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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완고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1)
주님의 심장을 할퀴어 터져 나오는듯한 이 탄성에는 안타까움을 너머 비탄과 자조감마저 듭니다.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곧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마치 회개에 대한 요한의 외침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도 춤추지 않는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도 없고 바닥도 없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르게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그 뿌리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완고함’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원인은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는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이미 아픔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거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됩니다.
어쩌면 바로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피눈물을 흘렀을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렸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반겨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 피리에 춤추게 하소서!
세상 죄악의 곡소리에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픈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기쁨을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 32)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첫째, 성령의 언어도 요란한 징이거나 소란한 꽹과리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1코린 13,1)
사물놀이에서 징이나 꽹과리는 대단한 악기이고 중요한 악기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시끄러움뿐일 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왜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봤듯이 코린토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없이 성령에 취해 방언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비판하면서, 아무리 성령의 은사로 방언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소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방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나고 일치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둘째로 아무리 영적 능력과 덕이 있어도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코린 13,2)
동양에서는 재승덕(才勝德)한 사람을 낮추봅니다.
재주는 많은데 덕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그것을 나쁜 데 쓰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신학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꼴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더러운 영이나 악령도 영적인 능력이 있고, 천상 신비와 세상 지식을 많이 알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사랑이 없지요.
악라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사랑이 없는 존재의 대표이고, 마찬가지로 영적 능력이나 지식이 많은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넘어 악마적인 존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셋째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사랑 실천을 해도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는 오늘 아리송한 말을 합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내 몸까지 넘겨주는 것은 대단한 사랑 행위인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코린 13,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재산 나눔과 자기 내어줌은 분명 그에게는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만, 사랑이 없이 실천한 그런 행위가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사랑 행위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사랑이 아닌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재난이 발생했을 때 T.V에 나와 성금을 내는데 자기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 위선적으로 내놓는 경우 말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행위는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처럼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이고,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고 내 행복과 구원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너 또는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그러기에 사랑이 없으면 남의 불행이 아니라 자기 불행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머리로 알지만 실제로는 사랑 없이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너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불행임을 뼛속까지 알아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깃장을 놓지 마라>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서 걱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장 나쁜 노예 근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것은 어깃장을 놓는 행위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에 장단을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삐딱 선을 탄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을 당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러고는 사람으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하고 공감하며 배려하는 넉넉함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 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은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봉헌해야 할 분입니다.
나의 법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내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풉시다!>
다들 고향을 찾아 떠난 여유로운 시간, 근처 방파제로 '고도리' 낚시를 갔습니다.
시장표 판매용이 아닌 사이즈가 좀 작은 고등어를 고도리라고 하는데, 나름 손맛이 쏠쏠합니다.
만조 전후로 잘 잡히는데, 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쑥 물고 들어갑니다.
도착한 시간이 딱 타이밍이라 정신없이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낚시를 왔는데, 전혀 조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낚시꾼들은 다들 열심히 낚아 올리는데 꽝 치고 있으니,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슬쩍 바라보니 바늘이며, 미끼며 전혀 아닌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질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잠깐 낚시를 멈추었습니다.
찌도 달아주고, 바늘도 바꿔주고, 미끼도 잘게 잘라 끼워주었습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싱싱한 고도리가 번쩍이며 올라오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드디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닌 이타적 성향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그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인간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 앞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 상황에 뛰어듭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깊은 슬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1)
그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 내면서 놀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라는 말은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이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한다.”이고,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거부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회개도 거부하고 복음도 거부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고, 당연히 오늘날의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2)
세례자 요한이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생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자기들이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가 미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요한 탓을 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라는 말씀은 당신의 평소의 생활 모습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시 나게 극기고행을 하시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식사에 초대하면 언제든지 응하셨습니다.
그러나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소의 생활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루카 9,58) 아주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라는 말은 “예수는 예언자나 랍비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는, 시정잡배 같은 사람이다.” 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리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비난하는 말인데, ‘저자는 죄인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생활 모습이 전혀 예언자답지도 않고 랍비답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예수님 탓을 하는 말입니다.
3)
마태오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똑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 3,2; 4,17)
이렇게 표현은 똑같은데,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회개’에 초점을 맞춘 선포이고, 예수님의 선포는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춘 선포입니다.
어떻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또는 회개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두 선포의 공통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거부한 일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거부한 일은 둘 다 ‘회개’를 거부한 일이고, 사실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셔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안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회개하기를 거부했을까?
사람들과 요한의 대화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 즉 “온 삶으로 실행하는 회개를 하여라.” 라고 가르쳤을 때, 군중이 그에게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루카 3,10).
그때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라고 대답했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라고 말했습니다. (루카 3,13-14)
요한의 말을 정리하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려라.”이고, “기득권을 내려놓아라.”입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과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에 거부감과 반감을 느꼈을 것이고, 회개하기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4)
오늘날에도 ‘회개’ 라는 말 자체를 듣기 싫어하는 이들이 있고, 회개할 죄가 없다고 자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려라.”, 또는 “내려놓아라.” 라는 말에 대해서 반감과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회개하라는 말을 못하거나 안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계속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계속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아무나 하나? - '무지에 대한 답은 평생 사랑 공부와 실천뿐이다'
지금도 생각하며 잘 했다 싶은 평생 좌우명입니다.
여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다음 평생 좌우명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詩같은 하루
詩같이 살자
비움은 지극히
고요히 함은 두터이”
하느님의 꽃이, 하느님의 시가 하느님의 사랑이자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꽃이, 시가 상징하는 바 아름다움이요 사랑입니다.
