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향기
모임득
차를 들고 볕이 드는 창가로 앉는다.
햇살이 어둠을 밀어내면 지난밤에 흐트러졌던 삶의 흔적들을 말끔히 치
우고 차 한 잔 마시는 이 시간이 좋다 내 손끝에서 정갈해진 집안에서
청소할 때 틀어놓은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고 비스킷이나 빵 한 조각을 차
와 함께 할 수 있는 잠깐의 여유로움이 더없이 소중하다.
한 조각의 빵과 커피, 커피는 한 모금 넘기는 맛보다 향이 좋다. 갓 구
워낸 빵에서 나는 빵의 냄새와 커피의 향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여 준
다고 한다 그래서 향기로 마케팅을 하는 곳에서는 일부러 빵과 커피의
향기를 내 보낸다고 하지 않던가.
집안에 향기로운 냄새가 퍼지면 방에서 비디오를 보던 아이들이 웃으면
서 뛰어 나온다 커피 맛이라도 보려고 티스푼에 묻은 한두 방울 빨아대
며 무언의 눈길을 보내면 난 아이들에게 빵을 갖다 준다 종류별로 다양
한 빵을 아이들에게 사다 주다보면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풋풋한 웃음
이 나오곤 한다.
먹고살기도 바빴던 시절이니 지금처럼 앙꼬가 들어가고 맛을 가미한 빵
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할 정도로
극빈한 아이들에게 주는 노란 빵이 있었다 좁쌀로 만들은 듯한 그 빵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아랫집 언니에게 보리밥으로 싼 내 도시락을 주고
바꾸어 먹었다 노란 빵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개떡에 비해 색다른 맛
이어서 아주 조금씩 베어가며 아껴먹었었다.
내가 빵을 처음 만들어본 것은 중학교 때이다 어머니는 개떡이라고 하
였는데 떡 보다는 빵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학교가 파하고 십리 길을 걸
어 집으로 오면 해는 산마루에 걸려 있는데 밭일 나간 부모님은 소식이
없다 그러면 자배기에 보리쌀을 빡빡 씻어서 불을 떼어 한번 끓인 다음,
일부는 대나무 조리로 소쿠리에 건져 놓는다 남은 보리쌀 위에 쌀 한 움
큼을 씻어서 넣고 어머니가 가끔 하시던 대로 사립문 옆에 돌담위로 기어
올라온 호박잎을 밥 위에 깐다 그리고는 밀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어 개
어두었던 반죽을 호박잎 위에 평평하게 깔고 불을 때면 밥이 되면서 나만
의 빵도 익어갔다.
보리밥이 뜸들을 시간을 기다렸다가 솥뚜껑을 열면 가마솥에선 김이 모
락모락 나고 부엌에는 빵 냄새가 시나브로 번진다 따끈따끈한 빵을 집어
들고 누가 볼 새라 뒤곁으로 갔다 감나무 아래 장독대에 앉아 가끔 부엌
문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사립문으로 누가 오나 살펴보며 먹던 빵 맛은 그
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빵 밑에 깔았던 호박잎을 소죽 쑤는 솥에 넣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침 떼곤 하였는데 어머니는 그때 눈치 채고 계셨
을까 보리밥에서 풍기던 빵의 냄새를 호박잎에 물 들은 밥알에서……
“우리 딸 다 컸네 이제 저녁밥도 지어놓고”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
던 어머니는 알고 계시면서도 딸만의 비밀을 지켜 주셨으리라.
언젠가 이웃에서 동부를 가지고 왔기에 개떡을 만들어 보았다. 밀가루
에 소금과 동부를 섞고 찜통에다가 예전의 호박잎대신 면 보자기를 깔고
얇게 펴서 쪄냈더니 제일 많이 집어먹던 남편은 또 먹고 싶은지 누구네
집에서 콩 안 가지고 왔느냐며 괜스레 콩 타령이다.
입맛이 달라서인지 몇 입 베어 물더니 먹지 않던 아이들. 달걀 버터 우
유를 넣은 반죽에다가 달콤한 내용물이 들어가는 단과자까지, 부드럽고
달콤한 빵 맛에 맛들인 아이들에게 달랑 밀가루로만 만들은 빵이 입맛에
맞겠는가 어릴 적 입맛에 맞는 막빵을 향수에 젖어 남편과 내가 먹었듯
흐르는 세월 따라 빵 맛도 입맛에 맞게 변했음이라.
세월이란 흐름 속에 삶의 질은 향상되고 의식주 또한 변화하기 마련이
다 산촌에서 빵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어머님이나 내가 만든 빵만
이 전부인양 살아온 시절은 지나고 이제 빵도 브랜드 시대가 되었다 빵
의 종류만 해도 다양한데다가 브랜드 빵집도 많다.
우리가 그려나가는 인생사가 저마다 다르듯 빵의 모양도 만드는 이의- 18
손길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기다란 바게트를 보면 남들보다 긴 인생을 같이 살아갈 남편 같다는 생
각이 든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우면서도 알고 보면 마음이 여
리고 생각이 깊은 것이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폭신하고 쫄깃한 바게트 같
다.
식빵은 사람으로 따지면 가장 순수하고 때가 묻지 않은 내 아이들과 같
은 빵이다 주로 토스트를 해 먹고 가끔 샌드위치도 만들어 먹는다.
계단 마냥 한 올 한 올 정성을 들여쌓은 파이를 보면 내 어깨가 무거워
진다 아이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한 발짝 한 발짝 세상에 발을 들여놓
도록 올바른 교육을 시키고 정성들여 키워야 하는 숙제 같은 것. 우리 부
부가 숙제를 잘 해서 아이들이 부드럽게 입안에서 살살 녹는 파이처럼 탈
없이 세상살이를 했으면 싶다.
아삭한 쿠키처럼 내 아이들이 아기자기한 면도 있었으면 한다 숫자에
연연하며 사는 것 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고 키 작은 풀꽃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 참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우리 집에는 빵의 향기가 풍기면서 행복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든 좌절과 고통의 늪을 지나고 오랜만에 얻은 자식. 그 아이들
을 키우며 사는 맛을 느끼는 요즘이다.
힘들여 얻은 만큼 자식들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크다. 기다란 바게트처럼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소보루나 크림빵 같은 둥그런 빵처럼 모나지 않
은 사람이 되었으면, 케이크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으
면 싶다.
부족한 것이 많은 내가 비록 거둘 것은 없지만 내 아이들에게 사랑이라
는 열매를 주고 싶다.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기분을 좋게 해 준다는 빵
과 커피의 향기를 전해 주고도 싶다.
빵과 커피는 이미 다 먹고 찻잔의 온기마저 식은 지 오래이지만 아이들
에게 잘 해 주고 싶은 내 마음속의 향기는 오롯이 남아있다.
2005/22집
첫댓글 부족한 것이 많은 내가 비록 거둘 것은 없지만 내 아이들에게 사랑이라
는 열매를 주고 싶다.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기분을 좋게 해 준다는 빵
과 커피의 향기를 전해 주고도 싶다.
빵과 커피는 이미 다 먹고 찻잔의 온기마저 식은 지 오래이지만 아이들
에게 잘 해 주고 싶은 내 마음속의 향기는 오롯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