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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예24기보존회 무예24기연구소 최형국- |
1 안녕하세요, 무예24기입니다. 2 [홍재전서] <무예도보통지>와 백동수와의 관계 3 [사진] 무사 백동수가 익혔던 조선시대 무예 시범 사진입니다.... 4 [관계] 무사 백동수와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과의 관계 5 [문장] 무사 백동수가 지휘했던 장용영의 군사들은 이렇게 훈련했다. 6 [사진] 무사 백동수가 익혔던 조선의 마상무예 (1) 7 [야뇌] 백동수는 왜 그의 별명(호)를 '야뇌(野餒)'라 하였을까요? |
1. 안녕하세요, 무예24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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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홍재전서] <무예도보통지>와 백동수와의 관계
글쓴이: 무예24기 2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9권
잡저(雜著) 6
무예도보서술(武藝圖譜叙述) 경술년(1790)
1. 연기(緣起)
무예보(武藝譜)는 모두 여섯 가지의 기법이 있으니, 곤봉(棍棒)ㆍ등패(藤牌)ㆍ낭선(狼筅)ㆍ장창(長槍)ㆍ당파(鎲鈀)ㆍ쌍수도(雙手刀)이다. 이것은 처음에 선조(宣祖)께서 훈련도감 낭청(訓練都監郞廳)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명 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허국위(許國威)에게 물어 엮어서 간행하도록 한 것이다.
선왕 기사년(1749, 영조25)부터 소조(小朝 섭정하는 왕세자. 정조의 부(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가리킴)께서 대리청정을 하여 오던 중 기묘년(1759, 영조35)에 와서 열두 기법을 더 만들어 넣도록 명하셨으니, 죽장창(竹長槍)ㆍ기창(旗槍)ㆍ예도(銳刀)ㆍ왜검(倭劍)ㆍ교전(交戰)ㆍ월도(月刀)ㆍ협도(挾刀)ㆍ쌍검(雙劍)ㆍ제독검(提督劍)ㆍ본국검(本國劍)ㆍ권법(拳法)ㆍ편곤(鞭棍)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다 도해(圖解)를 편집하여 넣어서 무예신보(武藝新譜)를 만들었으니, 18기(技)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실은 현륭원지(顯隆園誌)에 실려 있다.
내가 즉위하던 첫해에 바로 선왕의 뜻을 추모하여, 신보와 구보를 함께 연습시켜서 시취(試取)하도록 명하였다. 기유년(1789, 정조13)에 규장각 관원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 장용영 장관(壯勇營將官) 백동수(白東脩) 등에게 명하여, 이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계통을 이루어 놓도록 하였으며, 또 여섯 가지의 기기(騎技)를 더 만들어 넣게 하였으니, 기창(騎槍)ㆍ월도(月刀)ㆍ쌍검(雙劍)ㆍ편곤(鞭棍)ㆍ격구(擊毬)ㆍ원기(猿騎) - 마상재(馬上才)임 - 로, 도합 24기(技)이다. 이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 이름하고 친히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실은 다음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글씨를 쓰게 하였고, 경술년(1790, 정조14)에 서울과 지방의 군영에 반포하여 제도로 삼도록 한 것이다.
2. 편찬(編纂)
각 조항들은 널리 수집하고 참고하여 그 시말(始末)에 대해 주소(注疏)하되, 구보의 경우는 위에 ‘원(原)’ 자를 쓰고 신증(新增)한 것은 ‘증(增)’ 자를 써서 구별함으로써, 혹시라도 아무렇게나 뒤섞어서 앞사람의 잘된 점을 덮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며, 아래쪽에 안설(案說)을 붙인 경우 모두 한 글자를 낮추어 썼다.
장용영(壯勇營)에 서국(書局)을 열고 내부(內府)의 병가류(兵家類) 20여 부(部)를 내주어 참고하도록 명하고, 또 이덕무(李德懋)에게는 옛 서고(書庫)의 비장 서적들을 열람 참고하도록 하고, 박제가(朴齊家)에게는 판하본(板下本)을 쓰도록 하고, 백동수(白東脩)에게는 병술을 잘 아는 장용영 안의 장교들과 함께 기예를 살피고 시험하도록 명하였다. 판각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공정을 끝마쳐서, 그 판본은 장용영에 간직하여 두었다.
** <무예도보통지>는 정조 14년 1790년에 만들어진 동양삼국 최고의 무예훈련서입니다. 바로 그 무예서의 실질적인 무예동작을 <무사 백동수>가 책임지고 감독하였습니다.
*** <홍재전서>는 정조가 남긴 문집의 이름입니다.
-(사)무예24기보존회 무예24기연구소 최형국-
3.[사진 1] 무사 백동수가 익혔던 조선시대 무예 시범 사진입니다....
