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년~BC 44년)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읽기: 『줄리어스 시저』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etoric)』 기법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의 하일라이트는 제3막 2장 속 시저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이다. 번역본으로 1회독, 영문과 함께 2회독, 영문 원전을 바탕으로 번역본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면서 3회독을 거치면서 3회 모두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etoric)』 기법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줄리어스 시저』에서 연설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은 암살자를 다시 배신자로 순식간에 반전시키는 안토니우스 연설은 순전히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연설이라고 하는데, 시인이자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수사학자 경지에까지 올려놓은 그의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읽은 뒤에 창작에 반영하지 않았나 하는 호기심을 갖고 이와 관련된 두 글을 찾아 함께 인용해 본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etoric)』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수사학은 사회적 출세를 위하여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과 “수사학은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므로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주장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오랜 연구 끝에 『수사학』을 저술하였다. 그는 수사학을 “주어진 경우에 가능한 모든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정의하면서 “이성에 기반하여 설명하고 논증하는 능력”인 변증술(dialectic)과 하나의 묶음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한 요건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말하는 사람의 성격이 믿음직스러워야 하고 [에토스(ethos)], 청중의 심적 상태가 화자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파토스(pathos)], 화자의 주장이 논리적이어야 한다 [로고스(logos)].”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 설득하려는 사람의 성품이나 영향력을 말한다. 말하는 사람이 진실성이 있고 인성이 훌륭한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가 강하다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그의 생각을 수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친한 사람을 응원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파토스는 듣거나 읽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말한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설득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기분이 좋은 상태라면 설득력이 부족해서 수용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못한 상태라면 아무리 훌륭한 논리를 제시하더라도 요지부동일 것이 분명하다. 로고스는 논리 혹은 이성을 뜻하는 말이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이 논리에 맞는지 이성적인 판단에 부합되는지를 따지는데 이것이 로고스다. 논리와 이성에 부합되려면 그에 적합한 증거를 제시하면 된다. 이때 적합한 증거를 잘 찾아내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평소 꾸준한 독서활동을 통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는 공부는 로고스를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그의 스승 플라톤이 감각에 의존하는 에토스와 파토스를 경시하면서 지성에 기반한 로고스를 중시했던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생활에서는 로고스보다 파토스, 파토스보다 에토스가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하면서 변증술과 수사학의 가치를 모두 높게 평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사람들을 말로 설득하는데 있어서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의 순서로 중요하다고 하면서 『수사학』에서 연설의 도입부와 마무리 부분을 논할 때 에토스와 파토스의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 연설의 도입부는 청중들이 나에게 호의적인가 아니면 적대적인가에 따라 그 내용과 구성이 달라져야 한다. 청중들이 대체로 나에게 호의적인 경우 유머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된다. 반면 적대적인 청중들 앞에서는 연설을 시작함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적대감을 약화시키거나 호감을 갖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연설을 마무리함에 있어서는 청중들이 나에게 호감을 갖되 상대방에게는 반감을 가지도록 할 것, 나에게 유리한 사실을 확대하고 불리한 사실을 축소할 것, 청중의 감정적 측면에 호소할 것 그리고 내가 본론에서 제시한 증거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이 중요하다. - 유태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해설」에서 일부 인용, 펜앤드마이크 2. 『줄리어스 시저』에 나타난 설득과 수사 작품은 크게 봤을 때 시저 암살 사건을 둘러싼 브루투스와 안토니 두 인물의 대결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을 지지하는 고결한 정치가로 로마인들의 존경을 받지만 시저가 독재 군주가 될 것을 우려하여 그가 자신의 절친한 벗임에도 그를 죽이는 인물로 재현되어 있다. 안토니는 시저의 측근 장수로 시저가 암살 당한 후 시저 암살파를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인물로 나온다. 두 인물의 대결은 제3막 2장 시저 장례식에서 진행되는 이들의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브루투스는 자신이 시저를 살해한 대의명분을 밝혀 성난 군중을 설득하려고 하고 군중은 그의 연설에 설득당한 것 같은 태도를 보여준다. 뒤이어 안토니가 연단에 오르는데, 그는 시저 암살 사건에 대해 민중들을 설득하여 브루투스 일파에 대항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의 연설 이후 다시 시저와 안토니의 편으로 돌아선다.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이들의 각 연설에는 어떠한 설득과 수사가 나타나 있는지 살펴보자.
