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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지혜서의 말씀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 개혁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 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
이토록 제 자신을 바치는 일,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천상의 희망으로 시련을 감당하였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1요한 4,10-12)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분의 사랑을 살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 행복이라는 미래의 확고한 희망으로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았으며, 은총과 자비를 입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40년(1784년) 전 초기에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천상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시편 126,5-6)
신앙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을 두고 지혜서는 예언하였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지혜 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 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천주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신앙 선조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 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는 늘어갔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40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세상과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
‘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 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신앙인의 모습은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추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합니다.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날이 안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능력이 없다는 말은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핑계다>
인간이 하느님을 도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분명 인간이 당신을 도울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게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성경에서 다윗은 작은 목동에 불과했으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골리앗 같은 거인을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다윗은 자신의 작은 물매와 돌로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이 이야기는 외형적인 강함이나 능력보다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 주며, 작고 연약해 보이는 존재가 큰일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잔 다르크는 농촌 출신의 평범한 소녀로, 군사적 훈련이나 정치적 권력이 전혀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프랑스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랑은 마중물과 같습니다.
마중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샘이 있습니다.
그 샘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려면 그에 맞는 사랑만 조금 집어넣으면 됩니다.
인간은 무한한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해 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우리를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 안에 ‘망상활동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 가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활동계는 뇌간에 있는 신경 네트워크로, 뇌와 신체 사이의 경계를 조절하고 의식, 주의력,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적으로, RAS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행장에서 쇼핑에 정신이 팔려 시계를 보니 이미 비행기 이륙시간이 지났습니다.
좌석을 배정받고 짐을 부쳤기 때문에 자기 없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주위는 자기 이름이 호명되는지에 집중됩니다.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고 이미 20분 전부터 방송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왜 그전에는 듣지 못했을까요?
망상활동계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오스카 쉰들러가 어떻게 1,100명이나 되는 유태인을 구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발동하자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중엔 자동차와 나치 금배지를 팔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 정도까지의 의지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이게 됩니다.
줄 것이 없었다면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 보다는 ‘오늘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지?’라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정해지기만 하면 능력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의지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젊은 시절,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이 기억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과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깊은 감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내게 수도회에서 좋은 배움의 기회를 주셨으니, 어서 빨리 돌아가서 이 좋으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 특별하고 대단한 성인 돈보스코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열정으로 마구 솟구쳤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마카오에서의 길고 긴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러나 저와는 달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던 고국 땅 조선의 상황은 암담하고 살벌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었기에, 입국 과정은 철저하게도 은밀했습니다.
입국 과정은 소설 몇 권을 써도 남을 정도로 처절하고 위험했습니다.
육로가 꽉 막혀있으니 바닷길을 선택하고, 조각배에 몸을 싣고 건너오다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조선 땅을 밟았지만, 언제나 사람 눈을 피해 산길로, 밤길을 쉼 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숙박을 청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노숙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끼니를 자주 건너뛰니 건강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건강한 장정도 견뎌내지 못할 여행길에 온몸은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피 흘리는 순교 이전에 이미 땀과 일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한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적색 순교자들로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증언하는 백색 순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박해 시대가 지나가면서 순교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순교의 의미, 순교의 개념이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흘림 없는 순교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피흘림 없는 순교를 영적 순교, 백색 순교라고 불렀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의지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간 수도자들, 고행자들,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증거, 증언하는 사람들까지 백색 순교자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종교 자유 이후 많은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순례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백색 순교로 여겼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 역시 순교입니다.”
백색 순교에 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각자 삶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증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비록 피를 흘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증언하는 사람이 되며, 백색 순교자로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 '순교적 삶'>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에 어둠에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 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287장 입당성가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퇴장 성가 역시 두 분의 작품인 <순교자 찬가> 283장을 부르게 됩니다.
오늘 적당한 시간되면 두 성가를 부르면서, 또 다음 시편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면서 순교영성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시편 126,5)
오늘 우리는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지만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은 의무기념으로 지냅니다.
한국천주교회의 18-19세기 100여년에 걸친 박해시기 10000여명 순교자들을 낸 것은 세계 천주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명례방 사건(1785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경신박해(1860년), 병인박해(1866년), 한티 천주교 박해(1868년), 제주도 교난(1901년) 등 무려 1세기 100여년 동안 상상하기도 끔찍한 순교자들의 피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물든 때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박해역사를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말 그대로 순교자들의 한국천주교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현 상황의 매우 위중하고 심각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는데 폭력의 악순환, 전쟁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도대체 앞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후위기만 해도 심각한데 국내외 상황은 여전히 어지럽고 혼란합니다.
길과 희망, 진리와 빛을 잃고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 같습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습니다.
무엇하나 낙관적 징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믿는 가톨릭 신자들만이라도 순교영성을 새로이 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주님의 전사, 진리의 전사, 평화의 전사, 빛과 생명의 전사'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로 구체화되며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의인들처럼 한결같은 내적평화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신뢰와 사랑의 순교적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은총의 선물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축복이 뒤따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기일전 용기를 내십시오.
참으로 이런 은총에 힘입어 제2독서 바오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아 주님 사랑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이 우리를 사기충천하게 합니다.
새삼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고,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하며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모두 순교영성을, 백절불굴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답을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종파를 초월하여 예외없이,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진리의 길 주님 하나뿐이라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길과 희망, 빛과 생명, 진리의 주님을 잃었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요, 무지의 어둠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님을 잃고 자기를 잃은 삶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좀비’와 ‘헛것’의 유령같은 삶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끝으로 제 평생 좌우명 고백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구원은 요란한 구호가 아닌 한곁같은 파스카 삶의 실천으로 성취됩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롭게 와닿은 영적 전의(戰意)를 새롭게 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십자가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괜히 미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 ‘나’를 함부로 한다는 생각 등으로 미워집니다.
다시 생각하면 제게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그냥 밉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 그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멀리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좋지는 않지만, 멀리하지 않는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원망과 미움이 애정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미움이란 감정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아마 모든 사람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봉사자들의 고충을 종종 듣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하소연하시고 그래서 더 이상 봉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심리적 안녕감, 만족감, 행복감, 하물며 엔도르핀이 세 배 이상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타인을 돕는 행위라고 합니다.
봉사 과정에서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도 생길 수 있지만, 봉사에 집중한다면 그런 부정적 감정을 넘어서는 큰 선물을 주님께 받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대로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삶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는 1791년의 신해 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일 만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박해자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미움의 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있었고, 구원의 선물까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사랑에 우리 역시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고 원수를 만들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것처럼, 우리의 십자가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과거 순교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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