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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에서 돋아난 조각품들이 곳곳에 자리한 전경에 눈이 또렷하게 둥그레진다. 숲속 갤러리 2층은 전시 준비가 한창이다. 캔버스가 들린 발자국들이 오후의 정적을 깨뜨리느라 요란하다.
못 한 번 박아본 적 없는 손으로 나사못을 쥔 왼손에는 면장갑을 꼈다. 저돌적으로 돌진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드릴, 하얗고 말끔한 표피에 일부러 상처를 내기가 안타까워 망설이는 손의 동그라미 안에서 못이 떨고 있다. 값싼 동정에 흔들리면 흠집이 더 커지기만 할 뿐, 벽이 감내하는 고통을 경감시켜 주지 않는다. 나는 자세를 다잡고 일자로 세운 못 등뼈에 드릴을 한 번에 쭉 밀어 넣었다. 단단한 벽을 관통하는 찰나 오른팔에 전해지는 진동이 제법 묵직하게 울렸다. 이마를 적신 땀방울이 콧등을 타고 떨어졌다. 낯선 작업에 긴장으로 어깨 근육이 뭉쳐왔다. 벽은 마침내 필요한 수만큼의 구멍만을 품고 그곳을 양손으로 부여잡은 캔버스로 가렸다.
무더운 여름 내내 퇴근길 위에서 달빛과 마주 보면서 열정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붓을 쥔 손끝에서 흘러나온 파도와 바람, 모래와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며 구슬땀으로 완성한 작품들이다. 저마다 좋아하는 그림으로 들고 있는 벽이 아름답다. 사람들이 하나둘 혹은 그룹으로 관람하기 위해 전시실에 들어선다. 취향을 알아챈 그림 앞에 한참 서서 감상하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며 마음속에 그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예정된 전시가 끝난 저녁, 벽에서 캔버스를 모두 떼어냈다. 그림이 다치지 않게 포장으로 감싸 모두 차에 실어 보내곤 열어 놓은 미닫이문을 통해 바깥의 바람만이 굴러 들어오는 휑한 갤러리로 올라왔다. 텅 빈 벽은 전시 기간 내내 갤러리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체온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들이 남긴 시선과 손짓, 이야기들이 여전히 공기 중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전동 드릴을 다시 들고 내 눈높이에 있는 나사못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못이 빠져나간 자리가 빈 벽들이 서로 마주 바라본다. 정맥이 비칠 듯 깨끗했던 하얀 피부에 수두 자국처럼 흠이 점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상흔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그림을 품을 수도, 사람들의 숨결과 표정을 눈높이에서 마주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갤러리와의 약속된 시간이 임박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향한 빠데 후속 작업을 위해 주걱을 들었다. 흉이 생긴 곳에 옅은 회색 반죽을 떠서 세심하게 채우고 손끝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사포로 다듬어 매끄럽게 돌려주려 애썼다. 다음 기획전을 기다리며 벽은 설렘에 어린 결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깨닫는다. 나도 벽과 닮아있다는 것을.
작은 흠 하나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다. 몸에도, 마음에도. 발바닥이 페달에 가닿지 않는 어른 자전거에 올랐던 첫날 얻은 흔적은 남아 비탈에 굴러떨어진 통에 제대로 타지도 못한 채 피만 봤을 때를 가끔 투척하곤 한다. 이상하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찾지 않는다. 완벽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사람이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완벽함은 고독할 수 있다. 모난 데 없이 반듯한 사람보다 조금 깨지고 금 간 사람에게 마음 길이 움직이곤 한다. 갤러리의 흠 없는 벽이 인테리어 잡지 사진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울지 몰라도 작품을 가슴팍에 걸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이 없고 아픔에 면역력이 없는 사람에게 기대거나 경험에서 우러난 위로를 받을 순 없다. 삶의 깊이가 얕은 못에서 진정한 공감의 물안개가 피어오를 순 없다. 어쩌면 흠집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작은 통로인지 모른다. 아름다운 것은 흠을 통해 더 선명하게 밀려온다.
원 데이 수업에서 손수 만든 나무 스피커를 가지고 있다. 만들려면 울림통이 중요하다. 멀쩡한 통나무에 적어도 구멍 둘은 뚫는다. 속이 텅 빈 내벽에 부딪혀 소리가 깊어진 멍을 통해 밖으로 퍼져나간다. 그 흠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흠을 만든 못을 꾹 물고 있어야 그림을 안을 수 있다. 사람도 상처가 있어야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품을 수 있다. 흠 없는 벽이 무의미하듯, 그것이 없는 삶은 단조롭고 밋밋한 악보 같다. 삶에서 생긴 흠집은 미운 상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철학적 울림을 담은 채 이웃과 사회를 잇는 따뜻한 가교가 된다. 흠 속의 울림은 그래서 비거리가 길다.
다시 전시실 벽 앞에 섰다. 새 전시가 시작되면 전동 드릴이 목소리를 낼 것이다. 미간에 주름이 고여도 벽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질끈 눈 감을 것이고. 우리는 저마다 흠을 품고 살아간다. 흠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흠집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다고 귀띔하는 벽이 달빛에 창백하다. 그 흠집을 통해 우리가 더 넓은 세상을 품을 수 있다는 듯 하얀 미소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