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첫 수요집단상담모임을 안내합니다.
글 읽고 와서 배우고 깨우치는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모임에 책으로 읽습니다.
*줌주소는 당일에 올리겠습니다.
배우며 깨우치며 살아가는 인생 길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녀교육에 누구보다도 열심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의도로 “배워서 남 주냐?”는 말을 곧잘 한다. 학식이 많은 사람이 실망스러운 일을 했을 때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가!”라며 놀라기도 한다. 그만치 배움이 사람됨에 중요한 요인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배움은 주로 정규 학교교육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학창시절 수학을 잘 했기 때문에 처음에 이과로 진학할 생각을 했었다(나중에 관심과 적성에 따라 의과대학에서 문과로 전공을 바꾸었지만).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대학입시 시험감독을 할 기회가 있어 학생들의 수학시험문제지를 보면서, 문제를 풀어보려 했었다. 그러나,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수학실력을 자부했던 나였기에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사실에 참으로 기가막혔다. 답안지 쓸 ‘때’까지만 유효했던 배움이란 것이, 얼마나 수명이 짧은 것인가 새삼스러웠다.
실제로 이렇게 긴 세월을 살며 되돌아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인하게 된다. 오히려, 세상에 둘도 없는 특유의 부모님에게 배운 것과 각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배운 것이 아주 훗날까지 우리의 삶을 특징지으며 살게 한다. 아기가 눈도 제대로 뜨기 전에 엄마의 내음을 알고 엄마 품에 안기면 안정감을 찾는다. 일생의 삶을 앞두고 배우며 살아가는 과정을 우리 모두 그렇게 시작한다.
배움은 신기한 과정을 거친다. 말을 배우는 것도 얼마나 신통한가. 미국 유학시절에 아이 둘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맏이는 말없이 속으로 생각을 담아두며 노는 아이였고, 둘째는 말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유치원에 다닌 지 며칠 되지 않은 날 우리말 어순으로 영어를 하는 둘째를 보면서 아이가 우리말본(문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세 살도 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영어의 문법에 맞는 영어를 잘 구사하기 시작했다. 낱말 하나씩을 배운다고 우리는 영어철자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외워댔는데, 실은 말본의 틀 전체로 어린아이 때부터 명확하게 터득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 배우기 같은 것만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태도, 그리고 생각과 판단도 우리는 배워 익혀가면서 산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해답이 따로 있어서 그때마다 따로따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고구조’를 갖추도록 학습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같이 말이다.
남편과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이, 함께 사는 것이 하도 힘들어 헤어지는 것이 편할 것 같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부부가 싸우다가 갈등을 해결하고 함께 사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울 기회를 아이들에게서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혼자 마음대로 사는 것이 편하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부부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누구에게서 배울 것인가 생각해보라고 한다. 엄마가 했듯이 간단히 헤어지는 것이 편하다고 아이들도 쉽게 헤어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혼으로 갈등을 풀거나, 폭력으로 갈등을 푸는 가정에서 자라면 그 방법을 배울 것이다. 가축도 말로 하면 알아듣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말로 푸는 자세를 배우면 말로 갈등을 풀 수 있게 될 것이다(물론 이혼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라도).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에 딸과 아들을 보내고 있는, 내 친구(30대 후반의 여성)가 있다. 한 아이는 책읽기를 즐기고 한 아이는 수학풀기를 놀이 삼는다. 그러니 시험을 보면 한 아이는 국어를 잘 하고 다른 한 아이는 수학을 잘 한다. 아빠는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은 과목에 마음이 쓰여 아이들을, 시험문제풀기 기술을 가르쳐줄 학원에 보내라고 말한다. 내 친구이자 그 아이들의 엄마는 아이들이 스스로 열심히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흡족해하기에, 부부가 의견이 달라 갈등한다. 그 엄마에게, 우리 적에는 요즘같이 학원이 없었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 공부했지만 나같이 수학점수가 잘 나왔던 사람도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더욱이 요즘같이 학원에서 도움받아 수동으로 학습하는 습관에 젖으면 대학 가서도 혼자 공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혼자 공부해버릇하지 않으면 취업준비나 대학원공부조차 무리지어 해야만 하는, 이상한 습성을 지니게 된다. 혼자 스스로 하는 습성을 키우지 못한 탓이다.
정보를 얻어 답안지에 재생하는 공부는 곧 머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배워서 얼마나 자신이 바뀌고, 성장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서는가 하는 것이다. 「새가정」을 읽으며 나와 독자들이 함께 심리학이론을 공부하는 목표가 우리의 행동을 심리학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자는 것이듯이, 모든 공부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리게 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몇 차례 통독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성경구절을 많이 외울 수 있는 것도 귀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공부의 참 목적은 성경의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어 참으로 거듭나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어야 한다.
발달단계에 맞게 자기답게 알고 깨닫는다는 것에 대해 교육자가 바로 알아, 아이들에게 적합하게 학습의 터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어른들이 세운 교육목표와는 다르게 엉뚱한 것을 아이들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눈여겨볼 줄 아는 안목도 필요하다. 한 보기로, 교회교육이 상받기 위한 것으로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주어진 학습의 자료를 아이들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배우는 사람은 어차피 자기대로 선택해서 자기 식으로 배운다. “눈앞에 보여주었는데 왜 못 보았느냐! 말해주었는데 무얼 들었느냐!”고 야단치는 어른들이 있다. 우리 모두 보고 싶은 것,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 들리는 것만을 듣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아이들이 못 보았다고 하는 것은 정말 못 본 것이다.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눈앞에 제시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 않은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 나누고 함께 식사하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보지 않았던가! 부활하실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알아들을 귀가 갖추어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사심을 믿는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 시력을 잃었다가 수십 년 후에 수술로 시력을 찾아 해부학의 구조상으로는 완전한 눈을 갖추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눈이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경험한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이 이미 어느 정도는 쌓여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몸의 눈에 마음의 눈이 협조를 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배워서는 허공을 때릴 뿐 곧 사라진다.
요즘 우리네 아이들이, 빨리 60세가 되어 공부 안 하고 일에서도 물러났으면 좋겠다고 한다는데 너무나 안타까웠다. 배우고 깨달아 자기와 이웃과 세계를 더 잘 알게 되는 것을, 재미있게 공부하는 경험의 기회를,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깊이 통회한다. 지극히 작은 자, 어린아이를 실족케 한 사람은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물에 빠지라 하시지 않았던가! 재미있는 가정과 재미있는 학교에서 재미있는 공부를 하면, 평생 재미있는 배움을 끊이지 않게 되고 삶을 풍성하게 살 것임을 확실히 믿는다. 이제 그 재미를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하기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