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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 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
(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와 자비'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 5,44-46)
이렇게 말씀하신 바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을 하여(느헤 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 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13) 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을 드린 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8-9)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오른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는 확답을 들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자비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넘어 뿌리를 다스리시고,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밉살스러운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로마 13,8 공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초대받았고,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 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를 기억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오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 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방임주의 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1)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마태오도 갑작스럽게 응답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부 출신 사도들의 경우처럼,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눈여겨보시다가,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곧바로’ 응답하지 못합니다.
서품식 때의 서약 예식을 보면, “원합니까?” 라는 질문들과 “원합니다.” 라는 답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서품 대상자들은 그 전에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지를 엄격하게 심사 받는 과정을 거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페 1,3ㄴ-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갑자기’가 없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하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받은 ‘부르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갈라 1,15-16ㄱ)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부르신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로 보이긴 하는데,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심의 은총’이 작용했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 자신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사도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3)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은 직업과 낡은 인생을 버리고 ‘새 인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부들처럼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렸다면,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루카 5,29)를 베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태오 사도가 모든 것을 버린 때는 잔치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였을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집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사람의 내면은 보지 않고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만 자꾸 강조하는 이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병든 이들’이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는 의인이냐?” 라고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셨고, ‘모든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라” - 중심, 방향, 일치의 공동체>
저는 언제나 기상하면 만세칠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가장 좋은 기도, 만세칠창을 작년 8월15일 광복절 이후 시작했으니 1년이 훨씬 넘었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칠창 후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세상을 들여다본 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통해 가르침을 배웁니다.
국제 가톨릭 학생 모임의 회원들을 만나 주신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여정중에 있는 순례자들로서 주 예수님과의 더욱 깊은 일치에로 불림받고 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도 성 마태오가 주님께 불림받고 있는 장면이 잘 드러납니다.
당대 세리라 하면 죄인처럼 사람 취급 못받는 아주 무시당하던 신분이었습니다.
바로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오가 그런 신원의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후 길을 가시던 길이신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는 갈망의 사람, 마태오를 첫눈에 알아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바, 그의 과거나 신분이 아닌 그의 내면의 당신을 찾는 순수와 열정, 갈망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마태오의 운명적, 축복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정관념이 없고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고 실상의 본질을 직시하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찾는 갈망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을 따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세리 마태오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런지요?
한두번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당대 제자들이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버림의 여정’이자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았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은 마태오이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또 주님께 부름 받은 세리 마태오는 '혼자'의 삶에서 '더불어'의 제자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듯이, 우리 또한 주님께 불림 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포함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네 제자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참으로 바리사이의 무지를 반영합니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일뿐임을 까맣게 모른 무지한 바리사이였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복음 중의 복음이요 참 명쾌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며 제자들의 공동체의 성격이 환히 드러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의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건강하고 의인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라 불림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병없고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요, 자비로운 목자이자 의사이신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용서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신한 바오로의 말씀이 그대로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은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길다 싶지만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말 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일치입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다양성의 일치요 상호보완의 조화의 일치입니다.
바오로가 강조하는 중심의 '하나'가 일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시고,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서로 좋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중심 방향이 같아서 일치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보다는 중심의 주님께 부단히 맞춰가며 각자의 책무에 충실할 때 저절로 다양성과 조화의 일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아름답고 성숙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이며,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교황님은 “미사는 하늘을 향한 고속도로다(Eucharist is the highway to Heaven)”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여행을 가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면허증,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은 매일 강론을 준비하기에 가지고 다닙니다.
노트북을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가끔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노트북은 작은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인터넷을 무선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비행기 모드에서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저의 실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사목회 총무님이 친절하게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총무님이 알려주는 대로 노트북을 작동하니 비행기 모드가 풀리고,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은사가 다양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총무님처럼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치 있는 말과 따뜻한 말로 모임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철저한 준비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는 친절한 이웃을 보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헤밍웨이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고,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헤밍웨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가 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쓰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저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고, 제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소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들의 고통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위대한 작가인 헤밍웨이처럼 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 마태오 사도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선포자로,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실 겁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유명했던 건배가 있었습니다.
이 건배사를 술집만 가면 쉽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였습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는 남이 아닐까요?
아무리 같은 직장, 같은 성당, 같은 단체에 있다고 해도 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나 외에는 모두 ‘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이 아니니, 뜻을 같이 하고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독선적인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나와 네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 안에는 ‘다름’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사람으로, 나의 적 또는 원수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종종 이상한 항의를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다름을 왜 인정할 수 없는지, 여기에 자기 말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면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서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모습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반성합니다.
‘나도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보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구호를 외쳐보면 어떨까요?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로 당시의 모든 유다인은 세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태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기 집에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그 역시 어떤 판단 없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 곁에 예수님도 함께 계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간주한 죄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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