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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16-19
사랑하는 여러분,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연로하신 분이 옥좌에 앉으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옷이 새하얗게 빛난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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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예언자는 밤의 환시 속에서,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은 분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옷은 새하얗게 빛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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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예언자는 환시 가운데 장차 일어날 일을 본다. 인간들의 왕국이 부침을 거듭한 다음, 마지막 때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를 받는다. 그의 통치는 영원하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 높은 산에 오르시어 세 제자 앞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신다. 이 변모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이 변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미사의 감사송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혀 줍니다. 주님의 변모는 그분께서 본래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장차 그분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되셔도,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마르 9,9) 이 변모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겪는 이들의 처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의 시점에서 다시 복음을 읽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수난받으실 때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수난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전능하신 분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셔야 하였는지 인간의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모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가 이를 보여 줍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이야기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난 그 순간에, 그분의 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하리라는 것까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수난과 죽음이 예수님의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참으로 하느님께서 오신 분이심을 보여 주는 표지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들의 증언이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주기를 청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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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수난 거부 사건 뒤에 자리하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더욱 확고히 하는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오르신 높은 산은 특별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옷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신앙을 가르쳐 준 모세와, 하느님께 되돌아갈 것을 가르치던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변모 뒤에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왔던 말씀인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과 수난을 시작하시기 전, 곧 예수님의 삶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점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례 때와는 달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덧붙여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6항).(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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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성부의 개인적이고 결정적인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초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분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과 함께 산에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느님을 만나러 감을 뜻합니다. 산은 광야처럼 지형학적 사실을 뛰어넘어 시험받는 인간의 상황을 드러내 주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알맞은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에 오른다는 것은 믿음의 어둠 속에 그리고 절대자의 침묵 속에 걷는 것을 뜻합니다. 또 자신의 안전을 제쳐 놓고 자신을 포기하며, 자신에게 죽고 죽음을 통해 생명을 택하는 것입니다. 산꼭대기에서 하느님의 영광, 생명과 빛, 축복과 계약, 의로운 이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을 드러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예고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는 산에서든 평범한 들녘에서든 성부의 목소리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며, 그분을 따르면서 포기가 자유로, 고통이 기쁨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목적지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첫째로, 하느님께 마음으로 회개하는 개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자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이들과 연대하여 형제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온전히 내어 주는 매력적인 모험을 지향해야 합니다. 성부의 목소리를 되새겨 봅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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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던 세 제자가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그들만이 높은 산에 올라 예수님의 변모를 보았습니다. 새하얗게 빛나는 그분의 옷을, 그분의 신성을 보았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변모는 실상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본디 지니신 모습을 그대로 계시하시는 것이었고, 언젠가 온전히 드러날 당신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평소에 보아 온 그 모습이, 인성 안에 당신 신성을 감추시고 당신의 찬란하심을 가리신 모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공생활 동안 그들이 보았던 기적도, 가르침도,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도, 그분이 본디 지니신 영광의 찬란함에 비하면 모두 희미하고 초라할 뿐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참모습을 아직 뵙지 못하였기에 그 제자들을 부러워합니다. 셋째 하늘에까지 올라갔던 바오로 사도 또한, 지금 우리는 그분을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볼 뿐이고 그분을 부분적으로 알 뿐이라고 고백합니다(1코린 13,12 참조). 그래서 그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날을 갈망합니다. ‘세 제자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주님, 당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때 저희를 당신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소서!’
이어서 거룩한 모습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찬란한 모습을 본 제자들도 영광의 타보르 산에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곳은 영광보다는 고통과 시련이 기다리는 현장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일상과 세상을 사랑이 충만한 곳으로 거룩하게 변모시키고자 우리도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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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영원한 삶, 곧 부활의 표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수행하고 계시는 사명을 중단하자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시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신 분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의 온갖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시고 우리를 다시 생명으로 부르실 분이십니다. 그러시기에 앞서 먼저 십자가를 지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우리는 어떠합니까? 영광과 평안을 찾기 전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걸어갈 준비는 되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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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당신의 모습을 바꾸십니다. 현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웠을까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드러내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셨습니다. 제자들의 방황도 함께 보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미리 천상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좌절하지 말라는 의도였습니다. 당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처럼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스승의 격려와 위안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체험이 없을까요? 인생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은 없을까요? 누구에게나 은혜로운 일은 있기 마련입니다. 고통으로 시작되었다가 유익함으로 마감되는 일들입니다. 주님의 개입 없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님을 믿는 이에게 즐겨 드러내시는 당신의 변모 사건인 것입니다.
은총은 예고 없이 내리고, 생각지도 않은 때에 함께합니다. 꾸준한 기도와 작은 선행이 결정적 순간에 은총을 모셔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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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심하게 논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예수님께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했을 것입니다. 논쟁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 셋을 따로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산으로 올라간 세 제자는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눈이 부시게 변화되신 것을 보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조상들과 맺으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은 이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더 이상 다른 증거와 표징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영광스럽게 변모시키셨습니다. 이처럼 변화는 하느님의 손에 내어 맡길 때 찾아옵니다. 우리의 내적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변화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께 맡겨 드릴 때 우리의 가치관과 삶이 바뀌게 됩니다. 하느님 때문에 변화된 삶, 그것이 신앙인이 받게 되는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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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가십니다. 그러시고는 ‘하늘 나라에서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 자리엔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황홀경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물자고 합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요? 우선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두려움보다 기쁨과 환희가 더 큰 놀람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희열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을 오랫동안 화려하고 근엄한 모습으로만 상상했습니다. 천상의 빛이 감싸기에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모습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만 했다면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을는지요? 제자들은 한순간 깨달았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본모습이 편안한 모습이며, 아무나 바라볼 수 있는 모습이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주시기만 하는 모습이며,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요구를 해도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발견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확신을 안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들은 평생 이 체험을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실 때에도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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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가 전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와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를 연결해서 이해하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귀한 아들 이사악의 봉헌은 막으시면서도 당신의 귀한 아들은 인간을 위해 기꺼이 내놓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인간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인간 사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내맡기십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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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전례력으로 고유 시기(사순, 부활, 대림, 성탄 시기)에는 되도록 그날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이어 주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조금 더 넓은 맥락에서 본문을 묵상할 수 있도록 ‘오늘의 묵상’을 이끌어 가겠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어둠의 골짜기를 걷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빛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이 사악을 바치러 산에 오르던 아브라함은 앞을 내다볼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약속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게 되면 후손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칩니다. 인간의 계산과 논리를 훨씬 뛰어넘으시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 또한 온갖 환난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세상의 고발과 단죄는 힘을 잃고 맙니다.
예 수님의 수난을 앞둔 제자들의 처지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영광스러운 변모 다음에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해 줄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보았던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 모든 것이 실현되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는 그날까지 제자들의 눈앞에서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제자들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수난을 견뎌 내야 합니다. 세상의 힘이 예수님을 없애 버릴 수 있는 듯이 거들먹거린다 해도 그분은 당신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아브라함처럼, 바오로 사도처럼, 산에서 내려와 오늘의 기억을 간직해야 했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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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은 옷감을 희게 한다는 옛말입니다. 흔히 피륙을 바랜다고 하지요. 피륙은 무명베나 비단 같은 것을 말합니다. 삶거나 빨아 볕에 쬐어 ‘희게 하는 작업’이 마전입니다. ‘마전장이’는 이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지요.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라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의복을 입으셨다는 표현입니다. 그곳에는 ‘엘리야’와 ‘모세’도 등장합니다. 역시 천국에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자들에게는 완벽한 하늘 나라의 체험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놀랍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잠시라도 ‘천상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어떤 사건을 만나더라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변모 사건’은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청년들의 모습에서, 가족들의 모습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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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뜻밖의 일을 당하면 정신이 혼란해집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보듯이 예수님께서 빛나는 모습으로 당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시자 베드로 사도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정신이 나갈지라도 살아생전에 주님의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언뜻언뜻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그 찬란한 모습을 닮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지난 7월에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가진 해외 성지순례였기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낮 기온이 44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더운 날씨에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44도가 되면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집에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를 포함한 모두는 일정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순례에 임했습니다.
순례를 모두 마치고서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그늘을 찾아가면서 ‘쉬고 싶다’라는 마음이 가득하기도 했지만, 순례를 마쳤을 때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고생했기에 더 행복도 크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편하고 쉬운 것만이 행복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베드로가 나서서 이 타볼산에 초막을 지어 머무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영광 안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 행복은 편하고 쉬운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더 큰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하늘의 구름 속에서 들렸던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 것을 가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서, 이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친구란 무엇인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아리스토텔레스).
원판 불변의 법칙!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생토록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평생토록 같은 고백성사를 보고 있는 저 자신, 그리고 죽어도 안 변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법칙인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결심하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아직도 진정성 있는 변화는 요원합니다.
아직도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젊은 시절의 미성숙과 불완전과 나약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심하게 요동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래고 질긴 악습을 아직도 끼고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저 위에서 오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화와 회개를 갈구하는 간절한 기도만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플러스 알파로 하느님 편의 개입과 도움, 은총과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느님의 손길에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 필요합니다.
