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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봄꽃들의 꽃망울 터트리는 소리가 들리는 들판으로, 느리게 걸으며 기지개를 켜 본다. 봄꽃의 대명사인 복수초와 풍년화, 동백꽃, 벚꽃, 철쭉, 수선화, 튤립, 봉오리가 자태를 뽐내려고 얼굴을 다듬고 있다.
봄이 온다는 건 혹독한 긴 겨울을 견디었다는 것이다.
거실 한구석 동방구리에 심어 놓은 겹동백 한 그루. 새색시의 붉은 입술 같은 꽃봉오리를 매달고도 속내는 감감하다. 수삼 년째 꽃을 피우지 못해 양지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애를 태워 보지만, 올해도 젖멍울 몇 개 맺혔다가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이내 가슴을 감싼다. 반질반질하던 잎은 어느새 까칠해졌다. 어린 시절, 네가 품었던 달디단 꿀을 기억한다. 잘 익은 햇살과 해풍에 허기를 달래며, 겨울 숲에 불을 지펴 타오르던 동박새의 뜨거운 구애를. 네가 활짝 웃으면 숲은 달아올라 바다가 펄펄 끓고, 밤새 고열에 시달렸으리라. 먼 바닷가의 순결한 바람이 아니면, 붉은 속살을 열 수 없는 것일까? 늦겨울 해가 설핏 머물다 간 자리, 젖가슴에서 떨어진 검은 피 한 점이 동방구리 어깨에 진하게 묻어 있다.
꽃피우지 못하는 동백을 바라보면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날들이 있었다. 꽃이 핀다는 건 긴 겨울을 견디었다는 것. 자연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만 피는 꽃이건만 나의 탐욕으로 편하게 거실에서 동백꽃을 보려고 한 나 자신이 순간 부끄러워졌다. 자연의 이치를 어기고 인내의 시간을 어긴 결과로 꽃봉오리만 겨우 온 힘을 다해 맺히다 힘없이 툭 툭 죽어가게 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자연도 인간도 각자의 제 자리에서 주어진 소명을 견디고 이겨내고 그렇게 살다가 가는 여정임을.
친지가 준 선물 중에 철사로 꽁꽁 묶여서 거실에서 자라게 하는 소나무 분재가 있었다. 물만 주고 관심도 없다가 동백을 키우면서 자연의 순리가 아님을 깨달아서 분재의 철사를 풀어주고 뒷산의 건강한 대지를 찾아서 깊이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심어주었다. 작은 소나무가 뿌리내려 살아난다면 세월 흘러 언젠가는 우리에게 숲이 되어 줄 것을 믿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봄이 오면 어린 시절 들녘에 얼굴을 빠끔히 내민 냉이를 캐러 다닌 적이 있다. 옆으로 돌리고 돌리던 냉이를 캐면 허연 속살 토실한 뿌리가 나오고 냉이의 쌉쌀하고 향긋한 향이 가슴속에 퍼진다. 어머니는 냉이가 품은 바람 한 줌, 추위 한 줌, 햇살 한 줌을 버무려서 냉이 무침과 냉이 된장국으로 맛있는 밥상을 차리셨다. 거친 바람과 혹한 속에서 냉이의 뿌리는 더 깊숙이 뻗어 나가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키운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꽃과 나비의 등장으로 마음이 설렌다. 대지 속에서 움츠렸던 생명들이 깨어나는 시기이기에, 입춘이 지나면 자연의 선물은 누구에게나 모습을 드러낸다. 봄비를 맞으면 늙은 고목나무도 싹을 틔우고, 가려움증에 여기저기서 싹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계절. 누구에게나 설레고 벅찬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기에, 봄의 생명력과 희망이 모두의 마음속에 피어나길 소망해 본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모든 결과에는 이유가 있기에 부디 자연의 순리대로 해결되고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에도 청순한 봄꽃들이 피어나 그 향기 서로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5월의 장미원에 나비 한 마리 날고 있다
데칼코마니로 찍힌 무지개 날개 팔랑팔랑 장미꽃밭 넘나든다
우화 거듭하며 날개를 탄생시킨 나비는, 무지개를 내건다
허공을 탄생 시킨다
날개 밑에 조각별처럼 끌고 다니는 작은 그늘 아래 장미가 입을 벌린다
나비도 장미도 무한 허공을 즐기는 것이다
달뜬 몸을 던져 봄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허공의 탄생/노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