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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세계 배낭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3
한반도 가야인들의 일본 건국과 신라인 천일창과 연오랑!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한반도인들이 건너가서 일본을 세웠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우쭐댈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열등감을 느낄 일도 아니니.... 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이후 일본인으로 되었고 현재의 한국인들과는 다르기 때문” 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을 건국한 세력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반도 이주민인 이유는..... 2천년전 한반도인들이 청동기
와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건너가 야요이문화를 일굴때,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들은 신석기시대로
벼농사를 모르고 열매 채집과 밭농사 및 수렵과 어로에 종사하던 부족사회 단계였기 때문 입니다.
BC 3세기부터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야요이문화를 일으켜 규슈에 수십개의 왜 소국을 세운후,
4세기에 김해가야인들이 저 왜 소국들을 통합해 야마토 왜국을 세운 것으로 봅니다만..... 백제인
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 을 주장한 도쿄대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만주의
부여족으로 남하한 비류 백제로 보는데.... 이번 글에서는 신라인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는 도쿄 대학(東京大学) 교수로 1948년에 「일본 민족 = 문화의 원류(源流)
와 일본 국가의 형성」 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説)을 발표했으니, 「일본의
통일국가의 출현과 야마토 조정(大和朝廷) 의 창시는 동북아시아의 부여(夫餘) 계통의 기마민족
이 세운 진(辰) 왕조에서 비롯되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에 달성되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는 아마테라스 여신의 자손이 지상에 내려와 일본을 건국했다고 믿으니....
다카마가하라(하늘)에 있던 오쿠니누시신도 자신의 궁전 건설을 해주는 조건으로
나라를 양보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 궁전은 후일 이즈모타이샤(출운대사) 가 되며,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는 아시하라나카쓰쿠니 평정을 위해 규슈 휴가에 강림합니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가 하늘로 부터 남규슈 다카지호다케 (高天穗岳 고천수악)
구시후루봉에 내려왔다고 하는데.... 근처에 가라쿠니다케 (韓國岳 한국악) 가 있으니, 곧
“구시후루” 는 김수로왕이 김해 “구지봉” 에 내려왔다는 건국 신화를 차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니니기가 땅에 강림한 후 “이곳은 한국(韓國) 이 보이니 좋은 땅이고 가사사의 곶
과도 통하여 아침해가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라 말하고는 반석에
기둥을 세우고 궁궐을 지어 살았다“ 라고 말한 것이나..... 북쪽의 가장 높은 산
이름을 가라쿠니(韓國岳 한국악) 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가야 사람" 이라는 뜻 입니다?
규슈 가고시마현 북쪽 미야자키현의 경계에 에비노고원이라고 불리는 기리시마(霧島 무도) 다카지호다케
(高天穗岳 고천수악) 북쪽에 최고봉 가라쿠니다케(韓國岳 한국악) 는 왜국으로 이주해 온 김해 가야인
들이 자신들의 고향땅이 바라 보이는 산이라고 해서 가라쿠니다케 韓國岳(한국악)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문자가 없었던 고대 한반도는.... 자기 고유 글자가 없으니 오래토록 말로만 지명이 전해지다가 훗날 적국인
원수의 나라 중국에서 한자가 전해지니, 가야를 뜻하는 말은 가야(加耶·伽耶·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한(韓)으로 썼으니 모두 같은 뜻으로 가야 = 가라 = 한(韓) 입니다.
일본 원주민은 조몬인이니 BC 3000년경부터 BC 4세기 까지 신석기시대 문화로 토기의 표면에 새끼줄 형태
의 무늬가 있어 붙여졌다는데.... 한반도인들이 BC 3세기경부터 청동기와 벼농사를 가지고 건너와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들을 정복하고 동화시켜 야요이 문화를 이루고 두 민족이 혼혈한게 왜인(倭人) 으로 봅니다.
제럴드 다이아몬드 는 퓰리처상 수상작 "총,균,쇠" 증보판에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 를
수록했으니... 2,000년전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등 선진 농업기술을 가지고 이주한 한국인
이 일본인의 조상이며 고고학, 분자 생물학, 인류학과 언어학 연구를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자 DNA” 가 거의 같으니...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같다고 했습니다.
