 분위기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기 자리로 찾아드는데, 앞자리의 은희가 보이지 않자 두리번거리는 수하.
조 명구: 하이고! 쪽 빼입은 게.
수하를 훑어보며.
조 명구: 오늘 뭐 선이라도 보는감?
반쯤 열린 교장실 문틈으로 보이는 소파에 은희와 황 교장이 뭔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하, 신경을 곤두세우며 황 교장과 계속 얘기를 나누는 은희를 계속 힐끗거리며 살핀다.
자리에서 일어나 황 교장에게 인사하고 교장실을 걸어 나온 은희, 자리에 앉아 수하를 보고 목례를 한다.
목례를 하는 수하.
종소리가 울리자 교재를 챙겨 들고 나가는 은희와 선생들.
황 교장 교장실을 나오며.
교장: (허탈한 듯 혼잣말로) 허! 양 선생이 개인 사정으로 학굘 그만 드시겠다는 거예요.
하늘이 노래져 멍하니 서 있는 수하.
교장: (소리) 정혼한 사람하고 싼쁘란싯꼬로 유학을 떠나게 돼서 어쩔 수 없다고 그러는데…….
양 주사: 아니 일 년밖에 안됐는데.
교장: 글쎄. 학생들한테.
수하 갑자기 벌떡 일어나 급히 나간다.
씬 116. 복도/같은 시각.
수하, 4학년 2반 교실로 성큼성큼 다가가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은희, 교단에 서서 반 아이들에게 뭔가 얘기를 하고 섰다.
양 선생을 쳐다보며 주머니에 든 러브레터를 쥐었다 놨다 하며 끙끙거리는 수하.
시선에 이끌려 복도를 쳐다보는 양선생. 아이들도 일제히 수하를 쳐다본다.
은희와 아이들의 시선에 멋쩍어 한번 웃어 보이곤 수하, 걸음을 옮기는데.
교실 문을 열고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수하를 내다보는 은희.
은희 곁을 스쳐 태연한 듯 걸어가는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려 하자 이를 악물고 참는 수하.
그의 주먹 쥔 손에서 구겨지는 러브레터.
씬 117. 수하 하숙방/저녁.
술 취해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바로잡으려는 수하, 상주 댁의 부축을 받으며 방안으로 들어선다.
상주 댁: 하이고 마, 우야고, 술 냄새도 못 맡는 샌님이 술독에 빠졌다 나왔는고……. 냄새 한번 지독시럽네!
수하: 죄송합니다.
방문을 닫아주고 사라지는 상주 댁.
수하, 습관적으로 엘피판을 집어 들고 전축에 걸려고 꺼내드는데.
'조각난 판'
한쪽으로 치워놓고 딴 판을 전축에 건 후 태연스레 옷을 벗다가 문득 멈춰서는 수하.
이내 거친 몸짓으로 판을 도로 끄집어 재킷에 넣고 돌아서다 두 눈에서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다리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아 안주머너이게 구깃구깃해진 러브레트를 꺼내 들고 천천히 찢어버리던 수하, 급기야는 바닥에 엎드려 방이 떠나가라 목 놓아 울어댄다.
씬 118. 운동장/황혼녘.
떠나가는 은희의 뒷모습.
은희를 붙들고 우는 4학년 2반 아이들
창가에서 바라보는 수하의 쓸쓸한 모습.
멀어져 가는 은희.
홍연: (소리) 양 은희선생님이 사표를 내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어찌나 기쁜지 '야-!'하고 손뼉을 칠 뻔했다. 양 은희선생님은 정말 참 잘 생각하셨다. 결혼을 하면 여자는 남편을 따라가서 살림을 하는 게 옳은 일이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오늘 청소 시간에 혼자서 물을 세 양동이나 길어다가 열심히 교실을 닦고 또 닦고 했다.
씬 119. 교무실/오후.
연통에서 날리는 연기 빈 채로의 은희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앉은 수하, 건성건성 일기장을 검사한다.
교사들 난롯가에 모여 "이번 학예회엔 또 뭘 하죠" "장사 한 두 번 하나요." "우린 합창을 할까 해요" 등등 한담을 나누며 가끔 수하를 힐끗거리면.
