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은 화려하지 않다. 두멧구석 혼기 찬 처녀처럼, 수수하다 못해
청초롬하다. 겨우 빗물이 한 겹 입혀졌을 뿐인데, 애오라지 청초한 자
태만으로도 산 맵시가 가을 테두리 안에서 가장 도드라져 보인다. 느
낄세라 내향적 숨결이 가만가만 현을 탄다. 그다지 수려함을 뽐낼 만
큼은 아니라도 계절을 갈아 타 잘 숙성된 청록빛이 만방에 퍼져, 궂은
날임에도 시계감은 좋다. 웃자란 코털을 연신 오비작거리는 청정 공기
도 짜장 쾌연상큼하다. 일견 무균질 산소탱크 같은 숲이 저만치서 어
서 오라고 손짓해 부르는 듯하다.
가을산에 장치된 갖은 물상들이 하나 둘 멋스러움에 겨워 빙그레
눈짓콧짓 바쁘다. 개중에는 몽실몽실 안개구름이 봉우리께를 에우어
싸안은 듯, 갈길 먼데 옴짝달싹 못한 채 덜미 잡힌 듯....아무러하든
보아 미소 짓도록 운치도 제법이다. 그러나 안개구름은 제 몸 풀어 분
분히 흩어지니, 산 넘고 또 넘어 긴긴 여정에 오르나 부다.
얼추 물빛으로 번진 듯 아롱진 듯 어리어 든 경관이 마침맞게 내
마음에 떡 안긴다. 엉겁결에 안고 보니 혼곤하다. 은근하고 께나른한
느낌이란, 아니나 다를까 구비길 천리만리 허위허위 달려온 낭인인들
무념무상이 용인될 턱이 만무하다. 기실 찰나 같은 다리쉼마저도 여의
치 않으니 연득없이 객수客愁에 들까불리는 맘인들 여북할까. 여기가
정녕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피앙세의 혼백이 서린 곳이란 말인가. 그림
이 눈깔 뒤집어지게 좋아 눈에 밟히는 족족 톡 쏘듯 하기만 하면 그다
지 황망할 일도 없겠지만 보풀처럼 이는 감흥이 꼬리를 잇는지라 국외
자다운 심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옥죈 가슴엔 긴장감만 감돈다.
바람결 한 터럭도 콧날을 베어내지 못하고 있다. 빗소리를 제외하
면 산중은 흡사 진공관 같다. 본디 있어야할 갈바람은 기다려도 여전
히 꿩 구워 먹은 소식이다. 대신에 숫한 이파리 위로 길길이 날뛰는 빗
발들의 화음만이 살살 귓불을 핥는다. 목덜미에도 입김 같은 게 스멀
스멀 타 내린다. 빗줄기를 들러리 세운 가을다운 유혹이라면 꽤나 관
능적이랄까. 호젓해서 더한 적막강산은 음감도 에로틱한.... 빗발들의,
빗발들을 위한 오선지로 적잖이 구색을 갖추고 있다.
석남사 일주문을 막 넘어섰을 때 나는 턱밑까지 단숨에 벅차오르는
감정 팽창에 까무룩 아뜩해지고 만다. 급격한 변화는 일주문 안팎 배
경이 천양지차인 것처럼 동선에서 이뤄졌다. 어림컨대 가슴이 얼마간
울렁거리는가 싶으면서도 땅 껍데기가 들고 일어나는가 싶은 어지럼
증 같은 거다. 잠시 동안 눈자위에서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렁그렁 눈물샘도 자극된다. 소리 되어 터지지 않은 탄성 끝에 덩달
아 등골도 오싹했지만 온몸을 초고속으로 죽 훑어 내리는 전이감도에
도 불구하고 나는 넋 빠진 허수아비의 가슴을 닮아 몸을 굳힌다.
모세의 기적을 환시케 하는 바닷길처럼, 어둑어둑한 숲정이가 양 옆
으로 갈리고 산사로 발부리를 향한 시식잖은 중생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예우이듯 얄브스름한 빛 무리가 역시 연한 감도로 길바로 숲길
을 열고 있다.
익히 울산신문 화보에서 보았던 석남사 진입보도이다. 그러니까 일
전에 보았던 게 쾌청한 날에 앵글 가득 포커스를 맞춘 석남사 가는 길
을 이미지화했으련만 가을 중에서도 가을비에 흠씬 젖은 길은 화보로
보았을 때보다 두어 겹 덧바른 충동을 야기 시킨다.
자극이 크고 느낌이 지대하면 사람은 한순간 최면에 걸린 듯 벙벙한
표정이 되고 만다. 희대의 명화에 매료되었다 하나 어찌 이보다 더한
감동으로 다가올까, 나는 숫제 빨려든다. 섬뜩한 희열이다.