오사카대 고하마 모토쓰구 교수는 1949년부터 수만명 유골을 조사했으니 이른바 일본인의 원류를 밝히기
위한 프로젝트인데... 그 결과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과 한반도 도래인의 비율이 “1: 8.6” 이라고
밝혔으니, 오늘날 일본인의 피 속에 원주민인 “조몬인의 비율은 겨우 10%” 라는 이야기 인데.....
이는 조몬인들이 신석기문화로 벼농사를 모르니 생산력이 극히 낮은지라 숫자가 아주 적었기 때문 입니다.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원주민인 조몬인은 3%~13% 를 차지하고 한반도 도래인인 야요이인
은 87%~97% 를 차지하는데..... 특이한 예로는 홋카이도 아이누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는
조몬인은 66~79% 를 차지하며, 그 다음 오키나와 류큐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조몬인은 27% 이니
한반도에서 온 사람인 다수의 야요이인이 소수인 일본 원주민인 동북쪽으로 밀어낸 결과로 보입니다?
3세기 중엽에 갑자기 언덕 꼭대기에 전방후원분 형태의 수혈식(竪穴) 석실인 거대한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
하였는데 한반도로 부터 도래 집단(나주 및 김해가야) 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으니, 금관의 장식인 곡옥
등이 발굴되며 그후 고분은 평야지대에 흙을 파서 산처럼 보이는 봉분을 만들고 해자를 두른 양식으로
“경주 왕릉의 무려 10배” 에 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규모의 횡혈식 석실형태의 고분이 축조됩니다.
국립광주박물관이 2021년 봉분 길이 82m, 높이 9m 로 경주 황남대총 보다도 훨씬 큰 해남 장고봉
고분을 발굴했는데 무덤 양식이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듯 똑 같은 얼개등 왜계 무덤 구조를
갖고 있고..... 2차례 도굴되어 부장품은 적지만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에 철제 갑옷등 무기류
가 묻혔으니 부담을 느껴 발굴을 중단하고 급히 무덤을 덮어버렸는데, “임나 일본부설의 근거”
로 삼을까 걱정되었겠지만..... 그보다는 이들이 건너가서 일본을 세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계의 “이세의 신사” 외에 스사노오의 “이즈모대사” 도 일본에서 두번째
큰(오래된) 신사로 모시는 것으로 봐서 두 계열이 합쳐졌다고 보는데.... 즉 가야계인 아마테라스신의
후손과 신라계 스사노오신의 후손이 싸워 가야계가 신라계를 흡수해서 일본을 건국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늘나라(한반도?) 타카마가하라(高天原 고천원) 에서는 스사노오신( 素戔鳴尊) 이 아마테라스 여신
(天照大神)의 벼 논을 짓밟고 주거에 똥칠을 하자 수치심을 느낀 아마테라스 여신이 동굴에
숨어버리자, 신들이 스사노오를 하늘나라에서 일본 열도 서쪽 바닷가 이즈모(出雲) 로 추방 합니다.
그러자 스사노오는 바다를 건너가서는 한반도에서 용의 꼬리 속에 감추어진 쿠사나기 검
(草薙の劍 초치노검) 을 가져왔으니... 일왕(천황)의 3종 신기 중에 하나이며 다이코주신
大國主神 스사노오를 모시는 신사가 시마네현 이즈모시에 있는 이즈모대사(出雲大社) 입니다.
스사노오 는 이즈모대사의 대국주신으로 또 교토 기온 마쓰리 에서 모시는 주신이 되었으니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이어온 교토 야사카신사 의 기온 마쓰리 는 역병 을 물리치기
위해..... 저 무력의 신인 스사노오의 창을 가마에 모시고 행진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일왕인 초대 진무왕(신무천황) 과 10대 스진왕(숭신천황)은 같은 사람이며 2~ 9대 왕은
일본서기에서 건국 연대를 올리기 위해 만든 가공 인물로 보는데.... 고 최인호씨는 김해
대성동 15호분 주인공이 가야왕으로 일본에 가서 왜소국을 통합한 스진왕 이라 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진무왕은 규슈를 출발해 세토나이카이를 거쳐 오오사카에 상륙해 나가스네히코
와 싸워 굴복시킨후, 동쪽 가시하라에 야마토(대화 大和) 조정을 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10대 스진왕(崇神 숭신천황) 의 후손으로 15대 오진왕(應神 응신천황)이 아닐까 합니다.
