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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66
2월9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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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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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u0ehUP3L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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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마음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빈껍데기 일뿐입니다!>
수 십 년 전 손톱보다 작은 도움을 드렸던 분께서, 그때 일을 잊지 않으시고 정성스런 손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편지를 읽는 내내 큰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진 선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하느님 앞에 이웃 앞에 별로 한 것이 없다는 송구스런 마음에 마음이 씁쓸했었는데,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 제 마음이 순식간에 뒤바뀌더군요.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다는 마음도 들면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정성이 담긴 말 한마디, 마음과 영혼이 담긴 말 한 마디가 오늘 우리에게 더욱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말의 홍수 시대입니다. 방송이나 SNS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말들이 떠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때로 실수로 내뱉은 한 마디 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가 누군가를 깊은 구렁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입술로는 뭐든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 만에 만리장성까지 쌓을 정도입니다. 사랑한다, 노력한다, 기도한다, 믿습니다... 정말 입술로는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거기에 마음, 진실성이 담겨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사라진 언어, 영혼이 떠난 육체, 마음이 사라진 신앙, 진실성이 결여된 종교는 거짓된 신앙,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늘도 진실한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담기지 않은 미사와 전례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 감동이 사라진 신앙, 정성이 담기지 않은 전례, 그것처럼 웃기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왕 바치는 기도 지극정성으로 드려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분향 같은 제사가 될 것이며 그분께 영광과 찬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것들,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일 때마다 겉보다는 내면, 외형보다 마음을 중요시 여기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을 떠올려야겠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향한 우리의 올곧고 순수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인간의 겸손한 마음을 맞갖은 제물로 받으십니다.
미사를 집전할 때도 비슷한 체험을 많이 합니다. 세월이 흘러 연륜이 쌓이다보니 마치 프로처럼, 또는 이벤트 회사 직원처럼 미사를 집전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미사경문을 읽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습니다. 마음과 정성이 결여된 행사, 갖은 분심 속에 기계적으로 해치우는 전례행위를 보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도 합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께서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 마음은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이 홀로 설수 있도록 도와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픈 마음입니다. 결국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참 스승은 청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극진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식 같고, 친구 같고, 연인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없는 교사들은 어떻습니까? 그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급여를 받으니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대상자일 뿐입니다. 의무감에서 싫어도 대면해야할 생계의 도구일 뿐입니다. 마음이 없다보니, 마음이 가지 않다보니 자주 짜증납니다. 그의 미래에는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가 어찌되든 세월 가고,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빈껍데기 일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가 준엄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코 복음 7장 6`8절)
몸의 정결을 위해 손도 씻지만 마음도 깨끗히 씻어야겠습니다. 참회의 표현으로 옷도 찢지만, 마음을 찢고, 마음으로 울어야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한 경배를 주님께 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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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마음을 보시는 하느님>
시끌벅적 요란스런 이벤트라든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외적인 일에는 크게 혈안이 되면서도 정작 작은 일, 내면의 일, 영혼의 일은 뒷전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것도 아닌 정결예식, 그저 외출 나갔다가 귀가하면 손 씻으라는 예식에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회칠한 무덤 같은 그런 부끄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내면의 상태는 각종 비리와 죄의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한 예수님께서의 말투는 무척 날이 서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도다.”(이사야서 29장 13절)
신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마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겉치레보다 마음, 내면, 영혼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표시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기 상권 16장 7절)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장 23절)
나이 먹어갈수록 우리는 지난 세월 우리가 기를 쓰고 쌓아올린 높은 탑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대단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지니고 자신의 지난 삶을 바라보며 하느님 앞에서도 ‘이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하며 으스댑니다.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하느님께서는 외형, 성과, 업적도 중요시여기시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각자가 지니고 살아가는 진실한 마음, 거룩한 갈망, 올곧은 지향에 더 큰 방점을 찍으십니다.
사실 아무리 인간이 난다 긴다 해도 하느님의 놀라우신 업적 앞에 새 발의 피 입니다. 그래서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우리 인간 각자의 겸손한 마음인 것입니다. 바야흐로 말의 홍수 시대입니다. 방송이나 SNS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말들이 떠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때로 실수로 내뱉은 한 마디 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가 누군가를 깊은 구렁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입술로는 뭐든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 만에 만리장성까지 쌓을 정도입니다.
