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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병욱(金秉旭)
1) 비상시국에 우리의 각오(상, 하)
비상시국에 우리의 각오(상)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필승을 기하라
전쟁에 관해서는 옛날부터 여러 학자들의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싸움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싸우지 않는다는 것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필요합니다.
현재의 일본과 중국 간의 상태와 같이 우리는 분명히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각종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래도 현 상태에서 보건대 전쟁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거국일치, 단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장병들뿐만 아니라 총후(銃後)에서 내선일치(內鮮一致)·일만일체(日滿一體)의 결실을 거두어 전쟁터의 용사들의 분투와 총후 지원의 일치를 통해 반드시 이번 전쟁에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마법(司馬法)의 병서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그 나라를 공격해 그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이를 공격해도 된다. 싸움을 통해 싸움이 멈출 수 있다면 싸움 또한 가능하다.
의미를 요약하자면, 단순한 전쟁이어서는 안 되지만 백성을 도탄의 고통에서 구원하는 이른바 정의의 전쟁이라면 싸워도 좋다는 것입니다. 즉 의로운 전쟁이라면 싸워도 좋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야망을 이루기 위한 전쟁은 좋지 않지만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한 싸움이라면 검을 들고 싸워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내의 전쟁에 한정시켜 만들어진 말이지만, 이는 단지 일국 내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타국과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유명한 손무자(孫武子=孫矉)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국가의 대사이다. 전쟁터는 병사의 생사가 달려 있고 나라의 존망이 걸린 길이므로,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이는 전쟁이라는 것을 때에 따라 싸울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싸움이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국가는 능히 그 사정을 잘 살펴 싸워야 합니다.
싸움이란 진정 그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므로 매우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가볍게 여기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일본은 중국과 싸우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일단 전쟁을 시작한 이상 어떤 생각을 갖고 싸워야 하는가 하면, 어디까지나 반드시 승리하는, 즉 필승을 기한다는 결심으로 싸워야 합니다.
손무자의 말을 빌려 말씀드리자면, 전쟁을 시작한 이상 끝까지 싸워 이기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주의를 관철시킬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결국 모든 싸움의 역사입니다. 대개 국가에는 그 국가로서의 이상이 있고, 또 동시에 그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이치를 따져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를 설명해도 통하지 않을 경우, 게다가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고 선할 경우에는 이를 막는 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싸워 물리치고 희망의 실현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유명한 독일의 클라우제비츠 장군…… 지금은 독일인이지만 당시에는 프러시아인이었는데, 전쟁철학자로 칭송을 받고 있고, 또 저 유명한 맹장 블뤼허 후작의 참모였습니다.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은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한 수단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취하는 정략의 계속에 다름 아니다. 정치의 목적은 본래의 목적이고 전쟁은 그 수단이다.
요컨대 그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하나의 수단으로서 빼놓을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번 ‘지나사변(支那事變)’17)에서 일본이 결연히 일어나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은 그야말로 시의적절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정반대로 일본이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며 그 기회를 놓쳐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적이 충분히 군비를 완비하고 러시아·영국·아메리카 등의 나라와 결탁해 내정을 정비한 뒤 개전을 했다고 한다면, 우리나라가 품은 이상을 달성하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난폭한 중국이 노구교(蘆溝橋)에서 선수를 쳐서 결국 오늘날의 지나사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게는 대단한 천우(天佑)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제군들도 신문에서 혹은 라디오에서 이미 들었겠지만, 소련은 만주와 시베리아의 경계에 흐르고 있는 흑룡강 상류에 있는 건차자(乾岔子) 섬을 얼마 전 무단으로 점령했습니다. 게다가 이곳에 함포 등을 늘어놓는 등의 불법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만주국 정부와 함께 엄중한 항의를 하는 동시에 적의 군함을 격침시켰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중진인 토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7명을 총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세를 종합해서 보면 결국 러시아는 현재 국내의 정세로 인해 곧바로 일본과 개전할 수는 없어서 그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위에서 보건대 러시아와도 조만간 기선을 제압해 싸워야 할 시기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꼭 국민으로서 명기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의 생명선의 전진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일본의 생명선의 전진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생명선은 원심적
17) 중일전쟁.
(遠心的)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심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기세인 동시에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 일본열도에 갇혀 있었을 때는 우리 생명선은 일본열도 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열도의 생명선은 어쩌면 해안선과 일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이지유신의 대업이 완성된 이후에는 일본열도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어서 우리나라의 생명선은 점차 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조선으로 건너가 만주로 간다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좋은 기회를 하늘이 주었습니다. 그 기회란 곧 세계대전입니다.
이 세계대전의 발발을 계기로 우리 생명선은 만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베리아, 중국 본토까지 확장되었고 그 여광(餘光)은 지금도 계속되어 세계 지구상의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선의 진출은 결코 불순한 목적을 갖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뜻에 따른 자연스러운 대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대임(大任)을 완수하기 위해 전진하고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이번 지나사변을 계기로 해서 더욱 웅장하게 전진할 것으로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활약해야 할 장래의 무대는 더욱 확대되고 육지는 아시아대륙, 바다는 태평양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아시아대륙에서 어떠한 대격전을 벌일 것인지, 태평양에서 어떠한 대충돌이 일어날지, 결코 방심할 수 없습니다.
현대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작은 일본열도만을 생명선으로 간주하고 있던 일본이 아니라 널리 세계를 무대로 일어난 일본이 되고 있습니다.
즉 세계의 중심은 극동으로 이동해서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세계문제를 해결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나미(南) 총독 각하도 이번 전쟁의 발발로 종종 시국의 중대성을 설명하시고 내선일체의 실현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내선일체의 1억이라는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대처한다면 이제 세계 어디를 향하더라도, 어떤 일이라도 못할 일이 없는 국민이 되고 있습니다.
내선일체 1억의 국민이 단위가 되고 중추가 되어 만주를 이끌고 전진해야 한다고 미나미 총독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반도 동포들이 앞으로 해야 할 사업은 눈앞에 가득 쌓여 있습니다.
큰 노력을 기울여 분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생명선과의 교차는 용납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생명선이 넓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필경 우리 힘으로 앞으로 이 넓은 생명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 생명선은 결코 다른 것과의 교차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를 막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깨부수고 전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선의 중심이 무엇이고 그 원심은 무엇인가 하면, 결국 한 마디로 말하자면 황국정신(皇國精神)의 선양입니다.
황국정신을 세계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깨부수고 전진해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저 러시아의 공산주의, 중국의 삼민주의(三民主義) 같은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아메리카·프랑스·영국 등의 민주주의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상전입니다.
중국이 오늘날 아무리 항일(抗日)·회일(悔日)을 외치고 있어도 이는 곧바로 응징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중국의 국민정신이 이미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장개석(蔣介石) 정권을 중심으로 군벌을 만들어 4억 5000만 민중을 이끌고 항일·회일·배일을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창의성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라 대부분 러시아의 선동에 이끌려서 나왔다는 점에서 대단히 가증스럽습니다. 중국의 '삼략(三略)'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능히 천하 대중의 위태함을 지탱하는 자는 천하에 가장 안전한 위치에 의거할 수 있다.
능히 천하 대중의 근심을 제거하는 자는 천하의 가장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능
히 천하 대중의 환란을 구하는 자는 천하의 복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우리 황국정신의 선양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장개석이 강하다 해도 4억5,000만 민중을 도탄의 고통 속에 빠트리고 세계가 받아들이지 않는 공산주의를 퍼트리려고 하는 그릇된 일은 당연히 하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황도정신은 이러한 그릇된 사상을 각성시켜 시정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현재의 전쟁은 무력에 의한 전쟁만을 생각합니다만, 이는 단순한 무력의 전쟁만은 아닙니다.
사상의 전쟁도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단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장병들만 열심히 싸우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장병들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일본제국 1억 신민들의 싸움입니다.
단지 무력의 전쟁만을 보고 그 이면에 더 중대한 사상의 싸움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본이 병사를 보내고 있는 것은 결코 영토 침략이 목적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평화를 갈망하기 위한 싸움을 옛날에는 의전(義戰)이라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성전(聖戰)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만, 올바른 목적을 위해, 바꾸어 말하자면 황국정신의 선양을 위해 싸우는 일은 곧 성전이므로 국민은 일치단결해서 이 싸움에서 이겨 황국정신을 세계에 선양해야 할 것입니다.
<출전 : 金秉旭, 「非常時局に於ける吾人の覺悟(上)」, '綠旗' 第4卷 第1號, 1938년 1월, 36~39쪽>
비상시국에 우리의 각오(하)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국민 전체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자신감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에 관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정신적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일만일여(日滿一如)의 견고한 결성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승리를 얻는 첫 번째 필요조건입니다.
현재 러시아의 나라 사정이 어떤지, 중국의 사정은 또 어떤지에 대해 굳이 많은 것을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
지만 이에 비해 우리 일본과 조선의 1억의 제휴일체(提携一體), 그 아름다운 융합은 바로 우리의 최후의 승리를 웅변해 주는 것이라 확신해도 좋습니다.
이 정도의 결합이 있다면 앞날은 반드시 빛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둘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편 앞서 자원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가짐 하나로 어떻게든 될 것입니다.
특히 작년에는 일본과 조선 모두 큰 풍작으로 예년의 30% 이상 수확이 증가한 상태입니다.
이 역시 우리나라가 취한 수단이 진정 의전(義戰)·성전(聖戰)이라는 사실에 하늘이 베푸신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원이 부족하다고 해도 석유가 부족하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고, 석탄이든 식량이든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다만 전황(戰況)의 진전에 따라 외국과의 관계에서 어떠한지가 문제될 따름입니다.
두 번째로는 물질적으로 일본과 만주의 자원에 북중국의 자원을 더하는 것입니다.
북중국의 풍부한 자원에 대해 자금과 지식·기능을 가져가 서로 제휴하여 이를 개발한다면 그 자원은 실로 엄청날 것입
니다.
단지 눈앞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어서는 미래의 웅비는 바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비상시를 인고하고 극복해서 저편에 있는 빛나는 자원의 획득 개발에 매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일상생활을 착실히 영위해 앞으로 세계에 용감히 날아올라야 할 대국민의 태도와 소질을 함양하는 일입니다.
아직 조선 사람들에게는 ‘국어’18)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평소 국어를 상용하는 기회가 적은 관계도 있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대단히 실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평소 주의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앞으로 조선 사람들은 유용하게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 좀 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명을 유감없이 수행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대단히 큰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국가의 단위는 모두 자신에게서 출발합니다.
먼저 자신에게서 출발해서 가정·사회·국가로 확산되어 나갑니다. 각 개개인 스스로 다스리지 않고서,그 단결된 집단인 국가가 다스려지고 발전할리가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크고 훌륭한 이상이라 해도 이를 처음부터 한 걸음씩 착실히 나아가지 않고 단번에 그 목적에 도달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맹목적인 방식은 결국 벼랑에서 떨어지든가, 우물에 빠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처음 한 걸음, 다시 말해 각 개개인이 착실히 그날, 그때의 생활을 의미 있는 생활로 만들지 않으면 국가의 진출과 발달도 바랄 수 없습니다.
직업 혹은 사람에 따라 일과 힘에는 각각 차이가 있겠지만, 각자가 자신의 직분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오늘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국가총동원·생업보국의 면목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시국에 우리는 위와 같은 중대한 책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 의미 있는 생활을 함으로써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시각각 의미 있는 생활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항목을 나누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각자 맡은 바 일에 정진해서 좋은 일본인이 되고 좋은 국민이 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보은·감사의 생활을 하고 늘 생활의 향상을 꾀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고 오늘의 생활에 감사하는 동시에 더 나은 향상을 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이런저런 일로 불평을 늘어놓거나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는 진정한 국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세계대전 당시 큰 활약을 한 인물인데, 그의 모친은 아침에 누군가의 부음 연락을 받아도 결코 장군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 사망소식을 들으면
18) 일본어.
그날 하루를 어둡고 우울한 기분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기분이 가슴 한구석에 있으면 그날은 훌륭하게 일처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 하루를 훌륭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아침에 맑은 기분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친의 가르침은 깊이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셋째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우리 국력 발전의 초석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과 집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결국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국가는 각자의 연대책임이므로, 설령 그 성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각자의 노력은 국가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항상 견인지구(堅引持久)하는 정신을 갖고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결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만주인은 항상 3년의 식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중국의 농민들은 5년의 식량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이런 대비가 있기 때문에 가뭄이나 수해를 입어도, 전쟁이 일어나도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농촌은 어떻습니까. 춘궁이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평소 준비를 해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근에 대비하는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식량조차 마련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회와 국가를 위해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작년에는 수확이 30% 증가하는 풍작이었으니 이런 기회에 흉작을 대비한 저축을 하는 일에 유의해서 춘궁이라는 말을 조선에서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넷째는 물가급등의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각료회의에서 국민의 소비절약 방침이 논의되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군수자재·수입품 및 수입품을 원료로 한 국내제품의 소비는 되도록 절약하라는 것입니다.
철은 앞으로 가장 필요한 물건이니 충분히 절약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저는 재작년 여순(旅順) 방면을 둘러보고 왔는데, 지난날의 여순 공략을 기억하기 위해 당시 사용되던 물품을 진열해 두고 있었습니다.
곡괭이 같은 것은 거의 손잡이 부분까지 마모되어 있었고, 또 전선을 감기 위해 빈 병을 이용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으리라 봅니다.
다섯째는 각종 사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도 장래에 이를 충분히 유의하도록 하고, 해외무역이 이와같은 상태이니 가능한 군수품과 수입품 및 수입품을 원료로 한 국내제품은 극력 소비 절약하는 동시에 일반 국내생산비의 급등을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국내산 중에서도 가령 동이나 철 같은 것을 소비하면 곧바로 물자부족을 초래하고 결국 수입이 증가하기 때문에 절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시국의 관계상 소득이 증가한 자들은 생활의 확대를 꾀하지 말고 여유분을 저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료가 국내에 상당히 있고 또 제조가공도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물자는 공급이 부족하지 않은 한 소비 절약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이는 만약 그런 것까지 극력 절약하게 되면 국내 공업이 위축되어 파탄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국내에 없는 자원, 전쟁에 직접 필요한 물자에 관해서는 극력 소비를 절약하는 한편, 전쟁과 관련이 없는 것은 생산비를 되도록 억제해 다량으로 생산하고 회전시켜 물가의 급등을 막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가가 급등하면 당연히 국민은 동요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른바 사상전으로 나타나 또 다른 재앙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생산자 입장에 있는 자는 시국의 중대성을 충분히 인식하여 부디 황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가능한 많이 생산하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서로 맞물려 물가의 급등을 억제하길 바랍니다.
독일은 전쟁 중 자신의 집 주위에 있는 토지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경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냥 놀려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농촌에서 일하는 분들은 이런 정신으로 자신의 향토에서 조금이라도 많은 토지를 개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용하도록 해서 생산의 증가를 도모함으로써 시국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정신이 결국에는 춘궁을 절멸시키는 첫 걸음이 됩니다.
여섯째는 모든 사물을 과학적으로 건설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대충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번 사변은 획기적으로 문화를 건설하는 시기이므로 모든 일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일곱째는 내선일체의 의의를 구현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일본과 조선의 융화·동화를 철저히 해서 이것이 일본의 핵심이 되어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황도정신을 중외에 선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즉 강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모든 명예와 이익에서 벗어나 진리를 갈망하고 양심에 따라 비상시국에 무조건적으로 노력하길 바랍니다.
각종 조건이나 욕망이 있으면 대립을 하게 되고 진정한 내선일체의 결실을 거둘 수 없습니다.
함부로 바다 건너편, 북중국·남중국 쪽을 바라보고 흥분하지 말고 조용히 신변을 되돌아보고 발밑을 응시하고 자신의 일을 되돌아보고 책무를 완료함으로써 총후(銃後)의 방어를 견실하게 해야합니다.
지금까지 말할 것처럼 모든 일은 자신에게서 출발해서 가정·사회·국가로 확산되므로 각 개인이 열심히 일하고 물자를 절약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토지를 놀리지 말고 오직 봉공보국(奉公報國)의 일념으로 정성을 다한다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극복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또 앞으로 일어나게 될 난국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력만 함양한다면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실력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항상 불요불굴(不撓不屈)의 힘으로 침착하게 대응하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으로 그 어떠한 고난과 결핍에도 견딜 수 있는 심신의 단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생활태도를 반성하고 향락적·퇴폐적 내지 도피적 기풍을 배척하고 근면역행(勤勉力行)하고, 황군의 장병들이 주야로 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그 충의의 정신과 실천을 곧바로 국내에 있는 총후의 우리들 일상생활로 옮겨 전선의 충성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각자의 업무에 온 힘을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공자는,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 것을 안다.라고 했습니다.
또 우후(虞詡)는,얽히고설킨 뿌리와 뒤엉킨 마디를 만나지 않고서야 어찌 칼날의 예리함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 함의적인 말을 잘 음미해서 내선일체의 결실을 거둘 시기가 도래했음을 기쁘게 여기고 황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출전 : 金秉旭, 「非常時局に於ける吾人の覺悟(下)」, '綠旗' 第4卷 第3號, 1938년 3월, 50~53쪽>
4. 김성률(金聲律)
1) 내가 생각하는 내선일체
1.
우리 일본과 조선의 공동선조들은 수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실로 숭고하고 위대하기 그지없는 정신·활동·노력·사업 등을 축적했고 이를 일종의 신비적·무형적 목록으로 인식함으로써 수백 세대 이후의 자손인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이처럼 일본과 조선의 공동선조들이 만든 정신적 재산 목록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존중한 나머지 여기에 매우 소박하면서도 낡았지만 신비로운 표지를 붙여 제목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따라서 이 목록을 읽거나 페이지를 펼치는 데 있어서 이를 결코 즉흥적·감정적·타산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즉흥적으로 그 자리에서만 감흥을 불러일으켜도 그 자리를 떠나면 아무런 흥미도 취미도 느끼지 않는, 이른바 ‘상기막운한(相期邈雲漢)’19)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성질을 갖고 있다.
감정적인 어느 한때 어떤 사항에 대해서만 희로애락을 느끼는 경우는 있어도 어느 순간 그 사항을 벗어나면 곧바로 저 불어오는 바람과 떠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 하늘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로, 삽시간에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타산적인 저 시정잡배들이 어떤 물건을 매매할 때, 때로는 이익을 꾀하고 때로는 해를 입히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이른바 이해관계라는 것을 벗어났을 때는 더 이상 마음과 관련되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 30년간 이미 취해온 그 태도를 반성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이것이 내선용화(內鮮融和)라는 표어로 유행된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적연무문(寂然無聞),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또 때로는 내선일여(內鮮一如)라고 외치며 항간에 선전된 경우도 있었다.
동일한 내용에 서로 다른 이름이 붙은 제목에 대한 주장 방식은, 그 목소리가 높거나 혹은 작거나,그 태도가 강하거나 혹은 약하거나 혹은 적연한 것처럼, 시종일관되지 못하고 늘 바뀌면서 전혀 일관성이 없었다.
일관성이 없다 함은 실은 그 제목에 대한 우리 마음의 태도가 바뀌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과거 수천 년간 시종일관 흐르고 있는 우리 선조의 뜻에서 보면 매우 죄송스러운 일이며, 또 크게 반성해야 할 점은 없는 것일까.
2.
조선 속담 중에 다음과 같이 내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있다. “소의 뿔을 뽑기 위해서는 적당히 뜨거
19) 이태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나오는 구절로 “아득히 먼 은하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하세”라는 의미임.
워졌을 때를 골라 뽑아야 한다.” 소의 머리를 불로 지지고 털을 제거하고 뿔을 뽑은 뒤 이를 솥에 넣어 삶아서 이른바 태뢰(太牢)의 진미를 만드는 것이다. 소머리를 삶아 태뢰의 진미를 만드는 순서로서는 먼저 털을 제거하고 뿔을 뽑는 것이 순서인데, 이 뿔은 매우 뽑기 어렵다.
따라서 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불로 지지고 있는 동안 뿔이 적당히 뜨거워졌다고 생각될 때 사정없이 뽑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의외로 쉽게 뽑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 속담이다.
우리는 지금 국체관념을 체득하고 일본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순서로서 먼저 서로의 조상의 옛 정신을 되살려 조선인의 그 이후의 잡념을 제거하는 단계로서 새삼스럽게, 또 새롭고 어색한, 어느 도의 시학(視學)의 주장에 따르면 이미 사어(死語)가 된 것으로서, 물론 그것이 사실이지만, 무슨 그것이 대단한 것인 마냥 “내선일체, 내선일체”라며 마치 저 일연종(日蓮宗)의 행자들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외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이를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上之所好, 有甚於下者라고 말이다.
