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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이사 10,5-7.13-16
복 음 : 마태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걷다가 길가에 나온 수많은 지렁이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이 부분이 늘 궁금했습니다.
왜 비만 오면 지렁이가 땅 밖으로 나올까 싶었던 것이지요.
친한 친구가 지렁이는 비를 너무 좋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비를 싫어하면 굳이 비가 떨어지는 땅 밖으로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렁이는 피부 바로 아래에 있는 모세 혈관으로 호흡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흙과 흙 사이를 통하는 공기를 마시며 호흡하지만,
비가 오면 흙 사이가 모두 물로 가득 차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지렁이가 비가 오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살기 위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살기 위해 땅속을 박차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어렸을 때의 저처럼,
타인의 고통과 시련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판단하기에 앞서 몇 번이고 더 바라볼 수 있는 신중함이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도 겸손의 모범을 계속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높으신 하느님의 뜻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치고 감격에 겨워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찬미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의 기도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하여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인 데 대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권력을 휘두르는 권세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가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참 지혜는
철부지와 같다고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할까요?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철부지들의 특징은 의탁입니다.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함께야).
그들은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호가 절실한 이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부지는 어리광도 부리고, 떼도 씁니다. 그러다 품에 안깁니다.
성경에서‘안다’는 것은 단순히‘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
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그런 순수함이 사라진 시대이라서 더욱더 어린이의 마음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순진무구함으로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수녀님들과 함께 LA로 피정을 갈 때입니다.
수녀님들이 짐을 부친다고 해서 제가 도와 드린다고 했습니다.
보통은 체크인으로 가면 직원들이 안내해 줍니다.
짐을 부치려고 하는데 직원은 없었고, 자동 체크 인 기계만 있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렇게 짐을 부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계에 인적사항을 입력하니 짐을 부칠 수 있는 표가 출력되었습니다.
표를 가방에 부착하고 짐을 놓은 곳으로 갔더니 짐을 부칠 수 있었습니다.
짐을 부치는데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우리는 클릭과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점차 사람과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를 만드는 것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명 편하고, 쉽고, 간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클릭과 검색의 시대에는 이웃의 눈물을 보기 어렵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보기 어렵습니다.
꽃을 찾아 날아가는 나비를 보기 어렵습니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것도 어렵습니다.
예전에 직업 선택의 기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최상의 선택은 의미 있는 일이며 재미도 있고, 급여도 많은 직업입니다.
차선의 선택은 급여는 조금 적지만 의미 있고, 재미있는 직업입니다.
차악의 선택은 급여는 조금 되지만 의미 없고, 재미없는 직업입니다.
최악의 선택은 급여도 적고,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직업입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선택 기준은 어떠해야 할까요?
신학생 때, 천마산엘 갔었습니다. 본당의 청년들과 함께 갔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의 의견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테니 그냥 저녁을 먹고, 텐트를 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산에서는 폭우가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서로의 의견이 분분할 때, 모두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신학생이니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비가 조금 내릴 거라고 생각하고 머물자고 하면
짐을 옮기지 않아도 되고, 밥을 먹으면 되는 선택입니다.
폭우로 변할지 모르니 일단 짐을 다 옮기자고 하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비가 금세 그치면 일만 번거롭게 한 선택이 됩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였습니다.
어떤 선택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선택은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대부분의 신자분들이 저의 선택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하신 결정이니 믿고 따르자!’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늘 최선,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러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그런 저의 선택을 믿고 따라주는 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큰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는 말주변도 없고, 오랜 동안 도망을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능력과 인품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모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모세가 하는 모든 결정과 선택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용기는 없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 서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파스카의 꽃같은 삶
-“오늘 지금 여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깨어나 당신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약 2주 간에 걸친 배 봉지 싸는 일이 엊그제 7.11일로 끝났습니다.
다섯 분의 자매가 아마 15만 봉지쯤 쌌을 것입니다.
거의가 배 봉지 싸기 30년은 됐을 것입니다.
30대 중반의 어머니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6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고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란 호칭이 더 어울립니다.
끝나는 날 ‘하늘에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라는 시를 선물했습니다.
“하늘에 사랑의 별을 다는구나
사다리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배나무 가지 배 열매 봉지를 쌀 때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하얀 별들
낮에도 환히 떠오른 별들
하늘에 사랑의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다
몸은 고단해도
얼굴은, 눈은, 음성은 별처럼 빛나는
하늘에 별을 다는 ‘주님의 전사戰士’ 어머니들이다”
벌써 세 번째 인용하는 시詩이지만, 늘 새롭고 기분이 좋습니다.
말 그대로 파스카의 어머니,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두 어머니의 답신입니다.
“신부님, 시 너무 감동했어요. 너무나 감사합니다.”
“신부님, 만드신 시가 제 마음에 와닿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은 어제 써놨던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이라는 시입니다.
정주의 삶을 살다 보면 계절이 지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무수히 폈다 지는 한때의 꽃이지만 사람은,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죽는 그 날까지 날마다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쓴 시입니다.