길을 총체적 구도에서도 중앙에 놓고 길어깨로는 첩첩이 도열하듯
갖은 수종의 나무들과 푸새, 그리고 새새로 크고 작은 암반이 어박자
박 다소곳하게 모습을 갖추고, 길 아래 좁은 계곡을 좔좔좔 타 내리는
물소리까지 한통치자면 묵빛 질감이 전체를 아우르지만 다채롭고, 길
위로 희읍스레 번져드는 여백에서 공감각적인 정서와 그윽함으로 비
롯된 한국화다운 백치미, 그 조화야말로 원초적 자연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예술적 미학이라면 자연이 그린 화폭 중에서도 정히 걸출하다 할
만하다. 이를테면 한눈에도 촉촉한 느낌이 여실한 수묵 담채화답다.
아까 일주문 앞 매표소 상단에 '9분의 여유'라 명시된 문구 앞에서
잠시 의뭉스러워 한 적 있었는데, 그 이유를 몇 걸음 옮긴 지금에서
알 것 같다. 여러 느낌을 원 없이 추려내기에 족한 진입로를 후다닥 빠
른 걸음으로 재우칠 것 같으면 천추의 한이 될 터이다. 9분의 여유가
아니라 한 시간의 여유를 부려도, 아니 여유라기엔 좀 멋쩍도록 쓰잘
데기없이 밍기적거린다 쳐도 이 시간 길 위에서 결 고운 마음 빛으로
거듭날 수 있고, 스스로를 위무할 수 있다면 다시없는 행복임을 깨닫
는다.
나는 돌연 봇물이 이는 듯한 느낌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완
벽한 재충전을 꿈꾼다. 평소에도 가뜩이나 느리게 걷는 편인데 한 걸
음에 2초의 여유를, 것도 빠른 것 같아 한 걸음에 3초가 흐르고 남을
만큼 다분히 달팽이다운 노정이다. 어떤 경우에서 건 자기가 좋아할
만한 것에 가슴을 열어 헤아릴 수 있다면 그보다 기꺼운 일도 없을 것
이다. 예서 뿐만 아니라 사색을 모토로 삼은 유랑길이나 산행이 그러
하였듯 걸음걸음에 느림의 미덕을, 그리고 머리로는 문학적 사고를 기
억회로에 긁어모은다. 분위기가 그러루할 땐 아주 느리게, 고전적 가
락에 맞춰 숨고르기 하듯 보폭을 조절해야지 만이 사색을 위한 날개짓
이 힘차다. 그러노라면 비로소 바라마지 않던 카타르시스를 절감할 것
이다.
석남사까지는 짧지만 결코 짧지 않다. 시간이 더해지면 질수록 빗
발은 세를 불렸지만 나는 첫발을 내디딜 때 그대로 느린보 걸음에 재
밌어 한다.
'고독과 게으름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라고 도스트예프스키는 말했
다. 문학적 사고를 진작하기 위해서는 고독은 필수항목이고, 게으름은
일종에 느림으로 말미암은 두뇌회전의 빠른 처리 감도를 사사해 준다,
라면 엉터리없는 억측일까. 우성형질을 띤 사색을 위한 최적에 조건
앞에서 고독과 게으름은 얼마간 초석이 될 법도 할 것이다.
대구에서 활동 중인 수필가 백혜정님은 자신의 수필집에 이렇게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고독이 버릇인 양 몸에 익도록 나는 이따금 밤새워 명상에 잠기곤 한다. 외로움은 면역력이 강한 병원균이 허름한 마음에 둥지를 트는 것과 같다.여자의 세월은 외로움으로 점철된 고립무원이다. 이렇듯 나도 천상 여자여서 입때껏 외로움 앞에 수도 없이 허점을 보여 왔다. 그래서 오랫동안 극복하는 훈련을 해오고 있다. 고독과 명상만을 넘치게 채울 수 있는 새벽 시간은 나를 나답게 무장하고, 단련할 수 있는 보배로운 시간이기에 구애됨없이 명상의 뜰에서 훨휠 나닌다.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명상은 상상력을 기름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모진 세파를 헤쳐 오느라 깜빡 잃어버렸던 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다지는 절호의 기회이다.'