삼국사기와 광개토 대왕 비문에 서기 391년 부터 왜군이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해 서라벌을 포위하니
1차는 격퇴했지만.... 399년에 김해가야군과 함께 서라벌을 재 포위해 함락 위기에 처하자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노객이 되겠다며 구원을 요청하니, 5만 고구려군이 남진해 김해 종발성을 함락하자
왜군과 가야인들은 왜국으로 달아나는데 391년이란 연대로 보면 왜국왕은 오진(응신)으로 여겨집니다.
“일본서기” 에 따르면 진무왕은 동쪽에 아름다운 땅이 있어 푸른 산맥이 4바퀴에 걸쳐 형성된, 천하를
다스리기에 어울리는 토지이니 정벌해야 한다면서 동쪽으로 진군했으니 진무동정(神武東征) 이라고
하는데 츠쿠시(筑紫)의 우사(宇佐)로 부터 키비(吉備 오카야마)의 타카시마궁(高島宮)에 도착해 3년간
군사와 무기를 준비해 나니와(오사카) 곶(岬)에서 가와치의 오쿠모(青雲) 나루터에 상륙하려고 했습니다.
진무가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서쪽인 키비(吉備) 땅에서 3년간 전쟁을 준비했다는 말인데,
정벌 후에 나라현 가시하라에 야마토(대화) 조정이 세워진 이후에도 이에 불복하는
나라가 규슈 남부 구마소(응습)이며..... 저 키비국은 처음에는 야마토에 협조하다가 뒷날
야마토 조정에 대항하니 조정이 장군을 보내 토벌하기도 하는데 거대한 고분들이 현존합니다.
야마토(大和) 조정에서 키비츠히코노미코토 (吉備津彦命) 가 이끄는 군대를 파병해 키비(吉備)국
을 토벌한 전쟁은 그후 모모타로(桃太郞 도태랑) 가 오니가시마(키비국)에 사는 악한 도깨비를
물리치러 가게되는 이야기로 전하며, 오카야마에서는 8월 7일에 우라(溫羅) 라고 하는 귀신을
격파한 이 모모타로(桃太郞 도태랑) 이야기를 재현하는.... “우라쟈 溫羅じゃ 마쓰리가 열립니다.
하지만 그 땅의 대호족 나가스네히코(長髄彦 신라계?)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아 후퇴했는데...
이때 맏형 이츠세(彦五瀬命)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진무는 태양신의 자손인
우리가 태양이 뜨는 방위를 공격한 것이 좋지 않았다며 후회하고는, 바다로 나가 동쪽으로
우회해서 키이(紀伊) 쿠마노(熊野 미에현) 에 상륙하여 서쪽인 카마야마(竈山)로 진군합니다.
하지만 군사들은 규슈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지리에는 익숙하지 못해 금새 길을 잃어
버리고 말자 하늘의 카모타케츠노미는 곧바로 다리가 3개 달린 까만(혹은 붉은)
까마귀 야타가라스의 형상으로 나타나 동정군의 머리 위로 춤추듯이 내려갔으니.....
진무는 희한한 까마귀를 신의 사자라 확신하고 뒤를 쫓아 무사히 산을 넘을수 있었습니다.
동정군은 요시노(吉野)와 우다(宇多)를 거쳐 야마토(大和)까지 쳐들어가 숙명의 라이벌 나가스네히코와
다시 대립했으니 양자의 싸움은 태양신의 후손과 긴키(교토) 일대를 다스리는 패자(覇者)의 대결
이었으니, 하늘에서 황금빛 솔개(킨시)가 날아와 번갯불과도 같이 빛을 비추자 나가스네히코의
군사들이 눈이 멀어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쳤다는데 저 나가스네히코는 신라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발이 셋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 가 고구려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무왕의 그림에 보이는
삼족오가 당황스러울법 하겠는데.... 각저총, 오회분 4호묘, 덕화리 1,2호 고구려 고분벽화에 달 신 여와와
태양 신 복희가 나오니 복희씨가 들고 있는 것이 삼족오(三足烏) 로 태양 안에 세발 달린 검은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희씨는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 삼황에 속하는 신화적인 인물로, 삼족오는 복희씨
말고도 한나라 벽화에는 발이 3개 그리고 장사의 마왕퇴 유적에는 둘인 검은새로
나오는데 저 오(烏) 자 때문에 흔히 까마귀로 알지만 그냥 검은새 라는 뜻으로.....
