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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글에 짤방이라곤 없다.... 어떻게 넣어볼 구석이 있어야 말이지.
1. 역사
파티마 왕조지만, 왕조의 창건자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냥 지들이 상관이 있고 싶어할 뿐이다.
쉬아파의 분파 중 하나인 이스마일파는 정치적인 세력이 약했기에, 유일하게 믿을거라곤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선교활동을 통한 세력의 확장이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이스마일파는 각지로 선교사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의 주 타겟 중 하나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이었다.
이렇게 파견된 선교사가 아부 압둘라(Abu Abdullaha)와 우바이둘라 사이드(Ubaydullaha Sayyd)였다. 비록 아부 압둘라가 먼저 와서 베르베르족을 기반으로 세력을 쌓았음에도 나중에는 우바이둘라가 스스로를 이맘(쉬아파 종단의 지도자)으로 칭할정도로 상황이 역전되기에 이른다.
우바이둘라의 세력은 점점 강해져 튀니지의 순니파 왕조인 아글라브 왕조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결국 우바이둘라의 쉬아 국가는 915년 아글라브조를 무너뜨리고 튀니지에 새 수도 마흐디야를 건설하게 된다.
초기에 우바이둘라의 통치는 마구 삐그덕댔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이 순니파인 주민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느라 내부 반발 역시 심했으며, 모로코나 이집트등 다른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패권을 끝없이 노렸기에(마치 극동의 모 나라의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굳이 자기들을 환영하지 않는데도 제돈들여 가서 죽어나가는 것과 같은 이유다)막대한 전비가 지출되었다. 주위의 순니파 국가들은 파티마조에 대한 반정부시위를 주도하고 지원했으며, 이에 힘을 얻어 안그래도 불만 많던 주민들은 자주 봉기를 일으켰다.
우바이둘라 이후 한동안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가, 4대 이맘인 알 무이즈(Al-Muiz)에 이르러 상황이 어느정도 반전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순니파 왕조인 익쉬드조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는데, 군주들이 좀 병맛이 심했기에 노예인 카푸르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가 실권을 잡을때는 파티마조가 개입하지 못했으나, 그가 죽자 알 무이즈는 재빨리 침공, 자우하르(Jawwhar)가이끄는 군대가 963년에 이집트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알 무이즈와 자우하르는 우바이둘라가 하던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 익쉬드조의 귀족계급이란 귀족계급을 모조리 포섭하고, 순니파 이맘들의 권리도 어느정도 인정해줌에 따라 반발을 최소화했다.(우바이둘라는 순니파 이맘을 죽여 그 시체를 끌고 다녔었다. 놀라운 발전이다!)
알 무이즈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집트가 파티마조의 근거지가 됨에 따라 중동 세계는 다시 한번 이집트를 중심으로 돌게 된다. 이베리아 반도의 우마이야 가문의 후손들, 이집트에 세를 다진 쉬아파의 이맘들, 바그다드에 검은 깃발을 펼친 압바스조 세 세력이 대치하는 '칼리프가 셋인 시대' 가 온 것이다.
그리고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 국가는 절대로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알 무이즈의 뒤를 이은 알 아지즈는 그런 원칙에 따라 우방을 이슬람이지만 '순니파'인 압바스조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고 해버리고 비잔티움과 친교를 맺고 상호간에 사절을 교환한다. 경제적으로 보아도 양국간의 우호관계는 무역량을 생각해볼때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 친교는 가끔가다가는 삐걱거리는 일도 잦았다.
이 시기부터 파티마조가 망할때까지 끝없이 계속되는 문제가 터져나온다. 바로 파티마조 창건을 도운 베르베르족(특히 쿠타마kutama족)과 외부에서 사들여온 투르크 노예의 대립이 그것이다. 알 아지즈 사후 쿠타마 부족의 우두머리 이븐 암마르와 투르크 군벌, 그리고 이집트 현지민 출신인 무함마드 이븐 알 누만등의 내전이 시작되며, 어린 칼리프 알 하킴은 사실 아무런 힘도 없이 권좌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고, 실권은 투르크인 환관 바르자완이 잡았다.
파티마 이집트에서 환관의 권세는 특히 강했는데, 이 시기에는 경찰청장, 해군대장, 리비아와 팔레스타인의 총독이 모조리 환관이었다.(상황이 이러니 그정도 고통은 감내하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고자라니'의 압박은 좀 크겠지만)
996년에 즉위한 알 하킴은 어느정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조금씩 사람이 맛이 가기 시작했다. 서기 1000년을 넘어(물론 헤지라력을 쓰는 무슬림들이 밀레니엄을 지키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겠지? 기독교도들도 그때가 밀레니엄인줄은 몰랐다)가자 하킴은 점차 자신이 통치자란걸 자각하게 되었고, 어느날 갑자기 명령을 내린다. '바르자완을 죽여라'
명령은 즉각 집행되고, 투르크 환관 시대는 그렇게 말 한마디에 종결되었다.