홍연: (소리) 우리 선생님 표정을 보니 좀 화가 나신 것 같았다. 양 은희선생님이 결혼을 해서 떠나가시는데 선생님이 그런 표정을 지으실 게 뭐람. 참 우습다. 양 은희선생님은 참 예쁘고 또 좋으신 분이다. 남편과 함께 살림도 잘 하실 꺼다. 양 은희선생님의 행복을 빈다.
마치 홍연이 눈앞에라도 있는 듯 갑자기 입을 실룩거리는 수하.
수하: (독백조로) 쳇, 같잖게 수리! 아주 병 주고 약주고, 북치고 장구치구 혼자서 다 하누만!
자리에 앉던 유 선생이 눈이 휘둥그레 수하를 돌아본다.
씬 120. 5-1반 교실/황혼녘.
각자 자기가 맡은 구역 청소를 끝내고 그 앞에 서서 수하의 검사를 기다리는 5학년 1반 아이들.
홍연, 창문틀에 앉아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유리창을 닦도 또 닦고 한다.
수하: (홍연 쪽으로 점점 다가오며) 합격……. 합격……. 합격…….
수하 입에서 '합격'소리가 떨어질 때마다 '야'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가방을 싸들고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드디어 홍연 앞에 다다른 무표정한 얼굴의 수하, 잘 닦여진 유리창에는 눈길 한번 안주고 창틀 구석을 검지로 쑥 문질러보더니.
수하: (시선도 안주고) 윤 홍연……. 불합격!
너무나 억울해 눈물이 핑 도는 홍연 앞을 지나 다음 구역으로 걸음을 옮겨가는 수하.
씬 121. 5-1반 교실 앞 본관/오후.
나무 뒤에 숨어서 책상에 앉은 수하를 향해 눈뭉치를 던지는 홍연.
나무 뒤에 숨은 홍연.
창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는 수하.
씬 122. 읍내 거리/이른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
씬 123. 5-1반 교실/오후.
학예회에 쓸 의상과 각종 장식물 등을 만드느라 시끌벅적한 5-1반 교실 내.
종이에 색칠하고 헝겊 따위를 오려 붙이느라 들뜬 아이들.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작업을 거들어주는 수하.
아주 능숙하게 거북이 모자를 완성해 밝은 표정으로 머리에 써보던 홍연, 다가서던 수하와 시선이 마주치고, 둘 사이에 작은 긴장감이 감도는데.
뒷자리가 시끄럽자 고개 돌려.
범호: 빌려달라니까.
범호 짝: 싫다니까!
수하: 왜 그래?
범호 짝: 생일 선물 받은 건데 자꾸 뜨어 달래잖아요.
다가간.
수하: 너희들 하나도 준비 안 해왔어?
범수: 엄마가 빌려 쓰래서요.
둘러보다 도화지 한 장만 놓고 앉은 몽돌에게 다가가서.
수하: 넌 크레용 어쨌어?
몽돌: 성아도요. 학예회 준비한다고 뺏어갔어요.
수하: (몽돌이 짝에게) 그거 좀 같이 좀 쓰도록 해라?
몽돌의 짝: (마지못해) 네!
역시 손 놓고 앉은 몇몇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수하: (둘러보며) 준비 안 해온 사람 손 들어봐!
범수 형제 외에도 서너 명이 눈치를 살피며 손을 든다.
뒤로 돌아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드는 수하.
씬 124. 교문 앞/오후.
풀빵, 호떡 장사 등 즐비하게 늘어선 좌판들.
그 앞을 지나며 손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는 범수, 유혹을 뿌리치듯 달리기 시작한다.
씬 125. 문방구 안/오후.
한쪽에 만화방을 겸한 문방구 안으로 들어서는 범수.
콧수염의 문방구 주인이 새 만화를 꽂다 범수를 돌아본다.
문방구 주인: (돌아보며) 뭘 주랴?
씬 126. 5-1반 교실/같은 시각.
시계를 보며 창문에 붙어 서서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선 수하.
빈 범수 자리를 돌아본다.
씬 127. 문방구 안/잠시 후.
급히 안으로 들어서는 수하.
먼지떨이로 먼지를 턴던 주인이 수하를 알아보고 당황해하는 눈치다.
수하: (두리번거리며) 혹시 여기…….
문방구 주인: (돌아보며) 아구! 강 선생님 오셨어요?
