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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엘 예언서의 말씀 2,22-24.26ㄱㄴㄷ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내리라.
23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24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26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제2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14,13-16
나 요한은
13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14 내가 또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축복 가득찬 한가위 되셰요.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고 노래합니다.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는 것,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베풀어졌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입니다.
또한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과 집착’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집착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신만의 것인 양 여기고,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고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곧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임을 깨닫고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당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전부’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소유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가지게 되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도 소유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전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
(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을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유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놀라우신 일을 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주님, 당신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정의에 따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
(요엘 2,23ㄴ)
한 해의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한가위 명절에 듣는 오늘 요엘서, 주님이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셨다는 말씀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말씀입니다.
정의에 따라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내려주신다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개신교 번역은 적당히 주신다고 번역하고, 우리의 옛날 번역은 흠뻑 주신다고 번역했는데 어떤 뜻입니까?
우리의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주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주신다는 뜻입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의 계절 정의에 우리가 따른다면, 곧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면, 그 정의에 따라 하느님께서 적절히 비를 주신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저의 이런 이해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요엘서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듣는 그 유명한 말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라는 말씀 말입니다.(요엘 2,13ㄱ)
그러니 오늘 정의에 따라 비를 주신다는 말씀은 마음을 찢는 회개를 너희가 하면 그 보상으로 하느님께서 적당한 비를 주시고 풍성한 수확을 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한가위가 ‘가을 한가위’가 아니라 ‘여름 한가위’라고 합니다.
요즘 여러 곳 동유럽과 동남아시아에서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적절히 비를 주신 것이 아닌데 우리가 하느님의 계절 정의에 따르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두 번째 독서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묵시 14,13ㄹㅁ)
우리가 한 일이 우리를 따라온다는 말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우리가 되어주는 그 ‘되’로 받는다는 말이고 그 되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자연도 사람도 하느님도 우리가 한 대로 또 그 ‘되’로 되돌려줍니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엘서가 말하는 ‘정의에 따라서’입니다.
그러니 올해 한가위에 내가 풍요롭지 못하다면 내 탓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끝이 빈손이라면, 그것도 하느님 앞에서 빈손이라면 그것 또한 내 탓입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렸는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빈손이라니!
마음을 욕으로 채우지 않고 사랑으로 채웠다면 풍요로울 텐데!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한가위 명절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만남>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존중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합니다.
상대방을 항상 이해할 수 없고 항상 옳지도 않겠지만, 의견이나 성격이 다른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추석 명절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기억하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혈육의 조상뿐 아니라 천상의 삶에 눈을 뜨게 한 신앙의 조상들도 기억합니다.
부모와 이웃에 감사하고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의 신념을 표현하는 제례 방법이 다릅니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이 서로 자기의 신념을 강요한다면 갈등만 커질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며 가족 서로 간에 성숙한 사랑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부모, 형제, 친척, 이웃을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정을 키우는 날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사하고, 명절을 통한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 계실 때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 유대 관계를 지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갚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니고, 아름다운 미풍양속입니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성균관’에서 명예학위를 받게 되셨는데, 매스컴은 추기경님께서 과연 성균관의 예법에 따라 절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는 서슴없이 절을 하셨습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다면 그게 우상숭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상 공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우상숭배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철폐하였고 이는 부모의 은덕을 망각하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고 하여 천주교 신자는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39년 12월 8일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은 “조상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미풍양속이며 민족의 훌륭한 유산이므로 수용해야 하고 토착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아픔이 컸습니다.
사실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데 있습니다.”(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제134조1항)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미사 안에서 지속됩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서 천상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 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탐욕에서 벗어나는 법: “그래도 숙제니까!”>
한가위는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왜 시스템적으로 매년 이렇게 하도록 모든 나라에서 명절을 지낼까요?
그 이유는 시스템적으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탐욕에 시스템적으로 잠식되기 때문입니다.
1997년 수원 소재 전교 1등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갑자기 오른 성적 때문에 수군거리는 친구들의 태도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 학교 가기가 무서워요. 애들이 무서워요. 말투와 눈빛이, 행동들이….”
300명 중 100등 하던 아이가 한 학기 만에 전교 1등을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렇다면 다음 시험으로 전교 1등을 할 실력임을 증명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시선보다는 다음 시험의 부담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이뤄낸 것들은 이렇게 잃을까 봐 불안합니다.
1997년 같은 해 성남시에서도 1등을 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1등일 때 죽고 싶다.”라는 말을 많이 했고, “나는 최고인 이 순간 자유를 얻었다.”란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습니다.
1등을 유지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내가 이뤄낸 것은 이렇듯 지푸라기처럼 잃어버릴까 봐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탐욕이 많은 부자는 자기 재산을 잃을까 봐 곳간을 넓히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부질없습니까?
내가 이뤄놓은 것이나 가진 것들이 부질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탐욕에서 비롯되는데, 탐욕은 가만 있으면 저절로 나를 잠식합니다.
