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곧 권력, 조선시대의 시간관념
"오늘 밤 '술시'에 만납시다."
여기서 술시(戌時)는 저녁 7~9시 사이를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술시'가 아니라 '초경(初更)이라고 했다.
낮과 밤의 시간을 표현하는 방법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의 시간 표현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12시진법과 5경법이었는데, 12시진법은 12간지를 이용한 시간법으로 12간지만 알고 있으면 외우기가 쉬웠다.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정시법(定時法)이라고 하는데 계절의 변화와 상관없이 매일 시간대가 똑같다는게 특징이다.
가령 여름의 '묘시(卯時)'와 겨울의 '묘시'는 모두 오늘날의 오전 5~7시 사이로 일정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서는 낮 시간에만 이런 12시진을 사용했다.
밤에는 12시간 대신에 밤을 5등분으로 나눈 5경법(五更法)을 사용했다.
초경을 시작으로 5경까지 나눈뒤, 초경은 초저녁 별이 보이기 시작할 때, 2경은 컴컴해질 때, 3경은 한밤중, 4경은 한밤중이 지난 새벽, 그리고 5경은 별이 지고 먼동이 트기 직전을 말한다.
그리고 초경이 시작되기 전 해는 졌으나 아직 하늘이 훤할 때를 혼각(昏刻), 5경이 지나고 동이 트기 직전을 신각(晨刻)이라 했다.
하지만 5경법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점이 있었다.
여름에는 밤이 짧고 반대로 겨울에는 밤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런 시간법을 부정시법(不定時法)이라고 한다.
유독 밤에 부정시법을 썼던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인지라 밤 시간을 면밀히 나누어 봤자 그다지 유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고대의 로마도 그랬고, 일본의 에도시대에도 그랬고 대부분 전통시대의 국가들에서는 이런 부정시법을 사용해 시간을 나타냈다.
한국과 중국만이 낮에는 정시법, 밤에는 부정시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과거에는 정확한 시간을 어떻게 알았을까?
일반 사람들은 시간의 개념이 없었고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국가에서는 시계장치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고 주기적으로 여러가지 방법을 이용해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다.
동양의 경우 국가가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줬던 것은 농경문화의 전통이었다.
전통시대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 생각해서 하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해서 백성들이 제대로 농사짓고 살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은 황제로써 굉장히 중요한 의무였기 때문에 황실에서는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학을 중시했고 그런 일환으로 시간을 관측하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3천년 전 고대 중국에서 쓰인 사서오경 중 서경의 내용을 보면 1년을 365.25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천문학이 발달해 있었다.
결국 시간을 측정하여 백성들에게 알린 것은 농본주의 사회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진짜 원인은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명확히 하여 통행금지를 시키기 위한 용도였다.
자격루(自擊漏)는 물시계의 최종 진화형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중동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동양에서는 11세기 송나라에 의해 최초로 정밀한 형태의 물시계가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16년(1434년)에 왕명을 받들어 장영실(蔣英實)등이 명나라의 것을 본따 만들었다.
조선의 자격루에서 특이한 점은 쇠구슬을 통해 인형들이 주기적으로 북을 치고 종을 울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경, 3점이라 하면 인형이 북을 두번 '둥둥'치고, 종을 '징징징' 세 번 울렸다.
하지만 자격루의 단점은 겨울이 되면 물이 얼어붙기 때문에 난방이 필요했고 이런 이유로 물 대신 수은을 사용하기도 했다.
시간은 나름 정확했다.
오차가 15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격루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해시계가 있다.
일명 '앙부일구(仰釜日晷)'라고도 불렸는데, '하늘을 바라보는 솥모양의 시계'란 뜻이다.
해시계는 낮 시간과 절기를 나타냈다.
당시 부유한 대갓집 앞마당에도 이러한 해시계가 있었는데 오차는 대략 30분 정도였다한다.
조선시대에는 하루에 2번만 외부에 시간을 알렸다.