태양조(太陽鳥) 라고도 불리니 중국에서 한자와 함께 전파된 우주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1977년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우표에 “해뚫음 무늬 금동장식품” 디자인이 있는데 진파리
7호 무덤에서 나온 삼족오를 디자인한 관모이며 삼족오는 인디언이나 마야문명에도
보이는데 전투후 까마귀가 나타나 시체처리를 하니 중국은 흉조로 보았지만...
일본은 길조로 보았으니 현재 일본 축구협회의 상징이며 일본 건국 신화에도 나옵니다.
하지만 진구왕(神武 신무)은 10대 스진왕과 같은 인물이고(2~9대는 연대를 늘리기 위한 가공의 인물)
실제로 야마토를 건설한 왕은 일본의 제15대왕(천황) 인 오진(응신) 으로.... 그가 일본 최초의 천황
(일왕)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제10대 스진 덴노와 마찬가지로 시호에 '신'(神)자가 들어가는데 제14대
주아이 덴노의 4남으로 어머니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氣長足姬尊), 즉 진구황후(왕후) 입니다.
그리고 훗날 백제인들이 건너가 나라현의 아스카 조정(야마토 大和)에 참여했으니 백제 신하로 일본
으로 건너간 목만치(木滿致, 木協滿致, 소가노 마치 蘇我 満智) 의 후손들인 소가(蘇我) 씨들은
외척으로 일왕(천황)을 세우고 폐위시키며 죽이기도 하는등 권세를 농단하는데... 달리 동해(일본해)
를 건너가서 시마네현 이즈모와 돗토리현에 후쿠이현 남부 쓰루가에 정착한 신라인들이 있었습니다.
후쿠이현 최남단인 쓰루가 敦賀(돈하) 에는 고대에 호쿠리쿠(北陸 북륙) 지방을 수호하던 신사인
게히진구 氣比神宮(기비신궁) 가 있는데.... 이 항구 도시는 한반도와 인연이 깊으니 존 코벨
의 '한국문화 탐구' 에는 1천 6백년 전에 쓰루가에 상륙한 한국인 의 자취와 신공왕후
(신라인) 와 '용감한 큰 곰 다케치우치노 쓰고네 (武內宿 무내숙)' 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 학자인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 은 당초 일본 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이후 일본문화의 원류인 한국문화에 주목해 1978년부터
8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문화에 관한 수많은 글을 썼으니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 업적은 일제시대 한국문화를 일본에 알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한국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로 한일 고대사, 한국미술, 불교, 도자기 등에 대한 1천여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조선호텔 70년사’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영문저작을 냈으며 일본문화와 미술에 관해서도 16권의 저작
이 있으니‘대덕사의 선(禪)’, ‘일본 선정원 연구’, ‘잇큐(一休)선사 연구(선 미술)’ 등이 꼽힙니다.
코벨은 일본 3대 신사로 아마테라스여신의 이세 신궁과 한국땅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해 스사노오
를 모시는 이즈모 신사에 나라현 텐리시의 이소노가미(石上)신사를 들면서, 부여왕족(백제) 혈통의
여걸 왕녀 신공(神功)이 이끈 일단의 기마족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와 점령후 선진
문명과 기술을 전파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신공을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거꾸로 기술했다고 말합니다.
그외 미국인 최초로 한국사(은둔의 나라 한국 隱遁一韓國, The Hermit Nation Corea) 와 일본사 를 쓴
윌리엄 그리피스 도 1880년대에 후쿠이현 남부 쓰루가에 오게 되었는데.... 그리피스가 쓴 책의 앞부분
에는 어떻게 해서 바다 너머 들리는 명랑한 종소리를 알게 됐으며 그곳에 애초 부터 있던 두 개의 무속
사당이 신공왕후와 그 휘하 장군 다케우치노 쓰고네를 받드는 신토 신사 로 바뀌었는지가 쓰여 있습니다.