사실 변화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합니다. 굳이 애써 회심이나 회개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단 한번 뿐인 인생, 손톱만큼도 변화되지 않고, 전혀 성장하지도 않고, 부끄러운 이 모습 그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하느님의 은총 역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삶이 시작될때 뒤따라오는 하느님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분위기입니다.
회심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병고 역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은총의 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로 변모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삐 받으실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기적인 신앙을 떨치고 보다 이타적인 신앙에로 나아가는 것,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된 신앙에로 성장하는 것,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죄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이무기가 용이 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뱀이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마침내 용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무기도, 용도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다만 열심히 노력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났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3가지를 배우고 수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지식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영성을 닦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해 체력을 키웁니다. 모든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도 신심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신심이 깊어도 능력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능력과 신심이 좋지만, 건강 때문에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지만,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모른다면 나비가 원래는 애벌레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신학생이 사제가 되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본당으로 파견되어 사목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모임의 자리에서는 상석에 앉게 됩니다. 한 말씀을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배식을 받습니다. 버스에 탈 때도 앞자리에 앉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1인실을 사용합니다. 사제이기에 존중받고, 사제이기에 존중받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존중을 받는데, 익숙해지면 나비가 애벌레의 시기가 있었음을 망각하듯이, 왜 사제가 되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제의 말과 행동에 바리사이의 자만과 율법 학자의 교만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어가고 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빛이 났고, 옷은 새하얗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이곳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 그리고 하나는 주님을 위한 천막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이무기가 용이 되는 성공의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성품성사의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풍랑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걷는 표징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인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우리도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당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
다만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느끼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다만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닮게 하소서
당신
지니신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
이루실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
베푸실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변모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바로 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이 변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이 시점에서 모습이 변하셨는지도 알아야 하지요. 먼저 예수님의 이 변모가 있기 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누구라고 하는지 물었고 다음으로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정확히 대답하였고 이어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수난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황당한 말을 하게되고 이러한 일들 후의 예수님께서는 몇몇 제자들만을 데리고 산으로 오르시어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라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이 변모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오르십니다. 여기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새하얗게 빛이 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알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왕중의 왕이심을 선포되는 것인데 특히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함으로써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에게는 예언자 직분과 사제의 직분이 함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모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성자 하느님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힙니다. 그리고 이 새하얗게 빛이나는 것은 자녀로서 우리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리려고 변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고 또 이 삶을 살아가는데 누구의 말을 듣고 가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신 성부 하느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수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반대했던 베드로를 향한 하느님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신앙인은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수난을 받기 위한 나그네의 길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길을 걸음으로 우리는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께서도 누렸던 바로 그 기쁨이면서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길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거렸다.” (9,29)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산은 평지와 달리 높은 곳이며, 높다는 것은 하늘과 가깝다는 말입니다. 흔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선인仙人과 속인俗人의 차이란 그 존재가 살아가고 있는 상태, 곧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 산과 계곡에 따라 차이가 생깁니다. 산은 신성한 곳이고 초월적인 곳이며, 산은 모든 강물이 시작되는 곳이자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어머니 품과 같습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소명받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장소로 알려졌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탈3,1)도,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1열19,8)도 모두 산입니다. 그들은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높은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았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인”(루9,29) 변모의 핵심인 빛은 곧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빛에서 나신 빛’(=니케아신경)이라고 고백합니다. 순수한 빛,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암흑과 어둠은 없고 완전한 빛, 광명만이 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보다 마태오 복음에는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애졌다.”(17,2)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빛의 찬란한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높은 산의 명징한 정기와 찬란한 빛으로 고양된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지금껏 줄곧 스승이신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면서 느꼈을 행복과 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느꼈을 행복은 전혀 차원이 다른 행복감이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이런 예수님 본 모습, 참모습을 목격한 베드로는 주체할 수 없이 벅찬 환희와 전율에 들떠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9,33)라는 표현은 그저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행복감에서 터진 감사와 찬미의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 역시도 그 자리에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면 베드로처럼 그렇게 주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이는 곧 ‘주님, 지금 제가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음이 얼마나 좋은지 더 이상 말로 표현 못하겠습니다!’라는 탄성은 다름아닌 빛에서 나신 빛 자체인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 대한 베드로의 진솔한 행복감의 표현이라고 느낍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좋습니다.’ 표현의 의미는 놀랍다는 뜻인데, 지금껏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그 순간의 기운으로 압도당해 무섭고 떨린 상태임에도 그 경험이 참으로 좋다는 뜻입니다. 이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지만, 참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행복감이었을 것입니다. 지복직관의 행복!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 조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창조의 본래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인간 존재는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근심 없이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멸이나 무시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이라 부르는 그 자체를 느끼며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참된 행복한 분이시고 참된 행복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산에서 놀랍게 변모하신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자 한 의도는, 다름 아닌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희망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초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당신의 변모 축일을 지내는 저희에게 당부하시는 것이 있다면,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삶을 충만하게 살고 허투루 살지 말며 철저하게, 처절하게 살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당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동요나 여하한 주저함이나 머뭇거림 없이, 온몸과 마음과 정신과 심령을 다해 지금 여기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온 존재로 몰두하며 온 힘을 다해 결단하며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9,33)라고 말하는 베드로를 철부지 같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산은 오르면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베드로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베드로에게 있어서 산에서 체험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여기에 머물고 싶습니다, 는 표현은 기도 생활을 통해 혹은 일상생활 가운데 하느님 체험을 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바람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만난 그 상태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고 싶은 게 인간의 강력한 소망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훗날 예수님의 부활 체험 이후 깨닫게 되었으니 이런 하느님 체험을 만끽하기 위해서 필연코 십자가의 길, 고난의 여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제 영광스런 빛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난 뒤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9,35) 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그분의 뒤를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따랐던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그 어떠한 고통도 괴로움도 이겨낼 힘이 솟구칠 것이며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이 가신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느님과 하느님의 빛, 하느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보고 느끼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느님의 완전한 영광의 빛 안에서 오래오래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 빛으로 빛이신 당신을 뵈옵게 하옵소서.” (시36,10)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토록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당신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며, 그렇게 살 때 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의 권능을 수락하는 일’이요, ‘말씀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등산가면 가끔 신기루 같은 좋은 장면에 어이없이 멍할 때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셋 따로 데리고 타볼 이라는 산 정상에 오르셨습니다.
나임이라는 마을 북쪽으로 조금 가 570m 솟아있어 전망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빛날 정도로 변하시고 모세와 엘리아예언자도 나타났다지요.
더 높이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는 곳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봤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넋을 잃은 제자들이 더 머물겠다고 표현했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본 것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라니 제자들 멍 했지요.
가톨릭알림 말: 우리의 눈은 못 봐도 예수님의 본래 모습 그럴 겁니다.
‘은총만으로’와 ‘성경만으로’가 서로 모순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십니다. 주님의 변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은총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큰일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은총만이 아닌 말씀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는 것에만 목을 매면 그 기쁨에만 머물러있게 됩니다. 내가 인정받기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빈센트 반 고흐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 행위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란 그리스도를 닮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려면 그분을 마치 ‘거울’처럼 보아야 합니다. ‘금쪽이’에 한 아이는 거울을 보며 자기 모습을 보니까 말썽부리던 자기 모습을 버리고 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은총만을 바라는 이상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은총중독’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은총중독은 ‘말씀 빈곤’으로 갑니다. 말씀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미사 때 강론은 무시하고 성체만 영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얀세니즘은 1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이프르(Ypres)의 주교인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의 신학적인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얀센주의는 원죄, 인간의 타락, 신성한 은혜의 필요성, 예정론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선택된 소수만이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종교적 실천에 대해 매우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오직 즐거움(영적 즐거움 포함)이라면 그런 행위는 모두 죄가 됩니다. 얀세니즘이 엄격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은총만을 강조하니까 자연히 예정설을 주장하게 되고 말씀의 역할이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제10권 제33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성가의 말씀(가사)보다는 목소리에 더욱 감화될 때, 나는 벌받을 죄를 지은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음악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이와 비슷한 ‘정적주의’도 있습니다. 은총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싱입니다. 정적주의는 17세기에 발생했으며 스페인 신부 미구엘 데 몰리노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적주의가 왜 이단일까요? 말씀의 실천 동안엔 마치 운전할 때 기름을 줄어드는 것처럼 은총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채웠으면 운전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때 은총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은총과 말씀의 균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수도원을 개혁하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기도에서 얻어진 에너지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거기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아드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도록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성가는 노래 부르는 이의 목소리나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가사를 음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처럼 ‘말씀만으로’라고 한다면 이는 말씀의 씨를 키우는데 태양과 비는 소용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은총만으로’라고 한다면 씨를 뿌리는 일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만으로 구원이 된다고 말할 때 서로 모순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하.사.시.를 읽으며 매일의 나의 방향을 잡습니다. 방향은 잡혀있지만, 도로를 벗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하.사.시.입니다. 그렇다고 성체조배를 하지 않을까요? 성체조배와 말씀 읽기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차를 위해선 기름도 필요하고 운전 능력도 필요합니다. 영혼이 은총이라면 몸은 말씀입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2-10).”