깜짝 놀라 보던 만화를 뒤로 감추며 벌떡 일어선 범수.
수하, 범수 쪽으로 다가가면, 난감해 하는 문방구 주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수하, 범수의 뺨을 후려친다.
씩씩대며 노려보는 범수에 자제력을 잃은 수하.
다시 뺨을 더 세게 후려친다.
놀라는 문방구 주인.
범수, 보던 만화책과 수하가 준 지폐를 내던지고 서 있던 수하를 밀치고 번개처럼 밖으로 달아난다.
허탈한 표정으로 지폐를 바라보고 선 수하.
문방구 주인: (수하의 눈치를 살피며) 아구, 저 내가 가라가라 그랬는데, 아구.
씬 128. 5-1반 교실/같은 날 늦은 오후.
일과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칠판에서 문제를 풀던 아이들 제자리로 돌아가고.
돌아오지 않는 범수의 빈자리에 마음이 심란한 수하.
수하: 오늘 종롄 없어요. 그리고……. 범호는 교무실로 좀 오거라!
책을 덮는 아이들.
범수의 빈자리를 의식한 범호는 수하의 눈치를 살핀다.
교재를 추슬러 드는데, 복도 쪽이 시끌벅적해지더니 교실 앞문이 벌컥 열리며 범수 모가 귀를 솜뭉치로 틀어막은 범수를 이끌고 들어선다.
범수 모: (삿대질을 하며) 당최 이거 선생이야 깡패야? 놈의 집 자실을 개 패듯이 패서 귀때기를 찢어 놔? 네가 선생이야? 니가 사람이냐구?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수하.
충격에 웅성거리는 홍연과 아이들.
수하: 버, 범수 어머님! 진정하십시오! 사실이 어떻게 된 건고 아니…….
범수 모: 뭐, 진정을 해? 요런 배라먹을 화상 봤나! 놈의 자식을 반병신 만들어놓고 진정을 하라구! 진정하라구! (멱살잡이를 하며) 너두 귀병신 되고 싶어!
수하: (목이 졸려 캑캑대며) 버, 범수 어머님!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애들이 보잖습니까!
범수 모: (멱살을 흔드며) 이 화상아!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교실 앞문과 창문 밖으로 파리 떼처럼 몰려와 구경하는 옆 반 아이들.
보다 못한 몽돌 순청 등 몇이 다급히 뛰어들어 범수모를 떼어놓으려고 애를 쓰지만 끄떡도 않고 수하를 들었다 놨다 쥐고 흔드는 범수 모.
캑캑대는 수하의 앞단추와 와이셔츠 주머니 등이 볼상사납게 찢겨진다.
순간 잔뜩 독이 오른 홍연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수하의 멱살을 틀어쥔 범수 모의 팔목을 드세게 물어뜯는다.
홍연에게 팔뚝을 몰려 수하의 멱살을 놓친 범수 모,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치고, 교실 문으로 부랴부랴 들어서는 조 선생과 유 선생 이들을 붙들고 뜯어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범수, 그 통에 밖으로 뛰쳐나가고.
팔목을 물고 매달린 홍연을 쳐대는 범수 모.
씬 129. 양호실/초저녁.
찢어져 너덜거리는 옷에 얼굴과 목 등에 상처 난 수하와 얼굴 군데군데 거뭇거뭇 멍든 홍연에게 약 발라주며 혀를 차는 유 선생.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실없이 웃는 수하와 입 가리고 웃는 홍연.
유 해리: 넉살도 좋네, 웃음이 다 나오고.
홍연: …….
유 해리: 아니, 아무리 못 배워도 그렇지, 명색이 애들 담임인데 이 꼴로 만들어놔야 속이 시원한가?
수하: (침울하게) 다 제 탓인 걸요. 뭐.
씬 130. 읍내/저녁.
수하, 자전거를 끌고 오면, 말없이 그 뒤를 따라 걷는 홍연.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어색하게 웃는 수하와 홍연.
홍연,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려는데 잘 되지 앉자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길가 수풀을 툭툭 치며 간다.
그러다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문득 생각난 듯.
홍연: 저어…….
수하의 하숙집과 갈리는 길에 이른다.
수하: 오늘 나 땜에 욕봤구나.
홍연: 아니에요.
수하: 그래, 어두운데 조심해 가거라.