다케치우치노 쓰고네 (武內宿)는 ‘용감한 큰 곰’(712년에 편찬된 고사기를 영역한 도널드 필립은 무내
숙미를 용감한 늙은 곰으로 해석했으며 윌리엄 그리피스는 다께치우치로 썼다.) 이란 의미로
이름에 내포된 고마, 혹은 곰 이란 말은 조상이 부여 ~ 고구려 사람 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 땅에서 출토되는 토기 유물엔 그 자취 가 남아있으니..... 서기전 200년경 부터 서기
250년 사이에 만들어진 야요이(彌生) 토기를 보면 한반도에서 쓰던 물레와 회전판
이 비로소 수입되어 쓰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한국 부산 근처 고분에서
출토되는 김해 토기와 같은 경질 토기의 제작 기법도 이 무렵에 들어왔다고 여겨집니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스에끼(須惠器) 토기는 고령 일대에서 출토되는 한국 가야토기의 완전한 복제품 이며,
가야 토기는 부산대 박물관과 김해 박물관에 훌륭한 소장품들이 많으니 긴 목과 나팔꽃 처럼 퍼진
밑바닥, 귀신이 제기에 접근하는 세모 네모 또는 다른 모양의 가파른 수직상태로 뚫린 구멍들이 보입니다.
이런 구멍은 받침대에 숯을 넣고 그릇의 음식을 데울 때 공기가 통하도록 하는
환기창 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현대의 신선로 그릇 받침대를
보면 명확해 지니..... 김해토기와 일본의 스에끼 토기 모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공왕후와 다케우찌가 왜를 정벌하러 올 때 전사들만이 아니라 도공들도 동행해 온 것이니, 전쟁이 나면
통치자들은 전쟁에 임하기 전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기용 토기를 빚었으니....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토기형태를 통해 구체화된다고 코벨이 지어 1986년에 발행된 ‘한국 도자기의 세계’ 에 나옵니다.
동해(일본해) 바닷가 이즈모에서 쓰루가 까지는 신라인들이 도래한 땅이니..... 일본서기 6권에
"活目入言五十 狹茅天皇 垂仁天皇 (활목입언오십 협모천황 수인천황)" 라고 하는
기사가 나오니.... 일본은 BC 660년에 건국 됐다고 하는데, BC 2333년에 건국됐다는
고조선 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연대는 과장됐으니 아래 연대는 몇백년은 내려서 보아야 합니다.
660년 백제가 망하자 왜국의 사이메이 여왕은 일본에 수십년째 인질로 있던 풍왕자에게 왜병
5천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왕을 잇게 한후, 임시 수도를 후쿠오카로 옮기고는 1천척
배에 2만 7천 왜군 구원군을 보냈으나 금강 하구에서 당군의 화공에 패해 후퇴한 후에는
국호를 왜국에서 일본으로 바꾸는데....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은 전혀 다른 글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조선(朝鮮)의 朝(조) 는“아침 조” 이고 鮮(선)은 “고울 선” 이니 “빛나다, 선명하다” 는 뜻으로
아침 해가 비치는 나라를 뜻하며.... 일본(日本)의 日(일)은 “날 일” 자로 해를 뜻하고 本(본) 은
“근본 본” 자로 뿌리를 뜻하니 “해의 뿌리” 라.... 그럼 해뜨는 곳, “해뜨는 나라” 라는 같은 뜻 입니다.
신라 천일창에 대해 말하자면..... " 기원전 27년 : 3년 봄 3월 신라 왕자 천일창 天日槍 이 귀화
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 羽太玉 1개, 족고옥 足高玉 1개, 제록록 鵜鹿鹿 赤石玉 1개,
출석소도 出石小刀 1자루, 출석모 出石鉾 1자루, 일경 日鏡(청동거울) 1개, 웅신리
熊神籬 1개 등 7가지였는데, 단마국 但馬國 에 보관하여 항상 신물 神物 로 삼았다." - 일본서기
천일창 天日槍(아메노 히보코 天之日矛) 은 그외에도 고지키(고사기) 응신왕(천황)조에 천지
일모 天之日矛 라고 적었는데.... 일본에 귀화 동기와 경로는 위의 기사와 차이가 있습니다.
