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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대학을 진학할 때만 해도 미술대학이나 국문과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때도 이미 씨앗 하나쯤은 바람결에 날아오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졸업 후 과학교사로 재직할 때, 미술선생이 그리던 난이나 대나무를 함께 그려보기도 하고, 결혼 후에는 혼자 식탁 위에서 글을 쓰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그림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몰랐다. 국문과나 미대를 가지 않았던 걸 이토록 아쉬워하게 될 줄은. 그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등단이란 걸 하고부터는 전공하지 않은 국문과를 동경하게 되었고, 재미삼아 그리던 그림들이 미술 공모전에서 연이어 큰 상들을 받게 되자 그때부터 미술대학이 또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맘을 먹었다. 울산의 모 대학교 미대에 편입해 보기로. 그런데 가족들 외에는 주변사람들 대부분이 회의적이었고, 면담했었던 그 대학의 교수조차도 편입은 가능하나 나의 나이를 들먹이며 신중하게 고려해 보라고 했다. 봄에 피어난 새싹이 밤사이 된서리를 맞은 꼴이 되었다.
옛날 새댁 시절, 경주에 K대학교 한의대가 처음으로 생겼다. 편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한의사를 꿈꾸며 맘을 내었다. 그런데 남편은 “애들이 아직 너무 어리니 이삼 년만 더 키워놓고 다니면 안 되겠느냐”고 했고 나 또한 그 정도는 미뤄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결국 때늦은 후회만 남았다.
그래서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이 나이에 젊은 애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지금이 나의 일생에서 마지막 시도일 것 같아 더는 머뭇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세상일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집안에 예상치못한 일이 생겼고, 주부이자 어머니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미대편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나이에 미대를 다녀서 뭐 하겠나.”
그로부터 2년이란 세월이 정말 책장 넘기듯 쉽게 넘어가 버렸다. 그때 편입을 했더라면 지금쯤 이미 졸업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는 세월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ㅊ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C대학교 울산캠퍼스에서 미술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ㅊ교수의 권유는 마치 준비된 파티의 초대장 같았다. 화려한 파티복도 없고, 타고 갈 황금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보고 싶었던 길이었기에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대충 둘러봐도 내 나이가 제일 많아 보였다. “몇 살이세요?” 그중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대답하려고 입술을 내미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다. 갑자기 내 나이가 너무도 부끄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어 오른손을 내밀어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였다. “어머~ 사십다섯! 나보다 두 살 언니네. 그쯤 돼 보였어요”
여태껏 살면서 나이가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근데 그날은 왜 그랬을까. 그 나이 될 때까지 여태 뭐 했냐고 핀잔하는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시작이 늦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다. 곰곰이 그날을 생각해 보면 단지 그들보다 나이가 많아서 남은 미래가 짧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들이 삼십이 되고 사십이 되어 전성기를 구가할 때쯤이면 나는 이제 곧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어 전성기는커녕 머잖아 사라질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언니 생각이 났다. 언니는 나이가 나보다 일곱 살이 더 많다. 그래서 같은 삼십 대였을 때도 내가 33세가 되면 언니는 40대가 되었고, 내가 40대로 넘어가도 3년 후면 언니는 또 혼자 50대로 훌쩍 넘어갔다. 그렇다 보니 언제나 나보다 7년을 앞서 살아본 언니는 세월을 건널 때마다 10년 단위로 그 소회가 달라졌다. 언니가 막 사십 대로 접어들었을 때다.
“이모야(언니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여자 나이 사십이면 눈먼 새도 안 돌아본대” 그러면서 젊은 시절 다 지나갔다고 한숨을 쉬더니 오십 대가 되자 “이모야, 살아보니 사십도 괜찮더라. 오십을 넘어봐라. 완전 달라” 눈먼 새도 안 돌아본다며 멸시하던 사십 대도 오십에서 바라보니 아직도 청춘이더라며 ‘니는 아직 괜찮다’라고 하더니, 별볼일없다던 오십 대도 육십이 되고 보니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며 그때도 역시나 언니는 ‘니는 아직 괜찮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랬던 언니가 이제 칠십을 넘기고 나니, 좋은 줄도 모르고 살았던 육십대가 인생에서 최고로 멋진 때였다고 회상한다. 아마도 내가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어도 ‘이모야, 그래도 니는 아직 괜찮다’라고 할 것 같다.
지금 와서 마흔다섯 살이 많다고 부끄러웠던 그때를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난다. 부끄러움은 그때 잠시였을 뿐, 나이도 잊은 채 밤낮없이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하지만 어두운 길에서 갈증은 더 깊어만 갔고 대학원에 가면 해결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길은 결국 내가 찾아야 하는 길이었다. 지금도 매번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거나 길이 막혀 걸음을 주춤거린다. 그럴 때면 늘 나보다 세월을 먼저 살아가는 이의 말에 힘입어 다시 한번 어깨 펴고 나에게 주문을 걸어 본다.
“그래, 너는 아직도 괜찮아.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