환관이 막대한 권세를 누리고는 있었다고 하나, 그 역시 일개 종일 따름이었다.
xx가 없는 바르자완으로 만족 못한 그는 xx가 있는 진짜 남자들을 도륙하기 시작한다. 알 아지즈 이후 싸워댔던 이븐 암마르와 이븐 킬리스 형제가 암살당했고, 익쉬드조의 명가의 후예인 자파르 이븐 알 파루트, 이집트 정복에 공을 세운 자우하르의 아들 후세인 이븐 자우하르를 포함, 알 아지즈 시대의 관료들이 때로 죽어나갔다.
xx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는 모든 인간을 그냥 싫어했던것 같다. 1004-1005년, 1013-1014년에 걸쳐 그는 여성차별법(차별금지가 아니라)을 제정하는데, 이 법에 따르면 여성은 밖에 싸돌아다녀서는 안되고, 목욕탕도 가선 안됐으며, 여성이 물건을 파는것도 금지됐으며(이슬람에서 여성노동은 금지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우디나 아프간이 그냥 지혼자 미쳐돌아가는거다) 심지어 여성용 구두를 만드는것도 금지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1010-11년, 그리고 1011-12년에 걸쳐 모든 기독교도 및 유태인들은 그들을 상징하는 별도의 표식을 착용해야했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그전엔 이런게 없었단 이야기다)모두 검은 터번과 검은 허리띠를 작용해야했던 것이다. 그들의 예배당이 파괴당했다. 순니파도 도매금으로 같이 탄압을 받았다.
게다가 사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것도 탄압당했다. 강가, 사막에서 집회를 하는것, 나일강에 배를 띄우는것도 금지되었다. 또한 개를 몽땅 죽여버리게 했으며, 밤에 일하고 낮에 자게 했고(편의점 야간알바 15일 연속근무 경험으로는 이거 정말 미친 짓이다!)체스놀이도 금지했다. 게다가 점점 스스로가 진짜 신의 화신이니, 예언자를 이어받은 존재니 운운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이맘이 미쳐돌아가자,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1. 이맘이 미쳤다. 갈아치우자. → 대개 정상인들의 반응. 이런 치들중 일부는 반란을 일으켰는데, 알 하킴이 베르베르족인 바누 쿠라 부족장을 암살하자 아부 라크완이란 자가 주도하여 반란을 한번 일으켜 모조리 피떡이 되었다.
2. 이맘이 다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거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 않느냐. 이맘을 따르자 → 얘들이 드루즈파로 발전한다. 알 아크람이란 자가 발전시킨 이 종교는 이슬람과 기독교, 기타 근동의 남아있던 잡다한 종교를 모조리 혼합시킨 종교인데, 이집트에서 발원한게 어째 지금은 다 레바논에 있다.
암튼 알 아크람을 이어받은 함자란 자가 1019년 푸스타트의 암르 모스크에서 아비 알 아으왐이란 정통주의파에게 암살당하자 알 하킴은 꼭지가 돌아버리고 만다. 즉 자신의 수도를 노예를 이용해 약탈해버린것.
왕가도 이 미친짓에 지쳐가고 있었다. 알 하킴의 누나 싯트 알 물크가 알 하킴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즈음 마법이 일어났다.
알 하캄이 푸스타트 근교 야산에서 예배를 드리다 실종된거다.
싯트 알 물크는 저절씨구 좋구나~ 하면서 그의 아들인 아불 하산 알리를 앗 자히르라는 이름으로 새 이맘에 즉위시키고 알 하킴의 모든 정책을 없는것처럼 만든다. 1027-28년에 걸쳐 알 하킴이 끊어놨던 비잔티움과의 관계도 복구했고, 파괴했던 성묘교회도 재건했으며, 비무슬림 차별정책도 폐지되었으며, 심지어 알 하킴 시대에 강제로 무슬림으로 개종되었던 유태교도나 기독교도가 원래 신앙을 찾는것도 허락되었다.
알 자히르가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퇴장하고 뒤를 이어 받은 새 이맘은 알 무스탄시르였다. 그는 7살에 즉위했는데, 알 하킴이 11살에 즉위해서 험한꼴을 보고 돌아버린 걸 생각하면 위험요소가 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는 1036년까지는 그의 어머니 사이드 라쉬드의 영향에서 생활했다.
