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자라는 아이
이지연
목요일 오후. 오늘은 큰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엄마와 함께 하는 감
각통합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필반 점심 식사도 빼먹고 부리나케 어린이
집으로 향한다. 감통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딸아이가 트램블린 옆에서 친
구들이 신나게 뛰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저도 같이 뛰지 못하
는 것이 속상할 법도 한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가 보다. 잠시 후
엄마를 알아보고 함박 웃음꽃을 피우며 휘청휘청 다가온다. 엄마 목을 꼭
끌어안고 반가움의 표시로 내 머리며 옷에 온통 침을 묻힌다.
내 사랑스런 큰딸은 뇌병변 장애 1급의 장애아이다. 흔히 말하는 뇌성
마비이다. 올해로 6살, 엄마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다 큰 아
기이다. 스스로 걷기 시작한지 이제 꼭 7개월이 되었다 6년이라는 긴 시
간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혼자 걸을 수 있길 바라는 크나큰 소원이
이루어져 그래도 행복하다 그 행복 속에는 늙으신 친정 부모님의 눈물과
정성이 함께 녹아있다.
결혼하고 1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병원에 다니면서 얻은 아이
가 바로 큰딸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큰딸을 배에 담고 있던 10달을 꼽는다 그리고 그 10달 뒤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생후 3일된 핏덩이를 대학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아이도 없이 누워있자니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터졌다 하지만 행여 몸
조리를 위해 집에 와 계시던 친정어머니께서 들으실까봐 이불을 뒤집어쓰
고 울다가 그마저도 빨갛게 충혈된 눈을 감출 수 없어 10번 울고 싶은거
이를 악물고 참고 참다가 한 번씩 울곤 했다. 온갖 기계장치를 달고 있는
딸을 처음 면회 갔던 날도,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게 없으니 데려가 정
붙이고 키우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퇴원하던 날도 옆에서 함께 지켜주
시던 부모님 때문에 맘껏 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긴 노정이 시작되었다.
힘들었던 긴 시간동안 늘 곁에는 친정 부모님이 함께 해 주셨다. 딸이
퇴원을 한 그 날부터 부모님의 하루의 시작과 끝은 우리 집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없이 아침을 드시자마자 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오셔
서는 해가 진 뒤에야 돌아가셨다 딸이 힘들어 할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1
년 12달 출근도장을 찍으셨다 해가 진 깜깜한 저녁 어떤 날은 장대비 속
으로 어떤 날은 살을 에는 찬바람 속으로, 또 어떤 날은 발이 푹푹 빠지
는 눈 속으로 걸어가시는 늙으신 부모님의 뒷모습은 철없는 딸의 눈에서
눈물을 솟게 만들었다 겨울 살얼음 위로 퍼지는 가는 금처럼 내 마음에
도 짠한 통증이 심장으로부터 말단까지 번져갔다.
매일같이 오셔서 부엌일부터 온갖 집안일, 아이 돌보기까지 두 집안 살
림을 꾸려 가시던 어머니께서는 내가 모르는 또 하나의 짐을 가슴에 얹고
계셨다 예정일을 몇 주일 앞두고 어머니의 권유로 자연분만을 권장한다
는 병원으로 옮겼는데 어머니께서는 무리한 자연분만으로 아이가 잘못되
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고집 때문에 딸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죄책감에 밤잠도 못 이루시고 내가 낮 동안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동안 당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탄의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것
이다 기나긴 고통의 어둠이 지나가고 여명의 새벽이 오면 당신이 믿으시
는 신께 엎드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우리 집에 오셔서는 또 하루를 의연하게 살아내신
것이다. 훗날 어머니의 마음의 짐을 알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적 없다
고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어머니 당신이 만드신 족쇄는 여전히 풀어질
줄 모른다.
아버지는 가끔씩 아이가 밥을 먹거나 놀거나, 혹은 자는 모습을 물끄러
미 바라보시다가 조용히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응시하시곤 하신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안경을 벗으시고는 얼른 손으로 눈가를 훔치신다. 그리고
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들어오시지만 붉어진 눈가와 콧물이 메인
훌쩍거림은 아버지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이셨는지 그대로 전해
져온다 그걸 알기에 베란다에 서계신 고희를 넘기신 아버지의 뒷모습은- 30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프다 내 마음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아이는 자라면서 병원에 갈 일이 참 많았다 물리치료도 받아야 했고
약도 꾸준히 먹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도 받아야 했다 병원 문턱을
내 집 드나들듯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는데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 동
행해 주셨다 일흔을 넘기신 몸으로 힘에 부치실 터인데도 굳이 아이를
당신이 안고 가시겠다고 꼭 품어 안고 다니셨다. 당신이 대신 죽어서 아
이가 낳을 수 있다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 말씀에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염치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싶은 배은망덕한 헛바람을
떠올리고는 죄스러운 마음에 몸둘 바를 몰랐다. 부모는 조건 없는 무한
대의 사랑을 주는데 자식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 먼저 앞선다. 나는
나쁜 딸이다.
6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친정 부모님을 위해 눈물을 참았고 부모님은
딸을 위해 눈물을 감추셨다. 서로의 상처에 아픔을 더하지 않기 위해 속
으로 울음을 삼켰다. 미친 듯 현실로부터 뛰쳐나가고 싶은 때도 많았지만
친정 부모님이 계셨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부모님이 옆에서 버팀목
이 되어주시지 않았다면 아이를 이만큼 키우지도 결혼생활을 여기까지
이끌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부모
님께 감사하다고 죄송하다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점점 연로해
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내 마음은 자꾸만 조급함에 조바심이 난다.
이제 걷기 시작한 딸을 보며 걷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랄 것 없던 마음
에 다시 욕심이 생긴다. 내년에는 '엄마'하고 불러줬으면, 혼자 밥을 먹었
으면, 대소변을 가렸으면 하고 끝도 없이 아이에게 바라게 된다. 그럴 때
면 친정 부모님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딸을 위해 아낌없
는 희생과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고 그 사랑으로 여기까지 커온 딸아이를
생각한다.
2005/ 22집
첫댓글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죄송하다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점점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내 마음은 자꾸만 조급함에 조바심이 난다.
미친 듯 현실로부터 뛰쳐나가고 싶은 때도 많았지만 친정 부모님이 계셨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부모님이 옆에서 버팀목 이 되어주시지 않았다면 아이를 이만큼 키우지도 결혼생활을 여기까지 이끌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죄송하다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점점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내 마음은 자꾸만 조급함에 조바심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