이것이 만약 다행히 일억만의 형제, 아니 적어도 2,300만의 형제가 단지 윗사람들의 구령에만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라면 그것은 진정 황국(皇國) 일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반도인(半島人)’20) 자신을 위해 행복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이미 하나의 즉흥적·감상적·타산적인 것이 아니고, 또 선조들의 업적을 귀히 여기고 조산들의 유지를 중히 여기고 자손들의 장래를 우려하고 또 앞으로 천백만년 뒤를 생각하는 관계상, 이제 적당히 뜨거워진 것으로 보이는 소의 뿔을 뽑아 태뢰의 진미로 만들어 우리 조상들의 영령에 바치고 또 그 정신적 재산 목록을 태산 반석(磐石)의 땅 곧 불마불괴(不磨不壞)의 금궤석실 안에 보관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서 모기소리와 같은 작은 목소리를 감히 저 사자의 포효를 흉내 내면서까지 크게 한 번 소리치고 싶다.
“내선일체란, 그것은 실로 나의 하나의 인식이고 관념이고 신념이지 결코 즉흥적·감정적·타산적인것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3.
이를 하나의 인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식이란 나의 과거에 대한 모든 기억이고 반성이며,
연속된 사유 곧 “일관된 사념의 덩어리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식이란 그야말로 사소한 오류도 없는 가장 확실하고 진정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소한 오류도 없는 확실하고 진정한 지식이란 그 성질상 일종의 보편타당성과 필연성을 띠게 된다.
이른바 보편성이란 우리 1억만 일본 내지인과 조선인 형제들에 한해서는 언제 어디에서도 “내선(內鮮)은 일체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필연성이란 우리 일억만 내지인과 조선
20) 조선인.
인 형제에 한해서는 언제 어디에서도 “내선은 반드시 일체가 되어야 한다” 아니 “내선은 절대적으로 일체가 되어야 한다”라고 인식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하나의 불가지(不可止)·불가피적 내용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4.
그리고 이를 또 하나의 관념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관념이란 마치 모체 내에 잉태된 태아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외부에 나타나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고, 아울러 그것은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그 모체에서 분만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또 일단 분만된 날에는 그것은 아직 훌륭한 한 사람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언제 어떤 두각을 나타내고 언제 어떠한 위대한 활동을 할지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선일체’라는 것 역시 지금 그야말로 내 배꼽·가슴속·뇌리 어딘가에 깃들어 있는 바의 하나의 사념 덩어리이다.
아울러 그것은 엄숙한 사실이고 또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실현되지 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일단 실현되는 날에는 그것이 과연 전 동아에 대해, 아니 전 세계에 대해 어떠한 자태를 드러내고 어떠한 면목을 드러낼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1억만 내지인과 조선인 형제들은 지금 그야말로 이 내선일체라는 하나의 태아를 몸속에 담아 이윽고 그것을 분만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운명은 실로 우리 내지인과 조선인의 공동선조인 사람들에 의해 멀리 수천 년 태고 적에 일종의 신비력과 영계력(靈界力)을 담은 하나의 배종(胚種)으로서 이 동아의 지상에 씨가 뿌려진 것과 같다.
저 가네코 데이이치(金子定一) 대좌는 일찍이 그의 주장 ‘일본과 조선을 구별하는 일선(一線)의 말소’라는 견해에서
일본과 조선을 구별하는 일선이란 국체관념의 체득에 대한 차이를 가리킨다. 반도 2300만 형제들이 모두 그 국체관념을 완전히 체득하고 우리 일본 전체가 서서히 그 명랑성을 노정해야 할 성시(盛時)를 생각하면 나 실로 뛰어오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라고 외치며 참으로 만장의 기염을 토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 이 내선일체라는 내 관념이 드디어 사실상 여실히 구현되는 그때에 전 동아의 명랑함, 전 세계의 헌활(軒豁)함은 과연 어떠한 숭고하고 위대한 것일지를 생각할 때, 이 5척(尺) 5촌(寸)의 체구에는 실로 만곡(萬斛)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어찌 할 도리도 없다.
5.
또 이를 하나의 신념이라고도 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칫 타력이 되기 쉬운 데 반해 신념이라는 것은 실로 그 마음 깊은 곳, 뱃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바의 무한력·절대력이라 할 수 있는 성질의 하나의 힘이다.
그리고 1억만 형제들의 공동·협동의 신념력의 강인함이란 결코 1억만 개개의 그것을 누적한 바의 총화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그 이상으로 무한과 절대의 의미가 중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 힘의 발휘란 만주사변에서는 국제연맹의 과감한 탈퇴로 나타났고, 재작년 ‘지나사변(支那事變)’21)에서는 단호히 포악한 중국에 대한 응징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응징이라는 말에 대한 것인데, 그 이래 나는 자주 응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응징이란 실은 ‘(출수이자, 반수이(出手爾者, 反手爾)’ 격으로, 나는 저 포악한 중국의 말을 빌려서 군자는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리다가, 고쳐지면 그만둔다.라는 공명정대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 채 있었다.
응징이란 곧 중국의 서책, '시경'이나 '맹자'에 나오는 ‘융적시응, 형서시징(戎狄是膺 , 荊舒是懲)’22)에 의한 것이다.
즉 포악한 중국의 폭려(暴戾)·완명(頑冥)하고 불령(不靈)한 태도는 결코 포악한 중국 그 자체의 본질도 본심도 본성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편의 독이 그들의 본성을 마취시키고 괴뢰의 손이 그들의 태도를 조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인용해 말하자면, 우리는 직접적으로는 저 융적(戎狄) 곧 포악한 중국을 치고(膺), 간접적으로는
그 괴뢰의 손을 벌한다(懲)는 데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굳이 이 포악한 중국을 응징함으로써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리다가 고쳐지면 그만둔다(以人治人, 改而止)’는 군자적 태도를 취하고 단호하게 참마(斬魔)의 영검을 뽑아 청안(靑眼)의 자세로 섰다는 것은 그 뒤 순조롭게 전과를 올렸고 작년에는 동아신질서건설에까지 나아갔는데, 그러한 것 또한 실로 우리 황국, 황국민으로서의 신념의 힘에 따른 것이었다.
6.
그리고 이 ‘내선일체’의 목소리 또한 나의 하나의 신념에서 나오는 외침이다. 이 힘이 드디어 발휘하게 될 경우에는
兩人同心, 其利斷金이라 하고
同心之言, 其臭如蘭이라 한다.
하물며 1억만 형제들의 ‘동심’으로 외치는 ‘내선일체’이자 ‘동심지언’에 의해 거론되는 ‘내선일체’이다.
이 힘이 발휘되는 곳에서는 온 세상을 뒤흔들고, 귀신이 놀라고 신이 우는 것 같은 숭고하고 위대하기 그지없는 사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성취하려면 어떠한 곤란도 지장도 없어야 함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 시오바라(鹽原) 학무국장은 일찌감치 “내선일체의 관념 확립의 급선무”를 외친 것이다.
21) 중일전쟁.
22) 원문에는 ‘荊徐是懲’라고 되어 있으나 ‘徐’는 ‘舒’의 오식으로 보임.
나는 지난 1937년 가을 11월 8일, 군청 사람들을 위해 ‘내선일체’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11월8일은 마침 국민정신 작흥주간 이틀째를 맞이한 때였다.
당시의 작흥 강요(綱要)의 제2항에 나온 것은 내선일체는 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고, 양자 동근동조(同根同祖)의 관계에서 나온다.
우리는 내선융화(內鮮融和)에서 더 나아가 진정으로 양자일여(兩者一如)의 태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한편으로 혈연적 연쇄를 더욱 굳게 할 것을 기한다.라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이를 해석한다면, 감히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싶다.
“내선일체라는 것은 우리 선조들 실생활의 일기인 역사라는 것에 명명백백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고, 이에 의거할 때는 우리 내지인과 조선인은 실로 같은 근본에서 갈라진 가지이자 같은 조상에서 태어난 자손들이다.
그런데 무슨 불행인지, 한동안 저 조선해협의 함몰로 인해, 저 좁은 일본해에 의해 가로막힘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게 일정한 기간 동안 형제를 서로 잊은 적이 있었다.
그 이래로 다소 어색한 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어색한 태도를 바로잡기 위해 먼저 내선융화라는 사념(思念)·운위(云爲)·행동에서 출발해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함으로써 내선일여라는 태고 본연의 모습, 곧 우리 선조들이 같은 일가 형제로 아무런 차별도 차이도 없었던 그때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가능하다면 내지인·조선인 청년 남녀들이 서로 결혼하여 그 마음과 피를 서로 조화시켜 많은 자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하는 바이다.”라는 식으로 주석을 달고 싶다. 그리고 역사상에서는 이 찬연하고 늘 광명을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우리 형제들 중에는 때로는 역사에 대해 맹목과 무관심한 사람들이 전혀 없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비로소, 또 새삼스럽고도 새롭고 어색하지만, 또한 어느 도의 시학(視學)의 말을 빌리자면 이미 사어가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제목을 새삼 소리 높여 외치고 강석(講釋)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7.
나는 바로 이러한 때에 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 먼저 벽두 인사와 나의 소감을 말한다는 의미로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말했다.
불교에서는 이 우주·인생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을 완전히 인연이라는 두 글자만으로 시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법종연생, 역조인연멸(諸法從緣生, 亦從因緣滅)23)’이라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말로 전 우주·전 인생을 해석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그 교조 석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진리(고집멸도(苦集滅道)24) 4체(諦) 중의 고집 2체), 설교(고집의 2체를 가장 조직적으로 설파한 12인연설)라고 되어 있으니 이미 이 인연의 두 글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인연이란 바로 일종의 매우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가리킨다. 불교의 설을 빌린다면
23) 원문의 ‘함(減)’은 ‘멸(滅)’의 오식으로 보임.
24) 원문의 ‘함(減)’은 ‘멸(滅)’의 오식으로 보임.
이 인연의 힘은 그 미묘하고 신비한 작용을 통해 우주를 건설했고, 인생을 현현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인연력 중에도 더욱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영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침개지연(針芥之緣)’, ‘맹구부목지연(盲龜浮木之緣)’이라는 것이 있다.
이 사바세계에 한 개의 바늘을 거꾸로 세워 저 대범천(大梵天) 위에서 한 톨의 겨자씨를 떨어뜨렸을 때, 신기하게도 그것이 바늘에 떨어져 꽂혔다고 하자. 이러한 신기한 힘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이 곧 ‘침개지연’이라는 것이다.
8.
거북이는 오래 사는 동물이라는 사실은 저 다카사고(高砂)25)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 마리의 눈먼거북이가 있다.
그 거북이는 참으로 기이한 운명을 타고났는데, 잘못해서 저 태평양의 넓은 대양 위에 떠돌면서 언제 저 육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며 수백 년 동안 마음고생을 하고 피를 말리면서까지 헤엄치고 고생한 끝에 운 좋게도, 또 다행스럽고 신기하게 부목(浮木) 하나를 만나 그것이 표착하기만을 기다리면서 겨우 육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비·미묘한 일로 가득한 힘의 작용에 의해 누군가 다행히 하나의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날 수 있다면 이를 ‘맹구부목지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인생관이 그러했다.
覆盆水於地, 芥浮於水, 蟻浮於芥, 茫然不知到濟, 少爲水涸, 蟻卽意去, 見芥類出涕曰, 幾不復興子相見, 豈知俯仰之間, 有方執八達之路手
우리 내지인·조선인의 형제들이 어떤 계기로 헤어진 지 무려 수천 년, 마치 저 작은 송아지가 형(兄)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로 서로 바라보다가(조선의 속담에 “송아지가 자신의 형을 바라보는 것처럼”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다시 일가의 권속(眷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식으로 생각해볼 때, 참으로 신비하고 미묘하며 기쁜 눈물에 목이 막힐 것이다.
어차피 불교적 생각에 의해 인연관을 거론했다. 모든 것을 인연관으로 설명하는 것은, 또한 내가 모처럼 휘두른 그 필법과 기세로 나가야 한다.
9.
불교에서는 석가의 가르침으로 교화되어야 할 범위의 국토는 참으로 넓고 큰 삼천육천세계(三千六千世界), 아니 그 마음 위에 건립된 세계의 관대함은 이를 화장찰해(華藏刹海)라든가 향수해(香水海)라고 한다.
또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이른바 은하우주·범우주라고 하는 것처럼 이 우주의 세계라는 것은 결코 그런 좋은 곳이 아니다.
그런데 이 무슨 신기한 일이기에 우리는 행복하게도 바로 이 일본 국토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시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는 이른바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이라 하고, 또 불가설(不可說)·
25) 일본 노가쿠(能樂)의 하나로 다정한 노부부의 전설을 담았다.
불가교(不可敎)·불가사의·항하사수겁(恒河沙數劫)이라 한다.
우리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실로 천양무궁(天壤無窮)한 구원유구(久遠悠久)를 지난 세월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신기한 일이고 무슨 행복으로 바로 이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쇼와(昭和)라는 시대에 걸쳐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뿐만아니라 ‘동석대면오백생(同席對面五百生)’이거늘, 같은 국토·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서로 자리를 함께 하고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500년생에 걸친 양연(良緣)·가연(佳緣)·기연(奇緣)을 쌓지 않는다면 결코 서로 이룰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고맙고 신기하게도 오늘 이 자리에서 서로 만나 문제도 신기하게도 다름 아닌 ‘내선일체’라는 문제로 한쪽은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듣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이를 이야기하고 또 듣는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는 쪽인 나는 때로는 슬퍼 외치기도 할 것이고 또 뜨겁게 외치기도 할 것이며, 때에 따라서는 어쩌면 너무 감개무량해서 소리 내어 우는 일도, 거짓으로 우는 일도 있을지 모르겠다.
듣는쪽의 여러분은 때로는 재미있다며 흥을 내거나 때로는 슬퍼다며 얼굴을 찡그리고, 때로는 가슴이 벅차거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때에 따라서는 어쩌면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는 일이 없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신비롭고 미묘하고 고맙고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오늘 이 자리 이 기회라는 것은 일찍이 영원한 과거에 없었음은 물론이고 유구한 미래에도 없으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눈물 없이는 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여러분은 어떤가. 이런 심산으로 이 이야기를 듣고 나 또한 이런 심산으로 이야기를 하고, 이윽고 이 인연의 햇빛 아래에서 크게는 우리 일본에, 멀게는 우리 미래의 자손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인연의 종자를 하나 뿌리지 않겠는가.
10.
이상은 지금 현재의 내 인사이자 술회였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말한 이야기의 요점 대부분은 앞선 선배들의 의견에 근거를 둔 것으로, 횡으로 넓히고 종으로 늘린 것이 실은 내가 앞서 세상에 발표한‘사실에서 본 내선일체(史實から見たる內鮮一體)’였다.
그리고 여기서도 다시 반복하겠는데,報國心晈際, 念時涕汎濫이다.
나는 불가사의하게도 이 일본이라는 나라, 현대의 치세에 태어나 이미 인생행로의 50 고개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생불여인, 사당보국(生不如人, 死當報國)’이라는 부족하면서도 미덥지 못한 일념에서 저 보국의 마음, 자손에 대한 우려, 시대를 염려하는 눈물에서 나오는 주장이지, 결코 다른 뜻은 없음은 오로지 우리 일본의 신들과 내지인과 조선인의 공동 조상들의 영령에 있어서만 이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원고는 실은 지난 1월 18일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할 예정이던 원고로서 펜을 든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방송 직전에 원고가 바뀌게 되면서 십분의 일도 내 생각을 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위 분들에게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감히 총독부의 기관지 '조선(朝鮮)'의 귀한 지면의 몇 페이지를 빌리게 된 것이다.
<출전 : 金聲律, 「余の考へる內鮮一體」 '朝鮮' 286號, 1939년 3월, 25~35쪽>
2) 내가 지닌 내선일체의 신념
고하나조노천황(後花園天皇)26)의 어제(御製)
“오로지 생각건대, 하늘에 하나의 태양의 근본이니 또한 뛰어나게 태어나온 몸을”
이라고 우러러 성지(聖旨)를 복제(服臍)하므로, 실로 감격에 충만한 기지(氣持)로써, 이 황기(皇紀) 2600년27)의 새로운 봄을 맞이하였다.
호소카와 다카시고토(細川幽齋)28)의
“일본이 빛을 비추어 쫓게 되니 중국(支那)까지도 봄이 시작되겠지”
<출전 : 金聲律, 「我の抱く內鮮一體の信念」, '內鮮一體' 第2號, 內鮮一體實踐社, 1940년 2월, 15쪽>
5. 김한경(金漢卿)
1) 동양문화와 일본정신
동양사상이란 동양인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배양된 사회관·인생관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의 동양사상은 일종의 독특한 내용과 체제를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동양사상의 외침은 서양문화에 대한 방어적 투쟁을 의미한다.
서양사상의 본질을 꿰뚫고 그 장점과 결함을 일단 인식하고 난 뒤 동양인 자신이 외치는 자각의 발현이다.
따라서 그것은 서양문화에 대한 결정적 선전(宣戰) 내지는 그 필연적 극복 가능성을 선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18~19세기의 세계문명사는 동양이 서양에 정복당하고 추종되고 예속되는 과정이었다.
세계사의 전면적인 발전 속에서 동양적 요소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동양인의 생활의 전면적 변혁-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변동은 적어도 그 원인이 동양인 자신의 자기모멸·자기소외, 즉 동양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포기와 서양문화의 근대문명에 대한 망아적(忘我的) 심취와 맹신에 있었
26)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8~1573) : 아시카가시대(足利時代)라고도 한다. 제102대 천황(재위 1428~1464)으
로, 아시카가 히코히토(足利彦仁, 1419~1470)를 말함.
27) 1940년.
28) 호소카와 다카시고토(細川幽齋, 1533~1610) : 호 현지(玄旨). 전국시대의 무인. 와카(和歌) 시인, 학자.
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동양과 서양은 상고시대와 중고시대를 통해 오랫동안 각각 서로 다른 생활양식·정치조직·문화체계 등을 지니고 각각 다른 코스를 걸어가고 있는 현대-18~19세기, 세계 교통망의 완성과 그에 따른 선진국들의 동방통치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체로 서로 다른 핵심과 형태로 발전해왔다.
특히 세계문화의 역사적 연원은 대개 동방에서 나왔다.
오늘날 세계에서 말하는 3대종교, 즉 기독교·불교·유교 등의 방대한 관념체계도 기원은 모두 동방의 고대문명권, 유대,
인도, 중국 등의 민족들에 의해 양성·발전되어온 것이다.
또 과거의 동양인은 그 생활상의 도구·장식·건축·회화 등의 문명적 발전에서 서양 국가들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고대의 동양인은 단지 정신적으로 서양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더 진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고대에 우수한 문화와 생활사를 지닌 동양인이 근세 이래 찬란한 전통과 확고한 지위를 완전히 서양문화에 빼앗겼고, 일체의 고전적 요소가 세계문화사 속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일종의 역사의 얄궂은 장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모든 개인이 경력을 중시하는 것처럼, 국가와 민족의 경우에도 그 나라 특유의 역사와 전통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세계의 그 어떠한 위대한 국가도 자국 고유의 역사와 전통을 완전히 동떨어져 일어난 사례는 없고, 역사상 그 어떠한 위대한 정치가라 해도 정복한 국가의 전통과 문화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자신의 영구적 안정과 번영을 기대할 수 없었다.
고대적으로는 칭기즈칸이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을 석권한 것은 그 한 예이다.
근대적으로는 영국의 중국 통치가 그 한 예이다. 그들은 모두 일시적인 무력전으로 타민족을 정복·제압했다. 그렇지만 그 민족을 영구히 자신의 협력자로서 동일 정치체계 아래 동일한 경제적 모태와 문화적 온상 위에 완전히 융합·동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근고(近古) 중국에서의 원나라·청국의 한족 통일은 완전히 다른 코스를 걸어왔다.
그들은 모두 당시 중국 변방의 일개 호족(胡族)으로서 궐기해 일단 정치적으로 중국을 석권한 이후에는 한족의 문화와
한족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했다. 그 치국제민(治國濟民)의 엄청난 계획은 완전히 중국의 전통적 규범을 그대로 적절히 계승해 그와 같이 위대한 중국 본토에서 오족협화(五族協和)의 통일왕조를 실현시킨 것이다.
서양의 근대문명은 물론 위대함에는 변함이 없지만, 정치상의 데모크라시나 경제상의 기계생산, 문화상의 리버럴리즘의 사회관념 등은 오랫동안 침체를 거듭하면서 거의 그 진수를 상실해왔다.
근세적인 동양문화에 비해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동양인이 이러한 서양문명의 동방 병탄(倂呑) 과정에서 무조건적으로 굴복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양인으로서는 불가피한 필연과정인 동시에 동양의 장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 국가들이 이러한 문명을 동방에 살포(撒布)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동양인 고유의 오래된 문화와 뿌리 깊은 정신적 전통을 전부 무시하고 오직 서양문명의 주입과 추종을 강요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동양인 입장에서는 억압자·지배자·기만자였다.