예의 숙련된 명상의 산물 때문에 그러한 걸까. 백혜정님의 수필은,
미려하고 정돈된 문체는 거론의 여지도 없고, 이를 능가하는 깊고 하
염없는 향이 잔잔한 물결 되어 읽는 이의 가슴에 일렁이게 한다. 어쩌
면 이 분의 수필집을 펼쳐보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성서나 법구경을
헤아릴 때처럼 엄숙해지곤 한다. 지은이의 삶의 철학과 해법이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느린 걸음에도 어느새 다 왔을까 아쉽도록 저만치서 얼핏 석남사 추
녀 끝이 빗줄기에 가려 아스라하다. 은연중에 뜻 모를 서운함이 슬몃
슬몃 밀려든다. 애당초 목표 한 바 다다른 그곳이 목적이 아닌 알알이
헤집어 가는 노정을 화두로 삼은 터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별안간
우뚝 발부리를 모은다. 그리고 왔던 길을 외어서서 쓱 돌아본다. 거닐
때 그대로 텅 빈 길만이 덩그러니 휑하다. 길은 꿈의 나라로 가는 유일
한 통로처럼 보여 진다. 평일인데다 간단없이 내리는 가을비 때문일
것이다. 인적을 어디서도 찾아볼래야 볼 수조차 없었던 게 자못 의아
스러웠다. 때문에 삽시고, 잠시에 지나지 않지만 귀기 어린 일련의 징
후가 적당한 빌미를 안기고 나는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성근 어둠살
이나 나울대는 해넘이일지라도 산중엔 이미 초저녁을 예보하는지라 더
욱이 그러저러하다.
아무래도 좋다. 앞서 말했듯 두려움은 스치는 환각일 뿐, 평상심을
회복하자마자 천혜의 환경이 배려한 그 느낌 그대로 달보드레하다.
목하, 나는 분에 넘치도록 행복하다. 행여 누가 되었든지 간에 곁
에 동행이 나란히 한다, 라면 그보다 큰 불행은 없다 싶을 정도로. 혼
자감으로 사색의 눈덩이를 굴리는 낭인에겐 단지 무따래기, 즉 훼방꾼
에 불과하다. 곁이 빈자리여서 그저 천행이고 누굴에게랄 것도 없이
고맙다.
한발 두발 걸음을 보태는 숫자 못잖게 내 가슴에 잦아든 감격도 각
일각 더해 만 간다. 그러고 보면 나는 무엇엔가 동화되기 무섭게 심약
한 맘이 숨김없이 까발려지는 편인데, 북받친 가슴에 왠지 코끝이 시
큰한 것이 바로 눈시울에 이슬이 맺히고 만다. 이처럼 푸짐하고 꽉 찬
정감을 품에 보듬어 체감하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뜻 없이, 그러나 불
시에(단 한 번 주저함 없이..) 석남사 행을 도모한 게 어마어마한 여파
를 낳았다, 라면 나는 진정 그러하다, 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누군
지 기억은 없지만 석남사의 진면목을 소개한 울산신문 그 기자에게 할
수만 있다면 거하게 술 한 잔 사고 싶다.
대략 보름 전쯤일 것이다. 식당에서 본 신문이 나를 이곳으로 길라잡이
한 숨은 공로자였다. 예의 주말 기획기사였는데, 여유와 사색이 전무하
다시피 한 도시인을 겨냥해 다뤄진 듯한 인상이 짙어보였다. 정작 석남
사 자체보다는 가을날 사색을 탐닉할만한 적소로 진입로를 부각시킨 기
자의 빼어난 글 솜씨에 내심 동요되었다. 그때 신문을 읽는 동안에도 환
상 모드로 전환됨과 동시에 이미 나는 석남사 진입보도를 유유히 거니는
착각에 사로잡혔던가 몰랐다.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좀은 한갓진 시간
이 오면 응당 가 보아야지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석남사 추녀와 용마루가 보이는 모퉁이께에 달하자 조그마한 매점
이 한가롭다. 매점에 가까이 와서 보니 셔터는 굳게 내려져 있고, 처마
밑 간이쉼터는 오랜 시간 방치된 듯 싸늘하다. 플라스틱 의자에 이끼
의 흔적이 보인다. 가을비를 탓하랴, 당장에는 석남사가 뭇 세인들에
게 외면당하는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해도 언제 적부터인지 오래된
불빛 같게도 커피자판기엔 불이 켜져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
나칠 수 없는 그 심정이 바로 내 심정이다. 마침 커피가 고파고, 음미
할 것 같으면 커피 열량은 깡그리 군살 오르는데 일조할 터이다. 아니
사고의 수위를 높일 것이고, 넓이 또한 만장하게 할 것이다. 가장 시장
할 때 먹는 끼니가 체내에 잘 흡수되듯이, 정신 감정에 덕지덕지 붙은
군티야말로 커피 맛을 느껴 상상력의 풍요를 실감하기에 넉넉하다.
이윽고 석남사 경내로 들어섰다. 종점이면서 반환점이다. 사색의
대단원은 여기서 더욱 매듭을 조여 마침표를 찍을 것이고, 또한 돌아
나오는 길엔 버캐처럼 찌든 마음의 짐을 부렸으니 홀가분할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고단한 생이 애처롭다 여겨 당신 곁에서 잠시 쉬어
가라, 직언하셨다. 또한 이어서 가로되, 부처는 섬겨 경배해야할 신앙
이 아니다. 각자 중생들 마음이 곧 부처다, 차분히 생각하고, 바른 정
신으로 정진토록 힘쓰라, 고도 했다. 그러나 미욱하기 짝 없는 나는
마음에 부처가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수행의 한 방편으로 명상하고,
정갈케 할 요량에 가풀막진 돌산일망정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장님이
광명천지를 만나 듯 스스로가 만든 부처를 영접할 법도 하겠지만 요
원할 따름이다.