사랑한다, 노력한다, 기도한다, 믿습니다... 정말 입술로는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거기에 마음, 진실성이 담겨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떠난 육체, 마음이 사라진 신앙, 진실성이 결여된 종교는 거짓된 신앙,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늘도 진실한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담기지 않은 미사와 전례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제가 눈으로 봐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들, 영혼을 상실한 사람들, 심드렁한 구경꾼 같은 분들 보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이 마음은 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실까 걱정됩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 감동이 사라진 신앙, 정성이 담기지 않은 전례, 그것처럼 웃기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왕 바치는 기도 지극정성으로 드려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분향 같은 제사가 될 것이며 그분께 영광과 찬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것들,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일 때 마다 겉보다는 내면, 외형보다 마음을 중요시 여기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을 떠올려야겠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향한 우리의 올곧고 순수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인간의 겸손한 마음을 맞갖은 제물로 받으십니다. 상처 입은 마음, 크게 한풀 꺾인 우리들의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이웃을 향한 우리의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연민의 마음을 대견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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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vbEQ4C2B8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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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은 통합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시비 거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는 것이 건강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은 겉은 하느님의 율법을 따른다고는 하나 마음은 자기 욕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르면서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을 하지만 사실 자기 욕망을 따르는 이들은 남을 겉모습만으로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사람 안에 두 본성이 결국 공존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이 빛과 통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려면 인성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버리고 신성을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요즘 인간의 통합에 대해 말하며 마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자아를 통합하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의 마음 안에 이 악한 것들이 나오는 원천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 어둠으로부터 탈출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에게 요한 형제님이라는 분이 메일을 보내왔는데, 이분은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빛으로 나아오기 위해 어둠을 버리셨습니다. 이분의 사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저는 50여 년간 남부럽지 않게 가위에 눌려 고생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어둠 속에 시커먼 그림자 같은 사람이 제 가슴 위에 올라타서 누르고 있더라고요. 그때 이후로 너무 무서워서 가위가 눌리더라도 절대 눈을 뜨지 못한답니다. 저 같은 경우 언제 가위가 눌리냐면 술 진탕 먹은 다음 날 잘 때 꼭 어김없이 눌리더라고요.(술 먹은 당일은 안 눌림)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강요로 억지로 성당에 다녔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술 때문에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와의 결혼 때문에 세례를 받게 된 아내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제가 냉담 중 가위눌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 같아요. 가위눌림은 점점 심해져 나중엔 소름 끼치는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제 허벅지도 누가 만지고, 꼬집고 하는 등 정말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날 마신 술이 안 깬 상태에서 갑자기 안방에 있는 철로 된 십자고상이 보이는 것이에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예수님 머리 위에 ‘INRI’란 글자가 보였습니다. 저는 비몽사몽 간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아, 이 자식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면 곱게 죽이지, 왜 이런 걸 달아놨어!’ 하며 펜치를 가지고 INRI 표를 뜯어냈습니다. 제 마음속에 제가 다른 건 못 해 드려도 이런 모욕은 없애야지 하는 맘에 그랬던 거 같아요.
그 이후로 아내를 따라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하지 않고 스마트폰만 보다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그날도 아내 위한답시고 미사를 갔었는데, 그날 제 귀에 신부님이 읽으시는 복음 말씀 중에(요한복음 21장)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는 대목을 읽으실 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제 마음속에 영성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내는 고해성사부터 하라고 했지만 저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고 눈 주위가 뜨거워지며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 후 고해성사를 보았고 지금은 평일 매일 미사를 참여하며 매일 영성체를 합니다. 이때쯤 그 좋아하는 술도 끊게 되었습니다. 4년이 지났는데 이때부터 너무너무 신기하게 가위눌림이 사라졌어요. 지금은 절대로 예수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 매일매일 기도합니다. ‘제가 부족하고 예수님의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저를 절대 버리지 마십시오, 아버지!’ 하고요.”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반되는 둘이 한 주체에 공존할 수 없다. ... ‘빛이 어둠과 무슨 사귐이 있겠습니까?’(2코린 6,14) ...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영혼이 먼저 애집을 쫓아버리지 않고는 하느님과의 합일의 빛이 그 안에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4,2)
빛과 어둠의 이원론이 허물어지면 바리사이들처럼 자기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율법을 지킨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사귈 수 없습니다. 어둠을 섬기며 빛을 따르려는 이들은 자기 합리화에 바쁩니다. 결국엔 사랑의 계명을 어깁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악을 섬긴다는 증거입니다. 가톨릭교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빛과 어둠의 이원론입니다. 빛과 어둠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인간 미움의 본성에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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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다고 즉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롯의 아내는 어땠는가? 그 여자가 한 것이라고는 세상 부패를 향하여 의지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이 전부인데, 감각 없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창세 19,26 참조) 그 마음이 하느님과 거리가 먼 죄악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제4계명, 신명 5,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7; 레위 20,9)고 하면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가 굶주리는 데도 그 자녀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게걸스레 먹어 치울 제물을 봉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바쳤다는 핑계로 부모께 대한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 썩은 서약이 되어 버렸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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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조금은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창조된 순서대로 피조물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순서대로 빛, 물과 하늘, 땅과 식물들, 빛물체, 바다 생물과 새, 땅의 생물들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휴식하시며 복을 내리셨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피조물이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창조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므로 마지막에 창조된 것입니다.