결코 동양인을 위해 향상과 발전을 지향하는 협력자·동반자·선각자로서의 지도적 역할은 하지 않았다.
이는 말할 것도 업이 서양인 자신의 동방진출의 출발점이 전적으로 이기주의 입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은 동양의 우리와는 언어·문자·풍속·습관 등이 완전히 다른 인종이기 때문에 사실상 동양인의 진정한 협력자·동반자가 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동양은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이 서양에 대한 불평등적 지위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피정복자·피간섭자로서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점차 자신을 올바르게 비판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을 살리는 동시에 자신을 넓혀가야 함을 완전히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날 동양인은 단지 서양문명에 대한 염증과 증오를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서양문명과 대립, 아니 서양문명의 적극적인 극복을 목표로 싸우게 되었다.
그 만큼 동양의 민족들은 자각했고 동양의 실력은 서양과의 대립·항쟁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함양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동양인은 더 이상 서양문명의 단순한 수입·흡수·이식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 서양문명에 대한 현혹과 추종과 망아적 심취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그보다 오히려 서양문명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장점과 결함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규명해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는(棄短取長)’ 선택과정을 통해 기존의 서양인식에 근본적인 시정을 가해야 하는 단계에 당면하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계는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양문명의 부흥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점, 그 고전적 요소를 세계사의 창조과정 속에 융합·조성해야 할 신기원적(epoch)인 문제가 새로이 전개되고 있다.
한쪽 바퀴의 세계사는 이제부터 양쪽 바퀴로 달리게 되었다.
이제 세계사는 동서양 두 문명의 완전한 융합에 의해서만 움직일 것이다.
지금까지 등한시되어온 동양문명의 요소가 무럭무럭 생장해서 서양문명의 수준을 하루빨리 뛰어넘어 저 견고한 벽을 깨부수고 양자 모두 완전한 일원적 체계 아래 화합·통일되어야 한다. 우
리는 이와 같은 중대한 모멘트에 직면한 것이다. 동양에서 삶을 누리는 자는 누구든 간에 세계사의 새로운 동향을 올바르게 응시하고 그 문제의 제기자가 누구이고, 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가 누구인지를 일체의 편협한 전통 관념이나 왜곡된 민족의식 등에 구애받지 말고, 공정한 비판적 척도를 갖고 제대로 판단하는 동시에 그 올바른 발전을 위해 강력한 협력자로서의 빛나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동양인으로서 서양문명을 누가 가장 깊고 넓게 섭취했고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또 동양문명의 고전적 유산을 누가 가장 풍부하게 수집하고 과학적으로 정리해서 새로운 체계 아래 재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충분히 연구하고 천명해야 할 것이다.
이런 능력의 소유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다. 함부로 자신의 모국이라고 해서 편중된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거리를 둔 객관적 견지에서 나오는 공평한 견해이다.
옛날 중국의 공자는 관중(管仲)의 공을 칭송하며 “만약 관중이 없었다면 중화(中華)인 우리는 모두 ‘피발좌임(披髮左袵)’29)의 오랑캐 무리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근세 동아에서 만약 일본의 독립과 동양옹호를 위한 싸움이 없었다면 우리 동양은 광막한 유럽산 양떼로 인해 황폐화된 하나의 거대한 초원·목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구미의 검은 눈, 빨간 머리, 융복(戎服), 격설(鴃舌)30) 신사(紳士)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고, 그들의 압제와 착취에 영구히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동양에서의 일본의 존재 의의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일본은 문화적인 면에서 두 가지 역할을 했다. 하나는 구미문화를 포화 상태에 이를 때까지 정밀하게 흡
29)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의미로, 미개인의 풍습을 말함.
30) 거위의 혀 놀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인의 말을 낮잡아 이름.
수해서 자신의 태내에 완전히 소화한 점, 다른 하나는 동양인 고유의 고전문화 요소를 널리 수집해 정리한 동시에 완전한 종합·집대성을 위해 계속 노력한 점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러한 방대한 작업이 완성 단계에 달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위대한 원동력이 충분히 함양되었고, 또 동서 문명의 소재들이 일본적인 독특한 형태로 올바르게 세련·정제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일본은 장래의 동양문화의 분화구라 할 수도 있다. 즉 일본에 함양된 동양문화의 저력은 그야말로 전 세계를 향해 그 찬란한 빛을 비추고 대지를 뒤흔들어 놓을 대명동(大鳴動)을 일으킬 때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고 없고가 아니다. 현재 실제로 있지 않은가. 만주사변이나 ‘지나사변(支那事變)’31)은 일본의 정치·경제의 신체제가 세계를 향해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세계 역사상 위대한 신 분야, 신 체계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구안지사(具眼之士)로서 이 생동하는 동아의 신 동향을 부정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이러한 일본의 신기원적인 신 발전을 저지하는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일본은 결코 단순한 동양문화의 집성자(集成者)가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인생관·우주관은 그 자체로서 세계에 비할 바 없는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말하는 일본적인 사상·일본정신이라는 것은 결코 외래문화의 종합·집성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독특한 내용을 지닌 것으로, 구미인의 사상·관념 등과는 다른 것은 물론, 같은 문화권 내에 속하는 인도·중국 등의 사상·관념 등과도 근본 핵심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황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관, 인생관, 우주관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구미 각국이나 인도·중국 등에서는 국가와 국민이 있고 그 통치자로서 왕실이 있지만, 일본은 그것과는 달리 황실이 있고 국가와 국민이 있으며, 국토와 자연이 탄생했다는 독특한 관념을 소유하고 있다.
게다가 그 황실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을 갖고 있으며, 또 그 국민은 역대 천황의 큰 성은으로 훈육·생장
한 적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부터 이런 관계를 ‘정칙부자(情則父子), 의칙군신(義則君臣)’이라는 특수한 천륜관(天倫觀)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고사기(古事記)'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參神作造化之首, 陰陽斯開, 二霊為群品之祖, 日月彰於洗目, 神祇呈於滌身 (중략) 因本教而識孕土産島之時, 頼先聖而察生神立人之世.
보라, 이것이 일본인의 독특한 우주관이다. 그렇다, 일본에서도 우주의 근원은 신에 있다.
신에 의해 인간이 탄생했고 국토와 해와 달이 만들어졌다. 이런 점에서는 구미 각국이나 인도·중국 등의 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주의하라. 이 신, 일본인이 말하는 신은 황실의 신…… 만세일계의 황실의 ˙ ˙ ˙ ˙ ˙ ˙ ˙ ˙선조이신 신 ˙ ˙ ˙ ˙ ˙ , 즉 ‘신인일체(神人一體)’의 신이시다. 이런 점이 다르다. 이것이 일본인이 세계에 자랑하는 유사 이래 일관된 독특한 황실 중심의 우주관·인생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정신은 앞서 말한 것처럼 두 가지 방면이 있다.
즉 하나는 일본인 특유의 인생관·우주관에 의해 관철된 일원적 방면의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두 문명의 정수를 발췌하고 모아서 자신의
31) 중일전쟁.
것으로 섭취·소화하여 장래 세계의 지도 원리를 제시하기 위한 소지를 만든 종합적 방면의 요소이다.
여기에 만방에 비할 바 없는 일본정신의 특수성이 있고, 중외(中外)에 널리 베푸는 일반적 보편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일체의 시국적 임무 중에서 이 일본정신의 올바른 파악과 세계를 향해 일본정신의 분기·앙양을 도모하는 것 이외의 중대 임무는 없을 것이다.
<출전 : 金漢卿, 「東洋文化と日本精神」, '東洋之光' 1939년 2월호, 50~52쪽>
2) 일본정신의 정화
속설에 “소경의 단청구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필자의 이글은 소경의 단청 설명일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일본정신에 대하여 투철한 실견득(實見得)이 없다는 것을 미리서 고백하여 둔다.
일본정신이 반도인의 지도적 생활이념으로 제시 된지는 그다지 오래지 아니하다.
또 반도인 자신이 그 정신을 알려고 노력한 시간도 또한 그다지 멀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나의 일본정신에 대한 이해는 너무도 유치(幼穉)하고, 박약한 정도에 지나지 못함을 극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일본정신은 우리의 순유(順臾)라도 떠날 수 없는 엄격한 역사적 과제이며, 코스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시국적 모토가 아니다.
더욱이 어느 일부의 인사가 백안시하는 것과 같은 권력에 추수하는 요구도 아니다.
우리는 일본정신을 일본민족의 편협한 국수적 정신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하등의 교착된 전통감정이나,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정신은 일본민족의 정신이다.
이 사실은 결코 부정치 못한다. 또 부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느 개인, 어느 민족이라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호오의 감정으로써 그 대상자체가 제기해주는 보편적, 혹은 객관적 진리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만일 있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편견이요, 용허(容許)치 못할 독단일 것이다.
뉴톤의 인력설과 코페라뉴크스의 지동설이 과학사(科學史)상에 점유한 지위는 뉴톤과 코페라뉴크스에 대한 애악의 감정에서 좌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스미스의 부국론과 맑스의 자본론은 민족과 개인의 국부적 감정을 떠나서 세계적 규모에서 전파되고, 연구된 사상이요, 학문이다.
일본정신이 일본민족에 의하여 제기된 세계신질서건설의 이념이라면, 그리고 그 내용이 진정한 원리의 핵심을 함축하고 있다면, 우리는 왜곡된 적개심과 교착된 감정을 떠나서 충심으로 탐구하고 체현할 필요가 있을 줄 안다.
그것은 문화의 양심상 피치 못할 욕구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본질과 현상과의 관계이다. 본질과 현상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본질과 현상은 한 개인의 사물을 구성한 두 개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법칙상으로는 언제이나 상반되는 작용을 가지는 때가 많다.
일본정신도 또한, 본질과 현상이 결코 일치되지는 못한다.
현상은 때때로 본질과 길항(拮抗)하며, 본질과의 구심적 관계를 구하여 말지 않는다.
금일의 현상은 명일의 본질을 발현키 위한 준비이며, 전단과정(前段過程)에 불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욱 순수와 충족을 요구하며, 부단히 발생장을 계속해간다.
물론 이는 부분에 있어서의 일시적 혼란은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일본정신의 본질을 왜곡히 평정할만한 가치있는 사실은 아니다.
우리는 국부(局部)를 떠나고, 현상을 떠나서 일본정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체현하기에 노력치 않으면 안된다.
물론 일본정신은 엄격한 의미로 보아서 하등의 ‘이즘’도 아니요, ‘이데아’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일개의 완성된 개념도 아니나, 법칙도 아니다. 말하자면 일본정신은 일개의 정신 즉, ‘스피리트’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자연적 성격이며 전통적 관념이며, 국가와 황실에 대한 숭고한 감정이다.
그러므로 일본정신은 결코 하등의 주의와 개념을 구성해있지는 아니하지마는 모든 주의와 개념을 그 기초 상에서 건설하고, 추출할 수 있는 원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어떤 학자는 “일본에 있어서는 학문으로써의 도가 존재해 있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일본정신의 원형을 지적한 말이니, 적어도 그 기원은 신화시대에까지 소급치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신화는 다른 민족의 신화와 비교해 보아서 극히 합리적이며, 낙천적이며 평화적이다.
희랍신화의 ‘크로노스’와 ‘우노로스’의 쟁투와 같은 야만적 요소도 없으며 유태신화의 ‘이브’와 ‘아담’과 같은 금욕적 신인상극(神人相克)의 관계도 없으며, 인도의 폐타(吠陀)신화와 같은 흉녕(凶嚀)한 질투와 죄(罪)얼이 반복된 사실도 없다. 일본의 고원신화의 정신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평화, 원융(圓融)의 특질을 현시하고 있으니, 례(例)하면 속순좌지남명(速順佐之男命)의 난행과 천조대신의 반호유거(磐戶幽居)와 같은 사실로 보더라도 그 내용이 극히 도의적이며, 평화적이며, 낙천적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더욱이 천수력남신(天手力男神)의 힘으로 일신(日神)이 다시 그 령자(靈姿)를 출현케 되었을 때, 군정(群精)이 상화(相和)하여 권선(勸善)의 가무(歌舞)를 연출하게 된 사실과 같은 것은 실로 아름답기 짝이 없는 세계적 명신화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도 일본에 있어서는 학문으로서의 도가 발생하기 이전에, 행동으로서의 도가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은 솔직히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유구한 역사를 일관해온 중핵의 정신은 ‘모랄리티’가 풍부한 도의적 관념이라 확인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신의 본질은 결코 도의적 관념만이 아니다.
일본정신의 진수는 도의보담도 조화에 있다.
일본민족은 대화민족(大和民族)이요. 그 민족정신은 고래로부터 대화혼이라 일컬어왔다.
그리고 화(和), 혹은 대화(大和)라는 말은 모순 혹은 파괴라는 말과 정반대이다.
사물을 시찰함에는 모순의 일면과 조화의 일면을 각각 공정히 관찰할 필요가 있으니 결코 모순과 조화가 대립되어서는 안된다.
또 조화가 있는 이상, 결코 모순과 대립될 수 없는 것이다.
조화는 언제나 각개의 모순의 존재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적인 화의 개념은 결코 동질적 사물의 균등조화를 의미함이 아니요.
말하자면 이질적인 각개의 사물의 처분적 융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과 조화를 절연(截然)히 분잡하여 양립관계에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정신은 우주와 인생을 일개의 조화로 본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 괴테는 그 해학이 넘치는 단편시 중에서 세계는 일종의 모순으로부터 성립되었다고 영탄(詠嘆)하였다.
사실 이렇게도 관찰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가 모순으로부터 성립되어있는 것은 부정치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시적해정(詩的諧精)을 떠나고, 사물의 일면적 고찰만에 편리치 아니하고, 우주 간에 충만한 모든 현
상을 전체적으로 또는 일층 고차적 견지에서 관찰한다면 우주는 확실히 일개의 조화의 관계로써 구성되어 있는 것을 주저 없이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관(試觀)하라, 우리의 안전(眼前)에는 모든 삼라만상이 각각자기의 특성을 구유(具有)하고, 천차만별의 양상을 정시(呈示)하고 있지 아니한가. 산은 높고 내(川)은 깊으며 불(火)은 건조의 작용을 일으키고 물(水)은 황윤(況潤)의 힘을 가졌으며, 낮(晝)은 밝고, 밤(夜)은 어두우며 대지는 후중(厚重)하고, 바람(風)과 구름(雲)은 경경(輕輕)히 떠돌고 있지 아니한가.
차등의 모든 자연현상은 서로서로 상극적인 모순관계를 가지고 도저히 상용(相容)치 못할 특성을 정시(呈示)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다시말하면 차등의 제자연은 일면 모순에 의하여 상지(相支)되어있는 반면에 기타 그 개개의 존재가 각각 원만히 조화되어 한 개의 우주라는 크나큰 ‘파노라마’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관은 결코 이같은 모순만을 편시(偏視)할 것이 아니요.
어제까지든지 그의 조화면의 전체적이요. 입적(立的)인 본연상을 관찰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모순은 조화와 비교해본다면 자연의 일면적 작용, 다시말하면 적아류(的亞流)의 현상에 지나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우주와 자연의 본질의 상은 아니다.
우주를 우주로써 성립케하는 그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오 기실은 조화이다.
없어서는 안 될 사물이 있을바 지위에 있어서 다 각각 자기의 성능을 발휘하고 다시 서로서로의 병존관계를 원만히 보지(保持)해가는 그곳에 우주의 조화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아간다면 모순도 우주구성 상 일개의 요소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나, 조화가 없이는 도저히 그 자체의 존재가 지속될 수 없는 것이 명백히 이해될 수 있을 줄 안다.
동시에 일본정신은 인화(人和)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자연계의 관찰과 같이 인간사회관계도 한개의 조화로써 규정하는 것이다. 화가 없는 곳에는 사회가 멸망하고 국가가 존립치 못한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기계의 사회이요, 동물의 사회의 불과할 것이다. 이상의 신화를 논함에 있어서도 화의 정신이 현현해 있었다는 사실을 대략 말하였거니와 신화시대 이후에 있어서도 일본의 역사는 화의 정신으로 일관하여 온 것은 부정치 못할 것이다. 정치, 문화, 학술, 어느 부면에 있어서나 화의 정신은 명백히 현시되어 있는 것이니, 례(例)하면 성덕태자(聖德太子)의 17조 헌법과 같은 고전은 화의 정치상의 원리를 가장 명백히 제시해주신 불후의 정치적 요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헌법 제1조에는 화를 귀중히 알고, 오역(忤逆)치 않기를 종지(宗旨)로 삼을 지어다.
사람은 다 당(黨)이 있으며 이를 초탈하는 자 드무니라.
이러므로 혹은 군부(君父)에게 불순하며 린리(隣里)에까지도 배타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화(上和)하며 하목(下睦)하여 사물을 화로써 요리한다면 사리가 스스로 통할지니 하사(何事)인들 불성(不成)이리오.라고 명시하여 주셨으며 또 그 제7조에 가서는 사람에게는 다 각각 그 임(任)이 있으니, 마땅히 그 맡은바 직책을 그르치지 말지어다.
대저 현철(賢哲)이 관에 있으면 송음(頌音)이 곧 일어날지며, 간자(姦者)-관에 있으면 화란(禍亂)이곧 빈번하리라. 세상에 생이지지(生而知之)하는 자- 적으니 능히 힘써서 성인을 이룰지니라.
사(事)의 대소를 막론하고 사람을 얻으면 반드시 다스리게 될 것이요. 시의 완급을 막론하고 현인을 만나면 스스로 통하나이다. 이로 인하여 국가- 영원히 안태(安泰)하며, 사직이 위태함이 없을지니, 이러므로 고대성세(古代聖世)에 있어서는 관(官)으로써 인재를 구하고 인으로써는 관(官)을 구(求)치 아니하리라.라고 가르쳐 주었다.
필자의 졸역(拙譯)이 원문의 본지를 해(害)치 않았는지 모르겠다. 독자 제씨(諸氏)의 현찰(賢察)을 바란다.
이상 양(兩)개조(個條)의 명문은 천고불마(千古不磨)의 일본의 치국(治國)의 대전(大典)이니 결코 평범히 간과할 수 없는 바이다. 동양의 정치철학은 ‘화’의 원리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원기(元氣)가 불평등이다.
또 각각 특수한 성격과 재능이 있어서 결코 일필(一筆)로써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우(智愚),현불초(賢不肖)와 강약, 교졸(巧拙)의 천질(天質)은 일개의 자연이다.
인간의 후천적 힘으로서 이를 개선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구극(究極)에 있어서 상대적 정도를 초탈치 못한다.
례(例)하면 금과 옥을 갈아서 그 질(質)을 더욱 순수케 하고 그 광채를 더욱 빛나게 할 수는 있으나 금을 옥으로 변하고 옥을 마류(瑪瑠)로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만큼 인간은 그 생리의 본연상이 결코 동일치 아니하며, 따라서 그 사회적 활동기능도 또 그만큼 종종의 차별상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지나에 있어서의 “순하인(舜何人), 여하인(余何人)”과 같은 잠언과 상술한 성덕태자(聖德太子)의 헌법 중 “생이지지(生而知之)하는 자 적으니, 능히 힘써서 성인이 되나니라.” 등등의 고훈(古訓)이 없는 바는 아니나, 그것은 결국 후진(後進)과 범인(凡人)을 격려하는 의미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인간은 누구이나 초인과 성자가 될 수있다는 교훈은 아니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자질과 성능(性能)이 다 각기 다르다면 이 천차만별로 다른 각개의 인간을 한사회, 한 세계에 병존케하고, 그 공동번영의 생활을 영위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곳에 곧 화의 위대한 역할이 있고, 효능이 있는 것이다. 우주가 일개의 ‘하모니’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이 원리는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일관되는 진리이다.
명치대제의 교육칙어 중에는 순수한 동양적인 화의 정신이 명백이 명시되어 있으니 가라사대 “너희들 신민은 능히 충(忠)하며, 능히 효(孝)하며, 형제상제(兄弟相悌)하며, 부부상화(夫婦相和)하며, 붕우상신(朋友相信)하라.”는 말씀이 계시니 이는 만고에 긍(亘)하고, 만라를 통하여 부정치 못할 인도(人道)의 원칙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개의 화의 관계에 불과하다.
