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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잠언의 말씀 21,1-6.10-13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5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6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렉시오 디비나의 맥락에서 보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선포와 경청, 등불의 비유-묵상과 기도, 영적 가족-관상),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 루카 9,48; 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명사보다 명사이신 주님, 어떤 명언보다 명언이신 주님 말씀>
어디를 가다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을 들르면 거기에 명사들의 명언이라는 것이 걸려 있는데, 그 명언이라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참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뭐 저런 것을 명언이라고 걸어놨나?' 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판적 시각으로 보다가 비판의 화살을 저 자신에게 돌리면, 명사들은 비록 하잖은 말일지라도 그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실천하여 명사가 된 데 비해, 저는 그것들보다 훌륭한 말씀들을 많이 알고 있어도 그걸 실천치 않아 이모양 이꼴이라는 자조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명사名士들의 명언名言이라는 것들보다 더 금과옥조로 여길 주님의 말씀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오늘 잠언의 가르침들도 실로 금과옥조들인데도, 명사들이 주님보다 더 명사들이라고 여기기에 주님의 말씀을 명언 삼지 않고 명사들의 말을 길잡이 삼아 살아가고 좌우명으로 게시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 중의 한 구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21,2)
여기서 사람의 길이란 주님의 길이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시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인데, 그 길이 아니라 자기가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가거나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길을 다른 사람의 말을 등불 삼아 가지요.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만나기 전에 저는 편력遍歷을 많이 했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방황彷徨을 많이 했습니다.
제일 처음 불교佛敎에 심취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으로 인도 철학印度哲學과 명상법瞑想法에서 평안을 얻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으로 노장老壯 사상을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마디로 이것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얻는 법, 곧 도道를 닦으려 했지 하느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교 신자임에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십년을 편력을 하고 방황을 하다가, 비로소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가기로 제 인생의 행로行路를 정하였으며,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은 이제 저에게 큰 의미가 없고, 그래서 다른 책이나 글은 거의 읽지 않지만, 문제는 그 실천인데, 앞서 봤듯이 명사名士와 저의 차이가 바로 이 실천입니다.
명사가 붙잡고 놓지 않았고 또 초지일관 실천하였던 말보다 더 훌륭한 주님 말씀을 붙잡고 있지만 실천에 불성실했으며, 그래서 주님 말씀이 제 안에서 자라지 않고 체화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제 안에서 체화滯貨되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저도 하느님 말씀의 실천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게 주님은 뭇 명사들보다 명사이시고, 주님 말씀은 어떤 명언보다 명언인지를.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 형성>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인 결합과 통교가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이웃과의 관계도 새롭게 형성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또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히브 2,12-13)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 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 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 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 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 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 (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스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스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나 깊이 새기고 곱씹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 말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때로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대적 간극, 문화나 언어 습관의 차이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의 시선이 지극히 인간적이거나 편협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으로 마리아에 의해 잉태되시고 출산되신 한 인간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이십니다.
작은 고을 나자렛에 머물러 혈육이나 지연에 묶여 평생을 지내셔야 할 분 절대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혈육이나 인연, 지연이나 학연을 초월하는 크신 분, 세상 만물, 인류 전체를 주관하고 구원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서 다음의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위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촌들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아직 예수님의 애매모호한 말씀의 진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들으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향한 극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 무수한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주님 말씀을 충실히 듣고 묵상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행한 사람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이라면 말씀을 잘 듣고 들은 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1)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느님 나라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을, 즉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말은 ‘실행’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하느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빈껍데기 신앙인으로 사는 죄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죄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자기는 충실한 신앙인으로 잘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2)
‘말씀’을 아예 듣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처음에 집을 떠날 때의 작은아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아버지가 그를 타일렀을 것이고, 식구들도 말렸을 텐데, 그는 마음껏 살고 싶다는 욕망에만 사로잡혀서 아버지의 말도, 식구들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배반자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은 채로 제자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다 자신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았고, 끝내 멸망을 향해서 가버렸습니다.
복음을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아예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스스로 크게 깨닫고 뉘우치는 것 말고는...