창조의 순서는 인간을 위한 모든 공간이 마채워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삼라만상의 설계 작업이 마무리된 뒤에, 인간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소중함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피조물은 사람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심의 창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모두 “제 종류대로”(창세 1,11.12.21.24.25) 만드셨지만, 사람만은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고, 온갖 생물을 다스릴 권한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 창조 활동의 중심에 바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애정, 그 사랑의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의 모습에, 이웃의 모습에 하느님의 모습이 함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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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해야 하는 일, 해도 되는 일, 하고 싶은 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말은,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결 예식’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키고 있던 ‘일상생활 지침’을 가리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것을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상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물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비난했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질문은 “당신의 제자들이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죄인들이다.”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위선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십니다.
1)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하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에 없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위선’이고,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죄입니다.
2) 그들이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이고, 따라서 그것만 지키는 것은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입니다. (헛되이 섬긴다는 말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하느님의 계명부터 잘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지금 너희가 말하고 있는 정결 예식은 ‘사람의 규정’일 뿐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정결 예식 같은 ‘사람의 규정’은 안 지켜도 죄가 안 되는 규정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는 상관없는 규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안 지킨 제자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3) 사람의 전통만(규정만) 지키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안 지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따라서 지금 죄인이라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누구든지 주님께 어떤 서원을 했다면 그것을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율법’입니다.(민수 30,3) ‘코르반’ 관습은 바로 이 율법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어떤 물품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면, 아무도 그 물품을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관습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에서 부모 봉양을 싫어하는 자들이 코르반 관습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코르반으로 선언하고서는, 실제로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지도 않으면서 부모 봉양을 회피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짓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 제2계명과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제4계명을 동시에 어기는 ‘큰 죄’입니다. (신성모독죄와 불효죄를 동시에 짓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코르반 관습을 언급하신 것은 그들이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신앙인은 ‘해야 하는 일’과 '안 해도 되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계명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정한 규정이라도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모두가 합의해서 정한 규칙이라면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즉 선과 악에 관한 문제가 아닌 관습이나 전통들은 안 지켜도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은 ‘안 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2) 신앙인은 ‘하면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 죄가 되는 일, 사랑을 거스르는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자기 혼자서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지키는 것은 그 자신만의 일로 그치지만, 그것을 지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마실 물도 부족했던 당시의 그 지역 사람들에게 ‘정결 예식’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큰 고통을 주는 일, 즉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3) 신앙인은 어떤 일을 할 때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기준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도 죄가 되는 일이라면 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하기 싫은 일이라도 선과 사랑을 실현하는 일이라면(해야 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선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 경우에는 우선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바꿔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경우에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면 공로가 되지 않고,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마음부터 먼저 바꿔야 하는데, 마음을 바꾸는 것, 그것이 곧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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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히 이현주 목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 중에 후배와의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 후배와 인사동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서 지하철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차가 들어오기에 후배는 뛰어갔습니다. 목사님은 뛰고 싶지 않아서 걸어갔고, 결국 후배는 차 안으로 들어갔지만 목사님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겨우 다시나온 후배의 얼굴에는 화가 있었습니다. 후배의 얼굴에는 왜 같이 뛰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화는 불과 같아서 장작을 넣어주지 않으면 곧 사그라지기 마련입니다. 후배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지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그렇게 뛰어가야 했는가? 이번 차가 막차인가? 우리가 그렇게 바쁜가? 인사동의 찻집이 어디로 가는가? 남들이 다 뛰어간다고 나도 그렇게 뛰어가야 하는가?” 생각해보니 저도 그런 적이 많았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는 말로 나의 잘못을 합리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게을리 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꼭 기억할 수 있는 날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이날은 누구나 아는 날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깨닫는 날입니다. 