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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공항 모습]
나리타 공항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을 세우는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국제 허브 공항으로서의 야심을 품고 만든 공항이었다.
그런데 나리타공항을 이용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리타 공항의 경비와 경찰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경비가 삼엄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왜 나리타 공항은 여타 공항보다 더 경비가 삼엄하고 경찰들도 많이 배치되어 있는 것일까?
[나리타 투쟁 사진]
그것은 1960년대부터 2020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나리타 투쟁 때문이다.
[산리즈카 투쟁이라고도 함.]
[사토 총리]
1966년 일본은 우리나라가 인천공항을 만들때 그랬던것처럼 일본에 거대 국제공항을 만들리라는
꿈을 품고 나리타 국제공항계획을 세운다.
꿈은 원대했고 마음은 급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정부가 건설계획을 나리타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고 (?)
나리타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안조차 제시하지 않은채 공항 건설을 무리하게 추진한점에 있었다 (??)
적절한 보상을 위한 정책과 자금을 준비하지 않은 정부는 충분치 못한 보상액을 제시했고 애초에 돈을 받아도 떠나지 않으려는 주민들에게도 공권력을 행사하여 '나라가 큰일 하려는데 왜 국민이 협조하지 않느냐' 는 식의 고압적 태도로 주민들을 밀어붙였다.
[ 나리타 공항 시위를 다룬 만화 '우리마을 이야기중 한 장면]
나리타 공항에 살던 주민들은 대대로 몇백년간 농사를 지으며 정착해 살던 주민이었고
나리타 공항이 건설되니 나가라고 해도 당장 어디가서 뭘해먹고 살아야 할지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적절한 보상안이나 합의점을 도출하려고 하기 보다는 나라에서 큰일을 하려고 하니
보상을 받고 퇴거해달라는 식으로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려고 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와 행태는 당연히 주민들의 큰 반발을 샀고
이에 주민들은
어린이와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나서서 투쟁에 나선다.
[나리타 공항이 생기기전 산리즈카 주민모습]
이들은 대대로 물려받고 살아온, 혹은 힘들게 겨우 정착한 땅에서 퇴거당하면 살 길이 없으니 그야말로 농민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시위였다.
일본은 대대손손 가업을 물려받아 이어가는 성향이 강하고 특히 1960년대에는 농사짓는 토지와 고향, 고향땅에 대한 애착이 강한 시대였다.
그걸 갑자기 공항짓겠다며 나가라고 하니 사람들이 반발하며 시위를 할 수 밖에.
그런데 여기에 각종 정치단체와 정당이 개입하면서 사건이 복잡해진다.
[일본 공산당 ]
일본 공산당과 일본 사회당 같은 정치 정당들이 사진한번 찍어보겠다며 가세했고
1967년 당시에 벌어지고 있던 월남전을 반대하고 사토 내각에 반대하는 신좌파의 각 파가 반국가 투쟁에 나서면서 나리타 시위에 동참한다.
또 지역의 기독교도가 모인 토무라 일작의 반대 동맹 대표가 활동을 선도하고
지역 농민들과 좌익 혁명가들이 협력하고 제휴하면서 나리타 시위의 규모와 성격은 일변하게 된다.
[좌익 혁명가들과 무정부주의자, 정치정당과 신좌파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는 점점 무장투쟁화된다.]
1967년에는 시위대가 다리를 건너려 하자 경찰 기동대가 버스로 다리를 막았지만
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해 근처에 있는 살수차와 경찰버스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수명이 부상했고
주민들은 고공철탑과 바리케이드, 시설물을 세워 확성기를 켜고 공사차량의 진입을 막고 경찰과 싸우며 반대투쟁을 전개해나갔다.
기동대가 최루탄을 쏘면 주민이 주워서 기동대에게 되던져 기동대가 해산하는 일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 정부는 초지일관 비타협적인 자세로 건설계획을 수행했다.
주민들의 엄청난 저항과 반발속에서도 경찰력을 투입해 진압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뉴스와 여론매체에는 머리가 깨지고 선혈이 낭자한채 실려나가는 기동대원과 주민의 영상이 수차례 중개되었다.
[ 시위중 돌격하는 주민들]
주민들은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 고향을 지키기 위한 성격의 알박기를 하고
다른 시민들과 함께 합세해 1평 땅사기 운동을 전개하며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비타협적인 태도로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원래 1972년까지 공항을 완성시키려 했던 일본정부는 시위로 계속 시일이 늦추어지자
1971년 2월 22일에 건설 예정지에서 경찰력을 이용하여 제 1차 행정대집행을 시행했다.