글쓴이: 무예24기 2
-(사)무예24기보존회 무예24기연구소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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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관계] 무사 백동수와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과의 관계
글쓴이: | 무예24기 2 |
자!, 오늘은 무사 백동수와 조선후기 최고의 학자로 통용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알아 봅시다.
먼저, 청장관 이덕무와 백동수의 관계는....
- 이덕무에게 백동수는 처남이었습니다. ^^ 바로 백동수의 누나와 이덕무가 결혼을 한 관계라는 것이지요. 나이로 보면 이덕무가 1741년생이고, 백동수가 1743년생이니 좋은 벗으로 지낼 수 있었던 나이 차이입니다. (실제로 조선시대때에는 보통 10차이 내에서 서로 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의 친구 개념이 아니고, 벗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덕무와 함께 연암학파의 일원으로 백탑시사에 참석할 수 있었지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주 <다큐멘터리 무사 백동수 >를 시청하시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둘째, 연암 박지원과 청장관 이덕무와의 관계는....
- 조선후기 북학파, 그리고 연암학파로 불리는 학맥을 만들어 낸 박지원은 조선후기 최고의 학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지원의 나이는 1737년 생으로 이덕무와 5살 정도 차이가 있었지요. 그래서 이덕무는 박지원을 스승이자 좋은 벗으로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특히 조선후기 실학파 계보 속에는 '이용후생파'라 하여 그의 사상과 업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미에 다시 설명하지요.
셋째, 청장관 이덕무와 박제가와의 관계는.....
- 박제가는 1750년생으로 그들 모임에 막내가 되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장실력은 당대 최고의 실력이었습니다. 바로 십대때 조선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그의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바로 그런 실력을 인정해서 이덕무와 친하게 지내게 되고, 이후 백탑파의 일원으로 함께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대 무사 백동수와 함께 했던 인물들은 이외에도 유득공, 이서구, 홍대용 등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양반임에도 괄시를 받았던 반쪽 양반 소위 '서얼'출신이었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홍길동전에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 아버지는 귀한 양반이나,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태생적 한계이며,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세상은 그들을 고은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직으로 성장하는데 문제가 많이 발생했지요.
그/러/나 바로 18세기 정조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재주와 능력이 있으면, 당당하게 관직에 출사하고 그들의 능력을 펼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했습니다. 박제가와 이덕무가 근무했던 곳은 규장각입니다. 바로 정조시대 문치의 핵심은 '규장각'에서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무치는 '장용영'입니다. 바로 무사 백동수가 장교로 근무했던 곳이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이었지요.
따라서 정조는 조선을 文으로는 '규장각', 武로는 '장용영'을 통해서 새로운 변혁의 시대로 만들어 가려고 했습니다.
이정도면 이해가 되겠지요? 혹여 더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리플 남겨주시길....
-(사)무예24기보존회 무예24기연구소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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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장] 무사 백동수가 지휘했던 장용영의 군사들은 이렇게 훈련했다.
글쓴이 | : 무예24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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櫛風沐雨 즐풍목우.....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비에 몸을 씻는다는 뜻입니다.
무사 백동수가 장용영의 군사훈련을 바라보며 되뇌이던 말입니다.
-(사)무예24기보존회 무예24기연구소 최형국- http://muye24ki.com / bluek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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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진] 무사 백동수가 익혔던 조선의 마상무예 (1)
글쓴이: | 무예24기 2 |
바로 <무사 백동수>와 함께 조선을 지켰던 군사들이 익혔던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무예입니다.
앞으로 더 좋은 사진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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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야뇌] 백동수는 왜 그의 별명(호)를 '야뇌(野餒)'라 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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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무예도보통지의 그림 중 마상월도의 첫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유심히 보면 멋진 수염을 기른 무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그림에는 젊은 장교들의 그림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백동수가 직접 말을 타고 달리며 시범한 그림이지 않을까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실제로 백동수는 무예도보통지 제작과정에서 무예실기를 직접 감독한 담당자였습니다. 혹여 관심 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길...숨은 그림찾기 보다 재미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본명 대신 '호'라는 것을 지어서 이름대신 부르곤 했습니다. 보통은 2-3개정도를 사용했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도 <완당·추사·예당·시암·과파·노과>라는 다양한 호를 사용했답니다. 무사 백동수 또한 호(號)가 있었습니다. 영숙과 야뇌...
그중 그가 가장 아낀 호는 '야뇌(野餒)' 였습니다. 들:야, 굶주릴:뇌....