꽃같이, 시같이 살아간다 함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비움은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할 때 비옥한 마음의 토양에서 보기 좋게 자라나는 꽃같은 삶, 시같은 삶입니다.
시(詩)같은 인생은 말씀(言)의 사원(寺)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이자 지혜가 됩니다.
평생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함이 지혜요, 무지에 대한 참 좋은 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지혜로운 삶에 좋은 지침이 됩니다.
“남을 들여다보기는 쉬워도 나를 깨닫기는 어렵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허물을 지적받을 때 기뻐하였다.”
<다산>
이런 이들이 사랑과 지혜의 관대한 어른이자 참 선비입니다.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슬기로움(智)’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현명함(明)’이다.”
<도덕경>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얼마전 강론 제목이었지만 오늘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사랑도 평생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지혜로워지고 무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탄식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왜곡된 사랑, 변질된 사랑, 병든 사랑의 무지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당대의 세대에 대한 깊은 탄식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공감과 배려, 섬세함과 존중이 사라진 무감각하고 무뎌진 무지의 영혼들을 상징합니다.
그대로 왜곡된 사랑, 병든 사랑, 변질된 사랑의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랑과 지혜의 눈이 아니라, 편견으로 고착된 왜곡된 시선의 눈먼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사람이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현존하는 세대들이요, 회개가 시급한 이들이요, 우리도 또한 그러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냅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지혜의 자녀들이요, 두 분의 삶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자들 역시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지닌 우리들이라면 우리 역시 지혜의 자녀들이 됩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평생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사랑은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왜곡된 사랑, 변질된 사랑, 병든 사랑을, 한마디로 무지의 사랑을 치유할 절호의 기회를 줍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사랑은 연인 간의 육체적 성적 에로스적 사랑도 아니요, 친구간의 우정같은 필로스적 사랑도 아닌, 하느님을 닮은 일방적 이타적 사랑이요, 인간 모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연민과 존중, 배려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 정의할 때 그런 사랑입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듯 끊임없이 주어지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아가페 사랑의 동력은 어디서 기인합니까?
필로스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구와 끊임없이 주고 받는 우정의 사랑이 아가페 사랑의 샘이 됩니다.
제 아무리 많은 능력에 온갖 뛰어난 덕행을 지녔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 생생한 행위로 표현되니 각자 사랑의 현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2. 사랑은 친절합니다.
3.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4.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6.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7.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이래서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여정이요,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날로 사랑이 성장, 성숙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지금은 거울에 비친 어렴풋한 모습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끝까지 계속되지만 으뜸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무한한 창조주 하느님과 마주할 때, 믿음은, 희망은 필요없을 것이니, 우리 존재의 모든 가능한 욕망이 영원히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우리를 창조된 행복으로 채워주는 그 아가페 사랑에 영원히 젖을 것입니다.
이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맛보는 천상에서의 아가페 사랑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불순한 사랑을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우리 모두 꽃같은, 시같은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견지망월(見指忘月)’>
며칠 전입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인기가 떨어진 유명 가수와 가수를 도와주는 매니저의 진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만 잘하는 가수는 늘 사고를 치고, 매니저는 가수의 뒷수습을 합니다.
강원도 영월의 방송국 진행자가 된 가수는 솔직한 입담으로 지역에서 인기를 얻습니다.
전국 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이 승격되었고, 가수에게 새로운 기획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단 매니저 없이 가수만 영입하겠다고 합니다.
매니저는 20년 넘게 동고동락했지만, 가수의 미래를 위해서 말없이 떠납니다.
가수는 기획사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울먹이며 매니저에게 돌아와 달라고 방송합니다.
방송을 듣던 매니저는 다시 가수에게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지지만, 추운 겨울에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진정한 사랑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본당에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임마누엘 합창단’이 있었는데 팬데믹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보에 어린이 합창단 모집 공고를 하였고, 19명이 합창단에 가입했습니다.
19명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저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몬세랏에는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이 매일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부릅니다.
지난 4월에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때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롭게 문을 연 어린이 합창단은 예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다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본당의 날에, 성탄에, 부활에 공연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고운 노래와 깨끗한 마음이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 줄 것입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별 대부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의 빛을 받아서 빛난다고 합니다.
태양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가 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매니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합창단의 고운 노래가 본당 공동체를 환하게 비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목숨까지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사랑은 비로소 빛을 낸다고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어둠에 빛을 주고, 이런 사랑의 행위가 절망 속에 희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지친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기도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안 들어주실까요?
많은 이가 들어주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제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세요.”
부모님의 건강을 기도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 좋아지신다고 하고, 자녀의 진학을 위해 기도해도 현재 삼수째라고 하십니다.
남편의 승진을 기도했는데 갑작스럽게 퇴직할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다고 하십니다.
그 밖에도 기도하면 더 나쁜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기도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100%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자기 뜻이 하느님 뜻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매달리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십니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하나도 자라지 않았어.’라고 불평합니다.
다음날 나와도, 또 그다음 날 나와도….
결국 포기하려고 할 즈음 땅 위로 무엇인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쑥쑥 자라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기도도 이렇습니다.
그래서 멈춰서는 안 되고, 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계속 밭에 나가야 씨가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며 기쁨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 때는 함께 춤춰야 하고, 장터에서 곡을 할 때는 함께 슬퍼해야 놀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뜻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외쳤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며 반대했고,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면서 반대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는 자기 뜻만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뜻만을 주장한다면,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사랑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기쁨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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