그때가 바로 성문을 열 때와 닫을 때였는데 알리는 방식은 종소리를 통해서였다.
이 종을 치는 곳을 '종각(鐘閣)'이라 했는데 당시 종각은 한양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던 중심지에 설치했고, 2경(밤 10시)에 28번의 타종을 한 후 성문을 닫았고, 5경(새벽 4시30분)이 되면 33번의 종을 울려 통금해제를 알렸다.
이렇게 단 2번의 타종으로 시간을 알렸고 2경과 5경 사이에는 철저히 통행금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통행금지의 종이 울리면 성문이 닫힘과 동시에 순라군(巡邏軍)이 도성을 순찰했는데, 만약 이 시간에 돌아다니다가 적발되면 이튿날 아침에 군영이나 포도청에서 곤장을 맞아야 했다.
이때 붙잡힌 시간대별로 곤장의 수가 달랐는데 2경, 4경에 잡히면 20대의 곤장을, 3경에 잡히면 30대의 곤장을 맞았다.
곤장은 주로 회초리로 때렸는데 회초리라해도 살점이 터져 나갈 정도로 아팟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연인끼리 초경 무렵 만나는 약속은 광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물론 순라군에게 뇌물을 주면 무사할수도 있었다.
이러한 통행금지는 지방에서는 없었을까?
춘향전에서 보면 남원과 같은 지방 성곽에서도 종소리를 주기적으로 울려 통행금지를 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도 'curfew'라는 통행금지가 저녁종이 울리면 사작됐다.
일본에서도 밤이 되면 야경꾼이 쇠막대기로 바닥을 치며 통금시간을 알렸다.
종각에서 치는 종소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도성 모든 지역에까지 들릴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병사들이 달려가서 백성들에게 구두로 알려주곤 했다.
중종 때에는 종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남대문, 동대문, 종각 등 3군데에 종을 설치하여 울리기도 했는데, 하지만 나중에 중종은 종각의 종 하나만을 치게했다.
종소리가 너무 산만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시대의 권력자들은 휴대용으로 시계를 지니고 다녔다.
나침반이 달린 해시계였는데 한 곳에 고정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침반을 이용해 방향을 알아낸 후 시간을 측정했다.
일반 서민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시계는 동물의 울음소리를 듣고 시간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특히 닭의 새벽 울음소리는 나름 정확했던 이유로 시간을 알아내는데 많이 이용됐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일출과 무관하게 생리적 현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중구난방일 수 있지만 새벽시간을 통제하는데에는 유용하게 이용됐다.
때문에 매일 조정으로 출근하는 관료들은 수탉의 울음소리는 곧 시계였다.
해가 있는 낮에는 해시계를 이용했지만 해가 진 밤이 되면 해시계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러한 밤에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이용했다.
바로 북극성과 그 주위를 도는 북두칠성으로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두칠성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느 계절이든 밤새 지켜보면 네 개의 위치 변화 중 세 개는 볼 수 있기 때문에 아쉬운대로 북두칠성의 위치를 보고 대략적인 시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국가행사였던 과거시험장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확인했을까?
과거 시험장에는 '주시동'이라 하여 시간을 알려주는 어린아이가 과거장에 돌아 다녔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일반적으로 아침에 시작해 저녁까지 행해졌기 때문에 특별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각척시'라는 제한된 시간안에 문제를 풀어야 하는 과거시험도 있었다.
각척시는 초를 세워놓고 불이 다 탈 때까지 답안지를 제출해야 했다.
문과 시험은 과제를 놓고 그에 답하는 형태였지만 무과 시험은 시간 측정이 반드시 필요한 시험이 많았다.
당시 달리기를 측정해야 했는데 오늘날처럼 초시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구멍 뚫린 물통에 물을 채운 후 출발과 함께 물을 비우기 시작해 줄어든 물의 양을 측정한 뒤 누가 가장 많이 달렸는가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