이날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모두가 알지 못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노자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노자는 자연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서 자연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늘의 새와 들의 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도 그렇게 해 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자는 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움직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평평한 곳에서는 호수가 되고, 기울어진 곳에서는 흘러 넓은 바다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개울은 소리가 나지만 넓은 강물은 소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고, 바다는 넘치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다는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콘크리트에 쌓인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들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던 세상을 너무나 쉽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소중한 생명의 터전을 빼앗았습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삶의 터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노자는 어린아이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순수함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젖먹이가 스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젖먹이는 엄마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의 몸속에서 탯줄로 연결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젖먹이에게 엄마는 우주요, 엄마는 곧 젖먹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서 하느님의 의로움과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눈은 볼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귀는 들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발은 걸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는 몸을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입은 먹는 것을 사유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목구멍을 통해서 내려 보냅니다. 항문은 더러운 변을 내보낸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주어진 일을 수행합니다. 생각해보니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놓고 있었습니다. 욕심, 시기, 분노, 원망을 쌓아 놓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는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옆에 있는 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비슷한 점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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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사랑>
마르코 7,1-1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하느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빚으신 것을
품음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거지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하느님께서
빚으신 것을
팽개친다면
하느님마저
버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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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욱 안셀모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던 유다인들의 관습들을 자세히 설명하여 줍니다. 이 관습은 모세의 법으로서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계명이 아니고, 후대에 랍비들이 추가한 전통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상들의 전통은 원래 훌륭한 의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전통”이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성경의 계명들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일종의 울타리 구실을 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안에 있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밖에 친 울타리 자체가 더 중요시되는 외형화가 이루어지고, 이러한 전통을 준수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피상적인 관습들이 하느님의 법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전통의 준수보다는 진정한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받아들임이었습니다. 손을 씻는 예식을 통해서 외적으로 깨끗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선택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지고 실천하는데 누구보다 철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 18,11-13을 보면 그들은 욕심을 부리지도, 부정직하지도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였으며,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태오복음 6장과 루카복음 18,19을 보면 “기도할 때 남을 업신여기고 교만하며, 단식을 할 때는 침울한 표정으로 남에게 보이려 하고, 자선을 할 때는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스스로 나팔을 불고 다닙니다.”
이렇게 바이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보다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그 뜻을 알면서 진실성 없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또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행한 신앙의 삶이 없습니까?
무엇을 몇 번했고, 어디에 몇 번 갔다 왔고 하는 식의 수치상의 신앙을 혹 살지 않았습니까? 믿음에 대한 진실성이 없을 때 그저 타성에 붙어 하느님을 믿는다고 이야기 할 때 그 신앙의 삶은 힘이 없습니다.
간혹 지나다니다 겉포장지만 화려하게 하여 그 안의 내용물들은 포장지보다 못한 선물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상품을 팔기 위하여 겉모습만을 꾸미는 것처럼, 우리의 오랜 삶 속에서 나 자신의 습관적인 모습 안에 바리사이적인 모습들이 있지 않은지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감동과 감정, 사랑의 뜨거움없이 보여주기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은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아껴주고 나눔을 실천하는데 뜨거워야 합니다. 비록 작은 나의 마음이지만 그것이 진실일 때 내 주위는 조금씩 바뀜을 잊지 맙시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의 가정에서 삶의 터전에서 화려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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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다>
한국인의 종교 특성 중 하나로 "근본주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는 이야기로 한국에 들어온 종교들이 그 종교의 근본에 접근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우리 가톨릭이 그러하고, 한국 불교의 경전에 대한 이해가 그러합니다.
한국 개신교는 처음 한국에 선교할 때의 선교 원칙들을 여전히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이런 근본주의가 우리의 종교 생활을 "형식적"으로 이끌어간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자기 종교의 근본에 다다르려는 노력은 분명 교회와 신앙을 든든한 기반 위에 서게 하고, 세상에 대해 강력한 종교적 결속과 힘의 근원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근본으로 돌아감"의 의미를 단순히 그 때의 형식에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해서 문제입니다.