홍연: 저……. 선생님…….
수하: 응?
수하: …….
수하, 갈림길로 들어서려는데.
홍연: 엘, 엘프가 뭐예요?
씬 131. 수하 하숙방/저녁.
전등을 켜는 수하.
수하의 방 풍경을 가슴 벅찬 표정으로 둘러보던 홍연, 기워 신은 자신의 양말이 눈에 들어오자 얼굴을 붉히며 다른 쪽 발로 살짝 가린다.
전축으로 다가간 수하, 엘피 한 장을 재킷에서 꺼내 들며 돌아서.
수하: 엘프가 아니고 엘피라는 거야……. 여기다 놓고 틀 면은 음악이 나오는 거야.
수하, 엘피 음반을 전축에 올려놓고 음악을 튼다.
음악을 듣는 홍연의 행복한 표정.
그러나 그것과 얼 갈려서 수하의 얼굴엔 그늘이 있다.
홍연, 전축 쪽으로 다가와 한 구석에 외롭게 놓인 '조각난 음반' 재킷에 눈길을 던지며 엘피재킷을 만져본다.
수하: (소리) 응.
재킷을 집어 드는.
수하: 깨진 거야. 버린다는 게 그만…….
깨진 판을 꺼내 보는 수하.
씬 132. 홍연네 안방/휴일 한낮.
방바닥에 엎드려 '조각난 음반'의 빈 재킷을 손에 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리 뒹굴 저리뒹굴 하는 홍연에 다리미질을 하던 홍연 모 혀를 차며.
홍연: 아아. 온리유.
홍연 모: (소리) 무시기 그걸 노래라고, 돼지 멱따는 소리도 그 보단 낫지 않겠음매?
홍연 대꾸도 없이 갑자기 벌떡 앉더니 무슨 궁리에 골몰한 표정.
홍연 모: 일을 아이 돕겠으믄 공부를 하든지, 이거 눈꼴이 시러서 못 봐 주겠다. 으이.
홍연, 옷장으로 가서 고리짝 깊숙한 곳을 뒤지고 동생들을 부엌에서 가래떡을 들고 들어와 화로 가에 앉는다.
의아해 바라보는 홍연 모.
씬 133. 마을 외곽/잠시 후.
살을 에는 삭풍에 얼굴이 발개진 채 도로변을 서성이는 홍연, 어쩌다 지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지만 허탕만 친다.
홍연: 아저씨, 아저씨.
씬 134. 수하 하숙방/새벽.
책상 위에 백지 한 장 올려놓고 꼿꼿이 앉은 수하, 동창이 밝고 있다.
씬 135. 교장실/아침.
수하, 말없이 서 있고 그 앞에 교장과 사친회장 정주사가 여송연을 피우며 마주 앉아 있다.
정 주사: 어젯밤 범수엄마가 지서에서 생난리를 쳤다지 뭡니까! 당장 쇠고랑을 채워 넣어라 어쩌라 해가며!
수하: 죄송합니다.
침통하게 서 있는 수하를 바라보는 황 교장.
정 주사: (소리) 얼른 합의를 보시든지……. 여하튼 빨랑 만나 보세요.
수하: 네…….
씬 136. 5-1반 교실/오후.
잔뜩 찌푸린 하늘.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선 수하.
자습을 하는 아이들은 수하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이고 있다.
홍연은 그런 수하의 모습을 걱정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두태는 학예회 소품인 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뻐끔대는 시늉을 하며 아이들의 시선을 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범수의 빈자리를 보는 수하.
범호 혼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연필만 끄적대고 있다.
씬 137. 강당 안/오후.
5-1반 아이들은 무대 위에서 '토생전'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난희는 순철의 거북모자를 달라며 떼를 쓴다.
강주: 빌려주면 안 돼? 금방 줄게. 알았어. 알았어. 아이 난희 이쁘다.
수하, 무대 위로 올라와.
수하: 용왕이 안 보이는데……. 어디 갔지?
홍연: 용왕이면……. 두탠데…….
수하: 시종들도 안 보이고……. 어디 간 거야?
강주: 조금 전 까지 있었는데.
창문 밖에서 안을 훔쳐보는 범수.
수하, 돌아보다 창밖으로 범수가 쳐다보고 선 것을 발견한다.