이쯤에서 잠깐 파티마 왕가의 여성들에 대해 보자면, 싯트 알 물크도 그렇고 사이드 라쉬드도 그렇고 아랍 무슬림들도 오스만 여성들과 같이 여성이 정치에 어느정도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사례가 일부일 뿐이지만, 주목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엄마 품에서 벗어나게 된 1050년경에는 파티마조의 법관이자 선전관을 지냈던 알 야주리가 재상으로 그를 보좌했으며, 1058년에 이슬람 국가의 재상 사망률 1위 질병인 군주에 의한 처형으로 세상을 뜨자 이집트는 다시한번 내분에 휘말리게 된다.
1066년 3차 이집트배 빅매치가 벌어진다. 이번의 대결상대는 강력한 챔피언 노예세력과 영원한 맞수 투르크 군벌이었다. 경기장은 이집트 전역이며, 협찬 및 피해는 다시 한번 이집트 백성들이 수고해 주시겠다.
투르크군의 감독은 나시르 앗 딘 다울라 이븐 함단이라는 장군이었으며, 노예군은 상이집트를 홈그라운드로 삼아 홈경기에 대비했다. 경기는 투르크군의 우세로 풀어나가는듯 했으나, 투르크군의 팀내에 팀워크가 문제가 생겨 내전은 또 지리하게 길어진다. 관중들은 점차 경기에 질려버렸고, 이 상황을 타개한것이 해외 용병이었다.
1073년 아크레의 총독이자 아르메니아 출신인 바다르 알 자말리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군대가 이집트에 상륙, 지겨운 경기를 펼치고 있던 기존팀을 싸그리 정리해버리고 이집트 리그의 최종우승자가 된다. 그의 우승컵 획득 이후 이집트는 한동안 군사 사령관을 겸한 재상이 실권을 잡는 시대가 온다. 바다르 알 자말라 이후 이맘은 사실상 실권을 상실한다.
1094년 알 무스탈리가 길지만 사실 한건 없던 통치를 끝냈을때(그의 통치기를 설명한 위의 문단중 그의 이름이 나온 문단 자체가 없다!) 그 후계자인 알 무스탄시르는 역시 군사력을 가진 장관인 알 아흐달에 의해 이맘위에 오를수 있었다. 알 무스탈리의 즉위 시 그의 즉위에 반발해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의 또다른 분파가 바로 니자리파이며, 이들은 주로 하사신으로 알려져 있다. 파티마조는 또 하나의 적이 생긴 셈이다.
[여기서 잠깐 미디블 1을 기억하시는 사람을 위해... 미디블 1 이집트 여명기를 시작하면 칼리프 이름이 알 무스탈리 1세이며, 아라비아 쪽에 별 6개 달렸는데 하필이면 베두윈 낙타병이라 유저를 안습케 만든 알 아흐달 샤인샤라는 장군을 기억할 것이다. 다 실재인물이다]
여기에 더해 또다른 새 적이 서쪽에서 등장했는데, 이가 바로 십자군이다. 파티마조는 알 자히르의 통치에서도 보이듯이 자국내의 타종교인에 대해 광신적인 성향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며, 예루살렘에 아말피인을 위한 무역기지도 건설하는것을 허가할 정도였다. 또한 군사보다는 장사에 능한 이집트인들답게(이집트에 여행간 한국인들이 가장 치를 떠는게 이 미쓰리 상인들이다. 어디서든 관광객으로부터 돈 뜯어낼 구멍을 찾아낸다) 십자군이 떴다 소식을 들었을때 이들은 십자군과 협상을 하려고 노력했었다.
물론 목표는 오직 예루살렘을 외치고 달려드는 무리를 막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던지라 파티마조는 초동 진화에 대실패하고 이후 십자군 때문에 엄청 고생하다 결국에는 먼저 망해버린다.
1099년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알 아흐달은 이곳을 탈환하기위해 피나는 노력을 행하지만 결국엔 모조리 실패해버린다. 또한 이집트가 경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도시 인구가 급증하고, 이 틈을 타 니자리파 암살자들의 입국빈도가 높아지면서 파티마조 고위인사의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가운데, 알 아흐달이 암살당해버린다.
알 아흐달이 죽고 이맘 알 아미르가 드디어 좀 기를 펴보려는 순간, 그가 니자리파에 의해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버렸다.(9성 암살자 뜬거다) 군주가 자연사해도 내분이 일어날까 말까 하는판에 암살이면 뭐 뒷수순이야 뻔했다. 바로 그의 어린 아들인 알 타입과 사촌인 알 하피즈가 대립각을 세우고(애가 뭘 알겠나. 알 타입에 돈을 건 세력과 알 하피즈가 싸우는거지) 알 타입이 즉위 이후 급사하자 알 하피즈가 암살한게 아니냐는 의혹이 사방에서 빗발친다.