'Friends, Romans, Countrymen' Julius Caesar Act 3 Scene 2: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 브루투스의 연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 85년~BC 42년
1) 브루투스의 연설에 나타난 설득과 수사 시저 장례식에서 군중들은 시저를 암살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하라고 외친다. 그 앞에 선 브루투스는 자신이 시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는 시저를 죽인 이유에 대해 ‘시저가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브루투스는 정작 시저가 야심이 있었다는 증거는 대지 못 했다. 그럼에도 그의 연설 이후 시민들은 “브루투스 만세!” (제3막 2장 48)를 외치며 그의 연설에 동조한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수사학적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브루투스가 ‘명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에토스를 설득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논리적 측면에서 거짓 딜레마의 오류 (Fallacy of a False Dilemma)가 시민들을 어떤 상황에 처하게 하는지, 복합 질문의 오류 (Fallacy of Complex Question)가 시민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거두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① 에토스(Ethos)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Rhetoric)』 에서 설득력을 높이는 근거들 중 하나로 에토스를 들었다. 에토스란 말하는 사람의 인품이나 지식 등을 설득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는 사람의 품성이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줄 때,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내용을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브루투스는 연설 도입부에서 “내 명예를 두고 날 믿어 주시고, 날 믿기 위해 내 명예를 존중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가 평소 고결한 품성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던 정치가였음을 감안할 때, ‘명예’라는 단어의 언급은 로마 시민들이 그가 뒤에 말할 연설의 내용을 쉽게 믿도록 만들고 연설의 설득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똑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청중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통해 일반적인 문제 뿐 아니라 확실성이 없고 의심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전적인 신뢰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에토스의 설득력은 브루투스의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② 거짓 딜레마의 오류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력을 높이는 또 다른 근거로 로고스를 들었다. 로고스란 말 자체에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여 설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브루투스의 연설에는 ‘거짓 딜레마의 오류’라는 논리적 오류 (Fallacy; 올바르지 않거나 타탕하지 못한 논증)가 나타나 있다. 원래 딜레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매우 난처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팔관이 막힌 상태에서 임신했을 때, 아기를 살리기 위해 나팔관을 제거하면 산모가 죽고, 산모를 살리기 위해 나팔관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이가 죽게 돼 사람들은 딜레마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거짓 딜레마의 오류는 이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대개는 다양한 선택 사항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선택의 범위를 두 가지 가능성으로 제한하고,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할 때 발생하는 오류가 바로 거짓 딜레마의 오류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라. 그렇지 않으면 독신으로 지내라’는 말을 보자. 세상에는 혼인, 계약결혼, 동거, 조건부적 탐색결혼, 독신 등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선택 사항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과 독신 중 양자택일 하라고 한다면 이는 분명 거짓 딜레마의 오류다. 