수하가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자 재빨리 사라지는 범수.
수하, 곧 범수 뒤를 쫓아 밖으로 뛰어나간다.
씬 138. 무대 뒤/같은 시각.
곰방대에 성냥불로 불이 붙여진다.
용왕 분장의 두태, 긴 곰방대 구멍에 담뱃잎을 쑤셔 넣고 불을 붙여 어른 시늉으로 물고 뻐끔 담배를 피워 연기를 만들어 후 뱉다가 캑캑댄다.
시중 차림의 패거리들, 서로 한 번 빨아보자고 밀고 땡기며 소란을 피우다가 곰방대를 놓치고 만다.
두태패: 좋아? 줘봐. 이 자식들이. 싸우지마. 에이씨.
씬 139. 강당 밖/같은 시각.
주위를 맴돌며 인적을 좇는 수하,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강당 안에서 요란스러운 소음과 함께 아이들이 밖으로 뛰어나온다.
아이들: 불이야!
깜짝 놀란 수하, 연기가 새어나오는 강당 쪽으로 달려든다.
씬 140. 강당 안/같은 시각.
시뻘건 화염이 무대 뒤쪽에서 치솟는 가운데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불이야" "엄마야" 비명을 지르며 뿌연 연기 속에 우왕좌왕하는 아이들.
수하, 무대 쪽으로 날쌔게 달려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반 아이들을 밖으로 몰아댄다.
급히 달려온 교장과 교직원들, 허겁지겁 물을 길어다 불길에 퍼붓고 소화기를 뿜어대며 진화 작업을 벌이지만 점점 벽과 천장 쪽으로 옮겨 붙으며 더욱 거세어지는 불길.
씬 141. 강당 밖/같은 시각.
연기 사이로 줄줄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교직원들.
수하를 애타게 부르는 황 교장과 교직원들, 아이들.
불구경 나온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점차 커지는 무리.
강당에서 뛰어나와 지친 듯 털썩 주저앉는 수하.
수하 앞으로 급히 다가서는 순철.
순철: 선생님! 난희가 안보여요. 아직 안에 있나 봐요!
수하: 무슨 소리야? 난희야, 난희야.
수하: (둘러보며) …….
수하 주위로 빙 둘러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홍연과 5-1반 아이들.
갈등하던 수하, 온몸에 물을 끼얹고 젖은 옷으로 얼굴을 두르고 불타는 강당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하자 순간 수하의 앞을 막아서는.
홍연: 안돼요! 선생님!
수하: 나는 괜찮으니까 저리 비키렴.
수하, 홍연을 옆으로 밀치고 불똥이 마구 튀는 강당 안으로 뛰어들면, 탄성을 지르는 일동.
어느 틈에 나타나 아이들 속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범수, 주먹을 불끈 움켜쥔다.
하나…….
둘…….
셋…….
시간이 긴박하게 흐르며 불길은 점점 더 번지고 수하,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난희, 언제 나타났는지 천하 태평한 표정으로 불구경하고 섰다.
유 선생: 너 어디 갔다 왔어?
난희: 똥 누코 왔다 뭐.
유 선생: 뭐야!
홍연: (기가 막혀) …….
홍연, 어찌해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 불길로 뛰어들 기세로 강당을 바라보는데.
전육하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
씬 142. 불타는 강당 안/같은 시각.
짙은 매연과 넘실대는 화염 속에 헤매는 수하.
수하: 난희야!
씬 143. 강당 밖/같은 시각.
불을 지켜보고 섰던 범수 강당 쪽으로 뛰어 든다.
쏜살처럼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범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교내로 들어선 의용 소방대.
사람들을 헤치고 강당 앞에 이르는 소방대원들
강당 앞에 도착하는 소방 리어카.
소방리어카에서 펌프를 내리는 소방대원들.
펌프질을 하며 강당을 향해 물을 뿜어대는 소방대원들.
소방대원들, 물기둥을 퍼부으며 불길과 사투를 시작하는데.
범수 모가 미친년 꼴을 하고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범수야" 소리 지르며 헐레벌떡 나타나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 하면, 붙잡아 밖으로 끌어내려는 소방대장과 거칠게 몸싸움을 벌인다.
대장: 아이고, 죽을라고. 환장했어요?
