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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1일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1,10-17
복 음 :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신학교 교수 신부가 신학교에 막 들어온 신학생들에게 강의할 때였습니다.
커다란 칠판을 가리키면서,
“이 칠판이 하느님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뒤, 신부님께서는 칠판에 점 하나를 찍은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인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칠판 위의 점만큼은 과연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정도 만한 이해만 있어도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 17,2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도의 믿음도 없어서 불평불만의 연속과
하느님 뜻에서 멀어지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분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칠판 위의 점만큼이라도 하느님께 대한 이해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내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처음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사람에게 충격적일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에 왔는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뒤에 이어 오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에 갈라지면서 서로 원수가 된다니요.
이는 무조건 원수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갈라질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반대의 악의 세력은 어떻게 하려고 할까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온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세력이 사랑하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분열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칼을 주실까?
그것은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입니다.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 진 혁명가들입니다.
특별히 '참 행복 선언'인 진복 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2013.11.15)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또한 볼리비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본주의의 물신풍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성 바실리우스의 말을 빌려 돈을 악마의 배설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라과이 방문길에서는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라고 질타하시면서
'인간 얼굴을 한 경제모델 세워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종의 연설을 두고 미국 가톨릭대의 스티븐 쉬넥 가톨릭연구소장은
"교종의 발언은 통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외치는 함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혁명을 위한 칼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칼은 이사악에게 내리친 순명과 결단의 칼이었고,
할례의 칼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칼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칼은 영혼이 꿰 찔리는 고통을 주었고(루카 2,35),
성령의 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이처럼 '칼'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요,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와 이 세상에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저와 세상을 수술하소서!
병든 이 세상과 이 몸에는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하오니,
오늘 저희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희를 살리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지층에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퇴적을 통해서 지층이 아래로 쌓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각 활동으로 융기하는 지층이 있습니다.
지금은 높은 산이지만 그곳이 예전에는 바다였던 곳도 있습니다.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도 예전에는 푸른 숲이었던 곳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는 지층과 화석이라는 흔적을 통해서
지구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몸에도 살아오면서 여기저기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저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어렸을 때 결핵이 제 몸에 머물다 갔다고 합니다.
비자 문제로 건강검진을 받으면 그 지나간 흔적 때문에 가슴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눈썹에는 연탄재 싸움을 하다 맞아 수술한 흔적이 있습니다.
무릎에는 보온병을 열다가 물이 흘러 화상 입은 흔적이 있습니다.
오른쪽 발목에는 골절로 수술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흔적들을 담고서 여기까지 와 준 제 몸이 고맙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도 ‘영성’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시작은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던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잦아들면서 교회는 제도와 성전을 세우면서 외적인 모습이 발전했습니다.
사막으로, 광야로 들어간 은수자들은 제도와 성전으로 채울 수 없는 영성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원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일하며 기도하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은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였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 것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교회의 권위가 무너져갈 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영성으로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나눔의 영성은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몸과 피를 내어 주셨던 모범을 따라 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올 때 이냐시오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 있다.’는 영성으로 교회를 지켰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지혜는 나누고 비움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우고, 쌓으면서 얻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나누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밀알 하나로 남지만
떨어져 썩으면 수많은 밀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참된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밭을 제대로 일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과 교회에 쌓아야 할 ‘흔적’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우는 것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 보살피는 것입니다.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쌓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을 결코 잃지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참 좋은 분, 성 베네딕도
-슬기, 사랑, 섬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오늘은 유럽의 수호자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이자
제 사제서품 3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참 좋은 분을 만나면 마음도 환해지고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 전 전임 아빠스님을 뵙고 왔을 때도 그랬고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던 분들과의 만남도 그랬고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베네딕도와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긴 여운의 향기로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우리 곁에 왔던 성자,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
책을 좋은 지인에게 선물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베네딕도에게도 딱 드러 맞는 말마디입니다.
우리 곁에 왔던 성자, 여전히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아니 주님과 함께 여전히 우리 곁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행복을 주고 있는 듯한 성인입니다.
성인을 기리는 입당송입니다.
“베네딕도는 그 이름 뜻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 생활을 추구하였네.”
어제 저녁기도 시 아름다운 성경 소구 말씀도 그대로 성인의 풍모에 대한 묘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증거자로다.
그는 구름들 사이에 있는 아침 별과 같고 보름의 둥근 달과 같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전 위에 비치는 태양과 같고
영광의 구름에 걸린 무지개와 같도다.”(집회50,5-7)
바로 이런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위기와 혼란에 처했던 5-6세기 유럽을 구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유럽의 수호자 성 베네딕도입니다.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인 성인의 후예인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이후 1500년에 걸쳐 가톨릭교회와 세상에 준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합니다.