택일을 강요받는 사람은 ‘왜 둘 중에서만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와 같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브루투스는 연설에서 “여러분은 시저가 죽고 모두가 자유인으로 살기보다는, 시저가 살고 여러분 모두가 노예로 살기를 바랍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 역시 ‘시저가 죽는 것’과 ‘여러분이 노예로 사는 것’, 이 두 가지 가능성 이외에 다른 대안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이 둘 중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므로 거짓 딜레마의 오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왜 이 두 가지 가능성에서 선택해야 하는지,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에 대해 역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들은 로마 시민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 질문은 브루투스가 곤란한 딜레마 상태에서 다른 대안의 부재로 시저를 죽인 거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③ 복합 질문의 오류 또한 이 연설에는 ‘복합 질문의 오류’도 나타나 있다. 복합 질문의 오류는 질문자가 ‘질문 속에 숨겨진 어떤 결론이 참’이라고 전제하여 질문함으로써, 상대방이 질문에 긍정하는 대답을 하든 부정하는 대답을 하든 결국 그 숨겨진 전제를 인정하는 꼴이 될 때 발생한다. 예컨대 “그대는 이제 부인에 대한 폭행을 그만두었는가?”라는 질문을 보자. 이 질문에 “네”하면 “이전에는 폭행을 해왔지만 이제는 그만 두었다”가 된다. “아니오”라고 답하면 “지금도 폭행하고 있다”는 답이 된다. 부인을 계속 폭행해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복합 질문(Complex Question)이기 때문이다. 브루투스는 연설 후반부에서 “노예가 되길 원하는 비굴한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소?”라는 질문을 시민들에게 던졌다. 이 질문에는 “시저가 살아 황제가 됐다면 당신들은 그의 노예가 됐을 거요”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다. 또 브루투스는 “진정한 로마인이 되고 싶지 않은 미련한 자가 이 로마에 어디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 질문 역시 “시저가 살아 황제가 됐다면 그대들은 진정한 로마인이 될 수 없었을 거요”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브루투스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을 비열한 자가 그 어디에 있겠소?”라고 물었다. 마찬가지로 이 질문도 “시저를 살려두는 것은 나라를 위하지 않는 것이오”라는 맥락의 전제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을 예로 들면, ‘시저로 인해 노예가 되는 것’을 전제로 브루투스가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시민은 겉으로 드러난 질문 –노예가 되길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 에만 답하게 되고, 그 결과 브루투스의 주장(전제)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가 초래된다. 브루투스가 마치 시민의 의견을 물은 것처럼 보이지만, 시민은 그의 겉으로 드러난 질문에만 “없소, 브루투스, 아무도 없소” (제3장 2막 35)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사실 브루투스는 저 첫 번째 질문 전에 “시저가 살아 황제가 됐다면 여러분을 노예로 만들지 않았을까요?”라는 질문을 먼저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생략함으로써 시저가 당연히 그랬을 거라고 단정 짓고 있고 시민들도 단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답변을 요구받는 사람이 이 복합 질문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속에 숨겨진 전제를 찾아 단정 짓는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시민은 “시저가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을 거라는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브루투스에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Marc Antony's Oration at Caesar's Funeral by George Edward Robertson 1864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82년?~BC 30년
2) 안토니의 연설에 나타난 설득과 수사 브루투스의 연설이 끝나고 안토니가 뒤이어 연단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로마를 장악한 시저 암살 파(派)에 대해 비판하지 않기로 약속한 상태이고 군중들은 바로 이전 브루투스의 연설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 아래 안토니는 연설을 통해 시저가 야심이 있지 않았다는 내용을 시민들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이미 브루투스의 연설에 마음을 빼앗긴 군중들을 다시 자기편으로 만든 안토니의 연설에는 어떠한 설득과 수사가 나타나 있을까. 이 글에서는 그가 에토스, 로고스, 파토스를 활용해서 주장의 설득력을 높여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로고스를 활용한 생략삼단논법 및 예증법이 사용된 대목을 각각 살펴보고자 한다. ①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안토니도 브루투스와 마찬가지로 에토스를 설득의 방편으로 쓰고 있지만, 그는 브루투스의 에토스를 이용해서 자기의 에토스를 높이는 고차적인 수법을 구사하고 있다. 즉 연설 도입부에서 안토니는 고결한 브루투스가 시저에게 야심이 있었다고 했으니 사실일 것이라며 브루투스에 경의를 표하는 척 하는데, 이것이 자신의 에토스를 높이는 방법인 것이다. 이미 이전 연설에 마음을 빼앗긴 청중을 앞에 두고 브루투스를 비판하거나 시저를 변호했다면 야유나 욕설을 유발했을 수 있다. 다음으로 안토니의 연설에 나타난 로고스와 파토스를 살펴보겠다. 