범수 모: 이 손 놔! 내 새끼 내가 꺼집어내겠다는데 왜 지랄들이야!
검댕이 묻은 채 급히 다가오는 소방대원 하나.
소방대원: 대장님! 물이 벌써 다 떨어져갑니다.
대장: …….
넋을 놓고 선 소방대원들.
다급해진 홍연, 되는 대로 물을 길러 강당에 퍼붓는다.
바라보던 강주 등 아이들과 사람들 뛰어간다.
불길 가까이서 물을 퍼붓던 홍연을 위험하다며 끌어내는 유 선생.
유 선생, 홍연을 끌어내고 강주 등은 물 대야를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튀어 나온다.
불길에 물을 퍼붓는 사람들.
물을 나르다 엎어지는 홍연, 강당 불길 쪽을 바라보면.
씬 144. 불타는 강당 안/같은 시각.
넘실대며 달려드는 불길과 앞을 가리는 검은 연기.
꺾일 줄 모르고 더욱 거세어 가는 불길.
그 사이에서 서로 의지하고 오는 두 그림자.
이미 그림자 하나는 의식이 없는 듯.
씬 145. 강당 밖/같은 시각.
눈에 광채가 돌더니, 벌떡 일어서서 뛰어가는 홍연.
홍연, 불길 속으로 뛰어가는데, 부랴부랴 뒤쫓아 가는 홍연을 잡는 강주.
강주: 안 돼. 홍연아.
필사적으로 불 가까이 가려는 그런 홍연을 끌어내는 강주.
다른 아이들도 합세해 뒤로 질질 끌어내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홍연 고개 들어 보면 굵은 비가 온통 하늘을 뒤덮으며 내려오고 있다.
갑자기 퍼붓는 빗줄기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기뻐하며 '강 선생'을 외치는 조 선생, 유 선생
홍연을 안고 기뻐하는 강주.
범수를 부르는 범수 모.
기뻐하는 난희 등 사람들.
홍연, 범수모 등 사람들 초조하게 강당 입구 쪽을 바라본다.
순식간에 강당 불길이 사그라지는가 싶은데, 그 입구 쪽에서 기진맥진한 범수를 부축해 나오는 이는 수하다.
범수 모 달려가고, 만감이 교차하는 홍연, 다리가 풀리며 푹 주저앉더니 정신을 잃는다.
범수를 부축해 나오는 수하.
범수 모, 달려들며.
범수 모: 범수야!
범수 모, 범수를 안아들며, 수하, 몇 걸음 옮기다 쓰러지며 기절한다.
쓰러지는 수하 시점으로 보이는 기절한 홍연의 모습.
암전.
씬 146. 양호실/밤.
요란하게 코를 고며 잠자는 범수 모.
뒤척이며 고개를 돌리면 침상에 누운 수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다.
옆 침상엔 다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잠든 범수, 소파엔 홍연과 범수 모가 나란히 반쯤 누운 자세로 잠들어 있다.
자애로운 시선으로 홍연과 범수 모를 잠시 바라보던 수하, 침상 시트를 벗겨 홍연과 범수모의 몸을 덮어주고, 달빛 파고드는 창가로 다가가 찬찬히 창밖을 내다본다.
달과 별에 취한 듯 밤하늘을 바라보며 정물화처럼 선 수하.
씬 147. 산리교 교정/며칠 후.
가뜩이나 낡은 강당의 삼분의 일쯤이 검게 그을려 흉물스러운 느낌.
그 앞에 우뚝 서서 깊은 생각에 잠긴 노인은 황 교장.
그 뒤로 천천히 다가서서 인사를 하는 이는 수하.
수하, 머뭇거리다 마침내 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내드는데.
교장: (먼 산에 눈을 고정한 채) 늘상 가르치는 게 일 같지만 그러면서 실은 쉬임없이 배워가는 게 선생이란 직업이 아닌가 싶어요.
수하: …….
말을 잇는 황 교장과 그 뒤에 말없이 서 있는 수하.
황 교장: 사실 우리가 알면 뭘 얼마나 더 압니까, 세상을 좀 앞서 산다는 것 뿐이지.
수하: …….
교장: 옴니아 아모르 빈시트……. '사랑은 모든 걸 이긴다'는데……. 그 놈 하나만을 35년간 붙들고 있지만, 실상 내 말 솜씨만 번드르르해진게 아닌가 싶어요.