가톨릭에서 가장 흔한 한 예가 "주일 미사 참례"입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신앙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전례 행위입니다. 그런데 미사 참례를 못한 것이 고백의 주된 요소, 혹은 유일한 요소가 된다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계명이 사람의 형식에 얽매인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계명(3계명)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이죠. 주일 미사를 드리고 나가 거리낌 없이 거짓을 산다면 그것은 주일을 참례함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때는 고백거리를 만들기 위해 주일 미사를 일부러 빠져야겠다는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 지를 잊고, 사람의 형식에 얽매인 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미사를 참석하는 이유는 주일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 낼려는 신앙의 한 행위입니다. 주일 미사를 참석했다고 주일을 사는 이유가 충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느님 신앙의 근본을 사는 것은 바로 그 "참된 정신"을 헤아려 사는 것입니다. 주일의 의미는 그래서 보다 더 깊고 넓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주님, 당신의 너른 마음을 저의 일상 속에서 살게 이끌어주소서. 저의 생각만이 유일한 옳음이 아님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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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함께 정결례에 대하여 논쟁하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 논쟁은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은 까닭으로 시작됩니다. 그 당시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위생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결례와 관련하여 부정한 것을 피하려는 규정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위선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의 규정들을 충실히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율법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시키면서 수많은 규정들을 만들었고, 특별히 정결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조상들의 전통”인데, 문제는 이 규정들을 모세의 율법과 동등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성전에 예물을 바치면서 그 예물을 세속적으로 쓰지 못하게 하는 ‘코르반’ 서약을 예로 드시면서, 규정에 얽매여 율법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린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 서약이 부모 공양을 회피하는 데 쓰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본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규범인데도, 바리사이들이 본디 정신은 잊어버린 채, 세부 규정에만 얽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규율을 지키는 것과 본래의 정신을 지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여서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깨어 있는 정신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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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그때가 좋았다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때로 되돌아가면 좋을까요?
언젠가 우리나라의 7~80년대를 연상하게 만드는 개발 도상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바닥에 구멍이 나서 바닥에서 흙먼지가 실내로 풀풀 날립니다.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공중화장실은 너무나 지저분해서 들어가서 일을 보기에는 엄청난 인내심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묵고 있는 호텔에서만 인터넷이 가능했고, 그나마 거의 접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나라에 와서 하루 이틀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서 ‘우리도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함이 가득했습니다. 훨씬 더 발전된 우리나라에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할 때, 그 ‘나 때’가 과연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기를 살았었다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말일 뿐입니다.
물론 ‘나 때’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임을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바르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들은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으며, 이것이 율법을 잘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세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 역시 ‘사랑’이 가장 윗자리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외면한 모든 전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매여서 살면서, ‘바리사이법’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법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빼 버리고 어떤 것은 덧붙이면서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만을 지키다 보니 ‘사랑’이 제외되어 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사랑을 다해 부모를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라는 말만 하면 제대로 공경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전통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사랑하면서 지금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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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거리>
저는 개 몇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개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특히 겨울이 되면 세 마리가 꽉 붙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개의 부드러운 털에 의해서 서로 붙어있으면 정말로 따뜻합니다. 문득 고슴도치는 어떨까 싶었습니다.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서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요.
이들은 추위를 느끼면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내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금 서로 떨어집니다. 이렇게 고슴도치는 추위와 아픔 사이를 왕복하다가 마침내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찾아서 유지하게 됩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너무 가까이도 또 너무 멀리 떨어져도 안 됩니다. 너무 가까우면 집착에 빠질 수가 있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무관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리를 어떻게 맞출 수가 있을까요? 이를 위해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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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되이 섬겨서는 안된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체적인 생명의 양식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겉모양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알맹이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 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보아야 하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코로나19’의 감염병으로 말미암아, 전례와 관련 관면이 많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면의 문제보다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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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으신 하느님을 닮읍시다>
-사랑과 지혜-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첫장, ‘천지창조’는 늘 읽어도 감동입니다. 참 아름다운 대 서사시 같고 오케스트라 같습니다. 이런 멋지고 좋으신 창조의 하느님을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욕심도 듭니다.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 좋습니다. 개신교 형제들이 즐겨 부르는 성가 ‘참 아름다워라’ 유트브를 통해 들으니 더욱 실감났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천지창조’에 관한 독서와 정말 잘 어울리는 성가입니다. 2절 마지막 ‘하나님’이란 말마디를 대하니 김수환 추기경님의 재치있는 유머에 감탄한 적이 생각납니다. 가수 인순이가 추기경님께 ‘하나님’과 ‘하느님’차이에 대해 물었다 합니다.