화가 없는 곳에 충이 있을 수 없으며 효가 있을 수 없으며 형제와 부부와 붕우가 서로서로 그 있을바 지위와 직분을 다할 수 없을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동양의 윤리는 화의 윤리이며 도덕과 정치도 일개의 화의 발현에 불과하는 것이다. 지나의 고사(古史), 서경요전(書經堯典) 중에는 이같은 사실이 결코 적지 아니하다. 가라대 ‘이친구족(以親九族)’이니,‘협화만라(協和萬那)’이니, ‘여민족변시옹(黎民族變時雍)’이니 하는 사실(史實)도 이것이며,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전수심법(傳受心法)을 기재한 중용(中庸)과 같은 서(書) 중의 소위 “치중화(致中和), 천지위언(天之位焉), 만물수언(萬物首焉)”이라는 일절도 그것이며, “유능(有能), 비입(俾入)”라던가 “명명(明明),양측병(揚側陃)”이라는 일절도 그것이다. 모두 화의 윤리이며 화의 도덕이며 화의 정치이며 화의 우주관, 화의 세계관의 표현에 불외(不外)하는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동양의 정치철학은 그 귀취(歸趣)가화에 있으며, 요체가 또한 화에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현대구주정치가 중에서 화 혹은 인화의 문제를 중요히 평가하고 역설한 세가지의 예를 들어보리라. 이에는 양개의 전형적 정치가를 들 수가 있으니, 그 하나는 소련의 비조(鼻祖) 레닌이요, 다른 하나는 독일의 중흥자 히틀러이다. 양인은 다같이 우리가 이상하는 정치의 실현자는 못된다.
그들이 말한 정치론 중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약간의 어구는 모두 부분적 유이성을 말한 일례에 지나지 못한다.
레닌은 일찍이 그 조직 중에서 ‘정치는 일개의 심포니암’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진리이다.
피(彼)와 같은 철저한 모순의 세계관의 소유자가 어찌하여 이같은 조화론을 말하였는지 우리는 차라리 괴이한 느낌을 가지지 아니치 못하는 바이다. 사실 그렇다.
‘심포니암’이 대소, 강약의 제음절을 한 개의 악곡중에 교묘히 조화하여 전체의 미음(美音)을 구성하듯이 정치는 원래가 대소, 강약, 빈부, 현불초(賢不肖)의의 모든 인간이 다 각각 그 있을 바 지위에 있어서 응분의 활동을 하는 동시에, 서로서로 병존관계를 원만히 보지(保持)하여 일정한 중심 시스템에 혼연히 일치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대소를 동격화하는 것이 아니요, 빈부를 영원히 절멸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원래가 불가능의 사실이다.
요컨대 문제는 대소와 빈부가 그 있을바 지위에서 무리가 없는 공영을 실(實)을 제래(齊來)케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곳에 정치의 본령이 있다. 레닌의 이 말은 결코 정치의 조화미를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말하면 정상적 정치론은 아닐 것이다. 왜그러냐하면 피는 모순론자이요, 무계단 사회를 이상으로 하는 정치가이었던 까닭에 따라서 무계단(無階段)사회에는 조화의 대상이 없을 것이요, 또 모순을 통하여 세계를 보는 피의 안중에는 정치를 한개의 ‘심포니암’과 같이 시설하기를 당초부터 거부치 않을 수 없는 견지에 서있는 까닭에 사실, 피의 정치론은 투쟁이 제일차적 의의를 가졌다.
세계의 변혁과 사회혁명이 모두 투쟁을 통하여 실현된다고 부르짖었다.
투쟁이 없는 곳에는 발전이 없다고 고조(高調)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모순제일주의인 것이다. 모순에서 출발하여 모순으로 자멸하는 것이 피(彼)의 정치론의 숙명일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일 피의 정치적 ‘심포니암’설을 고(考)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정치의 일부적 진리를 교묘히 표현한 어구의 매력에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의 이 말은 결코 일반정치의 원칙을 지적하였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장시의 볼세비키 운동의 종합적 통일의 필요를 역설한 데 불과한 것이다.
모든 운동이 일정한 중심적 지도부의 통제하에 원활히 조정되기를 요구한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피의 ‘심포니암’설은 투쟁의 일층성으로서 투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역설한 것으로 이해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정치의 종합미를 무시한 반어적 표현인가. 우리는 그 말 그대로를 끌어서 보편적인 정치의 원칙을 반증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다음 독일의 히틀러의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히틀러는 그의 저(著) '나의 투쟁ꡕ'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의 모태인 국가의 융융(隆隆)한 시기는 오직 그 국민의 최고수준에 있는 자가 그 국가를 지배하는 때에 오는 것이다.”
“국가의 정상적 발전의 시기는 중간군의 세력이 평충(平衝)을 보지(保持)하는 때에 출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였다. 실로 명언이 아닌가. 독일의 현상이 과연 이 말과 같이 순조(順調)의 발전을 수(遂)하며 있는지 아닌지는 별 문제로 하고 이 말만은 훌륭한 진리인 것이다.
제일로 우리는 피가 이 말 중에서 인간의 주동적 역할을 높이 평가한 점에 대하여 다대한 찬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유물사상이 범람한 오늘 날 제국(諸國)의 의회가 그의 본래의 기능을 전연 상실하고 있는 이때를 당하여 피의 이말은 실로 경세적 통봉(警世的 痛棒)이라 이르지 아니치 못하겠다.
제이로는 피가 국가의 융체(隆替)와 인물의 진퇴관계를 연관적으로 파기한 점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아무리 시세가 좋고, 환경이 유리하다 할지라도 열등의 인간이나 패덕자(悖德者)가 정권을 전천(專擅)하게 된다면 그 국가의 장래는 사실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없을 것이다.
시대로 보아서 고금이 다르고, 지역적으로 보아서 동서가 판이하지만은 피의 이 말은 우리 동양의 정치철학과 그 기저를 같이하는 것이다.
가령 예(例)하면 상술한 성덕태자의 개화헌법 제7조의 내용과 지나서경(支那書經) 중의 ‘명명양측병(明明兩測陃)’이라는 어구와 저 히틀러가 말한바 인물과 국가의 평형관계와를 통합하여 본다면 그 의미가 얼마나 정연히 부합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하여 일종의 신비감을 갖을 수도 있다. 동시에 이것은 모두 화의 보편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재료로서 정당히 취급할 필요가 있을 줄 안다.
그런데 이에서 문제되는 것은 일본적인 화와 지나의 소위 중화(中和)의 도와 구주인의 소위 화에 유사한 정견과 같은 것이 여하히 다른가하는 점에 대해서이다. 일본적인 화는 이질적 요소의 존재를 전제로 한 화이다.
결코 구라파류의 기계적 혹은 종합적 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이며 포핵적(包核的)이며, 보편적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화를 존중하되 일정한 중심적 추축이 없는 개인본위의 인화관계는 이상으로 하지 않는다.
유능한 소수자의 능력을 무시하는 반면에 가수자의 조직만은 만능시하는 인화의 이상은 역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화’는 그 본래의 성질상 종종의 이질적인 요소의 동화를 전제로한다.
이미 이질적 요소의 동화가 전제되는 이상, 그 동화를 요리할만한 능동적 주체가 존재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모든 이질적 인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근본적 핵심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중핵이 없는 한 결코 능동적인 화의 관계는 조성될 수 없는 것이다.
중핵이 없는 화는 성립될 수가 없으며 설사 어느 정도까지의 성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기계적인 집합관계에 불과할 것이요, 결코 진정한 화의 본자(本資)는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인화관계는 일정한 중핵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조화관계가 아니면 안된다.
그것은 모든 다른 인자를 융합하고 허다한 촉순관계(燭盾關係)를 조정하는 근본적이며 능동적인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은 여실히 인정하고 그의 조정과 융합을 꾀하는 화의 원리인 것이다.
막연히 무제한 또는 중심이 없는 화의 관계를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요, 일정한 질서를 구비하고 말 호불접(乎不接)의 중핵을 포섭하는 화의 관계만이 문제시되는 것이다(이 점, ‘확호부접(確乎不接)의 중핵’에 있어서 지나의 중화정신(선양방벌(禪讓放伐)을 시인하는 이념)과 근본적으로 다른것이다).
지구는 간단(間斷) 없이 회전한다. 그러나 지축이 없이는 결코 회전치 못한다. 묘자(卯子)의 부화(孵化)는 황백(黃白)의 내포의 전적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생명적 요소 없이는 결코 부화를 성취치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썩은 난자(卵子)가 부화되었다는 사실은 듣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사회관계도 이와 흡사하다.
국가는 영원히 도귀(導貴)한 주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며 단체는 언제이나 우수한 지도자의 출현을 요망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조정한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모든 조건을 요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수한 인간이 열등의 인간을 지도하며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방위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이리하기 위하여는 차등(此等)의 인간이 일정한 질서에 의하여다 각각 적당한 ‘포지션’에 배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피등(彼等)이 다 각각 그 천분을 다할만한 지위와 권능에 참여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물질에 있어서도 동양(同樣)의 이법(理法)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이 물자에 지배되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부당한 일이다.
근대의 과학자는 물질의 법칙과 인간의 사회생활의 법칙과를 전연 무차별적으로 취급하여왔다.
인간이 물자보다 하위로 평가되어 물질에 지배되는 법칙을 창도(唱道)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은 그 자신이 물질적 제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동시에 단순한 물질과는 판연히 다른 생명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까닭에 물질을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리오.
이 점을 간과하고 어찌 인간의 사회생활의 법칙을 물질계의 법칙과 전연무차별적으로 취급할 수 있으리오.
그것은 결코 진실한 객관성에 통투(通透)한 인간의 학문이 아닐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결론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이 귀납되지 아니치 못한다.
즉 우리가 목표로 하는 화의 세계의 개념은 제일은 광범한 포섭성을 가질 것, 제2는 인간을 능동적 주체로 인정할 것,
제3은 영구적인 일정불변의 중핵의 존재를 전제로 할 것, 이상의 3개의 요건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고에서 순수한 화의 작용이 일어나며 자연적인 화의 본질이 들어나는 것이다.
무리가 없는 순정(醇正)한 화의 국가가 출현되고, 화의 세계가 구성될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일본적인 화의 이념이 발현되는 것이다.
일본정신은 일개의 화의 정신이다.
이상과 같은 특수한 전형을 갖은 화의 정신이다.
일본의 역사의 이면에는 이 정신이 활만(活漫)한 저류를 형성하였다.
정치에 있어서 그러하며, 문화에 있어서 그러하다.
동시에 이제부터 장래의 정치와 문화가 또 그러할 것이며, 또 그렇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일본적인 화의 정신에는 언제나 상무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적인 화는 지나와 구주제국(歐州諸國)의 화의 그것과 같이 결코 문(文)에 편중된 화가 아니다.
일본은 원래가 상무국(尙武國)이다.
신사에는 ‘황혼(荒魂)’이 봉사(奉祀)되어 있으며, 수리고성(修理固成)의 대명(大命)에도 ‘천지소제(天之沼弟)’가 먼저 수여되었으며, 천계강림(天係降臨)의 제(際)에도 무신(武神)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신무천황(神武天皇)의 동정(東征)시에도 무(武)를 행한 사실이 역력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로 보더라도 일본적인 화의 정신에는 언제나 상무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 명백한 것이다.
물론 일본에 있어서도 결코 문을 존중치 않은 것은 아니나 타국의 사실과 비교하여 본다면 이같은 결론은 가장 정당하다고 용허할 수 있는 바이다.
동시에 일본에 있어서는 고래로 문무합체를 존중해온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에 대하여는 호개(好個)의 고증적 사료가 있으니, 그것은 곧 저 유명한 수호학파(水戶學派)의 연원인 홍도관기(弘道舘記)의 일절(一節)이다. 홍도관기는 전문 491자로써 조성되어 있는 일본역사상 가장 간명, 직재한 정치상의 귀중한 문헌이다.
그 기(記)의 전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一節)이 있다.
즉, “……충효무이(忠孝無二), 문무불기(文武不岐), 학문사업불수기효(學問事業不殊其効), 경신숭유(敬神崇儒), 무유편당(無有偏黨)” 운운이라 하였다. 보라, 충효무이, 문무불기라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문무합체의 정치의 이념이 명백히 게시되어 있지 아니한가. 성덕태자의 개화 혁신의 이념과 덕천(德川)시대의 홍도관기의 진정신(眞精神)이 얼마나 진부(眞符)를 합함과 같이 전연 일치되었는가.
이것이 문무합체인 것과 같이 일본의 문화는 유불동화(儒佛同化)의 신도문화(神道文化)인 것이다.
신도(神道)는 결코 유불에 대한 편당(偏黨)을 인정치 않았다.
다 각각 그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제거해 버린 중에서 다시 일절을 인용해 보리라.
성덕태자전 보주(補註) 중에는 “신도는 도의 근본이니 천지와 같이 일어나서 사람의 시도(始道)를 말하였고, 유도는(儒道)는 도의 지엽(枝葉)이니 생려(生黎)와 같이 일어나서 사람의 중도(中道)를 말하였고, 불도는 도의 화실(華實)이니,
인지숙(人智熟)한 연후에 일어나서 사람의 종도(終道)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구태여 이것을 증(憎)하고, 이것을 오(惡)함은 곧 사정(私情)일지니라.”이렇게 말했다.
이 태도는 일본인의 문화건설의 근본태도이다.
그리고 그것은 화의 정신의 소이(所以)인 것이다.
확호부발(確乎不拔)한 중핵의 존재를 포섭하는 일본적인 화의 정신이 있는 까닭에 저같은 특수한 문화건설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기본태도를 잃지 말고, 아니 보다도 더욱 확충해 가면서 일본적인 ‘화’의 정신을 동서문화의 각개의 유형 중에 산생명으로써 주입시키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일본적인 화의 원리로써 각개 유형의 문화를 용해, 주성(鑄成)하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적인 국가학과 인간학의 산모형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세계적인 신질서와 세계적인 신문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묵은 국가관의 파탄과 붕괴된 인간학의 폐허 위에서 미증유의 대혼란을 경험하며 있다.
일본인의 신문화건설의 시각은 이 현실에서 규정되고, 이를 초극하며 조정할만한 방법과 체계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반도인의 임무도 또한 이에서 규정되고 출발되어야 할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출전 : 金漢卿, 「日本精神의 精華」, '朝光' 第6卷 第12號, 朝鮮日報社出版部, 1940년 12월, 124~134쪽>
6. 박관수(朴寬洙)
1) 국민교육과 의무교육
경기고녀교장(京畿高女校長) 금천관(琴川寬)32)
1.
조선에서도 1946년부터 의무교육이 실시된다하니 듣기에 반갑기 한량(限量)이 없다.
그러나 쉽게 의무교육의 실시라 하지마는 여기까지 밟아온 길을 돌이켜 본다면 적지 아니한 고심과 노력이 있었으니
당국에 대하여 고맙게 여길 것이요, 또 이다음 의무교육이 완전히 실시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32) 박관수(朴寬洙)의 창씨명.
2천4백만 민중은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서 길이 영광을 누리도록 힘쓸것이다.
대관절 의무교육이니 국민교육이니 하는 것은 무슨 교육을 말하는 것이냐.
이는 쉽게 말하자면 자녀를 둔 부모가 나라에 대하여 그 자녀를 훌륭한 국민으로 나라에서 요구하는 교육을 시킬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이 자식을 내가 학교에 보내던지 아니 보내던지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내 멋대로 할 일이지’ 한다면 이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말 못 되는 소리다.
사람이란 삼신님의 손에서 사람의 손에 떨어지자 곧 국민의 한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국민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내 부모가 아무리 못났어도 남의 좋은 부모와 바꿀 수 없고, 내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부잣집 식구가 될수 없는 것과 같이 제멋대로 나라를 버리고 사회를 떠날 수 없다.
누구나 다 국민으로서만 살아나갈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세계에 둘도 없는 훌륭한 나라다.
이 훌륭한 나라 백성이 된 것은 한없는 영광이다. 우리자녀들은 폐하의 적자요, 나라의 보배 된 영광을 누렸다. 폐하의 충량(忠良)한 신민이 되고 나라에 훌륭한 국민이 되도록 우리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우리 부모 된 사람들의 마땅한 의무라는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이 아니냐.
따라서 내 자식이라고 내 멋대로 사사로이 할 것이 아니고 꼭 충성스럽고 훌륭한 국민을 만들어서 나라에 바쳐야 될 것도 분명히 알 것이다. 이만하면 의무교육, 국민교육이 무슨 뜻인가를 대강 짐작될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의무교육을 완전히 마쳐야 국민 된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을 완전히 받지 못하고는 호적상으로는 국민이라 할지라도 그 정신, 지식, 도덕으로 보아서는 아직 완전한 국민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이 교육은 나라의 손으로 나라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글방선생이나 교육 선교사나 절에 중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가르쳐왔지만 이 교육만은 나라에서 세운 학교에 나라에서 임명한 선생으로만 가르치도록 되어 있다.
사사로 하려면 나라의 허가를 얻어서 나라의 감독과 지도를 받아야만 된다.
또 이 교육은 아이들 장래에 벌어먹고 살아나갈 직업을 가르쳐준다거나 이이들이 성공하고 출세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혼을 집어넣어서 국민정신을 기르고 국민문화를 일으켜서 국민생활을 완전히 하게 하는 데 국가정신이 교육의 중심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천양무궁(天壤無窮)의 황운(皇運)을 부익(扶翼)33)하고 팔굉위우(八紘爲宇)의 조국정신(肇國精神)을 실천하게 하는 신민도(臣民道)를 중심으로 하고 늘 교육칙어의 성지(聖旨)를 받자와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신민을 단련하여 내도록 되어 있다.
2.
이 제도가 처음 시작되기는 서양 로마(希臘)라는 나라였는데 그 후 연대를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하였으나 볼만한 것이 없고 지금으로부터 약 3백년 이래로 새로운 나라가 생겨나오자 이 제도가 점점 완전하게 되어왔다.
나라가 왕성하여 가는 편으로 본다던지, 또 나라백성들의 행복스러운 편으로 본다던지 이 국민교육이라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알게 되었다.
이것을 맨 먼저 깨달은 사람은 지금 우리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독일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Friedrich)대왕이다. 즉 프로이센에서는 황기 2423년(서력 1763년)에 지방학사통칙(地方學事通則)이라는 교육령을 공포하여 아이들이 수학연령과 공부시간
33) 남을 거들어서 도와 줌.
과 부모 된 이가 그 자녀를 학교에 아니 보내면 상당한 벌을 당할 것과 선생은 오로지 학교일을 부지런히 볼 것 등 여러 가지를 정하여서 독일의 국민교육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 국민교육의 본이 되었다.
프로이센에서는 그 뒤 서력 1794년 보통법, 1825년 각령(閣令), 1850년 헌법, 1919년 독일헌법을 거쳐서1927년 의무교육법을 정하여 세계에 가장 본이 되는 국민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니 지방학교통칙을 공포한 뒤 150년을 지나서 간신히 완전한 의무교육에 이르렀다.
그리하고 독일은 지난번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에 새로운 정신으로 국민교육을 강하게 하고 현대에 와서는 히틀러 총통의 주의로 세계대전하, 독일혼의 국민교육이 가장 열렬히 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에 히틀러 총통의 국민교육에 관한 생각을 들어보자.
“우리는 나라의 첫 일로 가장 좋은 국민을 낳아 길러 키우는 데 힘을 쓰지 아니하면 안된다.
전 교육활동은 첫째로 몸을 튼튼히 할 것, 둘째로 마음을 단단히 할 것, 그중에도 의지를 강하게, 결단이 빠르게, 책임을 꼭 지키는 버릇을 기를 것, 셋째로 지식과 지능을 가르쳐주는 차례로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온 국민은 한사람도 책만 파먹는 책벌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독일국민에게는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을 아이들 머릿속에 깊이 넣도록 교육을 하여야 된다.
독일군대는 싸워서 진 일이 없다는 자신이 교육상 절대로 필요하다. 청소년이 학교를 마친 후에 계속해 몸과 마음의 단련을 받는 것이 나라에 대한 의무요, 나라의 손으로 이것을 실행하여야 된다. 이런 점으로 국민교육은 군대생활의 준비다.
그리하여 청년이 새로 군대에 들어가자 바로 그는 병사가 되어 버려야 한다.
군대는 조국의 최후 최고의 학교다. 군대에서는 필요한 무기 쓰는 법만 배울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 바른 생활에 대하여도 가르친다.
그리하여 군대생활이 끝나면 두 장의 증명서를 내린다. 하나는 공민권을 인정하는것, 또 하나는 결혼에 관한 건강증명서다.
독일민족으로 독일국가에 국적을 둔 청년은 모조리 국가에서 규정한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다.
또 시민 될 교육을 받는다.
학교교육을 마치면 체육상, 훈련을 받은 뒤에 군대에 들어간다.
이 군대교육이 끝난 뒤에 비로소 국가의 시민권이 가장 장엄한 의식 아래서 내린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일생에 가장 귀중한 것이다.
여기서는 시민이 가질 모든 특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시민은 다만 국적만 가지고 있는 국민과는 분명히 구별을 하여야 한다.”“또 시민증서는 민족과 국가에 대하여 신성한 맹서 아래서 줄 것이며, 이 시민이 되면 비록 똥거름을 치우는 인부라도 외국의 귀공자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이다. 우리나라를 지켜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기에 있다는 것보다도 국민교육을 완전히 받은 국민에 있다.
