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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이사 26,7-9.12.16-19
복 음 :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60~70년대 스포츠화 시장의 독보적인 회사는 ‘아디다스’였습니다.
워낙 독보적이어서 다른 브랜드는 감히 경쟁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디다스가 독점하고 있는 시장에서 몇몇 젊은이가 운동화 회사를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자본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기에, 주위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가득했습니다.
창업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폐업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모여서 판도를 바꿀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여러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판도를 바꾸기에는 부족한 방안이었습니다.
한참을 회의하다가 이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상관하지 말자고. 그냥 하자!”
“그냥 하자!”는 말에 젊은이들은 힘을 얻었고, 이를 회사의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Just Do It.”
맞습니다. ‘나이키’ 회사입니다.
나이키는 창업 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아디다스를 앞질러
전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찾는 것보다, 그냥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보다, 그냥 해야 희망도 보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지루해서…. 등의 이유를 찾다 보면
주님의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이 너무나 커다랗고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주님의 큰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멍에’라는 표현을 ‘하느님의 법’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은 하느님의 법이
무겁다거나 사람을 짓누른다고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 조항이 613개나 있었음에도
이를 무겁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일상 안에서 지키기 어려워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절대로 무거운 짐이 아닌,
진정으로 편하고 가벼운 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인생의 짐을 흔쾌히 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를 매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 세상 안에서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며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나그네가 바랑을 지고 다니듯, 바랑이 없는 거지도 끼니를 챙겨야 하는 ‘짐’을 져야 하듯,
오늘도 우리는 삶을 ‘짐’으로 지고 살아갑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고,
수도자로서 스스로 짊어진 ‘짐’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자녀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가족으로서 함께 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질병과 육신, 상처와 나약함, 분노와 원망을 ‘짐’으로 지고 가기도 합니다.
형제를 ‘짐’으로 지고 가고, 세상을 ‘짐’ 지고 가며, 자기 자신을 ‘짐’으로 지고 갑니다.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짐’이 있고,
부당하게 떠맡겨지는 ‘짐’도 있고, 피하고 싶은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다른 이의 ‘짐’을 떠맡기도 하며, 함께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생명을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살면서는 죽음을 ‘짐’으로 짊어지고 죽어갑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그런데 나의 몸에서, 나의 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가?
사실 예수님께서도 ‘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니, 그 ‘짐’을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그 ‘짐’을 지고서야 가실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결코 그 ‘짐’을 지지 않고는 가야 할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북돋아 줍니다.
사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짐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오히려 ‘짐’으로 하여 우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짐’이 우리를 짊어지고 가는 까닭입니다.
정녕 ‘짐’을 지고서야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짐’이 없이는 가지를 못하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짐’은 우리를 북돋아 주고 도와주는 은총입니다.
그 ‘짐’은 저를 구원으로 이끄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고 그리스도와 함께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갑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몸소 우리의 ‘짐’마저 짊어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짊어진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서 제가 갈 길을 사랑으로 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묶지만 옭아매지 않는,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인류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단일행성종으로 남아 언제가 다가올 멸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중행성종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탐험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야를 지구라는 좁은 땅에서
우주라는 넓은 공간으로 넓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자손들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낯설고 거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
어부는 그물을 손질하여 고기를 잡은 것이 직업입니다.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 됩니다.
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후손들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어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입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입니다.
단일행성종에서 다중행성종으로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 묶여서 살아가는 운명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멋진 세상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주선을 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능력과 업적으로 가는 곳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가는 곳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를 떠났을 때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강대한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유배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절망과 허탈감이 가득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고,
흩어졌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행복하게 살날이 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가족들과 대화를 하고, 책을 읽고, 자신의능력을 개발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피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본인만을 위해서,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누군가를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음주와 도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
처음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한쪽은 안전한 곳간에 재물을 쌓은 사람과 같고
다른 한쪽은 깨진 독에 물을 부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곳간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고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재물은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빈소에 와서 울어 주기는 할 것입니다.
가족들은 장지에 와서 우리를 묻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뿐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원한 안식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쉼터가, 안식처가, 피신처가, 정주처가 없는 현대인들입니다.
딱히 머물 아늑하고 그윽한 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방황이요 혼란이며 불안하고 피곤한 삶입니다.
현대인의 궁극의 비극이자 불행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광야 인생 여정 중 심신이 피곤하면 언제나 찾아 머물 곳이 있는지요.