“글세 나도 잘 모르겠네. 나도 가끔 ‘하나님’이라고 불러---”
짧은 한마디로 더 이상 논란을 중단시킨 진솔하고 겸손한, 재치있는 유머가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참으로 하느님을 많이 닮은 추기경님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참 멋지고 좋으신 하느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깨어 온맘과 온몸으로 바치는 하느님 사랑의 찬미가, 감탄의 찬미가. 하느님 사랑의 감사가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하여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분도회 수도승들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인터뷰 기사중 “감사는 내 삶의 힘, 바다의 마음으로 주님 찬미하며 살 것”이라는 굵은 활자의 제목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감사와 찬미가 진짜 삶의 힘이요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어제에 이은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천지창조’ 내용 속속들이 스며 배어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 생명과 빛입니다. 지옥에는 탐욕처럼 한계가, 경계가 없다 합니다. 혼돈과 무질서의 한계없는 세상을 균형과 조화, 질서의 사랑으로 경계 지으시는 지혜로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정성과 사랑을 다해 하나하나마다 ‘제 종류’대로 온갖 동식물을 창조하십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보시며 동시에 하나하나의 디테일에도 강하십니다.
후렴처럼 참 기분좋게 반복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말마디 마다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대로 진선미眞善美로 표현되는 참 사랑입니다. 마지막 창조가 끝낸후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말마디 안에 만족해 하시는 하느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천지창조의 활동을 끝내신후 복된 안식을 취하시는 하느님처럼 하루의 끝도, 인생 마지막의 끝도 이런 복된 안식의 사랑으로 끝맺을 수 있다면 이보다 큰 축복도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창조의 절정은 인간의 창조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참 공존공생의 육식이 없고 채식만의 평화롭고 조화된 세상이요 세상 피조물의 사랑의 관리를 위임 받은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끝없는 탐욕과 과도한 육식으로 고갈되어 가고 쓰레기장이 되어가는 지구요 마침내 기후변화, 기후위기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입니다. 인간 무지와 탐욕의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순전히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그 책임을 망각한 업보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람 사랑에 이어 필히 피조물 사랑도 더해져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심이, 인간 중심에서 창조의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이 절박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본연의 우리 모습을 회복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는 첩경은 예수님을 닮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눈, 하느님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면 당장 드러나는 우선순위의 분별입니다. 결코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일이 벌어질 수 없습니다. 조상들의 전통에 앞서는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을, 하느님 마음을 반영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참으로 궁극의 분별의 잣대는 인간의 규범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에 많이 가까워진 이해인 수녀의 다음 인터뷰 대목입니다.
-“수도생활 50년을 하고 난 심정에 대해 “담백한 물빛의 평화를 느낀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지요?
-“제 개인의 취향과 개성같은 것들이 두루뭉술해지더라고요. 보편적이라고 할까요. 인간관과 종교관 등 모두를 바라보는 시선이 순해지더군요.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연민의 정이 느껴지고 미움이 없어지고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비심이랄까요? 그런 것을 물빛의 평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제가 ‘평상심’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요. 매사에 흥분될 일이 거의 없고 모든 것에서 담백하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오래전 저의 자작시입니다.
-“기쁨에 들뜨지 말고 슬픔에 빠지지 말고 평온히 바라보라
기쁨도 슬픔도 구름처럼 흘러가 버리는 것”-
물빛의 평화, 담백한 사랑, 있는 그대로 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하느님의 시선이 그러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은 존엄한 품위를 회복시켜 주시고 물빛의 평화를, 담백하고 순수한 본질직시의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끝으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옛 제 자작시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움이 깊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되었다
영원한 하늘이 되었다
침묵의 하늘이 되었다
영원히 바라보는 눈빛이 되었다
하느님의 눈이 되었다
사랑이 되었다
나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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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바리사이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예수님 제자들을 보고 불평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예절은 조상들에게서 전해져 내려온 전통입니다. 요즘같은 감염병 시대의 손씻기와는 좀 다른, 제의적으로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지요.
"너희 위선자들"(마르 7,6)
예수님께서 전통을 운운하며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대로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상태가 곧 위선입니다.
하느님이나 사람보다 율법의 문자와 전통을 우선하는 이를 위선자라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내와 자기 희생, 헌신이 필요하기에 마냥 수월하다 할 수 없는데 비해, 문자와 전통은 마음과 온기를 섞지 않아도 메뉴얼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럴듯해 보인다는 점이 다릅니다.
