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하다보면 학교 앞이나 골목길에서 ‘잠깐 정지’라는 교통 표지판과 마주치게 된다. 위험하니 속도를 줄여 브레이크를 밟으라는 경고의 표시다. 인생에도 이런 ‘잠깐 정지’의 표지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잠깐 정지’를 하는 동안 순간순간 놓치고 지나온 것들과 실수를 되짚어 보고 너무 달려온 인생이라면 잠시 쉬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2003 페넌트레이스가 2일 막을 내렸다. 벌써 한 시즌이 끝났다. 시간은 참 빠르다. 선수들이 흘리는 땀과 그라운드의 열기 속에 532경기가 물 흐르듯 지나갔다. ‘심은정의 그에게 묻고 싶다’를 연재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됐다. 기자는 여기서 ‘잠깐 정지’를 하고 뒤를 돌아보려 한다. 기억 속에서 시간의 태엽을 뒤로 돌리는 일은 쉽지 않다. 아쉬움과 미련이 등 뒤에서 어깨를 잡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의 초입을 달려온 10월 2일 기자는 지난 6개월 동안 써온 취재수첩을 거꾸로 넘겼다. 만날 사람의 연락처와 휘갈겨쓴 글씨…. ‘그에게 묻고 싶다’ 17번째 주인공은 심은정의 취재 후기다.
●챕터(Chapter) 16
기자의 부모님은 4년 가까이 딸이 쓴 모든 기사를 스크랩하셨다.
취재수첩보다 더욱 값진 스크랩북을 펴니 4월 12일 첫 인터뷰 상대였던 LG 치어리더들이 나타났다.
한장 한장 뒤로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그 만남의 순간이 떠올랐다.
2000년 대학야구 노히트노런의 주인공 임동진, 아들이 1승을 할 때마다 무료로 택시를 태워주겠다던 봉중근의 아버지 봉동식씨. 빅 리그에 실패해 재활 전문가로 나선 전 LA 다저스의 정석, 부상과 가정불화로 위기를 맞은 조성민, 국내 첫 2개 구단 단장을 거친 SK 최종준 단장, 야구에서 연예 매니지먼트로 진로를 바꾼 동봉철, 집 안에 ‘작은 박물관’을 짓고 있는 홈런왕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씨, 해태와 14년간 응원단상에서 동고동락하다 영화관 기술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호루라기 아저씨’ 임갑교씨, 올스타전에서의 딱 한 방의 홈런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긴 89년 미스터 올스타 허규옥, 최희섭을 통해 좌절된 빅리거의 꿈을 대리 만족하고 있는 에이전트 이치훈씨, 1승을 위해 세상에 도전장을 던진 청각장애학생들로 구성된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 그리고 정식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삼수도 마다하지 않고 서울대에 입학한 신동걸, 문화와 그라운드 충격을 경험하며 외국인선수로 지내는 게 어떤지를 보여준 LG 매니 마르티네스와 그 가족들, 그리고 16년 동안 LG 선수단 버스를 몰다 서툰 개인택시 기사로 변신한 원한식씨까지. 6개월간 기자의 취재수첩에 담긴 16명의 독특한 인생이었다.
●마음 아픈 이름 하나
뒤를 돌아보면 가슴 한구석에 아련히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김건덕. 지난 6월에 영화 ‘친구’의 배경인 부산 영도에서 만났다. 경남상고 시절만 해도 그는 지금의 삼성 이승엽보다 실력에서 더욱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인생은 역전됐다. 이승엽이 한양대 진학에 실패하고 프로에서 홈런왕으로 명성을 쌓아간 반면 한양대에 들어간 김건덕은 어깨 부상으로 브레이크 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나갔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수발을 들며 어려운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간 기자는 그의 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좁은 골목길 안 대문 틈 사이로 보이는 먼지 쌓인 세탁기. “아버지가 불편한 생활을 하셔서 집 안이 누추해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라며 고개를 숙이는 그의 말에 오히려 기자가 더욱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승엽과 김건덕, 옛 친구 사이인 둘의 극명한 인생역전이 머릿속을 내내 혼란스럽게 했다.
그러던 얼마 전 김건덕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운 목소리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며 어느 선수의 연락처를 물어왔다. “좋은 일이 생기면 꼭 알려달라”고 전화를 끊은 지 3주째. 궁금해서 다시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했지만 고객의 사정으로 당분간 착신이 금지됐다는 안내만 되풀이됐다.
●실패, 그리고 또 다른 인생
‘그에게 묻고 싶다’는 다양한 장소에서 물었다. 택시 안, 영화관, 아파트, 수산시장 앞 등. 그 가운데 지난 4월 영등포역에서 막 기차에서 내린 임동진을 만난 것이 문득 떠오른다. 그는 2000년 대학야구에서 노히트노런을 작성한 주인공으로 월급 없는 사회인 야구활동을 하다가 이날 SK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유명 인사와의 인터뷰를 기다리듯 기자는 곧바로 문학구장으로 이동해야 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대합실 앞 벤치에서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문자 메시지로 소식을 전하며 모락모락 입단의 꿈을 키우던 그는 테스트에서 낙방한 후 안타깝게도 연락이 끊겼다.
조성민은 사업가적인 기질이 뛰어났다. 약속장소를 호텔 커피숍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생크림 전문점 ‘비어드 파파’로 바꿨다. 새로 출시한 과일슬러시 제품도 선보일 겸. 야구와 사업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했던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차 드래프트를 포기하고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며칠 전에 삼성동 현대백화점 지하 매장에서 본 조성민은 손수 자신의 제품을 포장을 하는 등 열심히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를 야구선수 조성민으로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컴백 그라운드
‘그에게 묻고 싶다’가 계기가 돼 8년 만에 무대에 선 임갑교씨는 가장 유쾌한 인터뷰 상대였다. 16년 동안 해태 응원단장으로 지내다 대한극장 기술주임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의 사투리는 흥미로웠다. 그런 그가 구단의 요청으로 지난달 28일 잠실 기아-LG전에서 외야 응원단상에 다시 섰다.
“사인해 달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좋아요. 그런데 몇년 만에 다시 하려니까 힘은 드네요”라고 말하더니 7회가 되자 “제 대표작이 ‘아파트’예요. 여기에 맞춰 응원하는 걸 잘 보시라”며 단상으로 훌쩍 뛰어올라갔다.
●내가 묻고 싶은 것
‘그에게 묻고 싶다’는 주로 현재 야구계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지 않는 야구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취재했다. 환한 달빛에 가려 있다고 주변에 별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많은 독자로부터 스포츠서울의 색다른 접근을 격려하는 이메일을 받았고, 때로는 누구의 근황이 궁금하다며 제보도 받았다. 16명 그들과의 만남이 모두 연륜이 짧은 기자에게는 돈 주고도 사지 못할 큰 인생의 경험이었다. 독자들도 같은 생각이기를 바라며 기자는 ‘그에게 묻고 싶다’의 노트북을 잠시 접고, 설레는 ‘가을 잔치‘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