이 당시 투쟁은 경찰의 무력 진압 시도와
농민과 시위대의 목숨을 건 방어로 그야말로 전투에 가까웠다.
화염병에 맞아 불이 붙자 몸에 불이 붙은채 뛰쳐나오는 모습
[연행되는 시위 참가자]
1차 행정 대집행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부상자가 나오지만 일본 정부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지 못했고
같은해 9월 16일에 다시 제 2차 행정대집행이 이루어진다.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파괴하는 모습]
제 2차 행정대집행에서는 좀더 과감히 공권력을 사용하라는 정부측의 주문이 있었고
1차 행정대집행에서보다 더 강한 충돌이 발생하여 기동대와 시위대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주민들은 바리케이드와 건물을 구축하고 농성했고 기동대는 이들을 끌어내고 해산시키거나 폭력혐의로 구속했다.]
[행정 대집행 관련 만화 한장면]
특히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농민과 시위단체들이 곳곳에 성과 벽을 건설해두고 안에서 생활하며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이것을 불법 건축물로 규정하고 중장비를 동원해 강제 철거 및 해산시키면서 끝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며 자리를 지키던 농민이 사망하고 중장비 기사가 폭행을 당하는등 이당시의 폭력성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시위대가 있는 성을 철거하는 모습]
[철거를 위해 중장비가 다가오자 화염병을 투척하는 시위대와 탈출하는 기사 모습]
행정대집행에도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몇년간 더 투쟁을 이어나갔다.
1972년 3월 15일 반대 동맹은 A 활주로 남단에 접근 영역 내 바위 지역에서 높이 63M의 철탑, 소위 암산대철탑을 건설하여 비행전 검사를 중지하게끔 했다.
이에 1977년 1월 11일 후쿠다 내각은 국무회의에서 1년 내에 개항하게 하겠다고 호언하고 항공기 운항을 방해하는 암산대철탑을 철거하고자 1월 19일 중장비를 운행하는 도로 건설에 들어갔다.
[ 철거를 위해 진입하던 불도저가 화염병에 직격당하는 모습]
5월 6일 새벽 3시 기동대원 2100명이 암산대철탑 주변을 포위, 오전 11시경에 암산대철탑을 철거, 기초부까지 절단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 일로 5월 8일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고 시위대의 격렬 저항에 기동대가 최루탄을 마구잡이로 발포하다가 야전병원에 있는 학생의 머리를 직격하여 학생이 그자리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시위대가 설치한 탑을 사람이 있는채로 파괴하는 모습]
"이제 우린 어디로 가란 말이냐?!"
[항의하는 한 노인]
이러한 격렬한 시위와 투쟁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오직 나리타 공항의 빠른 개항을 목표로 경찰력을 동원해 무력진압해 나간다.
결국 대부분의 주민들이 밀려나오고 어쩔 수 없이 합의하거나 포기하며 떠나가게된다.
[무너지는 탑과 농성장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주민들]
그리고 나리타 공항은 조금씩 건설되었고 결국
1978년 3월 그 개항을 앞두고 있었다.
개항 직전 또 발생한 무장 투쟁
1985년 10월 20일 국제공항의 2기 건설을 반대하는 대규모 총궐기 집회가 일어났다. 3900명이 참여한 집회에서
오후 네시경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을 비롯한 여러 당파가 '이전처럼 또 질 수는 없다' 며 철저한 항전을 약속하고
집회 예정 몇주전 땅속과 관목속에 숨겨둔 쇠파이프, 죽창, 깃발, 화염병등을 꺼내어 참가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준비해둔 트럭과 덤프트럭으로 시위현장을 난입, 기동대와 충돌하며 시위가 폭력화되었다.
[헬멧을 쓴 시위대, 헬멧에 새겨진 글귀와 마크에서 단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4시 22분 1000명단위의 무장한 중핵파와 농민들은 교차로에 있는 경찰 저지선을 통나무로 뚫고 기동대를 공격했다.
저지선이 뚫리자 경찰 기동대는 큰 혼란에 빠졌고 다시 저지선을 세우려 하자 화염병과 자갈을 던지고 낙오된 경찰 병력을 구타하는등 2시간동안 시위를 벌였다.
[당시 일본 시위대가 통나무를 이용, 경찰 저지선을 붕괴시키는 장면]
[불타는 경찰 차량]
이 사건을 본 한국 노조원 및 시위대들도 "너무 격하다" 며 평가할 정도로 시위는 격렬했고 목숨을 도외시한것으로 보이는 수준이었다.
