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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지혜서의 말씀 2,12.17-20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제2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 3,16─4,3
사랑하는 여러분,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 '첫째'가 되는 길>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첫째가 되는 길로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마르 9,35)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의 의인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는 악인들의 위협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 43)라고 비아냥거리는 유다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키 재기와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들의 야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둔 제자들이 벌리는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 볼 일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 높은 사람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야고 3, 16)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야고 4,1)
반면에,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의로움의 열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야고 3,17-1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이 말씀은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심은 단지 자신을 비우고 ‘꼴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받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앞세우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타인 아래 두고, 타인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께 ‘속한 이’로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란 당시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지배받고 군림당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받는 무력한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이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죽으러 가는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곧 당신처럼 그렇게 당하면서 이루는 길을 '첫째'가 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력하여 사람에게는 '꼴찌'가 되고, 무력하기에 하느님께는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오신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생각하는 가운데 모두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겸손의 의미를 잘 가르쳐 줍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참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의 모습이 겸손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성공을 기뻐하되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내가 너보다 더 낫다’, ‘내가 너보다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자다’ 하는 생각을 다스립니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아직 겸손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받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는 것(성 아우구스티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아주 가슴 아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를 하셨는데,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파르나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시련이 올 때 그것을 기억하며 극복하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높은 자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베드로일까? 안드레아, 아니면? 요한... 줄 끊어질까 조바심을 갖는 것은 요즘도 여전합니다.
사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 큰 사람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큰 사람은 품이 큰 사람이요,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부들도 인사철이 되면 누가 어느 본당으로 가나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자리가 어디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열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고 말씀하셨는데, 꼴찌가 되고 종이 되라는 말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상대방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그의 행복과 완성을 위하여 나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합니다.
어떤 분이 사업이 잘되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참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공했다는 것은 그 재물을 어떻게 잘 썼느냐가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우리의 모습이 빛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시고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라!’ 하신 이유는 어린이의 단순함과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모습을 받아들여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에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선 인간은 하느님께 온전히 낮추어 의탁하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에 힘입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는 미성숙한 존재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껴안으며 말씀하신 모습은 사랑의 행위요, 구원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소외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그분을 힘입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꾸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1)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 2)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3)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듣고 있는 사람만이 악한 말을 멈출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사람은 이미 나쁘게 말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듣는 사람만이 대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매맞을 사람이 있는데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의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혹 듣게 되면 흐름을 바꾸십시오.
바꾸지 못하면 응분의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이는데, 첫째는 말하는 당사자입니다.
그는 하느님 눈앞에서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말을 싸움 붙이고 욕을 보이고 남들의 사생활에 수군거리는 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주목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결국 자신도 그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면 결국에는 자신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죽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힐 수 있고 그의 명예는 회복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험담을 듣는 것은 험담하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며 자기 자랑을 하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시기와 질투, 이기심을 멀리하여 겸손으로 의로움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9,35)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첫째의 삶 -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시편 54,6)
오늘 미사 중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 생명을 떠받쳐주시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신망애(信望愛) 삶을, 진선미(眞善美) 삶을 두터이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가, 은총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너무 잊고 지낸 생명의 주님입니다.
어제 위에서 오는 지혜를 갈망하며 피정자들과 파견미사 후 퇴장성가 부르기 전 일어나 함께 부른 만세칠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자 강론에 이어 실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눈길을 두고 양손을 활짝 펴들고 만세칠창을 바쳤습니다.
피정자들도 이런 체험은 처음일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우리 가정 만세!”
함께 부르는 만세칠창 기도 얼마나 좋은지요!
두 발로 서서 눈들어 하늘 보고 기도하라고 직립인간(直立人間)입니다.
순교자성월 9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철은 정말 기도의 계절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받쳐 주는 주님께 기도할 때 활력넘치는 충만한 삶이요, 위에서부터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입증되는 지혜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는 수제자 베드로가 격렬하게 반응했고,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 예고 때는 철부지 제자들은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승이자 주님께 공감하는 분위기가 전무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신, 생명과 진리의 길이신 주님께서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상기해야 할 사실은 길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도인(道人)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현자 무위당 장일순과 목사 이현주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목사인 자기에게 왜 도인이라 써주었는지 묻자 장일순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허, 자네는 길 가는 사람이 아니신가?