1) 하늘나라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 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마다 폭염 경보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폭염도 혹한도 없는 나라, 태풍이나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자연 재난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또 지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테러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전쟁, 테러, 갈등, 분열이 전혀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또 진짜로 그 나라가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물론 믿고 희망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루카 20,35). 그 자격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사람만 그 자격을 얻게 됩니다(마르 8,34).>
사도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일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바로 그 하늘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사도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그 체험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에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체험’이 금방 믿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오랜 시간 동안의 묵상을 통해서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체험을 하고서도 믿음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 말인데, 인간의 언어로는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다는 말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나눈 대화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대화입니다(루카 9,31).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황홀해서 이곳에서 이대로 영원히 살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고, 자신들은 그냥 노숙을 해도 괜찮다는 뜻도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라는 말은,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겁에 질려 있었다.” 라는 말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3) 사도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도 중요한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해 주신 말씀, 즉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신원보증’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에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신원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신앙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기도할 때 느끼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매 순간 다르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그 때처럼 오시지 않고 늘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지난 번 그 체험은 추억의 단편일 뿐, 그 편린이 오늘의 체험과 같을 수 없고, 그 편린들을 다 합쳐도 주님이시라고 확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사고와 체험영역 안에 가둬둘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고정적인 한 개념으로 구체화시킬 수도 없고, 하나의 개념이나 명제로 정의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저 추억들이 주 하느님을 만나고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시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 때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영광스럽게 변모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장면이 너무나 좋고 또 주님을 정성껏 모시겠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라고 제안합니다. 마르코 복음서 기자는 이러한 베드로의 제안을 두고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6절)라고까지 평가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는 베드로의 구체적인 제안에 이러저러한 반응 없이 그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라는 답변만이 들려왔다고 적음으로써, 베드로의 청원이 적절하지 않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합니다.
탈출기에 보면, 에집트에서 탈출한 후에 사막에서 교육을 받으며 머무는 동안, 주 하느님께서 매일 먹을 만나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날의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모아둔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에 “거기에서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탈출 16,20)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받아 누리는 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과 같이 나누어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혼자 간직하려고 더 큰 창고를 짓고, 더 높은 담을 쌓기 시작하면, 잉여된 만나에서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나듯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이웃에게 폐악을 끼치게 됩니다. 주님을 오롯이 흠숭하는 마음으로, 형제자매들과 공존의 길을 마련함으로써,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태양보다 빛나는 주님모습 못 보는 사람 장님이다.<마르코 9/2-10>8/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상에오신 주님 주님으로 못 보는 사람 눈 뜬 장님입니다. 구약을 통해 예언되고 오시어 기적을 행하시고 온갖 진실과 사랑을 남기시고 전해주시고 마침내 태양보다 더 밝은 보습으로 이미 하느님과 같이 사는 모세 엘리야와 함께 부활의 증표를 보여주시고 우리도 주님을 믿음으로 준미과 같은 모습을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었으나 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장님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이런 확실한 증명과 진실을 눈가리고 못보는 장님처럼 믿음을 버리고 살고 있거나 주님의 참 모습을 못보고 어둠속에 살고 있습니다.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고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면서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지 않고 자기 익이나 좋은 것만 찾아 나서는 사람은 살면서 행복하고 기쁘게 살지 못합니다. 저는 은퇴한후 상담하면 만난 사람은 카톡에 있는 사람만 1000명이 넘게 있으며 대부분이 나는 하느님 못보고 하느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고달푼자기 삶을 이야기하다가 태양이 아침에 찾아 만나듯 어둠에서 빛으로 변하는 사람을 보면서 제가 믿음속에 90년 가까이 산보람을 느끼며 막힌귀를 둟어주고 보지못하는 눈을 열어주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성령의 움직임을 저는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몇일 전에 울산에서 피정온 사람들 위해 준비하려 나가면서 강으실을 정비하고 있을 때 어떤 자매가 성사 보려고 준비하기에 지나가는 말로 주님의 참모습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30년 신앙생활 하셨다 하여 주님의기도 “아버지의 거룩하심이 빛나시며, 어떻게 거룩하다고 생각합니까?“ 하니 그져 거룩하다고 하며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기도한다고 하기에 바로이것이야 듣고 행하면서 뜻 모르고 기도하는 습관적 기도생활 그래서 오늘 오후 피정강론 끝 오후4시에 시간 있으면 만나서 알려주겠다고 하고 오후상담을 시작하니 신앙을 잃을 찬라에 있어 두 시간 상담하며 끝에 얼굴이 빛나며 부족한 믿음을 복귀 시켜 주었습니다.
보통 어두운 얼굴이 상담 후 밝은 얼굴로 변화되는 것을 보며서 하느님 성령의 움직임을 알게 됩니다. 어떤 때는 죽고싶디고 하는 사람도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알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의 형성용은 우리의 변화를 예시 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 사랑받고 그 생명에 참례하며 자유 평화 기쁨 중에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듣지 못한말도 들리고 보지못한 것도 보입니다. 믿음으로 태양보다 빛나는 영광 속에 살아 빛으로 빛이 전해지도록 살아갑시다.
높은 산에 오르셨다.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후,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십자가는 파멸이요 저주말고는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전하는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십자가에 나타나는 사랑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십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 하느님의 현존 안에 들어서는 곳입니다. 세상의 생각에서 벗어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하느님의 신비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시나이 산과 호렙 산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비로소 하느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 우리가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얼굴을 알아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줄 아는 이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마르 9, 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믿는 만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교만과
거짓의 옷을
하나 하나
벗어갈 때
드러나는
참되신
주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신앙은 새롭게
변화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신앙의
확립이며
사랑의
실천입니다.
한순간 한순간
실천하는
우리의 행동이
십자가의
거룩한 변모로
우리를
이끕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둘이 아니기에
어느 것을
강조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관점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변모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만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인
변화의 삶이
거룩한
변모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넘치면
그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변모가 있고
잘못이 있는 곳에
되돌아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삶을 새롭게 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거룩한
변모의 여정입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빛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주님과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사랑의
순리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하고, 밤 10시에 귀가하는 일과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를 무조건 해야만 했습니다. 두발, 복장도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를 보면 누구나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때는 주점에서 신분증 검사를 요청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제게 신분증 검사를 하겠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어른으로 살고 있지만, 이 어른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자주 느낍니다.
학창 시절의 규제가 오히려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보호받고 싶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보호받고 있음이 얼마나 커다란 안정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른의 무게가 참 무겁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른이라고 보호해주지 않으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더 열심히 살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뒤에,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사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모습이 변하다’라는 동사가 종종 쓰이는데, 모두 영적인 변모를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변모는 영적인 변모가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변모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옷은 천상 영광의 표징 가운데 하나로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님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자리라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되었을까요? 베드로가 나서서 그 자리에 그냥 눌러살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바로 그 순간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오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서 편안함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부활 사건 이후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보호 아래 사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줍니다. 열정적으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어떤 박해의 위협에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기쁨과 희망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지 않으면 거룩하게 변할 수 없습니다.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지그 지글러).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 것은 꼭 있습니다.
‘관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 종자, 관심 병자라고도 불립니다.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병적인 수준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타인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게시판에 글을 작성하고, 댓글을 달며, 이목을 끌만한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관종이 되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분위기를 이끕니다. 그러나 정말로 잘못된 것일까요?
나대는 것도 그의 고유한 성격일 수도 있으므로,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관종의 삶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책임감이 없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대고 주목받으려는 나의 말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다면, 나름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다면 가장 큰 가치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종을 무조건 나쁘다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가치로 변화시켜보면 어떨까요?
하늘 나라 행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전삼용 요섬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주님의 변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바로 직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코는 높은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오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그분의 본성이 빛이심을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옷은 그분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사제는 사제 옷이 있고 법관은 법관 옷이 있으며 경찰관은 그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옷이 변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빛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산 높이 데리고 오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는데 성체를 영하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분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라 믿고 성체를 영했지만, 그전에는 그저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늘 나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서 비로소 그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깨달았을 때 옵니다.
다시 말해 산에 오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흘리신 당신 피임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재벌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돈 버느라 바빠서 아들 하나 있는 것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망나니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돈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직접 한 달 동안 일을 해서 번 돈을 가져오면 내가 모든 재산을 너에게 물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좀 달라고 하여 이것이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을 시키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돈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황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벌어 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또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벽난로 불에 던졌고 아들은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 아버지나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다 아시는구나. 돈 한 번 벌어보지 뭐.’