건물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허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탐욕을 이기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1946년 최초의 마취제 ‘에테르’가 발견되었습니다.
의대 2년생 모턴입니다.
그가 특허 신청 때 지도교수인 ‘웰치’와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이 자신이 특허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셋은 법정 싸움까지 갔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합니다.
나의 것이면 뭐 하겠습니까?
목숨을 잃게 된다면.
성경에는 ‘못된 소작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소작인은 추수철마다 소출 일부를 주인에게 봉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였지만, 주인은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감사의 봉헌 시스템 안에 자신을 넣지 못하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선악과와 뱀 앞에 서 있는 하와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면 뱀에게 자기를 바치는 것이 됩니다.
선악과는 매년 열매가 맺힐 때마다 바쳐야 합니다.
부모를 기억해야 하는 명절이 규칙적으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잡초가 나고 건물이 허물어지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잡초를 뽑고 건물을 다시 재건하는 일도 규칙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시스템을 이기는 것은 시스템밖에 없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부모 공경 의무(키부드 아브 바-엠 Kibbud Av Va-Em)를 규율로 정해 실천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앉는 자리나 사용하는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는 자녀가 함부로 발언하지 않는다.
자녀는 부모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즉시 이를 제공하며, 필요시 부모를 돌볼 책임을 진다.”
이런 규정들입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기에 유대인들의 부모 공경은 대단합니다.
그렇게 규율로 자신을 얽어매면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빠는 아이에게 과자를 사 주면 규칙적으로 하나만 아빠 달라고 말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이는 아빠에게 하나를 주기도 아까워할 것입니다.
EBS ‘엄마가 울었다’는 어느 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번 칭찬하고 그 내용을 적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30번을 다 채우니 자신이 자랑스럽고 집이 좋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래도 숙제니까….”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지혜를 얻는 지름길은 ‘회개’입니다>
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내가 수확한 것’이라는 말과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이라는 말은 그 부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얻은 것들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원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리석음’은 곧 ‘죄’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일꾼들에게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고, 겸손한 사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법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고, 교만한 사람은 은총을 받아도 감사드리지 않고,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꾼들에게는 주기로 한 품삯을 주었으니까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일꾼들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유에서,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하느님 말씀은 목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목숨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인생 자체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셨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되찾아 가십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일 뿐입니다.
그 관리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교만에서 인생을 막 사는 어리석음이 생기고, 그 어리석음에서 온갖 범죄가 생깁니다.
2)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이라는 말은 ‘시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이고, 죄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시편 90,4-6)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 4,14)
인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간 동안에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면 좋을 것 같은데,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오늘만’ 살고 있습니다.
비유에서, '오늘 밤에' 라는 말씀은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즉시 떠나야 합니다.
3)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라는 말과 “모아 두어야겠다.” 라는 말과 “쌓아 두었으니” 라는 말은 그가 ‘나눔’과 ‘사랑 실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는 말은 그가 ‘몸의 쾌락’만 생각하고,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네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4)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하느님 말씀에는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때가 되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랑하는 것들, 무슨 학문이나 예술이나 업적 같은 것들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남아 있지 못하고, 그냥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지나간다’는 말은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한가위’는 겸손하게 감사드리는 날이고, 사랑을 더욱더 실천해야 하는 날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하는 날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회개’인데, ‘회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참된 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 - '찬양, 심판, 지혜'>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시편 67,1)
지혜로워야 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로 인해, 탐욕에 눈이 멀어, 지옥을 자초해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평생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평생 배우고 배워도 여전히 배워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도 지혜를 가르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못 버리는 것은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다산>
날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려가는, 비워가는, 내려 놓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공자는 네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억측을 버렸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을 버렸으며, 고집을 버렸고, 이기심을 버렸다.”
<논어>
한마디로 지혜로웠던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웠던 현인 공자입니다.
오늘은 한가위 추석입니다.
오늘은 삶의 여정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10년전에 끝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여정이요 참 많이도 강론에 등장했던 주제입니다.
오늘 주제는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이르기까지 귀가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계속 배워가야 하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늘 강조했던 바가 일생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일년사계 사계절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검이 삶의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날로 '위에로의 여정(an upward journey)'을 살게 합니다.
저로 말하면 오후 5시,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후 3-4시쯤, 가을철에 속하는 인생들 역시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현역으로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인 가을철 답게 부지런히 노력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외적 수확은 어느 정도이고, 갈수록 기도생활, 공부생활에 치열한지 묻고 싶습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졸업이 없는 평생 공부요,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영적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 어떻게 하면 보람있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네 측면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입니다.
찬양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저절로 샘솟는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인 가을철에 걸맞는 찬양의 삶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감미로운 세상에 경탄하는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태양의 찬가를 불러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 찬양 감사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맛이 아닌 하느님 맛으로, 진리맛으로 살게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하느님 중심의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요엘서의 말씀, 오늘 세상에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런 하느님을 잊어 자초한 불행입니다.