제 애송愛誦 좌우명座右銘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넷째 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이,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여기서 고백하는 자는 저일 수도 있고, 수도원일 수도 있고, 주님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영혼의 쉼터가 상징하는바,
영원한 안식처, 영원한 피신처, 영원한 정주처인 주님입니다.
하느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 바로 우리가 궁극으로 머물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닮아감으로 내 존재 자체가
주님의 안식처가 되고 싶은 열망을 반영하는 시詩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참 고마운 시편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이 영원한 안식처임을 제1독서 이사야서 중 다음 아름다운 신앙고백시가 입증합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오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주님,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했습니다.
아,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죽음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의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바로 이런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쉼터이자 안식처가 됩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이런 주님이 안식처가 될 때 비로소 내적 평화요 안정입니다.
부단한 파스카의 꽃 같은 삶이 가능합니다.
참 아름답고 깊은, 영혼에 깊은 위로와 평화를 주는 신앙 고백 시이자 기도입니다.
이런 영혼의 고백 기도 詩가 사라져 영적으로 참 궁핍한 현대인들입니다.
이런 주님을 떠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헛된 노고가 됩니다.
주님 아닌 어느누구도 영혼의 허기虛氣를 채워줄 수 없거니와,
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주님 안에 머물 때 다음 고백대로 의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주님이 영원한 안식처가 된 의인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바로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휴식 없는 평생 고통이 따르는 와중에도 깊은 평화와 기쁨, 감사가 넘쳤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안식처로의 주님의 초대가 참 고맙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영원한 안식처에로의 초대요 환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성구는 제가 고백성사 때 보속으로 참 많이 드리는 말씀 처방전 중 하나입니다.
새삼 안식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안에 머물 때 선사 되는 주님의 안식입니다.
안식만이 아니라 기쁨도, 평화도, 희망도, 행복도 주님의 선물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안에 머물 때 하사되는 참 좋은 주님의 선물들입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부단한 분투의 노력이, 필히 은총에 더해져야 합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지만 평생 항구한 분투의 노력을 요하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저절로 써지는 날마다의 강론이 아니라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은총의 선물처럼 탄생 되는 강론에 저절로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바로 예수성심의 사랑이 온유와 겸손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가 되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저절로가 아닌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의 학인이자 전사로서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훈련해야 주님을 닮아 온유와 겸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온유와 겸손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평생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을 날로 닮아갈 때
불편한 내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내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점차 바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웃에게 참 좋은 주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안식처가 쉼터가 없다 탄식할 것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어디나 영원한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막교부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려 사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이 질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깊다.
기초가 튼튼한 만큼 건물도 튼튼하게 지을 수 있으며 높이 올라간다.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갈등이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한다면 누구나 부정과 악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그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무게는 우리가 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멍에가 바로 나에게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양심과 도덕, 풍습과 관습,
그리고 법률과 헌법의 조화로운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양심과 도덕은 좋은 풍습과 관습을 만들어 주며,
이는 또다시 情感과 平和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이 개인적인 차등을 보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률과 헌법이 등장한다.
법이란 몇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제정되는 것이기에 다 같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준법정신은 법을 실제로 지키려는 의지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한다.
선진 국민일수록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 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 수준을 높이자고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먼저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인간적이고 보편적이지 못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제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한편으로는 통탄해야 하겠지만,
이왕에 제정된 법은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준수해야 할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이란 무릇 한자어가 뜻하듯이 ‘물(水)이 가는(去) 것’이다.
절대 거꾸로 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가며,
막히면 머물고, 넘치면 다시 가는 물의 흐름이 곧 법이요,
법은 극히 자연스런 理致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럽게 법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어떠한가?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은 다 모아 놓았다고 한다.
독일, 미국, 일본의 좋은 법은 다 갖다 놓았다는 것이다.
법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양심과 도덕, 올바른 양심과 보편적인 도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법을 잘 몰라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당하고,
경제적인 손해를 보며,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법은 이 국민 앞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
결국 법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법조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강한 자에게는 법을 피할 길을 가르쳐 주고 약한 자에게는
이 법, 저 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613가지의 율법을 짊어지고 살았다;(금령 365개, 명령 248개)
이런 율법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신께로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법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워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법이 아니라 가르침이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이며,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관습과 풍습이다.
이는 자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황금률: 마태 7,12),
하느님과 이웃을 동시에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사랑의 이중 계명 : 마태 22,34-40)이다.
물론 이 사랑은 나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그 알맹이를 채우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은 법의 멍에든 십자가의 멍에든 하나를 지고 가며 살아야 한다.
법의 멍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