건설 현장에서 손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매를 맞은 듯 아픈 것을 참으며 한 달을 버텨 자신이 직접 번 돈을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돈을 꺼내기 위해 불 속에 손을 넣었고 타들어 가는 돈을 끄집어내어 불을 껐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들은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생했다. 아들아. 내 모든 돈은 다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주는 재산의 가치를 모를 때는 아버지가 아무리 큰 선물을 줘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아버지가 주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가치가 됩니다. 그때 참으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산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려가시는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흘리실 피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게 해 준 것에 아무 고생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섬길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밑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싸워 이겨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과정이 쉬웠을까요? 하지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흘리신 피의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방법이 있는데 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가치를 묵상하고 나도 이웃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씻기 위해 흘리는 피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일본 어떤 선생님은 어둠의 세계로 빠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잘라야 했습니다.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입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선생님으로 유명한 그는 일본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교사로 불립니다. 밤에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마약중독, 매춘, 야쿠자와 관련이 있던 학생들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야쿠자 조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자 야쿠자 두목이 “손가락 하나를 두고 가라.”라고 협박하였고 오사무 선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학생을 구출했습니다. 심지어 그 학생은 일본인도 아니고 대만 유학생이었습니다.
오사무씨는 마약 상인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엄지손가락이 잘리는 등 숱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13년 동안 밤거리에서 학생과 만났고 5000여 명의 학생을 다시 ‘낮의 세계’로 불러들였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잃는 아픔은 매우 컸지만 한 소년의 미래를 위해 내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밤거리에서가 아니라 이 선생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거부한다면 선생님 희생의 가치를 모를 것이고 그만큼 덜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만큼 우리 행복은 커집니다. 이것이 높은 산에 올라 조금씩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는 방법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을 3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첫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보다 느린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전 역학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뉴턴의 물리학입니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 동역학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힘과 운동을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로 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적용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세상입니다. 빛의 속도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면 시간이 변한 것을 알게 됩니다. 빛의 속도로 1년을 다녀온 사람에게 지구에서의 시간은 100년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를 넘어서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는 세상입니다. 양자역학이 적용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을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보면 물질이 생깁니다.
우리의 삶도 3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삶은 감각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명은 이런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도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욕망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몸도 함께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삶을 받아들입니다. 두 번째 삶은 이성적인 삶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을 슬퍼합니다. 원하지 않는 만남을 괴로워합니다.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함에 안타가워 합니다. 감각에 종속되는 몸과 마음에 허무함을 느낍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철학, 과학, 문학, 예술, 건축이 발전하였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답을 찾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왜?’라는 질문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세 번째 삶은 깨달음의 삶입니다. ‘왜?’라는 질문의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삶입니다. 감각적인 삶과 이성적인 삶을 뛰어 넘는 삶입니다. 짜라투스트, 부처, 마호메트는 깨달음의 삶을 살았고, 그 삶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성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3가지 차원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옷도 변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을 3개 지어서 지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모습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과거의 예언자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 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 - 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지냅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축일은 1457년 제209대 교황인 갈리스토 3세가 로마 전례력에 도입했습니다.
십자가의 길, 광야 여정중 지친 제자들에게 당신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케 하신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입니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은 영적 삶의 리듬이자 함께 갑니다. 기도와 관상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심신도 새로워져 광야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관상과 활동-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日常化’-로 정했습니다. 행복기도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광야 세상 살이에 부패하고 변질되기 쉬운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시켜 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신비롭게 변모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참여하는 시편성무일도 미사의 공동 전례미사은총이 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날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해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주님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은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고, 주님은 이를 만류하던 베드로를 참으로 혹독하게 꾸짖었습니다. 멋진 신앙고백으로 주님의 극찬과 더불어 반석이란 베드로 이름까지 받은 시몬이 졸지에 사탄이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심한 질책으로 의기소침해진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고자 주님은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 변모 체험을 선물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가 이를 입증합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빛났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하면서 세 제자들 역시 내외적으로 변모되어 정화되고 성화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신비 변모 체험 은총은 끊임없이 오늘도 계속됩니다. 주님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해야 살 수 있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이런 신비 변모 체험의 결핍으로 날로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높은 산’이 상징하는 바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성전입니다. 아니 ‘오늘 지금 여기’의 우리 삶의 자리 역시 어디나 주님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주님의 변모 장면중 다음 대목에 눈길이 갑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아요 둘다 에녹과 더불어 승천한 분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평소 예수님은 기도중에 모세와 엘리아야 함께 깊은 영적 우정을 나눴음을 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를 영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솔직하고 열정 가득한 순수한 반응 역시 베드로답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영적 집착과 독점욕의 유혹에 빠진 베드로입니다. 아무리 수도원 피정이 좋다하여 수도원에 내내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거룩한 성지의 수도원도 세속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고 만나야 할 거룩한 성지는 바로 내 몸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자리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는 곳이 성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인이 되어 평범한 일상의 신비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 옛날에 일상의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밤의 환시 신비 체험중 주님을 만난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주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로 이 주님과 함께 광야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산위에서의 거룩한 변모체험에 집착하는 베드로와 그 일행은 물론 우리 모두에 대해 하느님은 지체없이 명령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와 위로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광야 인생,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보천리, 그분을 따라 한결같이 사는 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노처럼 ‘진리의 연인’이 되어, 베네딕도 16세 교황처럼 ‘진리의 협력자’가 되어 사는 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새삼 인생광야여정중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참으로 신비체험을 필요로 할 때 그 체험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하게 하시고 우리 또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영성체후 기도가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광스러운 변모로 보여 주신 아드님의 그 빛나는 모습을 닮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이유
이기우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내용으로 합니다. 십자가는 과정이요 부활은 목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짊어지면 자동적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삶에서 나오는 원동력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게 합니다. 때문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제자들을 데리고 타볼산에 올라 거룩하게 변모하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당신의 신원과 함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굴과 옷이 거룩하게 변하신 다음, 그 자리에 1,250년 전의 모세와 800년 전의 엘리야를 함께 불러 내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제정하여 하느님 백성을 준비시킨 인물이고, 엘리야는 그 율법 위에서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삶을 가르치며 바알 우상을 팔아 혹세무민하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했던 예언자였습니다.
구약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이 두 인물을 소환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삶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모조리 성취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유다교를 대표하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등 주류 엘리트들이 율법과 예언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백성을 잘못 이끌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스승의 이러한 조치는 절실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모두가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사실은 이 때만이 아니라 공생활의 주요 순간에도 그분은 이 세 제자를 대동하셨습니다. 그 속마음은 예수님만 아실 수 있는 것입니다만, 그분의 부활 승천 이후 초대교회에서 이 세 제자가 사도단의 간부가 되어 맹활약을 한 것을 보면 열두 명을 똑같이 한꺼번에 양성하기보다는 세 제자를 핵심으로 삼아서 그들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변화를 먼저 이끌어내고, 그를 바탕으로 나머지 제자들의 변화와 성숙을 기대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사정을 고려한 것이지 모든 이들에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부활에 대한 확신은 필수적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고 부활의 차원으로 십자가스러운 현실이 앞당겨질 수 있음을 믿지 못하면, 신앙은 미신으로 전락합니다.
<변모를 꿈꾸는 나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꿍꿍이속이야 무엇이든
대개 사람들이란
변모를 꿈꾸지
추레한 모습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어눌한 모습에서
능수능란한 모습으로
볼품없는 모습에서
눈길끄는 모습으로
아무것도 아닌 모습에서
뭔가 그럴듯한 모습으로
꿈꾸는 변모라는 것이
대개 이런 거 아니겠어
그런데 말이지
뭐에서 뭐로 변모되든
나는 나 아닌 무엇이 아니라
나는 나라는 거는 변함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어떻게 변모되는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거지
그래서 말인데
나의 모습에 안달하지 않고
나를 바르게 가꾸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9, 2-10(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심’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았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
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분의 말을 들을 때”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이요,
말씀의 능력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영광에 오르셨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시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서상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는 고백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모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을 영광의, 부활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러한 자세로 영적으로 더욱 진보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안에서 고통을 통해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있던 고통이었다.
고통의 신비란,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신비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통해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변모축일을 지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의 모습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인생에서 ‘좋은 그림’ 한 장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올림픽 소식이 들려온다. 무관중 시합에 응원의 함성이 없다. 코로나로 2020의 해를 넘겨 올림픽을 열었기에 관심도 사라진 느낌이다. 그러나 선수들은 다르다. 개인전에서 한순간 폭팔적 열정을 드러낸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인내했던가?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구성원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 되기 위해 피땀을 흘렸던가? 마찬가지로 단체경기가 그랬다. 인간의 한계상황에 직면해 얻은 단계적 상승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시상대에서의 선수들이 보여준 환한 얼굴, 숭고하고 거룩하기까지 하다. 선배들의 땀방울로 만들어낸 환한 얼굴을 후배들이 담고 다시 대를 이어 구슬땀을 흘린다. 살아가며 한계에 직면할 때 자기의 머리 속에 담겨있는 좋은 그림 한 장이 힘을 발휘해 한계를 넘게 한다.