굳은 토치카34) 벽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미칠 듯 불타는 국민적 감정이 끓어오르는 남녀국민이 살아있는 벽이 되어야 나라를 지켜준다. 나라는 가장 마땅한 국민교육으로만 승리를 얻는 것이다.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 즐거이 죽을 땅에 가는 것은 조국에 대한 사랑, 조국의 위대함을 믿는 마음, 독일민족전체의 명예를 느끼는 마음을 길러준 교육의 힘이다.
만약 독일국민이 이 교육의 이상을 떠나서 무기를 버린다면 지상의 천국에 가는 대신, 모든 욕과 곤란과 죄 속으로 빠져버릴 것이다”라고 히틀러 총통은 말하고 나라의 보전을 오로지 국민교육의 힘에 두고 있다. 독일은 예전부터 국가의 흥망을 교육에 의지하여온 역사를 가졌다.
그중에도 국민교육을 더욱 중하게 보아 완비되어서 세계에 가장 본이 되어 있다. 독일의 국민교육을 시키는 학교는 예전부터 국민학교라고 불러서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곧 서력 1900년대에 벌
34) 콘크리트, 흙주머니 따위로 단단하게 쌓은 사격 진지.
써 국민개학(國民皆學)이 완전히 되어 공립학교 수 5만 9,348교에 사립학교가 640교, 장정시험에 나타난 결과를 보면 문맹이 겨우 0.04밖에 안 되는 좋은 성적을 보였다.
이것이 오늘날 영웅 히틀러가 부르짖는 나치 정부가 된 이후로는 더욱 발달이 되어서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있다.
3.
다음으로는 역시 우리나라와 동맹국이 되어 있는 이탈리아(伊太利)의 국민교육을 알아보자.
이탈리아 현대교육은 황기 2519년(서력 1859년) 11월 13일에 공포된 사르디니아 왕국 카사티 법률이 그 밑뿌리가 되어 있다. 이 법률은 프랑스법(佛蘭西法)을 본뜬 것으로 거의 완전한 것이 되어있다.
그뒤 60년 동안은 조금씩 개정하면서 시행하여오다가 서력 1922년 10월에 젠틸레가 파시스트 신정부의 교육대신이 되자 이 법률을 전체로 개정하여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한다.
이탈리아 교육제도는 중앙정부에서 감독하고 지도하는 직권을 잡고 있으며 학교 계통같은 것도 비교적 간단하고 순서 있게 되어 있다.
한 학교를 마치고 윗 학교로 오르자면 졸업증서 외에 새로이 나라에서 보는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의무교육의 나이는 법률상으로는 6세로부터 14세까지로 되어 있고 귀머거리 벙어리 같은 불구자는 16세까지로 되어 있다. 이 동안은 무료로 국가교육을 받는다.
무솔리니가 지배하는 신정부는 학령아동수가 15인 이상 14인 미만이 되는 촌락에는 반드시 단급학교(單級學校)를 두게 하고 학령아동수 15인이하가 있는 궁벽한 촌락에서는 교회당이나 공장 같은 집을 이용하여서 보조학교라 하고 의무교육의 보급에 적지 아니한 노력을 하고 있으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수효는 그리 늘지 아니한다고 정부에서는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라 한다.
이탈리아 초등교육은 예비, 하급, 상급 세 층계로 나누었는데 예비층계는 3세로부터 6세까지의 아이들을 넣는 유아원, 보육소, 유아의 집들인데, 종교(宗敎), 창가(唱歌),도화(圖畵), 직관과(直觀科), 체조 및 유희, 수공(手工), 원예(園藝)들을 가르친다. 1933년도의 아이들 수가 전국에 70만 5천여 명이다. 하급층계 3년, 상습층계는 2년 이 두 층계를 합하여 국민교육의 의무교육기관으로 하고 대체로는 6세 이상 11세 이하의 아이들을 넣는다.
가르치는 과목은 종교(우리들의 수신과(修身科)와 같음) 국어, 창가, 암송, 농업 및 공업, 직관과, 역사 및 지리, 법제 및 경제, 산술, 도화,이과(理科), 체조, 가사(여아)들이고 일주일동안 교수하는 시간 수는 각 층 25시간이며 교과서는 반드시나라에서 만든 책을 쓰게 하며 학년은 보통으로 해마다 10월 1일에 시작하여 그 이듬해 8월 1일에 마치게 되어 있다. 각 지방단체에서는 법률로 학교후원회라는 것이 되어 있어서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교육을 도와주도록 되어있다. 서력 1933년의 통계를 보면 아이들 수가 공립이 513만7천여 명, 사립이 15만5천여 명이다. 최근의 소식은 잘 들을 수 없으나 영웅 무솔리니의 통제로 일반국민에게 열렬한 조국애의 국민교육을 가장 중대히 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리고 무솔리니도 독일과 같이 국민교육에 청소년의 체육을 중히 여기고 군대교육을 엄하게 요구하고 있다. 체육에 관하여는 이탈리아 올림픽위원회가 주장(主掌)하며 또 ‘바리라’운동이라는 것이 있어서 청년단, 소년단의 애국적 훈련단체가 되어 체육상, 국사교육상, 중대한 임무를 행하고 있다.
종교교육은 우리나라의 수신도덕교육과 같은 것인데 특히 ‘카톨릭’교을 중히 하여 초등교육, 중등교육의 밑뿌리가 되어 있으며 학교교원을 임명할 때는 세계대전 전까지는 교회와 교육당국이 서로 협의한 뒤에 결정하였다 한다.
이탈리아에서도 국가의 발전과 전쟁의 승리는 국민교육의 발달에 맡기고 있다.
이외 열국의 국민교육에 관하여서는 지금 대전 중이라 새로운 자료를 얻기가 대단히 곤란하고 또 영국이나 미국 같은 적성나라의 것은 말하고 싶지 아니하기로 이만 그치고 우리나라 것을 상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4.
1869년에 각 부현(府顯)에 명령하여 소학교를 건설시켜서 그대로 실행한 것이 교토(京都), 도쿄(東京)를 비롯하여 23현이고 세운 소학교도 사소옥(寺小屋, 조선 서당과 같음) 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뒤 소학교의 시초가 된 것이다. 1872년 7월에 처음으로 유명한 학제가 발포되었다.
이 학제는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본 뜬 것이라 하는데 213장으로 되어 있다. 그 대강을 보면 문부성(文部省)에서 전국 교육을 모조리 돌보게 하고 전국을 8대 학구(學區)에 나누어(이것은 1873년에 7대학구로 개정하였다.) 각 구에 대학교를 한 학교씩 두고 1대 학구를 다시 32중학구에 나누어 각 구에 중학교를 한 학교씩 두고 1중학구를 다시 210소학구에 나누어 각 구에 소학교를 한 학교씩 두게 하여 소학교는 전국을 통하여 5만 3,760교를 두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당시 인구 약 6백 명에 대하여 소학교 한 학교씩 두는 비례가 되었다.
그리고 소학교는 상등(上等), 하등(下等)으로 가르고 재학연한은8년으로 하였으며 실과(實科)에 중점을 두고 만 6세부터 입학시켰다. 그러나 아직 의무교육까지는 못되었다.
이 학제는 질서가 정연되고 규모가 광대하였으나 너무 외국의 본만 보고 우리나라 자체의 사정을 덜 본 점이 적어서 그대로 시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맞지 못하는 점이 많았다. 그
리하여 1879년에는 이 학제를 없애고 새로 교육령을 내렸다.
이 교육령에는 공립소학교 수업연한을 8년으로 하고 지방사정에 따라서는 4년으로 줄일 수가 있도록 하고 그중 의무교육연한은 가장 빠르게 16개월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소학교는 각지 정촌(町村)으로 하여금 설립하게 하고 학교위원을 선거하여 학사를 감독하였다.
그뒤 1880년에는 의무교육을 3개년으로 늘이고 또 1881년에는 소학교교칙강령(小學校校則綱領)이라는 것을 발포하여 소학교를 초등(初等), 중등(中等), 고등(高等)의 3과로 나누었다.
1886년에 이르러 소학교령(小學校令)이 내렸다.
이에 보면 소학교의 설치, 구역, 위치는 부현지사(府縣知事)가 정한 곳으로 하고 소학교를 심상, 고등으로 나누어 각각, 4개년으로 하되 심상과 4개년으로 의무교육을 규정하였다.
또 지방경비를 덜기 위하여 수업료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대용소학교로, 2개년 이내의 간이과(簡易科)를 두는 길을 열었으니 이것은 조선에 있는 간이학교와 꼭 같다. 1900년에는 개정 소학교령이 발포되었다.
이것은 심상과 수업연한을 3개년 또는 4개년으로 하여 이것을 의무교육으로 하고, 고등과는 2개년으로부터 4개년까지 되었다.
그리하고 지방의 부정촌(府町村)은 아이들 공부시킬만한 소학교를 설치할 의무를 갖게 하였다.
이 법령에 가장 주의할 것은 그 제1조에 “소학교는 아동신체의 발달에 유의하고 도덕교육 및 국민교육의 기초와 아울러 그 생활에 필수한 보통의 지식지능을 가르침으로써 본지(本旨)를 삼는다”고 규정을 하였으니 이것이 소학교육의 목적을 똑똑하게 처음으로 정한 것이요, 또 이 목적이 그 뒤 수십 년 동안 국민학교가 되기 전까지는 국민교육의 밑뿌리가 된 것이었다.
또 1890년에는 저 유명한 ‘교육칙어’를 내리사 우리나라 국민교육의 근본정신이 명백하게 되었다.
1900년에는 소학교령 일부를 개정하여 의무교육연한을 4개년으로 하고 지방경제의 발전으로 보아 수업료를 받지 아니하기를 원칙으로 하였다.
교과는 독서, 작문, 습자를 국어에 모두고 한자수를 제한하고 가명, 글자 쓰는법을 고치고 또 교수시간을 줄이며 시험 보는 법을 고쳤다. 1907년에는 소학교령을 개정하고 그 시행규칙을 많이 고쳤으니 이것이 재작년 국민학교가 되기 전까지 행하여 온 것이다. 이것은 심상소학교 6개년을 의무교육으로 하고 고등소학교는 2개년이나 3개년으로 되어 있다. 그 뒤에 얼마간 변동은 있었으나 재작년 1941년 3월 칙령 제148호로 국민교육령이 내렸다. 이것이야말로 황국교육의 대도(大道)를 나타낸 역사적 법이다.
세계에 류(類)가 없고 만고에 빛나는 우리나라 국제정신은 이 국민학교령으로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 일본교육은 학제 반포한 1872년으로부터 70년에 비로소 우리나라 본 길을 밟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교육, 의무교육도 이로서 완성하게 되었다. 이 법령을 보면 초등학교는 황국의 도를 법 삼아 초등보통교육을 베풀고 국민의 기초적 연성(鍊成)을 함으로써 목적한다. 초등학교는 초등과 6년, 고등과2년 합 8년으로 의무교육을 정하였다. 교과는 국민과(수신, 국어, 국사 및 지리), 이수과(산수, 이과), 체련과(체조 및 무도), 예능과(음악, 습자, 도화 및 공작, 여아에는 재봉, 가사), 실업과(농업, 상업, 수산)들이다.
보호자는 아이가 만 6세 되는 익일 이후에 최초의 학년의 처음부터 만 14세가 되는 학년의 마지막까지 초등학교에 넣을 의무를 진다.
공부할 나이 된 아이들을 부리는 사람은 그 아이의 공부에 방해가 없도록 하라. 학교선생은 모두 교원면허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
시정촌(市町村)은 그 구역 안아이들을 공부시킬 초등학교를 설치하라. 이와 같은 완전한 교육법령으로 팔굉위우의 조국 이상을 짊어지고 대동아를 건설하며 세계의 신질서를 지도할 만한 신일본의 대국민을 길러내기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5.
조선에서는 이 국민교육이 어떠한 길을 밟아왔던가. 조선교육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와 교육칙어의 취지를 받들어 황국신민 된 본질을 갖추도록 합병이래로 힘써왔다.
그러나 교육이란 시세와 민도(民度)에 맞도록 하여야 됨으로 합병 처음에는 간이실용(簡易實用)을 주장으로 하여 왔다.
1911년 8월에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이 내리자 이것은 조선인에 대하여 덕성을 기르고 국어의 힘을 주어 일본제국 신민 될 자질과 품성을 갖추도록 하였다.
수업연한이나 입학자격 같은 것도 일본인에 견주어서 얼마간 정도가 낮은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 뒤 10여년을 지나는 동안 반도는 새로운 황은을 힘입어 문화는 해로 빛나고 민도는 날로 향상하여젓다. 그러므로 1922년 2월에 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인 교육의 정도를 높이여 일본인과 거의 같이 하고 내선인(內鮮人) 교육을 동일한 법령하에 통일하도록 했다.
단지 국어를 상용하는 자와 상용치 아니하는 자를 구별하여 그 언어풍습을 달리하고 장래의 생활상의 편리를 생각하고 얼마쯤 서로 다른 점을 두되 서로 입학하고 전학하는 길을 여러 조선인이 윗 학교에 나아가는 데도 큰 덕을 보았다. 이것을 신교육령이라 하여 반도민중은 정말로 즐거이 맞이하였다.
그러던 것이 만주사변이 난 뒤로 반도민중의 자각이 더욱 뚜렷하여지고 1937년 중일전쟁이 난 뒤로는 충군애국의 적성(赤誠)이 날로 열렬하여졌다.
그리하여 1938년 3월에는 칙령 제103호로 또다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보통학교라는 명칭까지 없애고 내선인이 꼭 같은 교육으로 소학교 교육을 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실적은 더욱 늘어났다. 황국신민 된 본질은 날로 굳어졌다.
최근에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성업이 나아감을 따라 우리나라 교학(敎學)의 본의와 황국의 역사적 사명에 깊이 생각할 바 있고 또 황국신민의 근본적 속성을 완전히 하기 위하여 ‘내지(內地)’35)와 거름을 같이하여 1941년 3월 25일에 칙령 제254호로 조선교육령을 세 번째 개정하여 초등학교제도를 실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맙게 여길 바이다. 당국에서는 시세의 진전과 민도의 향상됨을 따라 위에 말한 바와같이 그때 그때의 교육제도를 가장 맞도록 하여 오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보급에 힘써서 학교를 해마다 늘려왔다.
곧 1919년에는 3면 1교의 계획을 세워서 그해부터 4년 동안 3면에 1교의 비례로 공립보통학교 합 400교를 세우기로 하고 1922년에는 이것을 1면 1교의 계획을 세워서 1936년까지 8년 동안에 공립보통학교 수 1,014교를 더 세웠다. 1935년에는 제2차 초등교육 보급확충계획을 세워서 1면 1교의 계획이 완성되는 1936년에 잇따라 1937년부터 이후 10년 동안에 당시 입학지원자(入學志願者) 전부를 입학시킬 수 있도록 목표를 삼고 공립보통학교를 더 세우거나 학급을 더 늘리거나 하여 아이 수 76만3천여명을 더 넣고 간이학교 2천2백 교를 더 세워서 15만4천 명을 더 넣어 합계 91만7천여 명을 더 넣어서 이것이 완성되면 그때 아이들이 약 60퍼센트는 넉넉히 넣어서 이것이 1946년에 완성되거든 그 뒤에는
의무교육이 되도록 계획을 하여 오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사회의 발전과 민심의 자각과 향학열이 성함으로 보아 이 10년 계획을 4년을 줄여 6년 동안 1942년까지에 완성하여 버리고 남은 4년 동안은 의무교육 준비기간으로 삼고 1946년도부터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 취학률이 남자가 75퍼센트요, 여자는 33퍼센트 가량이라 한다.
그러나 의무교육이 실시될 때까지에 남자는 90퍼센트로 여자는 50퍼센트로 끌어올리도록 힘을 쓴다고 한다.
국민교육이 국가발전상 가장 중대한 것으로 세계 각국이 다 힘을 쓰는 바이나 이것이 안정히 실시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서양제국을 보더라도 100여년을 거쳐서 아직도 완전하다 할 수 없다.
우리 일본서도 한없는 노력을 거듭하였으나 학제를 발표한 뒤 70년 뒤에야 비로소 황국민의 의무교육이 완성되었다.
조선서도 불과 30수년 만에 의무교육의 실시를 보게 되었다.
그동안 행정당국이나 민간의 한없는 노력에 대하여 감사함을 마지 아니한다. 의무교육 준비 동안에 할 일이 하도 많다. 선생을 만들어낼 것, 학교를 세울 것, 학비를 준비할 것들 큰 일이 많다.
그리하고 훌륭한 국민은 훌륭한 병정이 되어야 된다.
국민개학은 동시에 국민개병이다. 이것은 지금 히틀러나 무솔리니도 부르짖고 있는 바이다.
내년도부터는 우리조선도 징병제가 실시되어 우리들 가정에서도 영광에 넘치는 황군을 내어보내게 되었다.
우리가 황국신민으로서 군국에 충성을 다하자면 완전한 국민교육을 받아 충량한 신민이 되어야 하고 충분한 군대교육을 받아 충용(忠勇)한 황군이 되어야 한다. 남의 부형된 자는 그 자제들을 이와 같은 정신으로 기르고 가르치기 위하여 의무교육의 실시에 정성껏 협력을 하여 완전한 성과를 얻도록 힘을 써야 될 것이다.
<출전 : 琴川寬, 「國民敎育과 義務敎育」, '半島の光' 63號, 1943년 3월, 6~7쪽>
35) 일본을 말함.
7. 박희도(朴熙道)
1) 신동아 건설과 우리의 사명
장기 전쟁이 장기 건설의 신단계로 접어들면서 동아신질서 건설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한다는 것, 즉 동양인을 위한 동양을 동양인 자신의 손으로 건설하고, 일체의 공리주의적인 구미적 제국주의를 우리 동양사회에서 결정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은 우리 동양인이 오랫동안 희구해온 가장 숭고한 역사적 사명이다.
백인 제국주의의 동양침략이 개시된 지 벌써 1세기 동안, 우리 동양인에게 부여된 이러한 역사적 사명은 그야말로 뜻있는 동양인에게는 한시라도 소홀히 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제국은 일청전쟁과 일러전쟁36)을 통해 상시 청국의 배후를 조종하고 있던 구미 세력이나 러시아의 남진세력을 실로 완전하게 내몰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으로는 남양제도로 확장되고 서로는 중앙아시아에 접해 있는 이 광대한 동아 대륙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각 민족의 공존공영을 원칙으로 동아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 아래 재편성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우리 제국으로서도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중국 공산당을 주구로 하여 중국 민중들의 생활 깊숙이 파고든 적색제국주의나 장제스(蔣介石) 정권을 괴뢰로 두고 중국의 자산계급을 조종해온 영국·미국의 침략세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첫 번째 선결조건이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선결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이번 ‘지나사변(支那事變)’37)이 관철된 것이고, 우리는 이제 과거 2년간의 성전(聖戰)의 결과 중국 중원의 땅 일대를 완전히 평정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향한 명예로운 임무의 단초를 열었다. 그동안 우리 제국이 치른 희생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부여된 우리 임무는 더욱 큰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승리에 취하기 전에 앞으로의 임무의 중대함에 한층 더 자신을 편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아신질서의 건설-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아협동체(東亞協同體)의 조직은 성전의 개가 이면에 철저하게 관철되어야 하는, 우리의 가장 숭고하고 엄숙한 임무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제국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도자로 삼아야만 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제국만이 구미의 제국주의를 배제하고 단호히 동아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강력한 신진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국의 지도 아래 조직된 이 동아협동체는 단순히 일본·만주·중국이라는 3국의 경제적 블록의 결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우리 제국에 의한 전 동아의 식민지적 재편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숭고한 일본정신의 선(線)에 따른 우리 제국의 국책은 이 경우에도 동아 각 민족의 공존공영만을 절대적인 기조로 한 도의적 정신에 입각하는 것이다. 일부 소수의 비국민적인 자본가 중에 이런 경우 승리 뒤에 개인적인 공리를 탐하는 자가 설령 있다 해도 그런 일은 우리 국책의 근본사상인 도의적 정신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36)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37) 중일전쟁.
나아가 이러한 동아협동체의 이념은 동아 각 민족의 단순한 원자론적 혹은 국제연맹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현대의 독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동아통일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원자론적 연합은 첫째로 각 민족의 분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러한 분립적 민족주의 위에 입각하는 이상, 구미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전 동아를 하나로 묶는 협동체로 만들 수 없다.
나아가 피의 순수성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적인 민족주의는 국내의 문제와 달리 전 동아를 문제로 삼을 경우 피의 흐름을 달리하는 이민족의 병존을 인정하는 이상, 수많은 곤란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협동체의 이념은 우리 제국의 지도를 전제로 한 동아 각 민족의 철저한 협동을 의미한다.