방금 부른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요약한 듯한 복음 전 부속가 노래는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풍부하고 흥겨웠는지요!
길지만 내용이 은혜로워 그대로 인용합니다.
정말 성인을 자랑하고 싶은 내용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한 권의 책이라면 성인 삶의 책은
참 ‘내용contents’도 ‘이야기story’도 깊고 풍부해 샘솟는 우물 같습니다.
“새 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 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속에 울리네.
동쪽 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 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세오 예언자고 알도다.
무죄덕행 요셉같고 장래 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속에 우리 인도하소서.”
오늘 자주 불러 보려 합니다.
성인 축일은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성인이 되라 불림 받았으니, 성인이 될 각오를 새로이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걸출한 성인이 없는 요즘 세상이라 탄식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성인이 될 각오를 새로이 하시기 바랍니다.
성인이 되려는 청정욕은 얼마든 좋고 하느님께서도 환영하십니다.
성인의 삶을, 성 베네딕도회 영성을 요약하라면
저는 주저없이 ‘산山과 강江’의 영성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1998.
무려 24년 전 자작 짧은 시詩이지만 이상적인 영성의 요약입니다.
밖으로는 언제나 거기 그 자리 임 기다리는 정주의 산 같은 삶,
안으로는 끊임없이 임 향해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저는 산을 베네딕도로, 강을 프란치스코로 바꿔 읊기도 합니다.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 천년 만 년 임 기다리는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 천년 만 년 임 향해 흐르는 성 프란치스코”
사실 절묘하게 상호보완을 이루는 두 성인입니다.
성 베네딕도회에 속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제 좌우명 같은 고백이기도 합니다.
참 자랑스러운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성인의 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슬기를 추구하라!”입니다.
지혜의 순수한 우리말 슬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슬기란 우리말 이름도 많습니다.
얼마 전 신씨 성의 ‘신난다’ 이름이 참 기발하다 생각했는데 정말 신나게 사는 형제입니다.
오늘 잠언은 한결같이 지혜를 추구하라는 충고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참 지혜로운, 슬기로운 분이셨습니다.
이런 지혜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그래,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 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정말 궁극으로 추구해야 할 바 주님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로 충만한 성 베네딕도의 삶을 요약한 어제 저녁성무일도 시 계응송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베네딕도 성인은 모든 덕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지혜의 대가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하였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둘째, “사랑하라!”입니다.
무지無知에 대한 답이 슬기라면, 허무虛無에 대한 답은 사랑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참으로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사랑의 대가’였습니다.
사랑은 성덕의 잣대이자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입니다.
정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를 보면
무려 38개 항목에 걸친 기적 일화들인데 한결같이 사랑의 기적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기적’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불순한 의도가 전무한 순전히 모두가 성인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신
하느님의 화답으로 이뤄진 사랑의 기적들입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 말씀은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라는 바오로 성인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며칠 전 보자기의 영성을 강조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가방의 영성이 아니라 큰 보자기의 영성을 지니자는 권고였습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을 하나에 담아 묶을 수 있는 것은
정해진 규격의 가방이 아니라 큰 보자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큰 보자기 마음이 되자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셋째, “섬겨라!”입니다.
위로 하느님을 섬기고 좌우사방의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입니다.
믿는 이들의 영성이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입니다.
섬김의 사랑이야말로 참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대가’ 예수님을 닮아 성 베네딕도 역시 섬김의 대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유언遺言과 같은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을 빼다 닮은 성 베네딕도는 자기 제자들의 수도승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했습니다.
평생 한결같이 겸손한 사랑의 섬김의 자세로 살라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또 주님을 섬기듯 형제를 섬기라는 성인의 가르침입니다.
역시 ‘섬김의 학교’에서 평생 배우고 훈련해야 할 섬김의 덕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표적 서비스업인 음식점, 병원, 학교를 보면 그 핵심이 뭔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다음 셋은 서비스업의 3대 필수요소란 것이 제 지론입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여 좋아야 하고,
둘째 사람이 유능하여 실력이 좋아야 하며,
셋째 안팎의 환경이 아늑하고 푸근하여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셋을 우리 수도원과 제자신에 자주 적용하여 점검해 보기도 합니다.
참 좋은 자랑스런 성 베네딕도입니다. 자랑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길이 향기로 남아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부단히 분발의 노력을 다하게 하는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 베네딕도처럼
날로 슬기의 사람, 사랑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사람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자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34,10-11). 아멘.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러운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러운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말씀을 통하여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0-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같은 상을 받는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 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평화 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 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으나,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사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 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 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 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 (40-42절)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