예수님의 높은 산 산행, 세 명의 제자들을 대동했다. 왜 하필이면 높은 산의 산행일까? 세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 따라 오르며 엄청나게 투덜댔을 것이라 상상한다. ‘내려올 것을 꼭 올라가야 하나?’ 바닥에서 편하게 이야기 할 것이지! 산행의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산을 오르며 투덜대던 그런 모습을 오늘 복음 속에서 해 본다.
아름답고 거룩하게 변화된 예수님의 얼굴, 그분의 옷은 어떤 프로 마전장이도 할 수 없을 만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모습은 정상을 따라 올라 선 제자들에게 수여한 예수님의 값진 선물이 될 줄이야, 고통없이는 간직할 수 없는 좋은 그림 한 장, ‘예수님의 현성용’ 을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음성까지 듣는 특별함도 제자들은 선물로 받았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9,7)
훗 날 혹독한 제자 만들기 한계상황에 놓일 때 이 그림 한 장으로 승리의 월계관을 제자들이 쓰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남겨주신 높은 산 위에서의 ‘거룩한 얼굴, 빛나는 옷,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 ‘예수님 께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생생한 제자들의 체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동력이 될 것이다.
올림픽이 보여준 선수들의 환한 얼굴들, 그를 따르는 후배 선수들의 삶의 에너지가 되고 목표와 목적을 지닌 길을 또 감내하며 살아갈 것이다. 고통없이 얻어지는 기쁨의 선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하늘 앞에서 침착하려면 지금부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상상도 못했던 장면을 보는 베드로의 갑작스런 발언은 참 놀랍습니다.
준비도 못한 천막 세 개나 짓겠다는 말도 머물 준비도 없이 말입니다.
어쩔줄 몰라 놀란 베드로의 심경에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과학발달 무대장식 기법 등으로도 이해 못할 시대 성경대로 믿읍시다.
후에 이를 되새겨 생각하며 거룩한 변모라고 붙인 정황이었을 겁니다.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제자들이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늘체험 보였겠죠.
살아 온 인생이 전부 아니라 하늘나라체험 앞에 놀랄 날 닥칠 겁니다.
그 때 내 혼 하늘 앞에서 침착하려면 지금부터 신앙생활 해야 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는데 그들 앞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곧 강물은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두번 째 발을 담그는 물은 다른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가고 있고 나도 또한 변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정 하느님 보시기에 선하게 변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항에 수초를 키우면서 수초를 어떻게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하고 전문가에게 문의를 해보니 수초를 잘 키우는 중요한 팁이 물의 환수를 잘 해줘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어항물은 고여있는 물이기 때문에 가끔씩 어항의 3분의1만이라도 물을 환수시켜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말대로 물을 조금씩이라도 환수를 자주해주니 수초가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항물의 환수처럼 우리도 늘 영적 환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늘 영적으로 새로와지도록 이끌어 주실 때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더 보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은 늘 그렇게 주님의 영을 통해 늘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다니 7,9)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다니 7,10)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다니 7,13)
다니엘 예언자가 본 꿈의 환시 장면입니다. "연로하신 분"은 성부 하느님을,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성자 예수님을, 그리고 성부에게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성령이시니, 장엄하고 숭고한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입니다.
다니엘 예언서를 읽어 보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네 짐승들의 환시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오늘의 대목이 나옵니다. 혐오스런 광경에 이어지는 영광의 장면이 극명하게 대비되지요. 놀라는 예언자에게 환시 속에서 천사가 먼저 등장한 네 짐승들과 나중의 천상 거룩한 법정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은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이지만,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이어받아 영원히, 영원무궁히 차지할 것"이라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현장은 황제나 대사제의 대관식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악을 물리치시고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시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언어와 민족과 나라가 다른 모든 이들이 성삼의 하느님을 섬기며 그 빛을 받아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거룩히 변모하신 높은 산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3-4)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본 빛이 사람의 손에서 나올 수 없는 색의 흰빛이었다고 전합니다. 앞서 읽은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이 꿈의 환시였다면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셨으니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각별히 친밀했던 이들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섬기는 성인들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7)
성부 하느님은 목소리로, 성령은 구름으로 성자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이 역시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충만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과는 달리, 이 순간에는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을 거셨지요. 제자들은 관조자나 관찰자의 신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어 그분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이 세상과 분리된 어느 곳에 영광스러이 따로 떨어져 자리하시지 않고, 하늘을 뚫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과의 구체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말씀의 내용은 소개와 명령으로 간결히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러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증하시는 소개장은 "사랑"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무슨 신분이나 타이틀, 직업이나 주거지로 서로를 소개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 아드님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분'라는 자격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히 존중받고 섬김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독백에 그쳐서는 안 되는, 명백히 응답이 요구되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응답과 실천을 통해 이 말씀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의 말을 듣는 것. 이것은 하느님께서 말을 거셔서 그분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모든 이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의 얼굴을 관상하는 오늘, 그분의 영광에서처럼 그분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가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 형제와 이웃의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존중받고 환대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듣고 경청하며 이 사랑을 확인하고 키워나가야 하지요. 그리하여 예수님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영광을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실현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현실이 되시고 실재가 되어 가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 영광의 빛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2021. 8. 6. 금)(마르 9,2-10)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마르 8,31), 베드로 사도는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에만 놀라서 예수님을 강하게 말렸습니다(마르 8,3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이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꾸중’ 가운데에서 최고로 가혹한 ‘꾸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본분을 지키라는, 즉 제자로서 스승이 가는 대로 스승의 뒤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우선 당장 편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을 포함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반응에 무척 놀랐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정말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사심을 품고서 한 말도 아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에 놀라서 그것을 말린 것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시자 제자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뒤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르 8,34). 이 말씀도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 라는 말은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싶어 한 말씀은, 또는 듣고서 좋아했을 말씀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듣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말씀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은 모두 의기소침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때문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려고, 그래서 제자들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의 뒤를 더욱 잘 따를 수 있게 해 주시려고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 주셨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2-4).”
여기서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입니다.(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말은, 그 영광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세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 것은 ‘첫 번째 체험’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것은 ‘두 번째 체험’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9,31),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생략되어 있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나타난 일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일은,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구약시대 전체가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5-7).”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그냥 이대로 영원히 지내면 좋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황홀경’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베드로 사도의 말은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장 영광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소망을 차단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은 제자들의 ‘세 번째 체험’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직접 보증해 주신 말씀인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과 앞의 34절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를 생략하고 영광으로 직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나 모든 신앙인에게나,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도 (마르 9,9)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왜 꼭 십자가를 거쳐야만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이고, 우리의 경우에는 단련과 정화를 위해서입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신 시청각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 주교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한 강론에서 (Nn. 6-0: Melanges d’archeologie et d’histoire 67[1955], 241-244)
예수께서는 다볼산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변모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다니실 때 하늘 나라와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늘 나라에 대해 아직 확신하고 있지는 못한 듯했습니다.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견고히 하고 깊게 하시며 또 현재의 사건을 통하여 장차 올 것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다볼산에서 하늘 나라의 예표로서 당신 신성의 광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제자들이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 속에서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복음사가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바로 오늘 이 축일에 기념하는 기적들입니다. 이것이 다볼산에서 성취된 구원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이 지금 우리를 여기에 모이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뽑으시고 조명해 주신 제자들과 함께 표현할 수 없는 이 거룩한 신비들의 깊은 뜻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우리는 산꼭대기에서부터 우리를 당신께로 끈질기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목소리를 듣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 곳에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늘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신 것처럼 우리도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면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빛으로 둘러싸게 되고 우리 영혼의 모습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되며, 그분의 모상으로 형성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더욱 큰 영광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열렬한 마음과 기쁨을 지니고 그 산으로 달려가 모세와 엘리아, 야고보와 요한처럼 구름 속에 들어갑시다. 베드로처럼 이 신적 영상에 넋을 잃고 이 아름다운 변모의 영광으로 변모되어 이 세상 것들을 벗어나 높이 들리우도록 합시다. 육신과 피조물은 뒤에다 남겨 두고 탈혼에 빠진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창조주께로 향합시다.
베드로여, 정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좋겠습니다.” 영영 세세 여기에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고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의 빛 속에 거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더 보배롭고 더 거룩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그분의 신적 모상으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광채요 기쁨이요 환희인 이곳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서 마음은 안식을 누리고 평화로우며 평온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여기에서 아버지와 함께 거처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 들어오시며 우리에게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화들이 있고 영원한 선물들이 쌓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후세의 시작과 상징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옷을 입혀주시는 분
나형성 요한 세례자 신부님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쓰다 보면, 외적인 것들에 더 마음을 두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내 욕심의 초막을 지어 결코 가둘 수 없는 빛을 소유하려 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혀’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변모가 아니라 변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옷을 선물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멋진 초막을 지어서, 아름다운 옷을 입어서, 인간 관계를 잘해서 존재를 확인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십자가 예수님의 벌거벗은 사랑으로 덮여진 이들(1코린 13장 참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성전의 사제들은 가려진 휘장 뒤편에서 제물의 피로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자체로 그 휘장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찢겨진 상처에서 흘러내린 예수님의 물과 피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10년 전 저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로 살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동을 주지?”만을 생각한다면 함께 기도하자고 초대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듣는 데 분명 소홀해질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감사로 주님의 양들을 위한 기도를 먼저 드리고 있는 사람인가 되묻습니다. 우리는 이제 초막도 우리를 가릴 휘장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변모의 옷으로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우리를 덮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과 해의 비유가 지닌 한계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분은 어떻게 빛나셨습니까? (저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매우 빛나셨습니다. 그대는 이를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그분은 해처럼 빛나셨습니다(마태 17,2 참조). 해처럼이라고 했습니까?