이 경우 협동은 단순한 협조가 아니고 단순한 결합도 아니다.
협조 또는 결합도 각 민족의 개인주의적 분립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우리가 의미하는 협동은 동아 전체의 이익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고 이 목표를 위해 각 민족의 개인주의적 이익을 종속시키는 이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협동은 단시 동아 문제에서만 아니라 국내문제에서도 앞으로 우리나라에 부여된 근본원리이다. 가령 노사의 문제 같은 것도 진실의 일본
정신에 입각한 해결 방법은 노사의 협조가 아니라 노사의 일체이다.
또한 일본과 조선의 문제도 ‘내선(內鮮)의 융화’라는 슬로건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분립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동아협동체의 이념에 입각하는 원리는 ‘내선의 융화’가 아니라 내선의 일체이다. 이 일체의 사상은 일본정신의 도의적 국가이념
에서 출발해서 이 이념 아래 일본인과 조선인의 개인주의적인 이익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반도의 민중이 오늘날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받고 있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운동은 그야말로 도의적 정신에 입각한 동아의 개조-즉 동아신질서 건설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고,미나미(南) 총독이 말한 것처럼 “동양인을 위한 동양 건설의 핵심은 내선일체의 완벽에 있다.”
이와 동시에 내선일체의 대조류 물결을 탄 우리 반도 민중의 근본적 태도는 늘 이러한 협동의 정신에 입각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확고한 신념에 입각해 일본과 조선 간의 일체의 민족적 편경을 철저하게 분쇄해야 하다. 민족적 편견을 분쇄하는 방법은 산업·경제·문화·가정 등 인간생활의 모든 장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최고의 국가적 이념 아래 일신을 희생하는 각오로 결합하는 것이다.
일본 내지인이 자칫 ‘반도인(半島人)’38)에 대해 품기 쉬운 섬나라(島國的) 우월감도 이참에 철저하게 분쇄되어야 하는 동시에, 조선인이 일본 내지인에 대해 품기 쉬운 일체의 편견도 결정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내선일체의 근본이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갖가지 불복을 외치는 자가 일본인과 조선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가 어떤 근거에 입각하든 간에 우리는 그들에 대해 과감한 투쟁을 선언한다.
반도의 민중이 그 국민적 의무 및 자격에 있어서 일본 내지인과 완전히 일원화하고자 하는, 이런 팽배한 요망은 그들에게 부여된 가장 엄숙한 정치적 사명이고, 이 요망을 충분히 달성해야만 전 동양인의 역사적 사명인 동아협동체의 이념도 완전히 관철될 수 있다. 따라서 내선일체에 불복하는 그 어떤 일본인도, 또 그 어떤 조선인도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제국의 원대한 이상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자는 국가적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전 동아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역적이다.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이 내선일체 운동의 엄숙한 사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자칫
38) 조선인.
매우 저열한 무리들 속에 나타나기 쉬운 정치브로커-즉 내선일체를 흥정거리로 삼으려는 더러운 인간들의 발호도 우리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내선일체의 운동은 우리 동양인에게 부여된 가장 숭고한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익이다. 이 진영을 지켜라, 여기에서만 우리 반도 민중이 전진할 정치적 진로가 전개되어 있다.
<출전 : 朴熙道, 「新東亞の建設と我等の使命」, '東洋之光' 第1卷 第4號, 1939년 4월, 1~3쪽>
8. 방태영(方台榮)
1) 지나사변39)과 나의 각오
성전(聖戰)이 일어난 지 벌써 4년, 우리 충용한 황군(皇軍) 장병들은 육지로 바다로 그 무위(武威)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난폭하기 그지없는 장제스(蔣介石) 정권을 철저하게 응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어능위(御稜威)에 따른 것이고, 이 국토에서 태어났고 이 국토에서 살아가는 것은 한없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전선에 선 모든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이겨내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황군 장병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오늘날의 전쟁은 무력·사상·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부분에 걸친 이른바 총력전이므로 전선과 총후(銃後)가 일치협력해서 임하지 않으면 승리를 확신할 수없습니다.
저는 교육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교과서 제작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국에 직면해 자신의 직책이 중대함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전시(戰時)에는 늘 그렇듯 물자부족과 맞물려 자재도 부족하게 되고 자칫 교과서 제작에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전시의 교육은 평시의 교육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게다가 만약 교과서 제작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교육과 인심에 미칠 영향은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당국에서도 사변 이후, 특히 ‘국어’40) 교육보급, 내선일체(內鮮一體)에 의한 황민(皇民) 연성(鍊成)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저희 모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교과서를 가장 좋게 그리고 가장 신속히 배급함으로써 반도교육(半島
敎育)에 기여하고 황민 연성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출전 : 方台榮, 「支那事變と私の覺悟」, '新時代' 第2卷 第7輯, 1941년 7월, 126쪽>
39) 중일전쟁.
40) 일본어.
9. 배상하(裵相河)
1) 조국(肇國)의 정신과 조선의 장래(상, 하)
2600년 기념논문 입선·2등 1석[총독상 일본도(日本刀) 수여]
조국(肇國)의 정신과 조선의 장래(상)
성야상하(星野相河, 호시노)
(옛 이름 배상하)
논문 요지
건국(肇國)41)의 정신을 구명(究明)하고, 이 구명에 인식상의 철학적 근거를 부여하려고 시도하였다.
자명한 논리를 차례대로 펼쳐놓고, 이 시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안심감을 스스로 얻으려고 하였다.
다음으로 건국정신과 조선과의 역사적 관계를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조선의 현 문제, 장래의 사명을 언급하였다.
물론 소박한 논리이고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유토피아라며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불만은 없다.
목차
제1장 건국(肇國)의 정신
제1절 대일본제국
제2절 황도애(皇道愛)의 현재성
제3절 황도애의 보편성
제4절 황도애의 불변성
제5절 황도애의 평등성
제6절 황도애의 궁극 목표
제7절 황도애와 정치기관과 민중
제8절 황도애와 2600년
제2장 조선의 현재
제1절 조선의 과거
제2절 과거 일본과 조선의 관계
제3절 병합 이래 30년간의 조선
41) 肇國은 건국이란 뜻으로 본문에서는 건국으로 번역했다.
제4절 현재의 조선
제5절 내선일체론
1. 내선일체론의 정의
2. 내선일체론의 근원
3. 내선일체론의 이론적 근거
4. 내선일체론의 실질적 근거
제3장 조선의 장래
제1절 내선일체 내의 장래 문제
1. 불평분자의 적극적 향도(嚮導)
2. 잘못된 내선일체론의 극복
3. 의무교육 실시
4. 징병제도 실시
5. 정치 최고기관으로의 인재등용
6. 일본과 조선 간의 의식적 결혼
7. 전체주의와 내선일체론
제2절 내선일체 후의 장래 문제
1. 황도애의 보편성과 백색인종의 사상
2. 일본·만주·중국 블록에 의한 동아권(황색권)의 확립
3. 세계의 국제적 정세
(이상)
제1장 건국의 정신
제1절 대일본제국
사상(事象)은 그 생성에 반드시 필연적 근거를 지니고 생(生)·멸(滅)·회(會)·리(離)는 모두 그에 타당한 이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근거 없는 사상이라든가 이유 없는 생성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우연’이라는 말은 인과의 ‘필연’을 알지 못하는 제2의어(第二義語)에 지나지 않는다.
탄생할 만한 마땅한 이유를 바탕으로 탄생한 사상은 생성 과정에서 ‘진전’ 또는 ‘퇴보’ 단계를 갖는다.
이 기로(岐路)는
(1) 사상 자체가 지닌 선천적 요소(운명이라 불린다)와,
(2) 사상이 그 주위에 지닌 다른 사상(환경이라 불린다)이라는 두 가지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1)이 (2)에 비해 보다 일의적(一義的)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후천(後天)의 상대성에 대해 선천(先天)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국가형태 역시 사상인 한 사상의 인과율에 지배되어야 한다. 반드시 탄생할 만해서 탄생하고 사라질만해서 사라진다.
국운의 성쇠 또한 그것이 지닌 선천적 요소의 우열과 그것이 순응해야 하는 환경에 대한 적절·부적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선천적 요소야말로 흥폐(興廢) 결정의 일의적 조건이고, 생성 당초 부여받은 국가의 숙명이며, 건국의 정신 그 자체이다. 즉 국가 생성의 필연적 이유야말로 그 국가적 건업(建業)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건국의 정신을 벗어난 다른 이유에 의해서는 어떠한 국가도 생성될 수 없다. 개(犬)의 모태에서는 어떠한 인간의 혼도 생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본 국가 또한 이 이론에 따라 그 건국의 정신을 멀리 건국 당초에 갖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다른 국가가 국체(國體)의 교체와 더불어 다양한 건국정신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의 국가는 하나의 국체를 갖고, 따라서 하나의 건국정신을 갖고 있으므로 하나의 국체를 명징(明徵)하면 저절로 하나의 건국정신은 이해될 수 있다.
일본 국체에 있어서의 면면히 이어지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은 다른 국가에서 찾아볼수 없는, 비할 바 없는 존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만세의 일계 그 자체가 인간계의 모든 도덕성을 구현한다.
즉 진(眞)이기에 만세일계이고 만세일계이기에 참이며, 선(善)이기에 만세일계이고 만세일계이기에 선하며, 미(美)이기에 만세일계이고 만세일계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는 통치자의 숭엄성(崇嚴性)과 피통치자의 정절성(貞節性)을 보여주는, 상대적인 도덕관계를 크게 초월해서 모든 도덕성의 총체라고 보아야 한다.
진선미를 뛰어넘는 도덕성의 총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혼조 에지로(本庄榮治郞) 저 '일본사회경제사'에서)
역사에 따르면 일본 국가의 사회형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여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씨성(氏姓)제도의 시대(태고부터 다이카 개신(大化改新)까지)
2. 군현(郡縣)제도의 시대(다이카 개신에서 나라(奈良)시대 말까지)
3. 장원(莊園)제도의 시대(헤이안(平安)시대)
4. 분권적 봉건제도의 시대(가마쿠라(鎌倉) 막부의 개설에서 도쿠가와(德川) 막부 개설까지)
5. 집권적 봉건제도의 시대(도쿠가와 시대)
6. 자본주의 제도의 시대(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국가로서의 시작은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즉위하신 해,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의 황기(皇紀) 원년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진무천황에 의해 선언된 건국의 정신이 그 옛날 신화시대(神代)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 의해 약속받았다는 점이다.
즉 태고는 국가를 낳은 모태이고 황통을 일관시키는, 일본 국가 발전의 원천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에 국가로서의 모범적 유형을 보여주는 일본 국가의 초석은 실로 태고의 천신지기(天神地祇)의 교섭에서 비롯된다.
다른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하극상의 사실은 역사의 변천에 수많은 구분을 지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일본 국가에서는 그 사실성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국체는 어째서 만세일계일 수 있었는가, 어째서 진선미일 수 있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멸망하는 국가는 그 멸망 원인을, 흥륭(興隆)하는 국가는 그 흥륭 원인을 각각 그 건국의 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 국가가 진선미일 수 있는 까닭은 일본 국체가 진선미이기 때문이고, 일본 국체가 진선미인 것은 그 건국정신에 기인하고 있다.
우리 건국의 정신이란,천손이 강림하실 때 내려주신 신칙(神勅)곡물이 풍요롭게 나는 이 나라42)는 내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할 땅이다.
마땅히 그 황손이 이를 잘 다스리고 보조(寶祚)를 계속 이어나가 천양무궁(天壤無窮)하도록 하라.라며 밝히고 있다.
일본이 황손(皇孫)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는 것은 보조43)의 흥륭을 가져오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원인이다.
다른 어떠한 이유도 배제한다.
가장 숭고한 절대경(絶對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국가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황손의 통치와 보조의 흥륭이라는 인과율이 다른 그 어떠한 중개념도 배제하는 절대자임을 알아야 한다. 단지 그것으로 족하다.
일본이 영겁의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저 황손에 의해 통치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황손은 절대이며, 절대란 인간계의 모든 진실한 것,모든 선한 것, 모든 아름다운 것을 그 내부에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손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는 진선미의 국가이며, 진선미의 국가는 진선미인 건국정신을 가져야 한다. 황손에 의해 계승된 덕은 황도(皇道)이고, 황도가 황손에 의해 계승되는 한 진선미이다. 이리하여 진선미인 건국정신은 진선미인 황도에 의해 진전한다.
진선미가 모든 도덕성의 종합체라고 한다면 건국정신 및 황도애(皇道愛)는 모든 도덕성의 종합체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진선미의 종합체인 건국의 정신은 뒤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그 당연한 권리로서 객관적인 타당성과 시간적인 영구 불변성을 요구한다.
객관적 타당성과 시간적 영겁성은 그 본질상 세계의 최고이념이 되려고 한다.
따라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칙은 세계 최고이념에 대한 예언이었다.
건국 최초의 대군(大君) 진무천황의 선언에,위로는 천신의 나라를 맡겨주신 덕에 답하고, 아래로는 황손의 정의를 기른 마음을 넓히자.
그 뒤 온 나라를 하나로 해 도읍을 열어 하늘 아래를 뒤덮어 하나의 집으로 하는 것 또한 좋지 아니한가.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건국정신에 입각하여 웅대한 이상을 제시하신 것에 다름아니다.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큰 이상을 지닌 황도의 진선미성(性), 즉 그 도덕적 절대성은 인간계에 있어서는 인간이 부여받은 최대의 혼으로 표현된다. 인간이 부여받은 최대의 혼이란 바로 ‘사랑’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는 팔굉(세계-역자)에 표현하신 황도를 황도애라 부른다.
42) 원문의 “葦原の千五百秋の瑞穂の国”은, 일본국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곡물이 언제나 풍요롭게 자라는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43) 황위(皇位).
황도애는 황도를 주체로 한다고 한다면, 황도가 진선미의 모든 도덕성의 종합체라고 하는 본질에 입각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속성을 지녀야 한다고 본다.
1. 현재성
2. 보편성
3. 불변성
4. 평등성
제2절 황도애의 현재성
나에게 없는 것을 다른 데서 찾는 마음, 거꾸로 나에게 있고 다른 데 없는 것을 다른 데 베푸는 마음-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따라서 받을 권리를 지니고 줄 의무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모든 생물이라 말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여기서는 동물의 이른바 본능적인 사랑을 배제하고 인간계의 정신적으로 앙양된 사랑에 대해서만 거론한다)은 탄생과 동시에 생활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고, 또 다른 생활 존재를 이유 없이 범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가 있다. 따라서 사랑이란 원래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모든 인간이 직접 체험해야 하는 마음의 사실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부부의 사랑 또는 인간의 자연계에 대한 사랑, 인간의 동물에 대한 사랑 등 때와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의 양식과 친근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가장 광범위하게 체험되는 마음의 사실이면서 단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개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 없는 것을 다른 데서 찾는 마음, 나에게 있고 다른 데 없는 것을 베푸는 마음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바꾸어 말해서 받는 동시에 주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이란 상대적으로 보건대 공평무사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신상태의 공평무사란 정신상태의 청순을 의미한다.
즉 사랑은 늘 청순한 마음에 깃드는 것이어서, 불순한 마음은 사랑을 받을 그릇이 못되고 사랑을 줄 만한 재목도 아니다.
인간계에 교환되는 사랑이 진실한 의미에서 사랑이라 불릴 수 있으려면 마음의 청순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유형적인 사랑은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자비는 인류가 받은 사랑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고 실달태자(悉達太子)의 후신인 석가모니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이상, 이들에 의해 매개되는 종교적인 사랑의 존재 역시 실재성을 갖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실재한다는 것과 인간의 생활 그 자체와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현 사회의 사유재산권(圈)에 있어서 소수의 부자에게 막대한 재산이 실재한다는 것은 이를 갖고 있지 않은 다수의 빈자에 대해 그대로의 상태로서는 아무런 교섭도 없다.
전자의 재산의 실재성이 후자에 있어서 그 현재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도태가 격심한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날그날의 물적 생활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생활인에게 피안의 천국의 약속, 열반에 의한 극락의 전제는 사랑으로서의 현재성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그야말로 걸식아동에 대해서는 백만 마디 사랑의 말보다 한 공기의 밥이 그 생활에 현실적 효과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
이다.
복잡한 사회기구 내에서 다양한 생활양식을 영위하는 생활인은 주어진 생리적 조직으로 한정된 수명을 가장 굳세게 살아나가야 한다.
그들은 늘 물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정신적 동요가 좌우된다.
이러한 생활인에 대한 종교애의 실재는 물론 그것이 실재한다는 한에서 존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기아에 철저히 임할 수 있는 현재성을 갖고 있지 않은 한, 이중삼중으로 닫힌 타인의 냉장고 속의 식료품과 마찬가지로 실로 부자유스러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조직이 없는 민중에게는 정치를 통한 현재적인 사랑을 쏟아야 한다. 마음의 기쁨을 주는 동시에 신체에 물을, 소금을, 쌀을 줄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군거(群居)가 인간의 본성이고, 군거에는 정치가 필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랑은 정치 이외의 다른 데서 찾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늘 정치에 현현(顯現)하시는 황도애야말로 사랑의 현재성을 지닌 유일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역대 대군(大君)이 민초들에게 쏟아주신 대어심(大御心)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고, 황도의 사랑은 늘 실재하는 동시에 늘 현재하고 있으며, 이상인 동시에 현실이다.
3000년 동안 이 사랑은 민초들과 함께 계속 존재하였다.
면면히 이어지는 황통의 일계(一系)가 이를 입증한다.
태양의 빛조차 하루의 절반을 아끼고 어떤 때는 너무 덥게, 또 어떤 곳에는 너무 춥다.
민초들에게 방사되는 황도애의 빛은 비치지 않는 곳이 없는 평등한 것이다.
제3절 황도애의 보편성
청순한 정신적 상태에 깃들고 진선미의 총체적 도덕성이 본질인 황도애는 사랑의 현재성과 더불어 보편성을 요구한다. 보편성이란 철학에서 말하는 객관타당성이며 빈틈이 없는 침투성이다.
과학의 진리가 진리라는 본성으로 그 객관타당성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선미성을 구비하는 황도애는 그 필연적인 권리로서 방사권(放射圈)의 무한대를 요구하고, 적용 영역의 무제한을 주장한다.
이를 차단하는 모든 장애물을 관통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이를 오인하여 수용하기 꺼려하는 모든 적성(敵性)도 파괴할 결단을 지닌다.
황도애가 그 객관타당성을 현재에까지 실천하는 데 있어서 수많은 성전(聖戰)을 수단으로 삼은 근거가 여기에 있다.
실로 일본이 행한 모든 성전은 사랑의 선포 형식이고 사랑의 보편성을 보편화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성전은 전쟁에 따른 잔인성을 지니고 있지 않고, 전쟁이면서도 평화와 함께 걷고 있었다. 다른 데서 보는 것과 같은 살육·약탈을 주안(主眼)으로 삼은 전쟁의 잔학성은 사실상 나타나지 않았다.
사랑이 그 속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괴, 전쟁을 수락할 수 있는 범위는 그 파괴가 건설을 위한 파괴이고 그 전쟁이 평화를 위한 전쟁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시대에 천신(天神)이 지기(地祇)를 정복하는 방법도 천손강림을 계기로 가장 평화적인 협화체(協和體)를 채용하고, 다음 단계에서 천신지기의 협화체에 의한 원시주민(쓰치구모(土蜘蛛)라 총칭되는, 문화가 낮은 토민) 정복도, 또 진무천황의 친정(親征)도 모두 평화적 요소를 최고 속성으로 삼고 있었다.
이는 진무천황이, 나는 무력을 휘두르지 않고 앉아서 천하를 평정한다.('일본서기(日本書紀)')라고 명하신 불살(不殺)의 대어심에 의해서도 충분히 증명되는 일이다.
따라서 진무천황이 채용하신 전법(戰法)은 언제나 불살의 인자한 마음을 출발점으로 한 것은 분명하다. '일본서기'에는 진무천황의 친정의 신책(神策)으로서 나는 태양신(日神)의 자손으로서 해를 향해 적을 치는 것은, 이는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물러나 약함을 드러내 보이고 신기(神祇)를 제사지내고 태양신의 위덕을 등에 지고 그림자로만 위압을 가한다면, 전혀 칼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적은 반드시 저절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건국의 정신 곧 황도애의 건설신(神)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덕을 배후에 갖고 있는 이상, 여기에 대적하는 적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반드시 물리칠 것을 확신하시고, 또 그렇기 되기를 희망하셨다.
실로 천황의 친정은 팔굉일우를 목표로 황도애 보편을 최고이념으로 하시고, 불살에 의한 필승의 신념을 그 유일한 속성으로서 수행하셨던 것이다.
