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인물이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잉글랜드 무대의 왕좌를 탈환하지 못하고 중위권에 머무르던 첼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로만은 첼시를 유럽에서 으뜸가는 클럽으로 재건코자 본인의 두둑한 지갑을 흔쾌히 열었다. '축구의 낭만'에 사로잡힌 거부의 큰 손에 첼시는 순식간에 전통의 강호들을 위협할 정도로 무섭게 성장했지만, 결국 그 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만 본인이 추구하던 '낭만' 그 자체였다. 그리고 첼시가 그에 의해 대격변을 맞이하기 이전에 스탠포드 브릿지에 이 '낭만'을 수놓던 한 남자가 있었다. 100년을 훌쩍 넘긴 클럽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선수로 추앙받곤하는 전설 중의 전설, '작은 거인' 지안프랑코 졸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66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올리에나에서 태어난 졸라는 84년 FC누오레세에 입단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68cm에 68kg으로 축구선수로선 썩 이상적이지 않은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뛰고있는 무대는 전세계에서 가장 거칠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세리에A였다. 하지만 그는 이 타고난 신체적 결점을 기술적 재능으로 극복했다. 짐승같은 수비수들이 왜소한 졸라를 겨냥해 살기어린 태클을 시도했지만, 언제나 그는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이를 피하고 공을 지켜냈다. 그는 작은 체구임에도 야무지게 공을 몰고 상대팀을 향해 돌진했고, 가끔 그가 성공시키는 요술을 부린 듯한 멋진 골은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한계를 느낄 이유는 없어보였다. 그는 89년 이탈리아의 강호팀인 SSC나폴리에서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강팀 나폴리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한명 뛰고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1부리그에서의 생존을 위해 다투던 나폴리는 이 '구세주'의 등장을 기점으로 세리에A의 왕좌를 겨냥하는 강팀으로 급부상했다. 열광적인 나폴리의 서포터들은 마라도나를 향해 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독보적인 활약상으로 이탈리아 무대를 누비며 팬들이 몇년 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스쿠데토를 팀에 선물했다. 당시의 나폴리는 사실상 '마라도나의 팀'이라고 칭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이 거대했다. 그리고 이 마라도나의 후계자로 팀에 입성한 선수가 바로 졸라였다. 졸라는 그의 백업으로 활약하며 팀에 또 한번의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고, 자신과 유사한 플레이로 관중들을 감동시키는 졸라를 향한 마라도나의 애정 역시 각별했다. 마라도나는 걸핏하면 인터뷰를 통해 졸라에 대한 칭찬을 쏟아놓았고, 그에게 직접 프리킥을 가르치는 등 자신의 뒤를 이어 나폴리를 수호하게될 또 한명의 '작은 마술사'에게 신의 재능을 불어넣었다. 이후 졸라가 세리에A 역사에서 미하일로비치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프리킥 골을 기록한 선수로 남은 것에는 이 축구의 신이 그에게 하사한 가르침이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떠났고 졸라는 그의 뒤를 이어 나폴리의 새로운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마라도나의 그늘은 거대했다. 그는 그 누구도 근접하지 못할 충격을 선사했던 최고 중의 최고였고, 졸라가 아무리 요술같은 플레이로 필드를 누빈다한들 그의 영역에 범접할 순 없었기에 나폴리 팬들의 허탈감은 컸다. 하지만 졸라가 그의 공백을 채울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라도나의 수준에 근접하진 못했으나 졸라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할만한 빼어난 재능이었고, 브라질의 특급 공격수인 카레카와 호흡을 맞춰 굉장한 파괴력을 뽐냈다. 그리고 졸라는 나폴리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마침내 조국 이탈리아를 위해 뛸 기회를 잡게되었다. 축구사에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회자되곤 하는 명장 아리고 사키가 졸라에게 아주리 군단의 유니폼을 입혔던 것이다. 졸라는 대표팀에서도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국가대표 경력을 성공적으로 써내려가는 듯 했으나, 놀랍게도 이탈리아가 유로92 본선 진출에 실패하며 메이저 대회 출전은 다음으로 미뤄야만했다.
이후 졸라는 본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해준 나폴리를 떠나 파르마로 이적했다. 파르마는 당시 구단주의 상당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세리에A의 새로운 강호로 떠오르고 있었다. 새 팀은 졸라에게 자유롭게 그라운드를 누비며 창의력을 뽐낼 수 있도록 배려했고, 그는 일약 세계 최고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94년, 졸라는 마침내 미국 월드컵을 통해 아주리 군단의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 대회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과거 나폴리에서 마라도나의 존재 탓에 그가 주인공이 될 수 없었듯,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로베르토 바지오라는 거대한 산이 버티고 서있었다. 특유의 말총 머리로도 유명했던 판타지 스타 로베르토 바지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키 감독의 첫번째 선택이었다. 또 바지오의 파트너로 그가 아닌 시뇨리가 선택되면서 졸라는 자연스레 벤치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월드컵 무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기회는 주어졌다. 나이지리아를 상대로한 16강전에서 이탈리아는 0:1로 끌려가고 있었고 사키 감독은 졸라를 교체선수로 경기에 투입시켜 바지오와 호흡을 맞추게했다. 조별예선 내내 줄곧 벤치를 달구던 졸라로서는 생애 첫 월드컵 경기 출전이었다. 허나 지나치게 열의를 불태운 것이 화가 된 것인지, 졸라는 투입된지 10분만에 레드카드를 받으며 쓸쓸하게 그라운드를 걸어나왔다. 이것이 졸라의 대회 마지막 모습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월드컵에선 씁쓸한 결말만을 남겼으나 이탈리아는 끝내 나이지리아전에서 승리를 거뒀고, 이후 아주리 군단을 총지휘하던 로베르토 바지오가 결정적인 순간 승부차기를 실축한 까닭에 졸라는 다행히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것을 전화위복이라 불러도 될 지는 모르겠으나, 바지오가 비난의 도마에 오른 덕에 아주리 군단의 '10번'도 졸라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그는 국제대회에서의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파르마 유니폼을 입은 졸라는 이후 문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콜롬비아의 에이스 아스프리야와 파르마의 전방을 호령하던 졸라의 맹활약 속에 파르마는 95년엔 유벤투스를 누르고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세리에A의 강팀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졸라에게 다시한번 아주리 군단의 유니폼을 입고 지난 월드컵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가 찾아왔다. 유로96이 개막한 것이었다. 나이가 서른줄에 들어선 졸라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에이스를 상징하는 10번을 후배인 알베르티니에게 내줘야했으나 그가 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될 것임은 자명했다. 이탈리아는 독일, 체코, 러시아와 한 조에 속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첫번째 경기에서 러시아를 꺾으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상승세는 딱 거기까지였다.