예. 왜 해입니까? 해보다 더 빛나는 다른 천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눈처럼 희었다고 했습니까?(마태 28,3 참조). 어찌하여 눈입니까? 눈보다 더 흰 것을 모르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해가 날마다 빛나는 모습으로 빛나지는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땅에 엎어졌다는 이어지는 대목이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마태 17,6 참조). 그들은 날마다 해를 보고도 넘어지지 않았으니, 그분이 날마다 빛나는 해처럼만 빛나셨다면 제자들은 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해나 눈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셨기에 제자들이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하여 땅에 엎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함승수 신부님
사람들 중에는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았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잠시 동안이지만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를 경험했노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경험을 '임사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임사체험'을 경험한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자신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밝고 찬란한 빛이 가득한 세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아늑함과 평화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또한 이미 세상을 떠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 큰 행복을 느꼈으며 그대로 그 세상에 머무르고 싶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당신은 아직 여기 올 때가 되지 않았다'는, '당신에게는 아직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말과 함께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천국에서 받은 '소명'에 따라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자신이 평소 느끼지 못했던 큰 행복과 평화를 느낀다면, 그런 상태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가 느꼈던 감정이 바로 그것이지요. 당신이 수난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땐, 그분이 약하고 무력하게만 느껴져서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실거라는 그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찬란히 빛나는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시어 위대한 선조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나니, '아, 이분이 주님이시구나, 정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구나.'하고 실감이 났습니다. 그런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그분과 더불어 영광을 누리는 것이 베드로가 마음 속에 지녔던 희망이었는데, 그 희망이 눈 앞에서 실현되는 모습을 보니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겨서, 예수님께 초막을 지어드릴테니 고통과 번민이 가득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지내자고 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들린 하느님의 음성과 함께 베드로의 '일장춘몽'은 산산히 흩어져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소홀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여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는 불호령을 들었던 그였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람의 일만, 본인의 안위와 만족만 챙기는 베드로에게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천국의 삶을 누리고 싶다면, 하느님께 사랑받고 그분 마음에 드는 복된 자녀로서 살고 싶다면, 개인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 말씀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듣고 받아들이며 따르라고 하십니다.
성지(聖地)가 거룩한 것은 그 땅이 처음 생길 때부터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며 실천하신 예수님의 삶이 그 땅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믿음의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이 그 땅에 서려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을 믿고 따르는 거룩한 삶이 그들이 사는 곳을 거룩하게 만든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거룩함에 수동적으로 안주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나 자신과 내가 사는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누리시는 거룩함과 영광에 제대로 참여하는 길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냅니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씀을 올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사실 베드로는 엉겁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환하게 빛나시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난 것을 발견하며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십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봅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인기가 많은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신분과 부의 정도로 거룩함이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기도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기도하고 기도하여 주 예수님께 가까워지고 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현세에서 예수님처럼 이웃의 구원을 위해 희생 봉사함으로써 이어지는 성덕입니다.
지나친 자가 자랑은 진실의 장애가 된다.< 마르코9/2-10>8/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진실을 들어내면서 살아야 하지만 시기나 질투 하는 사람이나 경쟁자에게 비밀이 있어야 진실이 손상 받지 않고 보존됩니다.
잘하고도 욕먹고 비난받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당신의 모습을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모하시였지만 부활하신다음 까지 비밀을 지키라 분부 하시였습니다.
자랑도 시와 장소를 보고해야지 아무장소나 때는 사람들이 “ 머그런 것 있어” 하거나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 진실을 인장하려 하지않고 자랑가리가 부꾸러운 일로 나타니기를 바라면서 시기와 질투를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신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을 보기 전 까지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오늘 본 사실을 따들고 다니면 악마의 방해도 예산 되니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시기와 질투는 창세기 초에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느님이 받아들이고 가인은 정성없이 받치는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은다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는 인류 역사 안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랑거리를 지나치게 들어내려 하지 말고 들어 난일을 자랑하지도 말고 침묵 중에 살아야 더 좋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왜 이러날까요? 자기만이 선의 독점욕 자기만이 존경 받고 보상 받으려는 욕심에서 나오고. 윗자리를 탐하는 마음에서 머리를 내밀고 날좀 보시오. 하려는 마음입니다.
어느날 어느 교구에 대주교를 만나서 방문자가 한참 주교님의 일은 성과도 대단하고 이런일 저런일 잘되어 가서 존경스럽습니다. 하니 아글에 만연의 웃을 띠고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데 저 넘어 교구는 이런일을 하시며 잘하신다고 정평이 났습니다. 하니 즉시 얼굴이 변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며 시무룩하게 대답하더라는 이애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일을 갂아 내리려 하지 말고 좋은 일이면 따라하고 본받고 선을 성장 시켜야 합니다. 저쪽에서 하니 좋은 일이라도 나는 않해. 하며 선을 멀리하면 세상은 점점 주그러 듭니다.
우리는 자기 삶을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만 다른 이의 좋은점을 친찬하줄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까지도 주님의 일을 몰이해하고 무관심으로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성지에 전 인류가 성지로 찾아오는데 하느님께 감할 줄 모르고 그저 아직도 어리석은 이방인이 멋도 몰르고 2000년을 지내고 있다고 하면 누가 더 문제가 있는지 판단이 서게 됩니다. 이해하고 권장하고 서로 용기를 주며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알고 마음에 색이고 서로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살 때 온 세상에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분명 천주교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고 더 좋은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펼쳐 나가는데 아직도 엣 교회의 모습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보며 “ 하느님에게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변회된 교회의 참 모습으로 보다 낳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변모의 시작은
관계의
시작이다.
관계는
관계의 여정을
걸어간다.
변모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관계의 시작은
사랑의 참된
시작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새로워 질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빛나게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숙의
본질이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실행이다.
실행하지
않고서는
거룩한 변모로
이어질 수 없다.
십자가도
회개도
실행이다.
사람이
되어오시고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된다.
거룩한 변모는
관계이며
실행이다.
예수님께서는
새하얗게
빛나는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다.
거룩한 변모는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성숙의
여정으로
되찾게되는
우리의
본모습이다.
사랑은
정신의
승리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지금의 내 모습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까? 미래에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 등의 걱정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어도 미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문득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교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저를 본다면 어떻게 말할까요? 아마 이렇게 말하면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와~~ 내가 정말로 신부가 되었어? 더군다나 그냥 평범한 신부가 아니라, 꽤 알려진 신부가 되었네?”
솔직히 당시 제 자신은 진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을 때였습니다. 훌륭한 신부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더 컸었고, ‘혹시 교회에 커다란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신부님들처럼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재주도 보이지 않았고, 늘 부족한 저의 모습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왜 그런 걱정을 하면서 불안해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를 짓게 됩니다.
미래는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현재를 바라보는 눈은 ‘지금’이라는 시간에 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굳이 미래를 걱정과 불안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희망과 기쁨을 상상하면서 지금이라는 시간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보게 됩니다. 더군다나 이 자리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있었지요. 이 모습에 그들은 ‘여기가 하늘 나라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의 꿈꾸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 오르셨을 때 그 양옆에 앉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서 쭉 지내자고 베드로가 대표해서 말했던 것이겠지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힘들게 사는 것보다 지금의 이 현실이 쭉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편하고 쉬운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말과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걱정과 불안으로 미래를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주님의 뜻에 충실할수록 희망과 기쁨의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희망을 습관화하라. 희망이 습관이 되었을 때, 행복한 영혼을 영원히 가질 수 있다(노먼 빈센트 필).
08 신창 남방제
남방제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이며, 조윤호 요셉 성인이 태어난 곳이고 조화서 베드로 성인과 여러 순교자들이 사셨던 곳입니다.
조윤호 성인의 가문은 구교우 집안으로, 그의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하고, 할머니 권 율리안나가 선종하자 아버지 조화서 성인은 남방제로 이주해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1848년 조윤호 성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조화서 성인은 1850년경부터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복사로서 전국 각처에 숨어 있는 교우들을 순방하는 길에 함께 했다고 합니다.
조윤호 성인은 이 루치아를 만나 혼인하였는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인년(1866) 12월 5일 밤에 아버지 조화서 성인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손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한원서 요셉, 정원지 베드로도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이들 모두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부자를 같은 날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벅에 따라 아버지 조화서 성인은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아들 조윤호 성인은 12월 23일 전주 서천교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조윤호 성인의 깊은 신심과 성실한 수계 생활은 주위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았고, 조화서 성인 역시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용감하고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남방재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신 분은 모두 35명입니다.