알 하피즈는 파티마조의 이맘이 초자연적이며 초인간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믿어진다는) 특성을 이용했다. 즉 알 아미르가 자신의 죽음과 알 하피즈가 즉위할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구라를 친것이다. 선동술이 대단했던건지 파티마인들이 바보였던건지 이 구라가 조금 먹혀들어갔다.
사실 이집트인 모두가 바보는 아니어서, 이런 구라가 100% 먹히지는 않았다. 알 하피즈는 여기서 다시한번 머리를 굴렸다. 쉬아파에서 무함마드에 버금가는(가끔 어느 종파에서는 그 이상가기도 한다;;;) 인물인 알리가 무함마드의 사촌인것을 끌어들인것. 알리도 무함마드의 사촌인데 칼리프가 됐는데 알 아미르의 사촌인 내가 칼리프가 됐는데 불만 있뜸? 이란 논리였다.
이렇게 어렵게 권좌를 지킨 알 하피즈는 또 한번 파티마조를 뒤집어놓는데, 바흐람이라는 기독교도를 재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무슬림 정통파의 반발은 컸다. 리드완이란 자에 의해 주도된 이 반발은 대충 '아오 빡쳐 무슬림 인구가 95%가 넘는데 무슬림중 그렇게 인재가 없나혀' 식으로 요악될수 있는데, 이들은 시내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테러가 벌였으며, 아스칼론을 거의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알 하피즈 사후 파티마 이맘의 권위는 급격히 약화된다. 이 시기에는 거의 재상에 의해 이맘이 놀아나던 시기였으며, 알 자피르, 알 파이즈, 알 아디드등의 이맘은 아무런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고 궁전에서 쌀이나 축낼 따름이었다.
알 아디드는 재상인 이븐 루지크에 의해 몹시 시달렸다. 명색이 지 아들인데 당하는게 안쓰러웠던(아니면 그냥 권력이 빠져나가는게 배아팠을지도)그의 어머니 시트 알 쿠누크는 그를 암살해버렸다. 그러나 그 말고도 재상할 인간들은 많았기에, 새로 재상이 된 샤와르가 권력을 쥐고 알 아디드는 다시 푸스타트의 궁전으로 처박혀버린다.
샤와르는 그러나 투르크 군벌인 디르감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그는 누르 앗 딘을 끌여들인다.(1163) 디르감은 화들짝 놀라 십자군을 끌어들이고, 다시한번 이집트배 매치(이젠 몇회인지도 모르겠다)가 개최된다. 그러나 이번 경기는 시시하게 끝나 디르감이 패배해서 전사하고, 샤와르가 권좌를 찾는걸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샤와르는 누르 앗딘의 장군 시르쿠를 배신하고, 디르감의 편에 섰던 십자군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시르쿠와 살라딘의 투르크군은 십자군-이집트 연합군을 적절히 요리해낸다. 십자군은 버티다 못해 물러나고, 이집트는 파티마조에게로 다시 완연히 넘어가고 문제가 끝나는듯 싶었으나..
십자군이 이번엔 이집트의 동맹이 아닌 적으로 침공해왔다. 이 배신은 이집트-투르크의 동맹을 가져왔고, 샤와르는 1168년 11월 2일 푸스타트 전역을 태워버리고 승리의 도시, 아랍어로는 알 까히라라고 불리는 카이로로 이주했다. 투르크-이집트 연합군은(바로 윗문단에서는 십자군-이집트였는데...) 십자군을 격파하고, 이집트는 다시 완연히 이슬람의 손에 남게 된다.
다만 시르쿠는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샤와르와 같이 동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며, 와지르들에게 밟혀사는게 지겨웠던 알 아디드도 마찬가지였다. 바르자완이 알 하킴에 명에 따라 죽었듯이, 샤와르 역시 알 아디드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집트의 와지르는 시르쿠에게로, 그리고 시르쿠가 죽은 뒤에는 그의 조카 살라딘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1171년, 골골하던 파티마의 이맘제는 마지막 이맘 알 아디드가 사망하면서 종결되었고, 와지르인 살라딘이 이맘이 아닌 술탄이 되서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하면서 이집트의 처음이지 마지막인 쉬아파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첫댓글 알 하캄의 실종은 웬지 주변 주민들이나 왕실 혹은 근위대가 몰래 스윽 한 냄새가 풀풀 나는데요.
미치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집트배 3차 경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집트배 매치 ㅋㅋㅋㅋㅋ 멋진 표현입니다
진짜 지루한 역사를 이렇게 재밌게 풀어내시다니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근데 파타마왕조도 많이 막장이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