고지키에는 화(和)과자의 신이라 불리는 다지마모리가 아메노 히보코와 아카루히메노카미의 증손 이라고
나오며 다지마모리의 자식인 다지마히다카의 딸이 바로 진구 황후의 어머니인 카츠라기노타카와카히메
라는데,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아카루히메노카미와 결혼한 것이 의부 가락국의 왕자인 쓰누가아라시토
(都怒我阿羅斯等)로 나오니 쓰누가아라시토는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가기전에 일본에 건너갔다고 합니다.
『고지키』에는 옛날 신라의 아구누마(阿具奴摩・阿具沼)라는 늪에서 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을때, 햇빛이
무지개처럼 내려와 그녀의 배에 닿으니 여인은 바로 임신하여 붉은 구슬을 낳았는데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가 여인에게 간절히 부탁해 구슬을 얻은후 몸에서 떼는 일 없이 언제나 지니고 다녔습니다.
어느날 그 남자가 소를 끌고 음식을 산으로 나르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메노 히보코(천일창)가
남자가 소를 죽여 먹으려 한다고 착각해 감옥에 가둬버리니 남자는 아무리 해명을 해도
히보코가 용서를 해주지 않자, 붉은 구슬을 건네주고 나서야 겨우 용서를 받게 되고
히보코가 구슬을 갖고 집에 돌아가 마루에 두자 구슬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히보코는 여인 아카루히메를 정실로 삼았으며 그녀는 매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었지만 거만한
성격의 히보코는 어느 날 아내를 욕하며 비난했고, 그녀는 부모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는 작은 배에 올라 난바의 나루터에 있는 히메코소 신사(比売碁曾神社) 로 떠나버렸습니다.
히보코(천일창)는 깊이 반성하고 아내를 찾아 일본으로 향했으나 난바 해협을 지배하는 신이 방해하여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다지마에 상륙하고 말았으며 그는 그곳에서 마에쓰미
(前津見)라는 현지 여인과 결혼했다는데, 햇빛으로 알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시베리아와
한반도 북남부 부터 동남아까지 널리 퍼진 난생설화이니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출생신화와 유사합니다.
“又昔 有新羅國主之子 名謂天之日矛 是人人蔘渡來也 所以人蔘渡來者 新羅國有一沼
名爲阿具奴摩 此沼之邊 一賤女晝寢‧‧‧姙娠生赤玉”
" 그녀가 일본으로 도망하자 찾아나서 그녀가 숨어있는 난파 難波(지금의 오사카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신의 저지로 다지마국(단마국)에 정착함으로써 인삼을 전래 했다는데, 이는 일본서기 수인왕(천황)
2년조 도노아아라사등에 대한 일설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니, 기원전 무렵 진한인(辰韓人신라인)의 일본
이주설화로 풀이하거나,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비교하여 태양신화의 이동 전설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 삼국유사에 연오랑과 세오녀 기사가 나오니 연오랑은 신라 사람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데...... 랑은 이름이 아니라 호칭이니 진짜 이름은 '연오' 이니, 신라 초기
아달라 이사금 4년인 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살던 사람으로, 그의 아내로 세오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캐고있는데, 어떤 바위에 올라탔더니 갑자기 바위가 움직였다고 하는
데 멀어지는 육지를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와중에 연오랑은 또다른 육지에 도착하는데
그곳이 일본이니 사람들은 '우리 전설 속에는…' 하 고 설명을 하면서 연오랑을 일본의 왕으로 추대합니다.
한편 세오녀는 연오랑이 사라지자 바닷가를 거닐면서 연오랑을 찾다가 바위에 올라가게 되었으며, 세오녀도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일본에 도착하게 되어 연오랑과 재회하니 이때 신라에서는 갑자기 해와 달이
가려지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일관에게 물어보니 이것이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탓이라 하였다.
왕이 연오랑과 세오녀를 데려오도록 하나 연오랑은 일본에서 왕이 되어서 떠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신 세오녀는 천을 짜 신라 왕에게 보내고, 신라에서 그 천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해가 떴다는
이야기이니 일월 신화의 일종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해진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 스사노오 설화나 신라의 왕자라는 천일창 설화와도 연관이 있다고 추정
하기도 하는데.... '연오' 라는 이름에서 '오' 를 '해(日)' 로 보아, 오늘날 포항시의 지명인
'연일(延日)/영일(迎日)' 의 유래가 되었으며 포항에는 “연오랑, 세오녀 테마파크” 가 있습니다.