묵상에 잠긴 듯 선 두 사람.
눈이 내리는 운동장 전경.
씬 148. 읍내 거리/겨울에서 봄으로.
수업 마지막 날 등굣길에 오른 산리교 아이들로 점차 메워지며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읍내.
씬 149. 교무실/아침.
수하, 안으로 들어서면 최 헌몽, 양 주사 등 교직원들로 잔칫집 분위기.
인기척에 수하를 일제히 돌아보는 최 헌몽 등
최 헌몽: 아이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리 오소, 강 선생! 이리와.
수하: …….
양 풍주: 힘 좀 쓰게 생겼주! 왜냐? 함질 아비로 강 선생이 간택되얐거든!
쑥스러운 듯 나란히 서 있는 말쑥한 차림새의 유 선생과 조 선생.
수하: (소리) 함질 애배요?
조 선생과 유 선생 쑥스럽게 웃는다.
조 명구: 너무 섭섭히 생각 말아, 강 선생. 내 진작부터 털어 놓으려 그랬는데, (은근한 눈빛으로 유 선생을 응시하며) 이 사람이 하도 입막음을 시키는 바람에…….
유 해리: (전에 없이 수줍은 자태로) 어머, 이이는! 내가 언제…….
둘러선 선생들.
양 풍주: 햐아! 이 사람들, 신방도 안 치뤘는데 벌써부터 깨가 쏟아지는구먼. 깨 받아라!
최 헌몽: 아휴, 깨고 자시구 잘됐지 뭘 그려. 으이? 우리 산리 골칫거리였던 두 노친네가 함꺼번에 처분된다 싶으니, 아주 내 십년 묵은 체증이 함꺼번에 싹다 내려가는 것 아니유.
유 해리: (표독해진 얼굴로 콧김을 내뿜으며) 아니 노친네요! 최 선생님, 지금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조 명구: (만류하며) 해리씨!
최 헌몽: (딴청으로) 아니, 수업시간 다 되얐는데 여지껏 종 안치고 뭐하는 겨, 미자야, 종쳐라, 미자야.
도망치듯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최 헌몽과 돌아서서 웃음을 흘리며 흩어지는 양 주사 등.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자리로 가는 수하.
씬 150. 5-1반 교실/오후.
봄방학을 앞두고 들뜬 분위기에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문이 열리며 다소 가라앉은 표정의 수하가 교실로 들어서자 얼른 제자리를 찾아가 앉는 아이들 설레이는 얼굴의 홍연.
책상 속에 놓인 '책보로 싼 각진 물건'을 만지작거려본다.
다시 수하를 쳐다보는 홍연.
교단에 올라서서 유난스러운 눈빛으로 범수, 범호, 몽돌, 강주, 순철 등…….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한동안 말이 없는 수하.
수하의 예사롭지 않은 태도에 웅성거리던 아이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수하: (애써 밝은 음성으로) 자, 내일부터 봄방학인데 다들 좋지?
기분 좋아 히히덕거리며.
일동: (환호하며) 네!
애써 미소 지으며.
수하: 이제…….
하는데, 앞문이 드르륵 열리며 난희가 히죽 웃으며 들어서자 와 웃는 아이들.
난희 자리에 앉고 담담하게.
수하: 이제 담임선생으로 여러분들 앞에 서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은데……. 다들 좋지?
일동: (도리질하며) 아뇨. 싫어요!
수하: 이 다음에 너희들 졸업을 하고도……. 우연히 선생님 만나면 인사를 하겠느냐?
의아해 두리번거리며.
일동: 네!
책상 사이를 걸으며.
수하: 근데 여학생들은 말이야, 선생님을 만나고 그러면 부끄러워 곧잘 숨어버리고 그런다던데?
여학생들: (큰 소리로) 선생니-임!/아니예요!
수하: 그럼……. 시집을 간 뒤에도 날 만나면 인사를 할 거야?
수하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
여학생들: (서로 돌아보며 킬킬대며) 네! 할거예요.
수하: 그래, 좋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 시집 장가가고, 꼬부랑노인이 되서 날 만나도 알아보고 인사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
재밌다 는 듯 서로 돌아보며 키득거리는 아이들과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의 홍연.