순례자 미사나 식사는 사전 예약을 하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온양 신정동 성당(전화 041-534-2324) 관할입니다. 주소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서부북로 763-42입니다.
천상 체험의 감동을 마음에 품고, 이제 하산(下山)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타볼산 정상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베드로 사도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던가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스승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얼굴은 광채로 빛났으며, 입고 계시던 옷도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마르코 복음 9장 3절)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말로만 듣던 이스라엘 민족의 대영도자, 엘리야와 모세가 눈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에 살고 분위기에 죽는 사람이었던 분, 급하고 충동적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갑작스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하고도 기상천외한 분위기 앞게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맨탈 붕괴, ‘맨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잠깐 동안의 천상 체험으로 인해 무아지경에 빠진 베드로 사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코 복음 9장 5절)
베드로 사도는 비록 잠깐이지만 맛보고, 느끼고, 만끽한 천국 체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 지금, 타볼산 위에서, 광채로 빛나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동료들과 함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잠깐이지만 맛본 천상 체험을 뒤로 하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잠깐 동안의 천상을 체험한 사도들이었지만, 하산(下山)해보니, 무정하게도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과 같은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고, 어제와 같은 인간 실존의 비참함은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영광과 완성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스승님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도래할 그 순간을 맞이하려면, 먼저 그분처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볼 산에서의 변모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원과 정체를 핵심 제자들에게 뚜렷히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이시며, 머지 않아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겠지만, 죽음에 머물러있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것이며,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실 것이며 세세대대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겠지만 또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겠습니다.
남의 목소리 듣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옛날 어떤 섬에 천개의 종을 가진 사찰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 흔들리며 내는 천 개의 종소리는 듣는 이들을 황홀경에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그 섬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종은 물속에서도 영롱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려 그 섬 주위로 몰려들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 청년이 작정을 하고 매일 바닷가에 앉아서 물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파도 부서지는 소리와 바람에 실려 오는 갈매기 울음소리뿐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실망에 실망을 거듭했지만 마을의 현자에게 찾아가서 좋은 말씀을 들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은 접고 마지막으로 다시 바닷가에 나가서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음을 놓으니 그 소리도 들을 만 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종소리, 두 개의 종소리... 천 개의 종소리가 교향악을 하는 것처럼 명확히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다 하면서도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는 몇 달 동안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 한 청년에게 한 시간 성체조배 해도 문제가 안 풀리면 제가 백만 원을 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고민을 하고 도움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기도를 안 합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복권을 안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한다고 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에 앉아있더라도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하실 기회가 없습니다.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습니다. 너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장 시끄럽게 만드는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생각은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끼어들 수 없으십니다.
위 예화에서 청년은 소리를 듣겠다는 자신의 뜻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그 자리에 있어도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자신이 갇혀 있는 것입니다. 소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면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감각을 깨워야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듣는 중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집니다. 생각을 하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자신의 의도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머물 때 하느님은 이미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이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내가 그분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세 사도가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봅니다. 이 장소는 ‘산’입니다. 기도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산은 높이 올라갈수록 세상 것과 멀어지고 하느님과 가까워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산에 머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산에 머문다는 말은 지금 여기에 머문다는 뜻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보고도 천막을 쳐서 함께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세상 것을 떠나 그분 앞에 머물기를 배울 때 그분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증인이 됩니다. 자신에게도 변모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목수의 아들이 친구들을 데려왔습니다. 친구들은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는 모습을 재밌게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들의 실수로 아버지가 풀어놓은 손목시계가 톱밥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톱밥이 워낙 많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처음엔 걱정하다가 나중엔 서로의 탓이라고 싸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목수 아버지는 기계를 끄고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급할수록 마음을 가라앉혀라. 일단 무릎을 꿇어보렴. 그리고 귀를 마룻바닥에 대 보아라. 무슨 소리가 들리니?”
잠시 조용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소리에 집중하였더니 시계소리가 들렸습니다.
“째깍 째깍!”
무릎을 꿇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어보십시오. 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으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을 거부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안 된 것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고 합니다. 한글을 그만큼 배우기가 쉬운 문자입니다. 한글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세종대왕께서 만들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른데 우리는 중국의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중국의 문자인 한자는 배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글을 모르기에 책을 읽을 수 없었고, 책을 모르기에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책을 모르기에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헤아려서 쓰기 쉽고, 배우기 쉬운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세종대왕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오늘도 한글로 묵상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새로운 문자인 한글로 어려운 유교의 경전을 책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오랜 시간 익숙하게 접했던 불교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조선의 통치 이념은 유교였지만 백성들은 1000년 동안 불교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부처님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성들은 책을 통해서 친숙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한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역시 백성들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97년 8월과 9월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여성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8월에는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났고, 9월에는 성인이 되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분은 아름다운 외모와 신데렐라와 같은 삶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 분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모습이지만 그 영혼이 아름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한 분은 궁전에서 살았고, 많은 풍요를 누리고, 부러움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한 분은 가난한 빈민가에서 살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 중인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인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과 신발, 외모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입니다. 침을 뱉고 모욕한 사람입니다.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제자입니다. 스승님을 팔아넘긴 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이해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독과 아픔을 예수님과 나눌 수 있습니다.
‘너는 오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 죄가 컸어도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면 주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결심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시작한 일을 다 마치지 못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존심과 교만함 때문에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도 포기하셨고, 재물도 포기하셨고, 세상의 명예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하느님께 그런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모두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목소리에 순종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월요일 새벽 미사가 끝나면, 형제님들 몇 분과 함께 해장국을 먹으러 갑니다.
신흥동에 있는 아주 맛있는 해장국 집을 다녀오는데요.
갔다 오는 길에 형제님 한 분이 어디서 들었다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세상 살면서 세 여자 목소리만 잘 듣고 살면 된다잖아.
첫 번째는 어머니 목소리, 두 번째는 부인 목소리, 그리고 세 번째는 네비게이션 안내 목소리~”
그 말을 듣고 30퍼센트 정도 공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부인도 없고 차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 말고 다른 형제님들은 많이 공감하시는 듯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공감하시나요?
실제로 어렸을 때는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하고 성당 다니고 운동하고 반찬 가려 먹지 않으면, 건강하고 밝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결혼해서 부인의 목소리를 잘 들으면, 노후도 보장되고 집안 살림도 잘 꾸려갈 수 있겠죠.
그리고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목소리를 잘 따라야, 원하는 목적지에 제대로 갈 수 있겠죠.
그 세 가지 목소리 말고도, 우리가 따라야 할 목소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상하시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복음 5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가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목소리는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일 겁니다.
때로 그 목소리가 약하고 여리게 들릴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여린 목소리를 무시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가는 목소리려니 하고 지나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또 우리 영혼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의 여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목소리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복잡할 때 마음속에서 ‘기도하고 싶다.’ 라는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즉시 기도해야 합니다.
방에서 무릎을 꿇든지, 성당에 나와서 성체 앞에 무릎을 굻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음속에 괴로움과 어려움을 주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또 냉담한지 오랜 된 사람은 ‘이제는 성당에 나가야 할 텐데...’ 라는 목소리가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색하고 쑥스럽지만 성당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또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과 근심과 걱정들이 몰려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식사 하면서도 걱정, 대화하면서도 걱정, 일하면서도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 속에서 ‘밝고 기쁘게 살아가고 싶다.’ 라는 목소리가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밝은 것을 기억하고 감사했던 일을 기억하고 아이들과의 따뜻한 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할 것만 같은 사람의 얼굴이 문득 측은하게 느껴지며 ‘그 사람과 화해하고 싶다.’ 라는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대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화를 할 수도 있고, 방문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을 때,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 때 좀 더 잘할 걸...’ 이라는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대로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또 안부를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시간이 되면 집에 찾아가서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그 동안의 나누지 못했던 대화들을 나누며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고, 복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가 생명과 사랑이 있는 하느님 나라로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따라 살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 동안 방황하며 살아왔던 사람이 있다면,
그 동안 어리석은 선택으로 고생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동안 관계가 깨지고 무너지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 동안 행복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분이 마련하신 복과 상을 받아 누리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거기에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체험은 하느님에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체험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고린3,18).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비체험의 일상화,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신비체험이 참으로 필요한 신자들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 역시 신비체험있어 가능합니다. 신비체험이 우리를 늘 새롭게 하며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합니다. 신비체험을 통해 주님을 만나 알게되고 더불어 나를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 제자의 신비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비체험의 핵심은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입니다.
1.신비체험의 장소입니다. 때로는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위해 외딴 장소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주님은 높은 산에서의 피정을 통해 세 제자들에게 당신의 변모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상시에도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시간을 가졌습니다. 말그대로 신비체험의 일상화입니다.