로고스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말 자체에서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증명하는 것이고, 파토스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여 그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다. 연설에서 안토니는 자신이 봤던 시저의 살아생전 모습 -시저가 야심을 품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과 시저에게 야심이 있었다는 브루투스의 말을 대조시켜, 브루투스의 주장을 수정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로고스이고,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파토스이다. 파토스 측면에서 보면, 연설 내내 눈물 흘리지 않고 이성적인 어조로 일관했던 브루투스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또 셰익스피어 연구로 유명한 조세프 수녀 (Sister Miriam Joseph)에 의하면, 그가 우는 동안 로마 시민들에게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에 대한 반응이 일어난다. 시민 1. 안토니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소. (Methinks there is much reason in his sayings. -Logos) 시민 2. 가엾은 분! 울어서 저분 눈이 불덩이처럼 빨개졌군. (Poor soul! his eyes are red as fire with weeping. -Pathos) 시민 3. 로마 전체에서 안토니만큼 고결한 분은 없어. (There’s not a nobler man in Rome than Antony. -Ethos) -제3막 2장 108, 115, 116) ② 생략삼단논법 한편 안토니는 “내가 세 번이나 시저에게 왕관을 바쳤지만, 그는 세 번이나 그 왕관을 거절했습니다. 이게 야심이란 말입니까?”라고 말하는데 이는 생략삼단논법을 활용한 표현이다. 생략삼단논법이란 삼단논법에서 두 전제들 중 하나 혹은 결론을 생략한 것으로, 원래 삼단논법이라면 ‘왕관을 거절하는 자는 야심이 없다’(대전제) → ‘시저는 왕관을 거절했다’(소전제) → ‘따라서 시저는 야심이 없다’ (결론)라는 식으로 주장을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안토니의 대사에는 ‘왕관을 거절하는 자는 야심이 없다’는 대전제가 생략돼 있어 그의 주장은 생략삼단논법을 활용한 표현이 된다. 그런데 조세프 수녀에 의하면, 이렇듯 하나의 전제가 생략된 생략삼단논법의 경우 청자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생략된 전제’를 자세히 검토하지 않고 성급히 결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 연설을 들은 시민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안토니가 의도한 결론 – 시저는 야심이 없다 – 에 너무나 쉽게 도달하고 있다. 시민 4: 저분 말을 들었소? 시저가 왕관을 거절했다는군요. 그럼 시저가 야심을 품지 않은 게 분명해. (Mark’d ye his words? He would not take the crown, Therefore’tis certain he was not ambitious.) - 제3막 2장 112~113 마찬가지로 “시저는 수많은 포로들을 로마에 데리고 왔으며, 그 포로들의 석방 보석금으로 국고를 채웠소. 어찌 이것이 시저가 야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단 말입니까?”에도 생략삼단논법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보석금을 국고에 채우는 자는 야심이 없다’라는 대전제가 생략돼 있는 셈이다. 이 논법은 ‘생략’으로 인해 청자가 상대방 주장이 확실히 참이라고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런 측면을 극복하려면 생략삼단논법을 사용한 상대방 주장이 논증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한다. 그 구별법은 숨겨진 전제를 찾아서 이것이 보편타당한지 살핀 후 만약 보편타당하다면 논증으로, 그렇지 않으면 단순 주장 내지 오류로 판단하는 것이다. 안토니의 생략삼단논법에서 생략된 전제는 보편타당한 면이 있으나, 반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가령 시민들은 시저가 ‘겉으로 왕관은 거절하나 야심이 있는 자’가 아닌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③ 예증법 또 안토니의 연설에는 위에서 살펴본 생략삼단논법과 더불어 예증법이 나타나 있다. 예증법이란 잘 알려진 구체적인 예를 근거로 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논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구체적인 표현에서는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고 추상적인 표현에서보다 감정이입을 쉽게 하게 된다. 시민들은 안토니가 열거한 예증들이 떠올리게 하는 ‘보석금으로 국고를 채우고’, ‘가난한 자를 위해 눈물 흘리고’, ‘왕관을 거절하는’ 시저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이러한 예증은 안토니 연설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안토니의 연설 이후 시민들은 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 일파를 반역자라고 지칭하고 “반역자는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제3막 2장 205)라고 외치며 폭동을 일으킨다. 이후 시저 암살에 가담했던 자들은 도망치고 결국에는 안토니에게 패배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 언론중재위원회 월차 보고서, 「『줄리어스 시저』에 나타난 설득과 수사」에서 인용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