도대체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는 찬양과 감사, 그리고 참된 겸손의 삶입니다.
둘째, 심판입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여정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끝날 여정에 늘 심판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가 모두인 듯 사는 것입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철, 언젠가는 주님도 우리 인생을 수확해 가실 것입니다.
과연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잘 익어가는 인생들인지요?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이 실감나게 종말 심판 수확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찼습니다.”
그러니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던 이들은 심판의 날은 구원의 날이자 안식의 평화이기에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들려오는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하늘에 쌓았던 보물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선행, 섬김, 자비, 찬양, 감사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상급과 더불어 행복한 천국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지상(地上)에서부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천상(天上)의 삶입니다.
셋째, 지혜입니다.
탐진치(貪瞋癡)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탐욕의 무지가 우리를 눈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해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무욕의 지혜로운 자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삶이 자유로운 삶, 지혜로운 삶입니다.
소유의 쾌락이 아닌 존재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부자가 참 어리석습니다.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무지의 탐욕으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 같습니다.
하늘을 향한 창도, 이웃을 향한 창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느 창도 없습니다.
완전히 고립단절된 이런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스스로 자초해 이런 부자같은 지옥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부자였더라면 땅의 곳간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았을 것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찬미하며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자선의 삶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땅의 곳간에 곡식과 재물을 가득 쌓아두고 자족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조롱하는 하느님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하다.”
세상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촉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삶을,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찬양의 삶, 늘 심판을 염두에 둔 삶,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의 삶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곡 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 주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로다.”
(시편 57,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를>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 ‘한가위’, '추석'입니다.
추석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눔입니다.
농경사회에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입니다.
가을에 거둔 곡식과 과일을 이웃과 특히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재물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추석을 지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좋은 날씨를 주시고, 적당한 비를 내려 준 하늘에 감사드리는 겁니다.
좋은 땅을 물려준 조상에 대해 감사드리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추석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명절이 미국에도 있는데 ‘추수감사절’입니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이주민들은 낯선 환경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겨울을 지낸 이주민들은 가을에 첫 곡식을 수확했습니다.
신앙인들이었던 이주민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고, 음식을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은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명절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이 귀성, 귀향길에 오르는 우리의 추석과 비슷합니다.
유년 시절 제게 추석은 ‘심부름’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우면 돼지고기를, 형편이 좋으면 소고기를 친척들과 나누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친척 집에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면 친척들도 형편에 맞게 추석 명절을 지낼 수 있도록 선물을 주었습니다.
추석날 가족들은 조상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쳤고, 추석 합동 위령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제게 추석은 ‘가을 방학’이었습니다.
신학교는 매년 가을 추석이면 신학생들이 집에서 며칠 쉴 수 있도록 방학을 주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추석 연휴를 보내야 했기에 주어지는 방학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신학생들이 사제관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신학생들에게 추석 선물을 주었습니다.
양복 옷감을 받기도 했고, 옷을 받기도 했습니다.
추석 방학이면 동창 신학생들과 등산도 하였습니다.
지리산도 갔고 덕유산도 갔습니다.
한번은 동창 신학생의 집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동창 신학생의 집이 서산이었고,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는 서툴지만 벼 베기를 도와주었습니다.
추석은 ‘영화’를 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극장들은 추석을 맞이해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영화를 개봉했습니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는 추석에 맞추어서 개봉되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누려야 할 천상의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밝게 비치는 둥근 달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를 바랍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서로가 다른 삶을 인정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론 중에 종종 제 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 시대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공감하십니다.
아마 그 시대에는 모두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전혀 공감하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라면 봉지를 모아 공을 만들어 야구했다고 하면, “왜요?”라고 묻습니다.
재래식 화장실 이야기를 하면, 자기는 절대로 그런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30년 전만 해도 모두 비슷하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지 않고 또 경험도 하지 않았으면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대 간 격차가 크다 보니 대화가 되지 않아 현대 사회는 더 외로운 사회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30년 전에 10% 미만이었던 1인 가구가 현재는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섰고, 수 년 내에 40%를 돌파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외로운 사회 안에서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을 공유할 수도 없고, ‘함께’라는 것을 하나의 짐처럼 생각하기에 정서적인 고통이 커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분열만 보이게 됩니다.
생각의 차이를 서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삶을 사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다른 삶도 궁금해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다른 삶도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들도 함께 해야 할 이웃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인데, 지금의 우리는 점점 혼자라는 틀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도 그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말하는 한가위입니다.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수확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보름달처럼 밝고 훈훈한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만나고 하느님과 조상님들과 함께하는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좋은 날인데 가족의 붕괴로 혼자서 이날을 지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가족과의 다툼으로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삶을 인정하지 않고, 지지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가족인데도 함께 할 이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마지막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물 것으로 생각하지만, 복음의 말씀처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삶을 인정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랑의 삶만이 언제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예.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힘차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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