-“꽃들은 때 되면 폈다 지지만
사람은
참으로 믿는 사람은
끊임없이
죽는 그 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 지는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이다”-
그래서 어제 정했던 “자아 초월의 여정-참나가 되기” 강론 제목을
“파스카의 꽃 같은 삶-오늘 지금 여기”로 바꿨습니다.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의 원조는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온전히 자기를 비운 겸손하신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늘 맑은 물 샘솟는 우물이 되어 사는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늘 주님의 배움터에서, 샘터에서, 쉼터에서 머무는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주님의 배움터에, 샘터에, 쉼터에 머물러
주님을 공부하며, 맛보며, 심신을, 영육을 새롭게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아
순수하고 겸손한 철부지들입니다.
세상 지식이나 지혜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삶의 지혜, 천상적 지혜를 지닌 분들입니다.
감격에 벅찬 예수님의 감사기도, 찬양 기도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를 두고 드리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감사기도인지요!
참 기쁨은 참 행복은 주님의 철부지들이 되어,
겸손과 순수의 사람이 되어 주님의 기쁨에, 행복에 참여하는 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 기쁨, 참 행복의 삶입니다.
참으로 아버지와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고백하는 예수님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새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의 은혜가 깊어지면서
아버지를 알게 되는 복된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유일한 답은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음을 봅니다.
나이 들어 노년에 접어들수록 최고의 관심사는 건강일 것입니다.
옛 친구들에게서 오는 메시지도 온통 건강에 관한 것들입니다.
매력 자본을 갖춘 멋쟁이 노년을 위한 다섯 가지 지침이란 메시지입니다.
1. 얼굴에서 웃는 모습이 떠나지 않아야 한다.
2. 항상 마음에 여유를 가져라.
3. 품격을 지켜라.
4. 자신의 마음 마당을 항상 사랑으로 가득 채우라.
5.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라.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이 쏙 빠졌다는 것이며 순전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온 마음으로 섬길 때
위의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인데
이런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있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정말 영육靈肉의 식食이자 약藥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기쁨, 평화, 감사, 희망입니다.
이런 주님의 선물로 영혼이 튼튼하면
참 기쁨에, 참 행복이요 육신은 저절로 영혼에 순종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영혼이 육신에 끌려가지 말고
건강한 영혼이 되어 육신을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과 그리고 철부지 제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이사야서의 ‘자기중심’의 오만과 무지와 독선의 아시리아 임금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임을 까맣게 잊고 있는 아시리아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가차 없는 심판이 예고됩니다만 이런 심판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버리리라.”
비대함은 건강과 힘의 표징입니다.
하느님 빠진 건강과 재산의 우상은 얼마나 덧없고 위태한지요!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一紅 權不十年),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예전 듣던 노래도 생각납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아마도 자기중심의 아시리아 임금이 이랬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라면 첫 절은
“섬기세, 섬기세, 젊어서 주님을 섬기세, 늙어지면 못 섬기나니”
이렇게 바꿔 노래할 것입니다.
예전 피정지도 때 자주 드린 말씀도 생각납니다.
노년은 물론 인간 품위 유지를 위한 3대 조건,
“1. 하느님 믿음, 2. 건강, 3. 돈”이며,
절대로 이 우선순위가 바뀌어선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대부분의 불행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중심이 아닌 예수님을 닮은
하느님의 중심의 파스카의 꽃 같은 삶만이 참 기쁨, 참 행복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겸손과 순수의 철부지 같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신망애信望愛와 지혜의 천상 선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아멘.
그렇습니다, 아버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 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예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교만과 겸손의 놀라운 차이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스트리아가 낳은 음악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살 때 건반지도를 받고 5설 때 이미 小曲을 작곡했던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작곡과 공연으로 온 유럽을 다닐 수 있었지만,
26세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가정을 꾸리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더미에 가정형편이 쪼들리게 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가정교습을 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서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쉴링을 내야한는 부모들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자, 모차르트의 해명이 걸작이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은 찬양기도(25-26절)와 계시의 말씀(27절)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어록에서 따온 것이며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찬양기도이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다시 말하면 어제 복음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두고
불행을 선언(11,20-24)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감사의 환호를 부르신다.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좀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불행 선언을 맞은 대상 인물과 오늘 감사환호의 대상 인물을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더 명확해진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가 불행 선언을 맞은 이유는
그곳에서 좀 안다고 뻐기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거부하였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 마귀들린 자들, 온갖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의 아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다 같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다 같은 조건인데, 왜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교만과 겸손의 차이다.
교만은 거부를 낳고, 겸손은 수용을 낳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과 수용의 표상인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통찰은 철저하게 아들 예수께 맡겨져 있으며,
아들이 택한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다.
다행한 일은 예수께서 택하신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계시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철학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신은 한낱 絶對者(Absolutum)일뿐,
이분이 바로 구약의 야휘 하느님이시며,
신약의 예수님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스스로 사람이 되는 肉化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든지 육화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