진무천황 이후의 모든 성전도 위와 같은 방정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민간에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권욕 때문에 싸운 사적인 전쟁도 있었지만, 이는 물론 황도애 보편의 성전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가에 따르면 성전으로서의 성전은 진무천황의 동정(東征), 스진천황(崇神天皇)의 시도쇼군(四道將軍)44) 파견, 스진천황의 임나(任那) 구원, 게이코천황(景行天皇)의 구마소(態襲)45) 정벌, 야마토 타케루(日本武尊)46)의 구마소·에조(蝦夷)47) 정벌, 주아이천황(仲哀天皇)의 구마소 정벌,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 정벌,게이타이천황(繼體天皇)의 신라 정벌, 센카천황(宣化天皇)의 임나 구원, 긴메이천황(欽明天皇)의임나 구원, 비다쓰(敏達)·스슌(崇峻)천황의 임나 회복전, 소토쿠(聖德)태자의 임나 회복전, 나카노오오에노황자(中大兄皇子)의 소가씨(蘇我氏) 토벌, 사이메이(齊明)·덴지(天智) 천황의 백제부흥전, 나라(奈良)·헤이안(平安) 시대의 에조 정벌, 원나라 왜구와의 전쟁(元寇戰役), 겐무(建武) 중흥전, 난코(楠公)의 의전(義戰), 요시노조(吉野朝) 충신의 의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대명(大明)정벌, 메이지유신 전쟁, 일청전쟁, 북청(北淸)사변, 일러전쟁, 일독전쟁, 만주사변, 지나사변 등 27개 항목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성전에서 일관된 것은 황도애 선포의 이념이고, 그 귀결은 진선미의 세계화이다.
44)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황족(왕족)의 쇼군(將軍)으로, 오비코노미코토(大彦命), 다케누나 카와와케노미코토
(武渟川別命), 기비쓰히코노미코토(吉備津彦命), 단바미치누시노미코토(丹波道主命)를 가리킨다.
45) 구마소는 일본의 '기기신화(記紀神話)'에 등장하는 씨족의 이름이다. 큐슈(九州)의 남부에 본거지가 있어서
그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다.
46)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으로, 게이코천황의 아들이다.
47) 고대 일본열도의 동쪽과 북쪽에 살고 있었고, 일본인들에게는 이민족으로 간주된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다.
특히 각 성전에 종군하는 무수한 병졸들이 모두 그 사생활의 전부를 바치고 있는 까닭은, 그들이 평상시 교화에 따른 의지가 강열하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고, 또 그들에게 전해지는 전통적인 민족관념의 숭고함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슴에 침윤된 황도애의 발효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최대의 힘이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전에서 황도애의 현현과 더불어, 일본문화에 흡수된 외래문화에 대한 황도애의 보편적 편재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불교·유교에 의한 이른바 동양문화와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서양문화는 일본 국체와 접촉하는 데 있어서 수많은 상극성(相剋性)을 갖고 있었지만, 황도애의 보편적 본질은 이러한 모든 상극성을 적절히 극복하여 일본문화의 독특한, 이른바 황도문화권(皇道文化圈)으로까지 소화할 수 있었다.
문학박사 야마카와 지오(山川智應)는 문명 중에서 최대의 것은 국가이다.
국가 없이는 문명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문명을 낳는 어머니이다.
그리고 문명은 국가에 의해 보육되고 또 화합된다.
이 국가야말로 근본 문명이고,그 위에 발생한 문명은 지말(枝末)문명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국가란 황도애의 지도하에 선 국가이므로 황도애야말로 모든 문화의 모태이고 황도애의 여과를 거치지 않는 문화는 이른바 ‘서양의 몰락’으로 귀결될 따름이다.
불교의 진체(眞諦)는 전생의 인연을 스스로 깨닫고 절대무아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이는 동진(東晋)의 명승 혜원(慧遠)의 사문(沙門)은 출가했으니 국왕의 은혜를 입지 않는다.
때문에 국왕을 섬길 필요는 없다. 국왕의 은혜를 입고 있는 일반 재가(在家)만이 국왕을 섬겨야 한다.
는 말(‘사문불경왕론(沙門不敬王論)’에 의거함)에서도 분명이 드러난 것처럼, 국가·국체와는 실로 인연이 없는 중생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국체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신앙을 세운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못하고, 국가는 오히려 무관한 것으로서 그 신앙계에서 제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가 일단 일본에 수입되어 황도애의 빛을 두루 받았을 경우, 그것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에 의해“깊이 삼보(三寶)를 숭배하라”고 규정되었고, 일본에서 불교의 사명은 ‘진호국가(鎭護國家)’·‘교왕호국(敎王護國)’·‘흥선호국(興禪護國)’·‘입정안국(立定安國)’·‘왕법위본(王法爲本)’이라는 식으로 근본적 변경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애국승(愛國僧)이라 불리는 니치렌(日蓮) 성인이 일본 불교의 최고로 숭배되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유교에는 ‘효경(孝經)’은 있어도 ‘충경(忠經)’은 없다. 임금에 대한 ‘충’이라는 개념은 부모에 대한 ‘효’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중국에서 ‘충’은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천자가 천의(天意)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 하극상, 선양방벌(禪讓放伐)은 필연적인 실천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유교가 일본에 건너와 황도애에 의해 소화되었을 때, 그것은 천양무궁(天壤無窮)의 국체 옹호 이론이 되고, “대의는 부모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 되며, “자부(慈父)가 왕의 적이 된다면 부친을 버리고 왕에게 간다.
효의 지극함이다.”라는 식으로, ‘효’는 ‘충’에 의해 규정되고 충효 두 개념이 중국과는 정반대의 관계가 나타난다.
서양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그리스도교는 유일신만 강조함으로써 일본의 신들을 부정하고 신사 불참배 문제, 어진영(御眞影) 불경 문제 등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적으로 일원화된 그리스도교,바꾸어 말하자면 황도애의 보편하에서만 용인되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양식 각종 교육 사조도 교육칙어에 의해 “이로써 천양무궁의 황운부익(皇運扶翼)”이라는 귀결점을 부여받고 있다. 자본주의는 일본의 국체적 발전에 입각해 모든 국가자본을 근저로 한다는 유일한 정리(定理)에 의해 규약되려고 한다.
이상과 같이 모든 외래문화는 일본에서 황도애의 빛을 두루 받고 일본적으로 일원화됨으로써 비로소 그 부익적(扶翼的)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늘 올바르고, 올바른 것은 늘 그 존재의 극대를 요구한다.
진선미인 황도애가 그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이로써 공간의 진선미화(化) 역시 가능할 수 있게 된다. 복숭아가 나무에서 떨어져도 여전히 복숭아 이외의 과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진선미가 다른 공간에 적용되었다 해서
진선미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황국이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오직 융성의 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 까닭은, 건국정신인 황도애가 바로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상, 진리를 받들고, 중, 진리를 파악하고, 하, 진리의 교화에 매진하며 달려갈 수 있는 황국의 신민은 선택받은 민초로서의 기쁨을 자랑하기 전에 그 책임의 중대함을 깊이 새겨야 한다.
제4절 황도애의 불변성
황도애는 진리이기 때문에 공간적 객관에 대한 보편타당성을 요구하였다.
만약 황도애가 그 객관적 타당성이 부정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3+3=6이라는 산법이 어떤 사회에서는 인정받고 어떤 사회에서는 부정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성 자체의 붕괴를 드러낸다.
3+3=6이라는 산법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떠한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것인 이상, 단순한 지적 진리일 뿐만 아니라 진선미의 종합체인 황도애는 필연적으로 그 객관타당성을 보편화할 수 있다.
3+3=6이라는 산법은 공간적인 타당성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타당성도 불변하는 것으로서 요구한다.
상대(上代)에 있어서 3+3=6이라는 산법이 현대에서는 3+3=7이라는 식으로는 변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변천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타당성을 갖는다.
따라서 황도애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그 진리성으로서의 타당성이 영겁불변하다는 것을 속성으로 지니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없이 변천을 반복하는 외계의 총면(總面)에 대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이래의 절대적 타당성이 확보되어 있다. 이는 “황도애는 진리이기 때문에”라는 대전제로 입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신대(神代) 최초의 천양무궁(天壤無窮)하리라는 신칙에 의해 선언된 것이다.
천양은 그 아래와 위에 생성되는 모든 사상(事象)이 생(生)·멸(滅)·회(會)·리(離)라고 하는 유전을 반복하고 있는 것과는 무관하게 늘 높고, 늘 넓은 것과 마찬가지로, 황도애는 이를 입는 모든 대상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무한의 변화와는 별개로 그 자체의 진리성을 영구히 주장하는 것이다. 진리에 반하는 자는 올바른 일에 반하는 자이고, 올바른 일에 반하는 자는 부정을 저지르는 자이며, 부정을 저지르는 자는 불행을 초래하고,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자신의 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즉 진리에 반하는 일은 자기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식이 있는 모든 사회에서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복종하는 것을 인간의 상도(常道)로 본다.
예컨대 부부의 애정을 표현한 말중에 ‘2세를 약속하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유한한 인간계의 애정을 가능한 한 무한으로까지 연장하려는 의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스스로 영겁불변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모든 대상에 의해 영겁불변이고자 하는 의욕을 갖고 있다. 여기에 황도애의 실천성이 존재한다.
영겁불변인 진리성을 지닌 황도애는 이를 입는 모든 대상에 최대한의 희열과 변함없는 자기만족을 준다.
이는 황도애 선포 이래 황도애의 계승 주체이신 황통(皇統)이 면면히 이어지는 하나의 계통을 통해 관통되고 있으며, 이를 입는 민초들이 한 번도 변형되지 않은 제국으로서의 국체를 유지하고, 게다가 이 국체가 융성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대일본제국은 신대(神代)의 건국 이래 언제나 대일본제국이었지, 대일본민주국도 대일본합중국도 대일본노농국도 아니다.
위로 황도애의 주체를 받들고, 그 아래에서 황도애를 입고, 나아가 황도애 선포에 부익(扶翼)의 총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일본국의 고금을 통틀어 국체의 방정식이다.
그런데 이를 다른 나라에서 살펴본다면 솔로몬의 영화, 진시황제의 꿈이 대체 어디 있냐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국가는 반복무상(反覆無常)한 국운의 진퇴, 무주부정(無住不定)한 국체의 변천을 경험하였다.
외교사에 있어서 일본 최초의 교섭국인 임나와 신라는 이젠 없고,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들고간 일본의 국서(國書), “해 뜨는 곳의 천자(天子), 서책을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건네다. 평온하도다”에 의해 일본과의 첫 접촉을 가진 양제(煬帝)의 수(隋)나라 조정도, 당(唐)나라도, 송(宋)나라도 모두 사라졌다.
또 원(元)나라의 폭위(暴威)도 명(明)나라의 융성도, 일시적 국위를 떨치며 멀리 동양에 웅비한 스페인도 포르투갈도 모두 이젠 없다.
과거에 있던 것이 이젠 모두 없는 것이다.
건국의 역사가 아직 짧은 미국은 지리적 이점으로 경제적 부강을 누리고 있지만, 요컨대 오합지졸의 일시적 우거(寓居)라 하지 않을 수 없고, 일찍이 독일과 이탈리아 전체를 석권한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지금은 거꾸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발 밑에 굴복하였다.
그 영토에 해가 지는 줄 몰랐던 대영제국이 늙은 몸을 받아줄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의 혁명은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대역 폭동이고 소련과 제휴한 독일 또한 과거 베르사이유의 굴욕에 눈물을 흘린 역사를 갖고 있는 이상,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되새기지 않더라도 가까운 장래에 몰락 과정을 밟지 않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보증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유무의 교체, 무상의 반복은 이들 국가들이 확고한 도덕성에 입각한 건국의 정신을 갖고 있지 않고, 혹은 일시적인 이해관계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거나, 혹은 우연히 주어진 힘의 우월을 마치 영구불멸의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여 이를 국체의 기초로 삼은 등의 원인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해관계는 경우에 따라 바뀌는 것이고, 힘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니 만큼, 이러한 것들에 입각한 여러 국체들은 요컨대 모래 위의 누각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며, 그저 진퇴의 부정(不定), 흥폐의 무상(無常)으로 역사가의 두뇌를 어지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성의 종합체이고 진선미를 속성으로 삼고 있는 우리 건국의 정신은, 다른 데서 그 예를 찾아볼수 없는 확고부동한 기원이기 때문에 늘 융성이라는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일본의 현재를 가져온 것이다.
진리가 공간적인 타당성과 시간적인 불변성을 요구하는 한, 황도애에도 역시 그 공간적 선포와 시간적인 전진이 약속되어 있다. 일본이 세계에 군림해야 한다는 것은 인과율에 의해 규정된 예언이기에, 황도애의 모습은 세계이념으로까지의 진행형으로서 이끌어내야 하고, 이에 보조를 맞추는 모든 민초들에게는 진행의 부익(扶翼)이라는 중대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다. 게다가 이 임무는 50년의 한 세대로서는 너무나 위대하고도 위대한 임무임을 알아야 한다.
제5절 황도애의 평등성
진리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갑(甲) 입장에서는 시인되고, 을(乙) 입장에서는 부인된다는 주관 의존성을 거부한다.
진리는 그 수용자 총체에 대해 동등한 모습으로서 인정될 것을 요구한다.
3+3=6이라는 진리가 1년생에게는 시인되고 2년생에게는 부인된다는 것이 아니라, 산술을 알고 있든 모든 인식자는
이를 진리로 인정한다.
어떤 물체의 중량을 재고 그 물체의 중량의 실질적인 수치가 1관(貫)이라고 한다면 ‘이 물체의 중량은 1관이다’라는 것이 그 물체의 중량에 관한 진리이어야 하고, 힘이 약한 자가 들면 2관이 되고 힘이 센 자가 들면 반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진리란 그것을 인지하는 개개의 주관의 상황 여하와는 무관하게 인지의 일관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진리의 종합체인 황도애는 그것을 입는 모든 대상에게 평등한 사랑을 쏟는다는 필연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귀족에게도 평민에게도 에조(蝦夷)에게도 구마소(態襲)에게도 하야히토(隼人)에게도 쓰치구모(土蜘蛛)에게도 류큐(流球)에도 조선에도 타이완에도, 모든 인종에도 걸대 평등의 사랑을 보내고, 이로써 그들이 함께 자라고 함께 살고 함께 황도애 선포의 부익 분자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1919년 사이토 총독이 부임했을 때 황송스럽게도 다이쇼(大正)천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조서(詔書)가 환발(渙發)되었다.
일찍이 조선의 강녕(康寧)을 바라고 그 민중을 애무하기를 일시동인(一視同仁), 짐의 신민이 되었을 때 조금의 차이도 두지 않고 각자의 직분에 충실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면서, 모두 동등하게 큰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한다. (이하 생략)
당시의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는,조선은 일본의 판도(版圖)이지 속방(屬邦)이 아니다.
또한 식민지도 아니다.
즉 일본의 연장이기 때문에 일본과 조선을 동일한 제도하에 두는 것은 근본법칙이다.
라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런 점에 황도애가 세계의 중추이념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 황도애를 먼저 입었다는 기득권과 우연히 일본 내지에서 태어났다는 인간적 행운을 자랑하면서 황도애의 평등을 망각하고 나중에 참여한 자에 대해 정복자적인 위압을 가하는 일본인이 존재한다면(가정이길 바라지만, 슬픈 일임에는 분명하다), 이는 단순한 인식 부족이라며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라, 황도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자로서 세계이념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황도권(皇道圈) 내의 불순한 것으로 보고 단호히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제6절 황도애의 궁극 목표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48)가 각각 지(知)·정(情)·의(意)를 대표하는 것이라 한다면, 지·정·의의 궁극인 진·선·미야말로 삼종의 신기에 포함된 본질이며, 이 본질을 구현하고 세계를 진선미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삼종의 신기를 받드는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진선미화 되어야 할 세계의 모습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는 늘 유전(流轉)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운명으로 나아간다.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변천이 세계의 모습이며, 이를 지도할 최고이념이 발현되지 않는 한, 24시간을 반복하는 것이 세계의 운명이다. 이에 순응하고 이를 이끌어, 그 최고이념이어야 할 황도애는 세계에 펼쳐지고 있는 변환무상(變幻無常)한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변천에 따라가기 위해 스스로 임기응변의 신책(神策)을 지녀야 한다. 즉 불변적 보편성을 지닌 황도애는 늘 변화하는 시간과 장소에 즉응하기 위해 신통하고 자유자재의 유동적 내용을 우리는 황도애의 내포(內包)라 부른다.
황도애의 내포는 어쩌면 세계에 대한 적응성이라 부를 수도 있다.
3+3=6이라는 진리는 그 자체의 상태에서는 하나의 형식적 진리로서 잘못되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6이라는 결과에서 그 전제를 연역할 경우, 6이라는 결과를 얻으려면 3+3이라는 전제 이외에 무수한 전제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1+5, 10-4, 3×2, 24÷4 등이다.
그 외에도 무수한 전제적 산술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3+3=6이라는 산술은 진리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고, 6이라는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는 종합적 진리는 아니다. 산술을 연구하는 두뇌의 발달에 따라 그 전제적 형식은 무수히 연구될 수 있고,따라서 불변성 등에 의해 세계지배라는 궁극 목적을 약속받고 있는 황도애는 그 궁극 목적인 세계지배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한히 변화하는 세계의 모습에 즉응하기 위해 무한하고 자유자재로 융통성이 있는 내포를 지녀야 한다. 황도애 자체는 일정불변한 것이지만 그 내포는 자유롭게 유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내포는 시세(時勢)에 따라 무수히 존재한다. 황도애가 진리의 종합체인 까닭과 진리의 진전과 더불어 황도애 또한 진행형이라는 까닭이 위와 같은 논리에 기인하는 것이다.
내포를 제외한 황도애는(이는 단순한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 네 개의 속성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내포는 황도애의 진리성의 기초를 만드는 바의 진리성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고노에49) 공(公)에 의해 제창되고 있는 전체주의적 신체제 역시 황도애 내포의 시세에 즉응한 하나의 현현(顯現)으로볼 수 있다.
48) 역대 천황들이 황위를 증명하는 것으로 물려받았다고 하는 세 가지 물건, 즉 거울·검·구슬이다.
49)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 제34·38 39대 내각총리대신 역임.
제7절 황도애와 정치기관과 민중
내포를 지닌 황도애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인류에 현현하는가? 이미 내포된 황도애의 신책이 각 시세에 따라 어떠한 형식으로 인식되는가?
이는 방법론이다. 그 방법으로서 정치기관을 지닌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은 ‘살아 있는 인간은 살아 있다’라는 점이다.
인간은 죽지 않는 한 늘 살아 있어야만 한다.
이는 모든 상대를 초월한 절대경(絶對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이상, 살아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의 최고의 조건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 최고의 조건을 인간은 행복이라 부른다.
즉 행복이란 생활의 필수조건으로서 욕망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과 절연한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생활이 행복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너무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행복을 얻는 최초의 단계로서 군집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집생활은 개개인의 유기적 결합이고 힘의 단결이며, 유무의 대차(貸借) 지반이다. 이를 사회라 부른다.
인류행복을 위해 생성된 사회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각종 형식으로 유전(流轉)하였다.
이 유전의 형식을 낙천가들은 사회의 진전이라 한다. 진전이냐 아니냐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사회가 늘 변화하는 주마등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타당한 황도애는 그 본질상 일정불변하기 때문에 일정불변한 것을 유전의 대상으로 적용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황도애의 내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데, 이 내포는 반드시 스스로 다양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다양성을 갖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에 대한 황도애 적용의 가능성이 긍정되는 이치이다.
적용 가능적인 황도애 내포의 다양성은 대상이 이를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형식으로써 대상에 적용된다.
즉 각 시대에 살고 있는 각각의 생활인은 황도애의 어떠한 내포가 그 시대에 즉응하고 타당한지를 올바르게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황도애의 찬란한 빛을 입을 수 있다.
이런 올바른 인식을 황도애의 주체이신 천황페하에 주상(奏上)하고 천황폐하의 재가를 거쳐 천황폐하의 이름 아래, 생활인인 자기 자신 및 다른 모든 생활인에게 이를 행할 수 있는 소수의 선택받은 생활인이 정치가이다. 그들에 의해 구성되고 황도애와 민중을 중개하는 기관을 정치기관이라 부른다.
따라서 정치기관의 선악은 황도애 내포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혹은 인식부족에 따라 결정된다. 이리하여 정치기관은 변화하는 사회형태의 추이와 더불어 수시로 변경되어야 한다. 가마쿠라(鎌倉)·도쿠가와(德川) 등 정치기관으로서의 일시적
수명 또는 내각의 빈번한 교체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도애 내포의 올바른 인식은 단지 정치기관에만 일임되어서는 안 된다.