체코를 상대로한 2차전에서 이탈리아는 1:2로 석패했다. 기량이 만개한 체코의 파벨 네드베드가 지치지않는 체력으로 필드를 종횡무진 누볐고, 이탈리아는 파상공세를 퍼부었으나 체코의 골문을 더이상 열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졸라는 출전하지 않았다. 1차전 승리를 바탕으로 2차전에서 힘을 뺀 뒤, 3차전에서 난적인 독일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겠다는 사키 감독의 계산이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 계산은 네드베드의 맹활약에 엇나가버렸고, 이탈리아는 1,2차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한 독일과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승부를 벌이게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은 졸라의 손길을 외면했다. 경기 도중 독일의 반칙으로 페널티킥이 선언되었고 졸라가 나섰으나 마치 2년전의 바지오처럼 공은 골망을 가르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맛봤고, 같은 조에서 그들의 탈락에 일조한 체코와 독일은 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2년전 역적이 바지오였다면, 이번 대회의 역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졸라였다. 그렇게 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국가대표에서 멀어져갔다. 또 한번의 아픔을 맛보고 돌아온 파르마에서의 활약상도 신통할리 없었다. 졸라는 파르마가 야심차게 영입한 키에자와 크레스포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고, 시즌 중엔 조기 교체에 유니폼을 벗어던지는 등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파르마에서 그의 운은 다한 듯 보였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굴리트 감독이 이끄는 첼시로의 이적을 선택했다. 당시엔 세계적으로 이탈리아의 세리에A가 가장 인정받는 무대였고, 프리미어리그는 한 수 아래라는 인식이 강했던 까닭에 대부분의 축구팬들이 졸라의 첼시행에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유로에서의 실패 이후 파르마에서도 주전자리를 내주고 기량이 다소 쇠퇴한 그이긴 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 무대를 누빌 실력은 남아있었던 까닭이다. 푸른 사자군단의 유니폼을 입은 졸라는 새로운 환경에 완벽히 적응하며 잉글랜드 무대를 접수했다. 시즌 도중에 첼시로 이적한 까닭에 그는 데뷔시즌에 전체 시즌의 반 밖에 소화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며 제 2의 전성기를 열었다. 25번을 단 졸라는 그야말로 첼시의 주인공이었다. 번뜩이는 발놀림으로 팀의 공격을 지휘했고 마법을 부린 것같은 환상적인 골로 스탬포드 브릿지를 열광시켰다. 그는 첼시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다시금 아주리 유니폼을 입고 조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끝내 기회는 더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엔 델 피에로가 버티고있었을 뿐더러 비에리나 인자기 등 다재다능한 공격수들이 즐비했고, 서른을 훌쩍넘긴 졸라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결국 그는 98월드컵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졸라는 첼시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이긴했으나 뭇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던 시절의 폼을 재현해내진 못했다. 이는 세월의 흐름에 의한 것이라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첼시는 탄탄한 체구에 수준급의 골 결정력까지 장착한 하셀바잉크와 졸라의 전성기를 연상케하는 재능을 선보이던 구드욘센을 전면에 내세웠고, 그렇게 그가 벤치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만갔다. 그리고 리그에서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 첼시를 세계 최고로 변화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클럽을 인수한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등장은 사실상 졸라의 첼시에서의 경력에 찍힌 마침표와도 같았다.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로만의 제국이 되어버린 첼시는 유럽의 빛나는 재능들을 스탬포드 브릿지에 데려왔고, 팀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변화를 거듭했다. 변화된 첼시에 졸라가 설 자리는 더이상 없었다. 첼시에 굉장한 애정을 갖고있던 졸라는 팀에 잔류하길 원했으나 끝내 재계약 협상이 결렬되었고 자신의 고향인 칼리아리로 돌아갔다. 칼리아리에서 10번 유니폼을 입은 졸라는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몸소 입증이라도 하듯 현역생활 말년을 불태웠고, 그의 맹활약을 토대로 칼리아리는 1시즌만에 세리에A 복귀에 성공했다. 그리고 졸라는 그렇게 자신의 고향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졸라가 떠난 후의 첼시는 졸라가 뛰던 시절의 첼시보다 훨씬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세계 최고수준의 클럽으로 도약했다. 하지만 아직도 팬들은 첼시 역사상 최고의 전설로 지안프랑코 졸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졸라가 지금의 첼시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린 축구의 낭만을 스탬포드 브릿지에 수놓았던 마지막 영웅인 까닭이다. 첼시팬들은 앞으로도 25번을 달고 마법을 부리던 작은 거인을 영원히 기억하게될 것이다.
작성 - Phenome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