씬 151. 수하 하숙집 방안/오후.
부지런히 짐을 꾸리는 수하.
상심한 얼굴로 짐 정리를 거들어주는 상주 댁.
상주 댁: 이래 훌쩍 떠나면 섭섭해서 우얄꼬!
상주 댁, 저고리 앞섶을 뒤져 봉투를 꺼내 수하에게 내민다.
수하: …….
상주 댁: 내 큰 선물은 몬하고 서울 가는 차표 한 장 샀어예.
수하, 그 소리에 눈시울 시큰해 고개 돌린다.
상주 댁: 아그마! 밥 타는 냄새 아닌가!
뛰어 나가는 상주 댁.
씬 152. 수하 하숙집 마당/오후.
문을 열고 나오던 상주 댁과 수하.
어느 틈에 문 앞에 와서 있는 홍연, 두 눈에 눈물이 그렁해서 수를 보고 있다.
상주 댁, 연기가 새어나오는 부엌 쪽으로 급히 든다.
수하: …….
홍연: (애써 웃으며) 진짜……. 가……. 세요…….
마루에 걸터앉으며.
수하: (짐짓 우스개로) 학교도 그만뒀는데 농사라도 질까?
홍연, 모로 고개를 틀고 땅바닥을 긁고…….
수하: 홍연아! 사실……. 아직 난 누굴 가르치기엔 부족한 게 많은 것 같아……. 더 많이 배워야하겠구……. 그리구…….
더 이상 속내를 감추지 못해 등 돌리고 선 홍연을 바라보는 수하.
마루에서 내려서 다가서며,
수하: 내 맘을 젤 잘 아는 게 홍연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홍연: …….
수하: 나도 아마……. 어디를 가든……. 홍연이 생각 많이 날 거야.
홍연: …….
수하: 홍연아…….
수하, 뭐라고 말하려는데 홍연, 돌아서 뛰어간다.
뛰어가며 멀어져 가는 홍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하.
파릇하니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아픔.
씬 153. 홍연네 안방/달밤.
바느질을 하며 연신 홍연 쪽을 바라보는 홍연 모.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평소와는 다른 홍연의 모습에 홍연 모, 눈치만 보는데.
홍연, 동을 돌린 채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오래도록 꼼짝 않고 있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씬 154. 5-1반 교실/달밤.
창문너머 보이는, 달빛 은은히 파고드는 텅 빈 교실 한가운데 홀로 풍금 치는 수하.
풍금 치는 수하.
수하, 반 아이들이 앉았던 책상 하나하나를 찬찬히 둘러본다.
씬 155. 마을 어귀/이른 아침.
큰 가방을 옆에 놓고 비포장 도로변에 선 수하.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지나가는 차량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찬 기운이 도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일며 수하를 휘감고 지나간다.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한 대 달려오자 재빨리 손을 흔드는 수하.
하지만 화물 트럭은 심한 흙바람을 일으키며 수하의 앞을 그대로 지나친다.
길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반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 선생님 가지마세요! 선생님! 선생님 가지 마세요!
수하에게 다가와 둘러싸는 아이들.
준비해 온 선물 꾸러미를 내미는데.
지프 한 대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손을 높이 치켜드는 수하.
수하 앞에 급정거해 서는 지프, 차창이 열리면 파이프를 문 마도로스 풍의 사내가 내다본다.
사내: 어델 가시려구?
수하: 읍내로 가서 서울행 버스를 타려구요.
사내: 하. 운 좋수, 젊은이! 마침 서울 가는 길인데 서로 말동무나 하며 갑시다. 얼른 타슈!
수하, 애틋한 눈으로 차마 말 못하고 아이들을 바라본다.
차에 탈려는 수하에게 보자기로 싼 물건을 내밀며.
강주: 선생님 이거 홍연이가요…….
받아드는 수하.
사내: 보시게! 탈 꺼야? 말꺼야?
아이들: 선생님 가지마세요. 선생님. 가지 말아요.
수하,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한번 시선을 준 후 선물꾸러미와 가방을 뒷좌석에 실고 지프에 오른다.
눈을 뜬 상연을 바라본다.
한숨을 돌리는 미소…….
주 씨 작업실 의경이 잠깐 보였다간…….
주 씨가 방으로 들어와 상연의 입에 문 체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