민중 또한 늘 천의(天意)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로써 자신의 의욕을 결정하고, 이 의욕이 천의를 지키는 정치기관의 방향과 일치할 때, 민중은 그 정치에 안주해도 좋은 것이다.
정치가 일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고 민중 모두 좋은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정치 자체의 신체제로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예부터 수많은 철학자·정치가·종교가들이 인류에 최대의 행복을 주기 위해 시도하고 노력하고 괴로워했다.
게다가 그들에 의해 나온 철학적 이론·정치적 기구·종교적 이념은 설령 일시적인 보상은 될 수 있어도 결코 대국적인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개인적인 인간의 두뇌에 의해 고안되고, 때로는 일시적인 세력을 갖고 구축되고, 때로는 단순한 시대의 반영으로서 발생했다는,극히 박약한 생성 근거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인류라는 놀라운 동물로서는 아무런 권위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황도애는 개인적인 인간의 두뇌에 의해 고안된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세력을 갖고 구축된 것도 아니며, 단순한 시대의 반영으로서 산출된 것도 아닐뿐더러, 신대의 그 옛날 신의 말로서, 범할 수 없는 절대로서, 모든 진리에 대한 연역체로서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황도애가 유일한 세계적 이념이라는 근거가 있다.
제8절 황도애와 2600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황국 2600년의 사회형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변천을 거쳤다.
(1) 씨성(氏姓)제도의 시대(태고 적부터 다이카개신(大化改新)까지)
(2) 군현(郡縣)제도의 시대(다이카개신에서부터 나라(奈良)시대 말까지)
(3) 장원(莊園)제도의 시대(헤이안(平安)시대)
(4) 분권적 봉건제도의 시대(가마쿠라(鎌倉) 막부의 개설에서 도쿠가와(德川) 막부 개설까지)
(5) 집권적 봉건제도의 시대(도쿠가와 시대)
(6) 자본주의 제도의 시대(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 씨성제도의 시대
일본의 사회제도사에 있어서 최초로 나타난 형태이다. 씨족이 사회조직의 근저로 삼고 있는 것이다.
씨족이란 동조(同祖)신념 위에 구축된 단체이고, 씨의 위가 이를 지배하고 그 밑에 부민(部民)·노예 등을 예속시키고 있었다.
천황은 직속 토지와 인민을 영유하는 동시에, 이들 모든 씨족을 통괄하고 있었다.
씨의 직업은 대대로 세습했으며, 혈연을 기초로 토지와 인민을 사유(私有)하는 사회형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뒤 씨의 분열과 병합은 자주 일어났고, 소아씨(蘇我氏)와 같은 대 씨족의 발호로 인해 큰 불공평을 일으켜 자기모순에 빠지면서 마침내 다이카개신에 의해 변혁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군현제도의 시대
다이카개신에 의해 씨성의 제도는 군현의 제도로 변경되었다. 즉 행정구역을 확립하고 중앙정부가 파견한 관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종래의 직업 세습은 폐지되었고, 인재등용의 문이 비로소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토지와 인민의 사유를 금하고, 일체를 먼저 천황에게 봉환(奉還)하고 반전수수(班田收受)의 법·조용조(租庸調) 제도하에 새로운 토지와 인민의 정치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상이 높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3) 장원제도의 시대
헤이안시대에 들어서 군현제도의 근본적 원칙인 토지와 인민의 공유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즉 사간전(私墾田)·사사영지사전(社寺領地賜田)·공전(功田)이 증가하고 사유지가 많아졌으며, 정부의 행정징수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 각지에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장원제도이다.
장원의 인민은 영주의 지배 아래 장토(莊土)를 경작하고, 영주에게 연공과역(年貢課役)을 제공한다는 토지와 인민의 사유제였다.
이 장원은 매년 증가하여 다이라일족(平族)이 영유하는 곳이 무려 500여 개에 이르렀다. 무사는 장원을 지반으로 한 지방의 호족이었다.
(4) 분권적 봉건제도의 시대
장원제가 진화한 형태는 요리토모(賴朝)50)가 가마쿠라에 막부를 연 봉건제도였다. 각지에 수호(守護)·지두(地頭)를 두고 군량미를 부과하고 전지(田地)를 지급함으로써 전국통제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봉건제란 주권자가 제후들에게 봉지(封地)를 주고 그 대가로 제후들의 충성을 받은 제도이다.
제후는 그 봉토 내의 인민을 세습적으로 통치하고 인민은 신하로서 제후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5) 집권적 봉건제도의 시대
초기의 봉건제도는 극히 분권적인 것이었다. 전국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에 이르러 비로소 강고한 중앙집권에 의한 일원적 통치가 완성되었다. 막부의 직할지는 전국의 4분의 1에 이르렀고, 정치·경제의 주요한 토지를 직할하였다. 쇄국정책으로 외래의 자극과 교란을 피하고 제후의 통제적 배치, 참근교대(參勤交代)51)의 실시로 도쿠가와의 세력은 압도적인 집권성을 띠게 되었다.
(6) 자본주의 제도의 시대
그러나 이 봉건제도 말기에는 계급의 혼란이 매우 심각했고 무사의 생활은 궁핍했으며, 죠닌(町人)52)의 경제적 부흥과 더불어 막부는 재정적으로도 무력적으로도 제후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올바른 국체론에 의해 반국체적 막부의 존재는 부정되고, 메이지유신에 의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제도가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대정봉환(大政奉還)53)·판적봉환(版籍奉還)54)·폐번치현(廢藩置縣)55)·계급폐지 등과 같은 오늘날의 사회제도가 탄생하였다.
50)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將軍)이다.
51) 에도(江戶)막부가 각지의 다이묘(大名)들을 정기적으로 에도(현 도쿄)로 참근, 즉 불러들인 제도이다.
52) 에도시대에 도시부에 살고 있던 상공업자를 가리키고, 지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53) 정권을 천황에게 되돌려 준다는 뜻으로, 1867년 10월 14일 에도막부의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넘기겠다고 전하고, 조정은 15일 이를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54) 1869년 전국의 각 번주(藩主)들이 토지(版)와 인민(籍)을 조정에 반환한 것. 메이지 정부가 중앙집권을 위해취한 조치로, 폐번치현의 전제가 되었다.
55) 1871년 메이지 정부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전국의 261개 번(藩)을 폐지하고 부(府)·현(縣)을 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일본의 사회형태는 2600년 동안 수많은 변천을 거쳐 왔다. 그러나 늘 변천하고 있던 일본의 사회형태 깊숙한 곳에 언제까지나 변천하지 않는 존엄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민족의 모습이다. 여섯 가지 사회형태의 변천 속에서 천황은 언제나 민족의 중추로 계셨다는 점이다.
이는 천황이 황도애의 주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황도애는 진선미의 종합체이기 때문에 모든 변화에 임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일정불변의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황도애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일본의 사회형태는 가까운 장래에 필연적으로 이념적인 사회
로까지 앙양(昻揚)될 수 있는 것을 약속받고 있다. 왜냐하면 황도애의 본질은 불변성인 동시에 보편성이기 때문이며, 진리의 종합체는 이념의 세계에서 비로소 그 완성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적인 사회란 미래에 속하는 사회이고, 수많은 이상가들이 꿈에 그리던 사회이며, 황도애가 세계에 군림할 때의 새로운 사회이다.
모든 민족의 생활을 도덕성의 종합체로 연결할 수 있는 이상향이고 절대경이며, 민족 간의 투쟁도 없고 계급 간의 대립도 없으며, 자본 간의 상극도 없고, 인류의 발생 이래 모든 투쟁의 뒤에서 꿈꾸고 있던 평화경(平和境)이다.
메이지천황의 어제(御製)56)를 봉독하면서 본 장을 마치도록 한다.
아마테라스 신의 위광을 우러러본다.
열려질 다음 세상에 만나게 되더라도 .
제2장 조선의 현재
제1절 조선의 과거
제1장 서두에서 사상(事象)의 생성에 관한 작은 철학적 이론을 서술하였는데, 이 이론은 조선의 과거를 돌이켜 봄으로써 또 다른 입증의 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00여 년 전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漢民族)의 이른바 낙랑문화의 유물 및 1500년 전 경주 일대의 신라문화의 고적 등은 조선이 ‘아름다운 나라’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미(美)가 없는 곳에 문화는 창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절승(絶勝), 백두산의 웅장한 모습은 아름다운 신화와 무부(武夫)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강가의 옥토는 평화의 진전을 약속하고 있었다.
태고적 그 옛날, 북방대륙에서 이주한 조선의 원시주민은 농경과 수렵·어업으로 자족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른바 한족(韓族)이라 불리며 조선의 남부에 거주한 70여 개의 국가와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족(高句麗族), 함경 지방의 옥저족(沃沮族), 강원 지방의 예족(濊族) 등은 평화로운 목가적 생활을 아름다운 자연에서, 소박한 가요(歌謠)에서, 원시적인 연애(戀愛)에서 윤택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전란이 끊이지 않는 중국 한민족(漢民族)의 침입으로 그들의 평화로운 꿈은 깨지고, 소극적으로 민족의 단결을 자극받았으며, 적극적으로 무력 투쟁을 강요받았다. 고구려·백제·가라(伽羅)57)·
56) 천황이 만든 시문(詩文) 등을 가리킨다.
57) 가야(伽倻).
신라 등은 중국 한민족의 압박에 대한 조선 원시주민이 조직한 국가체제였다. 중국의 조선에 대한 관계는 태고 적부터 침략의 전주곡으로 시작되었다.
고구려·신라·백제·가라 등 각 국은 그 생성에 있어서 외부적 침략에 대한 소극적 방어로서 발생한 것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정치적 및 신앙적 중추를 가짐으로써 국가적인 적극성을 부여받았다.
즉각 국의 군주는 정치적 주권인 동시에 피통치자의 생활 목표이기도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은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며 민족의 중추가 되었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천제의 영광을 입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그 이름의 ‘밝게 빛나다’는 속성에 의해 태양으로 비유되었고, 가라의 여섯 연방국가의 각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에서 태어난 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 건국 시조들의 공통적인 점은 그들 모두 자연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인 ‘하늘’ 혹은 ‘태양’으로 자신을 상징하고, 이로써 민족의 모든 생활을 하나의 중추와 연결하려고 기도한 점이다.
민족의 결속을 천제 곧 군주라는 중추 의식으로 일원화한 것은 모든 도덕성의 종합체인 황도애를 그 중추 의식으로 삼는 일본민족성의 근거와 거의 비슷하다. 그렇지만 일본민족의 황도애가 진선미의 종합체 그 자체였던 데 반해, 조선 고대의 민족 중추는 천제를 모방한, 진리에 대한 모방체(模倣體)였다.
모방체는 어디까지나 모방체일 뿐이고, 진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민족 발전의 추진력이 되지 못하고, 각 국가가 ‘하늘’을 시조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500년 뒤 마침내 신라에 의해 통일된다는, 개개 국가의 붕괴를 전제하게 되었다. 조선의 국가적 비극은 실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과거 통일의 패업(霸業)을 성취한 신라도 그저 경주의 고분에 떠도는 그 문화의 여운으로써 월성(月城)에 시드는 추초(秋草)와 함께 회구(懷舊)의 여정을 깊게 드리울 뿐이다.
조선반도는 이 땅에 생멸하는 수많은 국가가 확고불발(確固不拔)한 건국의 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로 무력에 의해 일러서고 무력에 의해 무너지는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해왔다.
이리하여 이 땅에 태어나는 아버지도 아들도 손자도 모두 ‘비극의 자식’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랑의 애조(哀調)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비극적 민족의 필연적인 소리이다.
반복무상한 국체의 교체에 환멸을 느끼고 외적의 부단한 침입에 위협받고 권력에 대한 강제적 복종에 지친 ‘비극의 자식’들은 국체의 교체가 없고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권력이었던 태고적 옛날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되었다.
유구한 흐름에 따라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키우며 사랑을 노래하는 기쁨은, 무력의 강제주권에 내몰려 이름 없는 전쟁터에 그 주검을 내던지는 무모함을 극도로 배척하였다.
산에서 사냥하고 바다에서 고기 잡으며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감격은, 산을 넘어 바다를 건어 까닭도 없이 옥토를 유린하는 외적의 침략을 극도로 증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격은 퇴영적·우유부단·회고적·비순종적인 것으로 변하였다. “안녕(오하요우(オ早ウ))”이라는 말 대신 “잘 잤어?”라고 하고, “안녕(곤니치와(今日ハ))”이라는 말 대신 “밥 먹었어?”라는 인사는 단순한 풍습으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자가 현재를 긍정하는 힘인 데 반해, 후자는 그저 생활의 과거만을 묻는다.
회고적인 민족성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조선의 대지에 생멸하는 모든 국가는 세계의 이념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확고불발한 건국의 정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국체의 변천 무상하고, 따라서 파괴적이고 퇴영적인 민족의 성격을 키우고 있다.
파괴적인 민족성이 항구적인 문화를 건설하지 못하고, 퇴영적인 민족성이 국력의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이상 문화의 건설이 없고 국력의 발전이 없는 국가가 붕괴되는 것 또한 자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 근거에 확고한 진리성이 없는 국가는 설령 일시적인 융성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영속성을 누릴 수는 없다.
과거에 이러한 건국의 정신을 갖지 못한 조선이 늘 비극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과거이기에 체념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 또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유구한 미래에 조선의 모습이 구태의연함을 지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태를 벗어나 비극의 무대를 새롭게 출발하는 제단으로 만들고, 비극의 자식들로 하여금 새로운 출발의 선봉에 서도록 하기위해서는(이는 우리가 생활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한, 필연적으로 욕망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하면될까?
제2절 과거 일본과 조선의 관계
조선의 새로운 출발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과의 상관관계를 알아야 한다.
일본과 조선의 상관관계를 이해함으로써 황도애가 조선에서 지닌 내포를 인식하는 동시에, 황도애가 세계이념으로까
지 발전하는 과정에 있어서 조선이 그 첫 단계라는 인과율을 발견할 수 있다. 사상(事象)과 사상(事象)이 서로 상관관계를 맺는다는 현상은 사상의 발전과정 속의 단순한 변이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거기에는 필연적인 인과율이 당연하고 절대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즉 인과율을 벗어난 사상 간의 상관관계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양자가 그 영역의 어떤 부분을 섞고 어떠한 형식에서 상관적으로 결부되기 위해서는 양자의 속성에 있어서 당연히 그렇게 될 요인을 발견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 수천 년동안 일본과 조선의 상관관계 역시 필연적인 인과율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반드시상관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인이 양자 안에 그 속성으로서 잠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요인이란 무엇이었을까?
(1) 정신적 요구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허이다. 조선에 생기(生起)하는 여러 국체는 당연히 가져야 할 확고한 건국의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에는 누구나 욕망하는 좋은 건국 정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에게 없다는 공허감을 이웃에 있는 것을 욕망함으로써 충족하려 하였다.
일본의 건국 정신은 그 본질상 공간적인 무변확충(無邊擴充)을 요구한다. 무변확충이란 무한대의 연장이다.
연장이란 가까운 데서 먼 곳으로 미치는 것이고, 조선은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건국 정신의 본질과 조선의 결핍성은 모든 장애를 끊고 서로 접근해야 하는 요인이 되었다.
(2) 지형
양자는 현해탄의 좁은 해역을 사이에 두었을 뿐, 완전히 인접해 있어서 부산에서 쓰시마(對馬)를 바라보고 쓰시마에서 이키(壹岐)로, 이키에서 기타큐슈(北九州)로 외칠 수 있다.
고대 전설에 나오는,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嗚尊)가 소시모리(曾尸茂梨)로 내려간 일,58) 야쓰카 미즈오미쓰노노 미코토(八束水臣津野命)가 나라를 끌어당겼다는 고사,59) 탈해(脫解)의 표류, 연오랑(延烏郞)이 바다를 건너간 일 등은 양자의 지형이 인접한 데서 나오는 상관적인 모습이었다.
(3) 고고학
지형의 인접은 고고학적으로 많은 유사한 유물을 낳았다. 멀리 석기시대의 석포정(石疱丁)·돌도끼·돌화살촉·석검(石劍) 등 서로 비슷한 형태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고대 토기의 네 가지 원형은 모두 일본의 토기에서 계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구옥(勾玉)의 유사점이다.
이 미술품은 일본과 조선 외에는 어떠한 국토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재료가 중국 오지에서 반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일본과 조선에만 비슷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단지 지형이 인접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두 민족이 미를 감상하는 눈에 섬세한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과 밀접한 동일 문화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4) 체질
국가가 같은 위도와 경도에 위치한다는 것은 인종의 체질이 유사하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중대한 원인이다.
황색인종 중에서도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은 참으로 유사한 체질을 갖고 있다.
특히 긴키(近畿)지방의 일본인과 중부 조선인은 가장 가까워서 그 차이가 일본 내지의 지방적 차이보다 훨씬 작다고
한다.
체질이 같다는 것은 또한 혈액이 섞여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선일체를 긍정하지 않는 속론(俗論)에 대한 반증이 된다.
(5) 언어
국어와 조선어는 주어와 술어의 배치법에 있어서 완전히 같은 형태를 갖고 있다. 언어학자에 따르면 양자는 문법이 거의 같은 뿐만 아니라 발달한 개개의 언어 그 자체 또한 어원적으로 상관적인 부분이 많다고 한다.
이는 사실에 입각한 것인데, 이론상으로 보더라도 인접한 지형을 갖고 있고, 신화시대부터 일가(一家)와 같이 빈번한 교섭을 맺고 있던 두 민족이 완전히 다른 국어적 원천을 지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필연적 요인 아래 양자는 그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관계는 역사상 어
58) 스사노오는 일본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이다. 난폭한 성격 때문에아마테라스에게 추방당한 뒤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蘇尸茂梨)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59) 구니비키(國引き)라고 하는데, 야쓰카 미즈오미쓰노노 미코토(八束水臣津野命)가 신라에 그물을 던져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끌어당겼다는 전설에서 나왔다고 한다.
떠한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일본의 국제적 교섭은 모두 황도애의 선포를 그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다. 조선에 대한 관계 역시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신화시대의 양자의 교섭은 전설로서 과학의 논외에 두더라도, 양자의 관계는 멀리 스진천황(崇神天皇) 시대에 임나(任那) 구원이라는 우의적(友誼的)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관계는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 정벌, 센카천황(宣化天皇)과 긴메이천황(欽明天皇)의 임나 구원, 비다쓰천황(敏達天皇)과 스슌천황(崇峻天皇)의 임나 회복 및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임나 회복,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의 임나 부흥전쟁을 거쳐 덴지천황(天智天皇) 시대에 일시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종지부를 찍게 된 이유는 국내외의 정치기구체가 올바른 황도애의 내포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외형적으로 보건대 임나에 대한 교섭은 실패로 끝났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동안 황도애의 외적 선포, 황도애로의 귀화인들이 남긴 각종 유적 또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역대 대군들이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셨는지,긴메이천황의 유언에서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즉, 임나를 예전과 같이 만들도록 하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의 제1차적 교섭은 수많은 파란을 남기고 중절된 형태가 되었다. 중절된 이후 일본은 그간에 섭취한 대륙의 문화를 스스로 소화하면서 독특한 문화권으로의 자기충족적인 진취를 도모하는 동시에, 황도애 내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열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 일본과의 교섭이 막힌 조선에서는 신라통일이라는 국가적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이 국가적 위업을 달성한 해는 조선민족에게 눈부신 재출발의 해가 아니라 무력에 의해 민족의 자부심이 짓밟힌 비극의 탄생일이었다.
당나라에 게 조공을 바치는 신라는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화를 이입함으로써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늘 대륙의 무력에 위압당한 노예적 근성은 힘 이외의 올바른 이념을 욕구하는, 충족되지 못한 민족성을 키웠다.
이는 신라가 고려로 바뀌고 고려가 이씨조선으로 바뀌어도 그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의욕은 발전의 전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무엇인가를 의욕하고 있던 조선은 청일전쟁에 의해 만족할 만한 가능성을 약속받았다. 청일전쟁은 조선에서의 중국민족의 역사적 무압(武壓)에 대해 황도애가 반격하는 최후의 해답이었다. 그 이후 10년, 러일전쟁에 의해 러시아로부터 벗어난 조선은 발 빠른 황도애의 진군에 심신을 모두 바쳤다.
1910년은 그야말로 조선이 그 국가적 독립을 잃은 슬픈해가 아니라, 잔해에 가까운 병든 몸이 건강을 되찾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 기쁜 해였다.
신라의 통일은 나라를 부여하고도 기쁨을 빼앗았고, 한일병합은 나라를 잃음으로써 기쁨을 되찾았다.
(다음 호에 계속)
<출전 : 星野相河(舊名 裵相河), 「肇國の精神と朝鮮の將來(上)」, '綠旗' 第5卷 11號,綠旗聯盟, 1940년 11월, 137~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