들판에 피어나는 잡풀처럼 꾸미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며 굶주려도 무사의 기상을 잃지 않으려했던 그의 마음을 담은 것이지요.
백동수의 벗이자 매형인 청장관 이덕무는 그런 그를 위해서 '야뇌당기(野餒堂記)'라는 글을 남기며 그의 호에 대해서 후대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 야뇌(野餒)는 누구의 호인가? 나의 벗 백영숙(白永叔 영숙은 백동수(白東修)의 자)의 자호(自號)이다. 내가 영숙을 보매 기위(奇偉)한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비이(鄙夷)하게 자처(自處)하는가? 나는 이 까닭을 알고 있다. “저 사람은 얼굴이 순고하고 소박하며, 의복이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야인(野人)이로구나. 언어가 질박(質朴)하고 성실하며 행동거지가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뇌인(餒人)이로구나.”
한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그와 함께 어울려 주지 아니한다. 온 세상이 모두 이러하니 이른바 야뇌라고 하는 자도 홀로 행하여 다난(多難)하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어울려 주지 않는 것을 탄식하여, 후회해서 그 순박한 것을 버리거나 부끄러워하여 그 질실(質實)한 것을 버리고서 점차로 박한 것을 좇아가니 이것이 어찌 진정한 야뇌이겠는가? 참으로 야뇌스러운 사람은 또한 볼 수 없다. 영숙은 고박(古樸)하고 질실한 사람이라 차마 질실한 것으로써 세상의 화려한 것을 사모하지 아니하고, 고박한 것으로써 세상의 간사한 것을 따르지 아니하여 굳세게 우뚝 자립해서 마치 저 딴세상에 노니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 모두가 비방하고 헐뜯어도 그는 조금도 야(野)한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뇌(餒)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이야말고 진정한 야뇌라고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것을 누가 알 것인가? 나만이 잘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야뇌라고 이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지만 나는 그대에게 기대(期待)하는 바이니 앞서 내가 이른바, “비이한 데 자처한다.”
한 것은 마음에 격동하여 말한 것이다.
영숙은, “내가 자기 마음을 알아 준다.” 하여 그 서문(序文)을 청하므로 써서 준다. 행여 이것을 가지고 말을 교묘하게 하고 낯빛을 좋게 꾸미는 자에게 보이게 되면 반드시 비웃고 또 꾸짖어 이르기를, “이 글을 지은 자야말로 더욱 야뇌한 사람이로구나.” 하겠지만 내 어찌 성내랴?
신사년(1761, 영조 37) 1월 20일(경신)에 한서유인(寒棲幽人)은 쓴다."
-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야뇌당기(野餒堂記>
이 글 중, < 세상 사람 모두가 비방하고 헐뜯어도 그는 조금도 야(野)한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뇌(餒)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이야말고 진정한 야뇌라고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를 보면 무사 백동수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로 자신의 입신양면을 위하여 온갖 아양을 떨면서 권력자에게 굽신거리는 정치질을 하지 않아서 거친 '야(野)한' 삶, 또한 그런 삶을 위하여 기꺼이 굶주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뇌(餒)한 삶'.....
바로 그에게서 '야하고, 뇌함'을 빼면 존재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무사 백동수는 그저 단순한 무사 백동수가 아니랍니다.
비록 드라마 상에서는 픽션과 넌픽션이 뒤섞여 팩션으로 흘러 간다 할지라도, '무사 백동수'는 우리에게 '야뇌 백동수'로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몇 해전 설문조사에서 '귀하는 TV를 비롯한 사극을 통해서 역사공부를 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약 70%이상의 사람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한 자료를 접한적이 있습니다. 그저 드라마로 치부하지 마시고, 부디 백동수의 삶에 대해 잠시라도 진정어린 마음으로 살펴보시길 빕니다. 그것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기억하는 마음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며,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무사 백동수, 많이 사랑해 주세요.
-(사)무예24기보존회 무예24기연구소 최형국- http://muye24ki.com / bluekb@hanmail.net
(자료출처: ※SBS 월화드라마 '무사 백동수' > 드라마정보> 백동수 따라잡기 게시판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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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보고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백동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는걸 알게되네요. ㅠㅠ 글 감사히 잘봤습니다(__)(^^)
영조 시대의 실존인물이라네요 전 백동수를 드라마의 원작인 야뇌 백동수 만화책으로 알게 되었습니다..만화책이 어떻게 보면 드라마 보다 더 재미있다고 봅니다..ㅎㅎ
ㅈㅓ 어릴적에는 무협만화랑 무협소설을 참 좋아했었어요.. 만화 야뇌 백동수도 재밌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