이 일로 기동대는 9명의 중상자, 5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다수의 장갑차 및 살수차가 파괴되었으며 241명의 시위대가 체포되었다.
공항 침투, 관제탑 파괴 사건
동시각, 나리타 공항에서는 혁명적 노동자 협회의 구성원들이 택시로 위장한 차량과 가짜 신분증으로 경찰의 검문을 통과하고 공항내로 진입하여 5시 35분경 공항 여객 터미널 빌딩 주차장에서 자신이 타고온 차량 외 1대, 총 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또한 화염방사기와 산탄총으로 무장한 결사대가 위장 소방차 2대를 방화 사건의 소화 활동 명목으로 경찰을 속여 진입했다.
관제탑 앞에 위장 소방차 1대를 정지시키고 시한장치를 작동시킨 이후 다른 위장 소방차로 도주했다.
약 8분후 소방 호스 노즐로 위장한 산탄총의 화약으로 한번에 200개 가량의 구슬탄이 발사되어 관제탑과 유리창이 파괴된다.
화염방사기는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아 관제탑이 불타지는 않았으나 타고온 위장 소방차에 불이 붙었다.
[점거된 관제탑에서 삐라가 날리는 모습]
이 전략은 수년전부터 준비되어 오던것이고 극좌 과격파 및 농민들과 시가전을 일으킨것이 양동이었으며
이 양동에 당해 2시간 가량 진압이 지연되어 국가 중추 시스템까지 파괴되는 수모를 겪은 일본 경찰은 콩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개항 후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주민들은 게릴라 형태로 항쟁을 이어나갔고 개항해 공항을 대상으로 150건이 넘는 게릴라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대에 밀려 나오는 기동대]
그후, 결국 대화에 나선 일본 정부
이러한 1966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장구하고 치열한 시위끝에
일본 정부는 농민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고통을 입은 농민에 사과가 이루어지면서 충돌은 잦아들어갔다.
1995년 이후에는 공항2기 공사에 쓸 토지 매수에 응하는 농민들도 증가했다.
그러나 토지 이전에 응하지 않는 주민과 시위단체들이 여전히 있어 공항은 결국 계획대로 완성되지 못했고
시위단체와 주민들 일부는 여전히 공항내 자신의 땅에서 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리타 공항은 처음 계획의 절반도 이루지 못한채 운영되고 있고
반쪽짜리 공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활주로는 아예 활주로로 사용할 수 없게되었다.
현재에도 공항내에 주택이 있으며
이러한 공항내 주택과 건물은 항공기 촬영의 명소가된다.
투쟁과 그 결과로 인해 나리타 공항은 기존의 반도 안되는 활주로와 용량을 갖게 되었고
측풍이 강해 심심하면 고 어라운드가 나오게된다.
이러한 문제를 가진 나리타 공항덕에 인천공항은 반사 이익을 상당히 많이 봤고
허브 공항으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잇게 된다.
일본 정부도 나리타 공항과 하네다 공항의 기능을 강화하고 여전히 눈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공항부지내 주택과 주민들을 몰아내고 공항을 고치려 했지만
현재 부지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과거 나리타 공성전의 기억으로 인해 정부에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고
나리타 시위 자체도 아직 현재 진행중인지라 제대로된 협상도 못해보고 물러나게된다.
나리타 공성전은 베트남전이 진행중이고 냉전중이라던 당시의 시대상과
전공투, 좌익, 공산주의같은 사상과 시위가 뜨겁게 벌어지던 일본의 시대적 특징,
그리고 국가 계획이라며 제대로된 협상과 보상없이 일을 진행시키려 했던 정부의 행태
가 만들어낸 참사였다고 평하는 사람이 많다.
만약 일본 정부가 제대로된 보상과 협의를 거쳐 나리타 공항을 계획대로 완성했다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대체로 평하며
한편 이런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든 정당과 단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들 입장에서 보면 감히 하찮은 농민들 주제에 다이묘(영주)들이 사업을 하고 결정을 내렸거늘
잇키(농민봉기)를 일으킨단 말이냐?! 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리고 그 생각 그대로 일 처리했다가 저지랄 난거고.
첫댓글 몰랐던 사실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몰랐던 사실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역시 사무라이의 후예들 ~!
도쿄 나리타에 가면 지상에서 오랜시간 빙빙돌아서야 비행기에서 내리던 이유를 이제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일본도 시위를 할때가 다 있었네요
평범한 일본 국민들 화끈할때도 있군요!
그 동안 순종적이라는 얘기만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