제1독서는 어제에 이어 세상 창조 이야기의 후반부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21)
창조 기사를 읽고 듣고 묵상하다 보면,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바라보며 "참 좋다~~"고 하시는 하느님의 탄성에 우리 마음도 덩달아 기쁘고 흥겨워집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은 이렇듯 보편적입니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으시지요.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 온갖 생물과 짐승들, 그리고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는 모든 이가 "좋구나!" 하시는 그분 기쁨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입니다. 모든 존재가 하느님께 귀하고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은 그분을 닮고 그분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을 다른 존재에게도 베풀 수 있어 더욱 특별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과 인류를 향합니다. 그렇기에 복음 속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내내 고수하고 주장하는 조상들의 전통은 오히려 그들을 선민 사상의 장벽 안에 가두어 구원의 보편성과 새로움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물과 제물을 바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예배하는 이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몸을 씻는 여러 가지 예식과 관련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새 질서의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만 부과된 법규일 따름입니다."(히브 9,9-10)
옛 것에 고착되어 안주하는 이는 새로움에 저항하기 쉽습니다. 전통에 대한 충실성으로 그럴듯하게 포장은 했지만 실상 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심과 분리할 수 없이 덩어리져 있기에, 악이 이 부분을 건드리면 결국 생명의 주인을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강력해지지요.
예수님의 강생과 함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은 이스라엘 민족이 조상 때부터 지켜 온 전통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법, 온 인류를 구원할 온전하고 보편적인 새로운 계약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옛 것에 집착해 새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을 몰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우리 모두는 어떤 이념이나 관습, 전통보다 더없이 존귀하고 존엄하니까요. 문자와 관습의 공식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는데 마음과 온기와 정성을 다하며, 하느님 모상으로 완성되어 가는 벗님을 응원하며 축복합니다. 그런 벗님을 보고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참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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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10대 폭력의 확산은 그들의 이상주의가 좌절됨으로써 발생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오늘날 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이상주의를 격려하기보다 서로 경쟁하고 타인의 희생을 기반으로 이익을 얻는 경제 제도를 수용하도록 부추긴다. 이런 제도는 개인의 특별한 존재 방식을 향상시키기보다 미친 듯이 일하는 것을 격려하고 증진시킨다. 피어스는 10대 폭력의 급속한 확산은 그들 앞에 닥친 어른들의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그로 인하여 죄 발달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0대 폭력의 확산은 그들의 이상주의가 좌절됨으로써 발생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그의 말에 우리는 동의한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하버드 철학자들의 인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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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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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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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지가 바로 주방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또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의 정신’과 ‘하느님의 뜻’에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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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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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7,9)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과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을 하시면서,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지적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제가 부제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제게 와 울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어머님께서 마지막 병자성사(종부성사)를 받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사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어머님께서 새벽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구역 성당에 전화를 해서 종부성사를 청했더니, 늦은 시간이라고 거절하셨답니다. 그래서 다른 성당으로 연락을 했더니, 자신들의 구역이 아니라고 거절하셨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부성사도 받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조상들의 전통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전통들이 때로는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가로막고,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가두어 버립니다. 조상들의 전통과 교회의 전통 안에 가두어 버리고, 때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하느님을 가두어 버리기도 합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하느님도 가두어 버리고, 신부님도, 수녀님도, 너도 가두어 버립니다. 이는 하느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큰 불행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7)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나 틀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하느님을 가두지 맙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두지 맙시다! 신부님도, 수녀님도, 너도 가두지 맙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고 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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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bBZphXyIe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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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 9)
살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다.
삶의 기준과
삶의 질서가
필요한
우리들
관계이다.
계명은
삶의 길이며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이다.
우리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위선과
모순을 보게 된다.
계명을
저버리면
빛과
소금이라는
우리의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신다.
진실로
사랑하는
삶이다.
거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이다.
거짓과
이기심이
사랑의 계명을
망가뜨린다.
계명은
삶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현실과
이상과의
거리
전통과
계명과의
괴리 속에서
바로 세워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이다.
모순과
이중성의
삶에서 벗어나
정직한
내면의
계명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빛좋은
개살구처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아름답지 않는
삶이 아닌
겉과 속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삶이
계명의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먼저
우리 자신이
계명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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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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