길 도(道)에 사람 인(人), 그러면 그게 길 가는 사람이지.
사람이 길을 간다는 건 길을 닦는 거라.”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길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길 가는 사람’ 도인(道人)이자 길을 닦는 수도자(修道者)들임을 깨닫습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말마디가 도(道)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요한복음 중국 한자 성경은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인이 보내준 삶의 지혜도 길 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싶어 나눕니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을 위해, 소식(小食)에 고기를 먹기, 뭘하든 계속하기, 햇빛 쬐기, 눕지 말고 움직이기, 일부러 외출하기, SNS를 즐기기, 지인과 대화하기, 느슨한 운동을 습관화하기”
이보다 더 권하고 싶은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기, 적절한 걷기 운동'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에 필시 이런 삶의 지혜도 적절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기에 차마 부끄러워 대답을 못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속내를 환히 아시고 위에서 오는 지혜의 절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길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지혜를 체현(體現)하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 영적 진리의 최고봉이자, 겸손과 사랑의 최고봉인 천상 지혜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이런 첫째의 삶은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런 첫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공동체의 첫째 원리입니다.
모두가 '커지기 경쟁'이 아니라 모든 이의 '꼴찌 되기, 작아지기의 경쟁, 모든 이의 종이 되기 경쟁'이라면 상상만해도 너무 흐뭇한 '복음적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지체없이 택한 오늘 강론 제목, '첫째의 삶-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입니다.
영어 말마디 역시 은혜롭게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부터 또 하나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Last of all, Servant of all(모두의 꼴찌, 모두의 종)”
얼마나 멋집니까!
이러면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우리의 파스카 영성은 어원도 같은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어 어린이를 껴안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참 감동적입니다.
제가 간혹 면담성사시 감동하여 형제자매를 안아들일 때도 이런 심정입니다.
예수님 제자 공동체는 물론 교회 공동체의 두 번째 원리로 이 또한 ‘위에서의 지혜’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건강하고 건전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린이 환대가 예수님 환대요 하느님 환대라는 놀라운 신비를 보여줍니다.
어린이가 누구입니까?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물론 모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과부, 고아, 약자, 병자, 죄인, 난민, 노인, 변두리 소외된 사람.. 끝이 없습니다.
잘 깊이 들여다보면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가련하고 불쌍한 인간 존재들입니다.
이런 모든 이들을 환대함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일이요, 이런 이들을 받아들여 모든 이의 꼴찌로, 모든 이의 종으로 사는 자가 주님을 닮은 참 영성가이자 신비가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가한 박해와 시련 중에도 이런 위에서의 지혜와 하나된 이들의 내공은 놀랍고 주님 친히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녕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과정을 통해 입증된 영적 승리자, 하늘 지혜의 화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영적 전쟁의 상황은 흡사 온유와 겸손, 인내력, 분별력의 시험장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한 '지혜의 도(道)'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내적 일치가 우리 모두 모든 이의 꼴찌로, 모든 이의 종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여름은 정말로 더웠습니다.
수도권에만 38일간의 열대야가 있었고, 열대야가 끝났어도 낮 더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9월의 중순도 넘어가면서 좀 살 만합니다.
이렇게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 하면 겨울나무가 떠올려집니다.
봄의 화사한 꽃도, 여름의 싱싱하게 푸르던 잎도, 가을의 풍성한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마치 죽은 것처럼 딱딱한 가지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아주 현명한 모습입니다.
푸르른 나뭇잎을 겨울까지도 가지고 있으면 혹독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많은 물기가 얼어서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 전체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잎사귀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버립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나뭇잎은 마르고 땅에 떨어집니다.
버리는 길이 바로 자기 살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 명예, 지위… 그 밖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무엇을 가져가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세상의 칼날에 쓰러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까지 합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가 중요했고, 가장 높은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집착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낮은 이,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까지 짊어지는 용기와 자기 비움, 그리고 작아짐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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