산사 주변에서 영험한 기운이 헤쳐모여 집약된 듯 감응된다. 워낙에
미거한 몸인지라 도량 깊은 산사를 속속들이 헤적거릴 순 없지만 은근
스레 스멀대는 사찰 특유의 정서임에 의미심장함 그대로 감화된다.
어디에, 어떤 산사나 휘갑하고 있는 기운만은 감히 속인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구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짐짓 여기 또한 뭇 수
도승들의 수행 정진의 본산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엄엄한 맘은 겹겹이
두께를 더해 돌연 참선에 들도록 종용하는 듯하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아본다.
돌이켜보니 일주문을 기점으로 석남사까지 오기까지 머나 먼 여정
같았다. 앞서 '9분의 여유'라 했듯이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9분이면
좋이 당도할 거리지만 나는 엉금썰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1시간
여를 족히 소요했다. 그러나 시간상의 숫자로 만 따따부따 할 수 없는
행보였다. 기실 어마어마한 시차를 불풍스레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굴비 꿰듯 했기 때문에 생각으로 읽히는 시간차는 몇 년 세월
을 훌쩍 살아버린 느낌이다.
나는 무늬도 다양한 사색을 묶어 알찬 배움을 섭생했고, 하여 이전
까지 탐탁찮았던 정신 건강도 회복기에 접어든 기분이다. 아울러서는
삶을 올바르게 가리사니 할 모범답안도 찾은 듯해 뿌듯하다.
석남사로 가는 길이나 나오는 길에서나 비슷한 비율로 분위기에 취
하긴 마찬가지다. 생리적 신진대사를 송두리째 쥐고 흔드는 취기 어린
여운이 거들먹거리자 나는 헤벌쭉 웃고 만다. 그리고 우산을 접어 약
해진 빗줄기에 몸을 맡긴다.
저만치서 매표소에서 본 그 비구니가 우산도 없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온다. 일주문 밖, 사바세계의 여인들에게서나 맡을 법한 향이 아
직은 잔양처럼 감도는 비구니다. 매표소에서 경황없어 할 때를 회억하
자니 다시금 설핏 어이없다 웃음이 난다. 무슨 생각에 골몰하다 그랬
는지, 선생님 앞에 해찰하다 들킨 악동처럼 놀래 화등잔만한 눈으로
엉겁결에 비구니와 눈을 맞추고 말았는데, 엉뚱하다 생각되었던지 비
구니가 실실 미소를 자아내지 않았던가, 내심 어! 비구니도 웃네,..나
는 생각 속에서 말했었다. 비구니가 웃는 거 난생 처음 봐서 신선한 충
격이기도 했다. 그런 비구니의 이미지를 보아 형용할 수 있는 건, 고운
낯에 미소를 그려 넣으니 더할 데 없이 해사한 소녀의 미태로다, 였다.
모르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비구니를 추앙이 아닌 능갈치려 든다면 석
남사 대웅전 안 부처님의 귀를 열고, 눈을 뜨게 하고, 이내 가부좌를
풀어 버선발로 달려 나와 대뜸 멱살잡이하려 들지 않을까.
비구니와 마주보고 엇갈리기 몇 걸음 전에 나는 허리를 굼닐거려 예
를 갖춘다. 비구니 역시 받아 합장한다. 장삼자락 나풀나풀, 막 스치는
순간 생각의 구심점은, 온통 비구니에게 정신이 팔려버린다.
석남사 방향으로 십여 미터, 점점 거리는 멀어지고 비구니의 형체가
가뭇없어질 때까지 나는 오도카니 서있다.
기약할 순 없지만 이후로 다시 가을비 내리는 날, 나는 이곳을 걷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스스로가 명명한 도솔천에서 해묵은 정신 토양을
갈아엎는데 진력하고 있으리라.
가지산의 청초함이여, 석남사 가는 길에 벗스런 도솔천이여..보아
마음 주었으니 우리의 인연은 두고두고 푸르리라..
첫댓글 엊그제 같은데..벌써 작년 가을 일이네요..울산 현장에 있을 적인데..석남사 뿐만 아니라..울산에 명주님이하 여러 사람이 계셔서 뜻 있었고, 나름으로 소중한 추억 속 한때였었지요..
^^;;
해조음님 글씨좀 따닥따닥 붙여주면 안 될까요? 좀 정답게 붙여주시지... 집중이 안되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