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같이 쓸려다 너무 길어져서..
2. 군사
북아프리카 지역의 군대의 많은 수는 노예였다. 준드(jund)라 불리는 토착민은 대개 제외되었다. 가령 아글라브조의 수도 압바시야에 주둔한 군대 5천명은 노예군이었으며, 파티마조의 핵심주력 역시 쿠타마 부족과 아비드(abid)라 불리는 흑인노예군이었다.
쿠타마 부족은 파티마조 시기 세금이 면제되는 등 굉장한 특권을 누렸으며, 초기 파티마군에서 활동했다. 파티마 왕조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으나 쉽지 않았다.
쿠타마의 독세는 파티마조가 이집트를 벗어나 시리아로 진출하면서 끝나게 된다. 시리아에서 투르크인들과 맞서싸우게 되면서 뛰어난 궁수의 부족함을 체감했던 이들은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가 막힌 대안을 내놓는다. 즉 우리도 투르크인들을 데리고 다니자는 것.
<파티마 왕조의 군대>
978년 알 아지즈가 시리아에서 알프 테긴의 군대를 힘겹게 격파한 후, 이런걸 체감한 이맘은 990년 알 아지지야라는 군대를 창설한다. 길맨(ghilman)이라고 불리는 노예 출신의 투르크 기병대로 구성된 이 군대는 카쉬가르 출신의 투르크인인 아누쉬타킨 앗 디즈비리에 의해 통솔되었으며, 후즈라(hujra)라 불리는 병영에 주둔했다. 또한 그는 노예병에 대한 궁술 훈련에도 집중했다. 바로 여기서 이집트 정계의 한 축인 투르크 군벌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알 아지즈는 그 스스로가 투르크군의 후원자가 됨으로써 그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내는데에도 성공했다.
이에 반해 흑인 노예군은 알 아지즈가 하던 거라면 뭐든 싫어하던 알 하킴 시대에 크게 성장했다. 카이로의 알 파라히야 지역에 모여 거주하던 이들은 주로 중무장 보병으로 활동했다. 다알림인들은 궁수, 투창병등 경무장 보병으로, 투르크인들은 기마궁수로, 베르베르인들은 창기병이 주종목이었다. 11세기 중반 이집트를 여행했던 페르시아 쉬아파 무슬림인 나스리 쿠스라우는 서부 베르베르인들인 마사미다 베르베르족은 창과 칼을 쓰는 보병으로, 흑인들은 칼을 쓰는 보병으로, 베르베르인들은 창을 다루는 기병으로 활약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투르크군, 흑인 노예군이 발전하는 동안 쿠타마 부족은 점차 정주민에 동화가 되었고, 이 와중에 유목민이 가지고 있던 강점들을 잃어버려 점차 약화되었다.
위에 나온 니자리 쿠스로우에 따르면 1047-48 시기 파티마군은 2만명의 쿠타마 기병대, 15,000의 바틸리야 기병대, 20,000의 마사미다 보병대, 10,000의 페르시아, 투르크인들과 50,000의 아라비아의 베두윈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066년부터 시작된 알 무스탄시르 치세의 내전 시기에 파티마군은 30,000의 흑인 노예병과 5,000의 쿠르드군이 있었다고 한다(더 있었지만 나머지는 빠졌을것이다. 내전을 몇년 했는데 30,000명이 5,000명을 7년간 못잡는다고?)
일반적으로 아랍군 하면 무지막지한 대규모 군대를 떠올리지만, 사실 아랍측에서도 도시 비정규병이 아닌 정규군은 그닥 동원규모가 크지 않았다(십자군에 비하면 막대했지만) 후기 파티마 군은 최대 2만 5천명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1171년 살라딘이 이집트의 통치권을 잡을때 병적에 올라있던 군인은 총 8640명이었다. 같은 해 11월 살라딘은 14,000명의 기병을 동원했다.
또한 시리아 지역의 대도시들은 각자 민병대를 보유했는데, 12세기 초반 다마스쿠스, 하마, 알레포는 천명, 힘스는 500명, 모술 지역은 1500명 정도를 동원할 수 있었다.
각 병사의 급료는 다 달랐다. 일반적으로 투르크인이 제일 높은 급료를 받았으며, 흑인들은 가장 적은 급료를 받았다. 많은 흑인병사들은 도시 근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부가 소득을 거두었지만, 세금은 내지 않았다.
파티마군은 십자군을 상대로 한계를 드러냈는데, 투르크군과 달리 궁수 대부분이 경무장 보병이었다는 점, 기병대의 기동성이 떨어졌다는 점에서 십자군의 개돌에 취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알 무스탄시르 시기 내전으로 인해 군대의 피해가 컸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것이다.