특별히 높은 산의 장소가 아니라도 매일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주님과 만남의 신비체험을 마련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신비체험의 일상화라 칭하고 싶습니다. 매일 수도원의 중심인 외딴 곳 성전 안에서 거룩한 공동 전례를 통해 주님을 끊임없이 만남으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2.신비체험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비상하든 평범하든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신비체험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단지 우리는 신비체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필요하다 생각될 때 은총의 선물처럼 주어지는 신비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 때가 되었다 판단되니 주님은 이들에게 신비체험이란 은총의 선물을 주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케 하심으로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제1독서의 다니엘의 신비체험 역시 은총의 선물임을 봅니다. 다니엘의 눈이 열리자 선물처럼 계시되는 하느님 체험입니다. 다니엘 예언자의 신비체험 덕분에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체험하는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교회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제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아, 이렇게 살다가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과 형제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편안히, 두려움 없이 죽음도 맞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순간적 신비체험이 마음에 깊은 평화를 주었습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3.신비체험에 집착은 금물입니다. 신비체험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순수한 믿음이요 일상에서의 충실한 삶입니다. 수도원 피정이 아무리 좋아도 평생 머물수는 없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제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바로 그 집착을 보여줍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이 또한 영적 욕심이자 집착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체험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더라면 이런 성급한 반응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의善意라 하더라도 무지無知의 반영입니다.
4.신비체험의 핵심은 주님의 발견이자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제안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고맙습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신비체험이 새삼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신비체험을 통해 주님께서 의도하는 바입니다. 이제부터 평범한 일상의 현장에서 유일무이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드님, 파스카의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편단심 충성忠誠해야 할 분은 그 누구도 아닌 파스카의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5.신비체험은 가볍게 말하지 않고 비밀히 마음에 담아 두고 곰곰이 그 의미를 묵상함이 올바른 처신입니다. 이웃에게 불필요한 호기심이나 질투심을 불러일으킬수 있고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도 신비체험을 할 때 마다 곰곰이 마음에 깊이 담아 두고 새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당신 부활의 때가 될 때까지 침묵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신비체험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에게 이 거룩한 변모 신비체험의 기억은 광야여정중 활력의 원천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매일 깨어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의 수행중에 주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체험을 통해 우리도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우리 모두 거룩한 당신을 닮게 하십니다.
“하느님, 영광스러운 변모로 보여 주신 아드님의 그 빛나는 모습을 우리 모두 닮게 하소서.” 아멘.
변모의 의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주님은 왜 모습이 변하셨을까?
우리처럼 변모의 필요가 당신께 있어서일까?
그렇다면 몰래 변모치 않고 왜 제자들 앞에서 그것도 세 제자들 앞에서만 변모하신 것일까?
제가 오늘 너무 감상에 젖어 이러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변모를 눈을 감고 묵상하니 임종자의 아름다운 이별 영상이 그려집니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할 엄마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너무도 보고 싶었지만 병상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병원에 자주 오는 것은 못하게 하였습니다.
허나 이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이별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오래 고민을 하였습니다. 어떤 모습을 아이들에게 남길 것인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이 크지만 그 고통과 죽음보다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처절한 사랑보다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오기 몇 시간 전부터 공들여 화장을 하였는데 그것은 가장 처절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려는 사랑, 그래서 아이들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케 하고픈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변모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도 이런 의도였을 텐데 당신의 수난 예고 사이에 이 변모 사건이 있는 것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의 모습은 커녕 인간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게 될 당신이 실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라고,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고 사랑을 기억하라고 부활과 희망의 모습을 밝게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 변모의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주님의 화려한 쇼나 보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봐야 하고 우리의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마라톤을 완주하거나 장거리 연습을 할 때마다 이런 경험을 합니다.
정말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그 고통이 끝이 없을 것 같고 고통밖에 보이지 않으며 그래서 그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데 이 때 저는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은 것임을 생각하며 의지적으로 희망을 보고 사랑을 느끼며 봉헌하는 마음으로 완주하려고 합니다.
곧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나의 고통을 아픈 사람을 위해 봉헌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주님 변모 축일에 진정 해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을 보며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내가 되는 그 정도를 넘어 우리의 모습을 주님의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것, 곧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망의 나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나로, 희망을 볼 수 있는 나에서 희망을 주는 나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수난과 사랑을 똑같이 느끼기를 갈망하여 주님과 똑같이 오상을 받게 된 것처럼 모습이 같아지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모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클라라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의 정신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앞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하느님 본질의 형상 안에 두고 관상을 통하여 그대 자신 전부를 그분 신성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십시오.”
우리를 주님 앞에 위치시키고 그분 앞에 머무는 것,
그리고 매일 수난과 부활의 그 주님 사랑을 관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임을 깨닫는 오늘 축일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9, 2-10(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오늘 비로소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심’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았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이요,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이고,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베드로 사도의 헛꿈 <마르코 9, 2-1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베드로 시도는 주님의 변모와 엘리야와 모세의 같은 모습을 보고 자기도 같은 모습으로 “이곳에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변모 모습이나 다른 예언자의 모습은 많은 시간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가끔 이런 헛꿈을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능력도 안 되면서 마치 자신이 능력자인 양 앞에 나서서 큰소리치고 자격도 없으면서 자격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빈축만 사게 됩니다. 실력 없는 사람이 실력이 있다고 큰소리치고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스스로 반성의 시간과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많은 시련을 극복한 후 그 반열에 들어가서 순교의 면류관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베드로 사도와 같이 어떤 경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나 결심을 합니다. 쉽게 깨닫고, 쉽게 결심하고, 쉽게 약속하고 공약하고, 실천 면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행동해야지’ 결심하고 막상 눈앞에 일이 닥치면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식적이며 능력을 키우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할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오랜 시간 생각하고 이제 나이 들고 몸도 따르지 못하는데 30년 동안 운전하던 운전대를 놓고, 나를 가고 싶은 곳으로 끌고 가던 차를 버리려는 결심한 날입니다. 보험사에 가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섭섭하고 안타깝지만 그래도 차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감사합니다. 능력이 없으면 운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같이 꿈에서 벗어나는 것도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힘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북쪽과 평화통일을 갈망하며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악수하고 포옹했다고 통일이 다 된 것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준비가 아직 덜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기도하고 양쪽이 의식적 능력을 갖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헛꿈을 꾸지 말고 더 준비되도록 기도합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눈부시게 변하셨으며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알을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후라이가 된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이 변화되길 바라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곧 내가 변화될 때 세상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세례를 받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저에게 주어진 일상이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참된 변화를 이루어 가는 신앙인들입니다. 주님의 영이 함께하실 때 우리의 삶은 변화를 이루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파스카의 여정이며 부활의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어둠은 빛이되고, 슬픔은 기쁨이 되고, 미움은 사랑이 되며, 고통은 치유가 됩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역시 주님 안에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산 아래로 세상 속으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8. 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르코 9,2-10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구세주인 그리스도 예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초인적인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분입니까?
모든 불의와 부정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순식간에 새 세상을 여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까?
불치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고,
삶의 온갖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하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무력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라는 치욕적인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무 힘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힘없는 이를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적어도 입으로, 머리로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이와는 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굿판에서 불리어지는 온갖 잡신들처럼
구세주께서 현세 생활을 보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당장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아무런 고통도 없는 삶을 마련해주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것을 강요합니다.
이렇게 해주셔야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고
구세주의 자격을 제시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십자가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고 예수님께 외칩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참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살기 위해 십자가를 내팽개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꾸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빛처럼 다가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
우리가 생각했던 구세주, 바로 그 모습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여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은 간 데 없고,
환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신 예수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의
초조함과 절망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빛처럼 당당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얼마나 든든합니까?
구약 시대를 상징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를 살리실 분이라면,
바로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미칠 것 같았던 이들,
밤낮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던 이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 속에
처절한 몸부림으로 지내야 했던 이들,
이제 벅찬 해방감에 젖습니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한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의 대화를
잠결에 듣지 못하고
오직 눈앞의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에 도취된
제자들은 환호하며 외칩니다(루카 9,31-33 참조).
스승님,
여기에 머뭅시다.
이대로 삽시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삶이 아니었던가요.
저희가 모든 것을 해 드리겠습니다.
집도 짓고 먹을 것도 마련하고
그저 이 자리에 이렇게만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당연한 제안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주님의 뜻이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아직 머물 때가 아닙니다.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함께 보듬어야 할 이들이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산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
산에서 보았던 모든 모습들,
영광과 환희가 넘쳐나는 그 모든 것들을
희망으로 곱게 간직하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두려움 없이 다시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지어 바치고자했던
초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으로 예수님을 만나 힘을 얻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주님을 모시고
오순도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마는
이렇게 편안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예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울려 퍼지는 것,
가난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빼앗긴 이들,
묶이고 억압받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이들을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주님의 기쁨에 온전히 함께 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고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척박한 땅위의 흙투성이가 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이 땅의 하느님 나라를 가꾸려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우리가 오늘 미리 맛 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삶에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마르 9,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사랑은
사랑으로 빛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거룩한 변모로
주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의 힘으로
거룩한 변모가
일어납니다.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모든 변모가
지향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우리 신앙의 빛나는
최종 목적지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변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또한 서로를
빛나게하는
그리스도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우리가 거룩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사랑의
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변모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희망을 되찾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