고지키(고사기)에서 다시 일본서기 기록으로 돌아가면.... "처음에 천일창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파마국에
정박하여 육속읍에 있었다. 그 때 천황(일왕)이 삼륜군의 시조 대우주 大友主 와 왜직 倭直 의 시조
장미시 長尾市 를 파마 播磨 에 보내어 천일창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나라 사람인가” 라고 물었다."
“저는 신라 국왕의 아들인데, 일본국에 성황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지고 知古 에게 주고 귀화
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엽세주 葉細珠, 족고주 足高珠, 제록록 鵜鹿鹿 적석주
赤石珠, 출석소자 出石刀子, 출석창 出石槍, 일경 日鏡, 웅신리 熊神籬, 담협천대도 膽狹淺大刀 8가지 였다.
“파마국 육속읍이나 담로도 출천읍의 두 읍 중에서 너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 때
천일창 이“신이 장차 거주할 곳에 대하여 만일 천은을 내려 신이 원하는 곳을 허락 하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지급 받고자 합니다” 라고 아뢰니, 이를 허락였다.
“이에 천일창 이 도도하로 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으로 근강국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다시 근강으로
부터 약협국을 거쳐 서쪽으로 단마국에 이르러 거주처를 정하였다. 근강국 경촌곡 도인 陶人 은 천일창을
따라온 사람이었다. 천일창은 단마국 출도 出嶋 사람 태이 太耳 의 딸 마다오와 결혼해 단마제조를 낳았다.”
"도인 陶人 은 토기를 제작하는 사람으로 경촌곡이 있는 경산에 수혜 須惠 란 곳이 있는데,
5세기 한반도에서 전래된 도질토기 스에키(수혜기) 는 이곳 이름과 관련 되었으며 천일창
을 따라와 경촌곡에 도착했다는 도인도 그러한 관련에서 기록에 전승된 것으로 짐작 된다."
서기 59년 : 88년 가을 7월 기유 초하루 무오 戊午 신하에게 조칙을 내려“ 듣자 하니 신라
왕자 천일창이 처음 올 때에 가지고 온 보물이 단마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귀하다고 여겨 신보 神寶 로 삼았는데, 그 보물을 보고자 한다”
라 하고, 그 날 사자를 보내 천일창의 증손 청언 淸彦 에게 조칙을 내려 바치도록 하였다.
“청언 이 조칙을 받고 신보를 받들어 바쳤다. 우태옥 羽太玉 1개, 족고옥 足高玉 1개, 제록록 鵜鹿鹿 적석옥
赤石玉 1개, 일경 日鏡 1개, 웅신리 熊神籬 1개 등을 바쳤으나 오직 출석 出石 이라는 소도 小刀 를
도포 속에 숨겨 차고 다녔는데... 이후 출석도자 出石刀子 가 저절로 담로도 淡路島 에 이르렀는데
그 섬 사람들이‘신神’이라 이르고는 칼을 위하여 사당 을 세웠다. 이는 지금 까지도 제사 를 지낸다."
"서기 61년 : 90년 봄 2월 경자 庚子 초하루 천황이 전도간수 田道間守 를 상세국 常世國 에
보내어 사시사철 나는 향과 香菓 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귤 橘 이라 부른다.
전도간수는 수인왕(천황) 3년 일본에 귀화한 신라 왕자 천일창의 고손 高孫 이니 일본서기
권6, 수인천황 3년조 ‘天日槍-但馬諸助-但馬日楢杵-淸彦-田道間守’ 의 가계 라!"
"또 전도간수 田道間守 는 삼택련 三宅連 의 시조니 고사기에도 “삼택련지조三宅連之祖 명다지
마모리 名多遲麻毛理” 라고 나오며 신라 왕자 천지일모 天之日矛 로 부터 내려오는
가계 家系 를 전하고 있다. 신찬성씨록 우경제번‧ 동섭진제번조에도 “신라국 왕자
천일모명지후야 新羅國王子天日鉾命之後也” 라 했으며 동족으로는 귤수 橘守 등이 있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와 712년에 엮은 고사기 및 1283년에 편찬된 삼국유사
에서 천일창 天日槍 (아메노 히보코 天之日矛) 과 연오랑 및 세오녀 관련
기록을 살펴 보았는데...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가야인이나 백제인 외에 신라인
들도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국 건설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