알 아흐달은 계속되는 실패에 쇼크를 먹고 군대를 개혁하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게 후자리야 군이다. 실랸(silyan)이라는 어린 소년들을 합숙시켜 만든 3~5000의 기병대였으며, 여기에 더해 시반 알 카스(sibyan al khass-미디블 2 킹덤즈 크루세이더에서 이집트 특수유닛으로 나오는 애들)이라는 부대를 새로 창설한다. 이들은 사망한 장교나 관료의 아들을 징집해서 만든 군대로 노예병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나 노예병과 달리 이들은 지체높은 가문의 자유민이었기에 혹독한 훈련을 시킬수가 없었다(노예야 새로 사면 된다지만) 그렇기에 이들의 도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135년 이맘 알 아미르가 직접 관심을 써 준비하고, 무에진, 의사, 코란 독경사들이 대동했으며 기병들의 급료는 이맘의 국고에서 지급될 정도로 중요한 워정이 개시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다미에타, 아스칼론이 총 지원 모드에 돌입했고 점호('ard)가 철저히 이루어져 탈영을 막았음에도 십자군에 의해 16,000명의 병력이 패주하고 6,000명의 흑인군이 전사하는 패배를 맛보았다. 장비나 준비 측면에서는 십자군을 앞질렀지만 제일 중요한 전투력에서는 항상 뒤졌다. 1153년 아스칼론이 함락당할때에는 군사령관 이븐 살라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구원군의 출동이 늦어지기도 했다.
해군에 있어,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 해군과 맞서 싸운 유일한 해군이었다. 파티마조의 반격은 주로 육군과 해군이 같이 발을 맞추어 나가는 식이었으나 1102,1103,1104,1105 년에 이루어진 원정에서는 해군에 비해 육군이 너무 일찌감치 털러버려 모조리 작전이 실패해버렸다. 또한 계속 턴을 돌아가며(제노바 베네치아 피사 프랑스 영국 심지어는 노르웨이까지) 보충되는 십자군 해군에 비해 이집트 해군은 혼자 싸워야했기에 문제가 많았으며, 1109년에는 제노바 해군에 의해 트리폴리를 잃기까지 했다.
이처럼 물자가 달리다보니 1105년 폭풍으로 25척의 배를 잃고, 1110년 베이루트에서 19척의 배가 나포되는 등은 타격이 컸다. 그러나 1115년의 자파 공격 당시에는 무려 70척의 전함을 동원할 수 있었으나, 어딜가나 육군과 손발이 안맞는다는게 문제였다. 1123년 자파 공격때는 육군이 뻘짓을 하는 바람에 80여척의 해군이 물러가던 도중 베네치아의 기습을 당해 28척의 전함과 4척의 수송선을 잃는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파티마 해군의 약세는 일단 항구의 부족에 기인했다. 주요항구인 트리폴리가 일찌감치 함락당하자(1108년 파티마조에 반기를 든 바누 암마르 가문을 체포할때는 득달같이 달려들던 파티마 해군이 다음 해 트리폴리 구원에는 무지하게 굼떴다) 레반트 지역의 항구는 거의 없다시피해서 모두 가자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해야만 했다. 또한 수적인 열세도 한몫했는데, 1163년 십자군은 100여척을 동원할 수 있었고, 후대의 맘루크는 75-80척에 달하는 전함(shini)와 20척의 그리스의 불을 장착한 화염선(harraqat)를 동원했지만 파티마조는 7~80척을 동원하는 규모였다. 1169년 다미에타 공성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무려 200척을 동원했으며, 1174년 알렉산드리아 공성전에서 노르만도 비슷한 수를 제공했다.
해군성(diwan al jihua)에는 5천여척의 배의 명단이 있었으며, 각 배의 규모에 따라 20, 15, 10,8,2 디나르씩의 자마키야를 지불했다. 원정 시에는 선원당 5 디나르씩을 제공했지만 선원은 육군에 비해 박봉에 시달렸다. 이들의 비용은 광산수입에서 지출되었다.
해군은 카크(ka'k)라 불리는 비스킷을 주 식량으로 썼다.
살라딘 시대에는 해군이 독자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전함이 필요하면 병력이 강제징집되어 죄수처럼 일하고는 했다.
아래 서술했듯이, 12세기 바드르 알 자말리 이후 군사-재상들이 실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최대 약점은 그들의 기반인 군사력이 수도에 들어오게 되면 전투력이 약해진다는 것이어서 이들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 시기 다양한 군벌이 경쟁하다보니 흑인, 베르베르인, 투르크인, 아르메니아인등 다양한 집단이 활동하게 된다.
알 아흐달이 만든 시바인 알 카스 군은 알 하피즈 시대 세력을 잡았던 아부 알리 쿠타이파트에 의해 만들어진 야니스 군과 대립했으며, 야니스 군은 알 하피즈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 노예군인 라이하니야 군과 대립하는등 다양한 군사집단의 충돌이 장식한게 12세기였다.
이 내란 이전 군대는 중앙의 관청에서 급료를 받았다. 비록 알 하킴이 익타 제도(장군등에게 봉토를 주고 그 봉토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일정 군대를 유지하게 하는것)를 도입하려고 시도 했으나 그의 행방불명 이후 시트 알 물크에 의해 백지화되었으나, 12세기 내란 이후 군 우두머리의 입김이 강화되면서 익타 제도가 활성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자신들의 거주지를 지켰던 베두윈들은 거의 익타를 통해 급료를 받았는데, 한 예로 아스칼론을 지켰던 카나니야 베두윈 족의 익타는 아스칼론 총독과 군사령관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12세기 이븐 루지크 시대에 파티마 군대는 3만 6천명의 흑인 군대와 4만명의 기병, 100여척의 전함과 1만명의 해군이 있었으며, 시르쿠 시대의 파티마 군대는 4만명의 흑인 군대와 1만의 기병, 1만의 해군이 있었다. 전자에는 익타 베두윈 군이, 후자에는 익타 베두윈군이 포함되지 않은걸로 볼때, 후대 파티마 시대에는 익타를 통해 봉급을 받는 베두윈군의 규모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