3)
‘말씀’을 듣고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사제와 레위인이 그 경우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계명과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계명과 율법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기가 싫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린 것은 ‘큰 죄’입니다.
또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도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면서도 ‘아무것도 안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라자로가 누워 있는 것을 못 본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외면했습니다.
그는 오며가며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습니다.
4)
‘말씀’을 듣고, 또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긴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인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9)
이 말씀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질문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좋은 일도 하지 않고, 목숨을 구하는 일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성경 해석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5)
어떤 경우든지 간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이거나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원하는 하느님 나라는 관광지가 아니라, 인생 전부를 걸고, 목숨을 다 바쳐서 간절하게 찾아가야 하는 생명의 집입니다.
아무리 성경과 교리를 잘 알아도 바로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바위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루카 8,13)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걸었던 길을 아까워하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산>
회개에 신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므로 뉘우침에 이르지 않으니 길하다.”
<주역>
늘 깨어 살 때 큰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제목 '예수님의 참가족'이 맘에 들어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혈연 가족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참가족의 이상이 참 원대합니다.
예수님의 품은 그대로 온 인류를 품에 안는 하느님의 품임을 봅니다.
인류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마음을 넓고 깊게 멀리 개방해야 함을 봅니다.
교회가 날로 예수님의 큰 품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자 누군가 예수님께 전달합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즉각적인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화두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말씀인지요!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시공간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를 실천하며 참으로 반듯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도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혈연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품, 하느님의 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교회요 우리 마음이면 참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참가족의 생생한 증거가 교회공동체요 이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미사 한번만 함께 하면 국적, 인종과 상관없이 한가족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디에서나 미사에 참여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 한가족임을 체험하지 않는지요!
도대체 미사전례가 아닌 그 무엇이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을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을런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사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듣고 실행하여 사는 이들은 그가 어디에 있던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사랑하여 듣고 공부하며 실행에 옮기는 삶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참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은 단 하나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하는 것뿐이요, 부단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평생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전 삶을 요약하는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시종여일(始終如一), 한결같이 평생 하느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실행한 '예스맨(yes-man)'이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잠언의 현자가 말하는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손(in God’s hands)’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의 지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려는 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임금의 마음은 주님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끄신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그러니 말씀에 맛들여 잘 듣고 실행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세상맛이, 돈맛이 아닌 하느님맛에 살게 하는 말씀맛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란,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라는 시편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제가 피정지도시 자주 드는 예에 웃습니다만 대부분 공감합니다.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을 북돋우는 ‘말씀맛’만이 ‘돈맛’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주님의 법'이라는 제하에 무려 176절에 이르는 제일 방대한 시편입니다.
흡사 ‘말씀 찬가’같은 시편입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이 더욱 말씀 사랑과 실행을 고무합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을,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말씀이 사람이 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온전하고 충만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자 영이요 주님의 현존입니다.
다음 히브리서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우리의 주님 향한 갈망은 시종일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될 때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성서는 1권의 책이지만, 73권의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 성서의 제목 중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 이사야와 같이 구원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전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대부분이 남자의 이름이지만 여자의 이름으로 된 책도 2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테르와 룻입니다.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왕국의 왕비였습니다.
에스테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를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한 에스테르는 용감하게 왕 앞으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남편이 죽어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룻은 보아즈를 만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에스테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이방인 여인이었던 룻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지위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업적의 크고 작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혈연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저의 사제 생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경기도 적성 성당입니다.
그곳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미사 예물과 사무장 급여를 교구에서 지원받았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식복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3년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청소, 세탁, 식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 주일미사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
군인이 오거나,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권도를 시작했고, 농산물 직거래도 했고, 비디오 대여도 했고, 차량 봉사 팀도 만들었습니다.
3년이 제게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부족한 능력이지만 교우들과 알콩달콩 사목의 기쁨을 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목 체험을 발표했고, 그 소식이 교구에 전해져서 다음 임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사목국에서의 업무는 적성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구역장 교육에 지구마다 700명이 넘게 왔습니다.
남성 구역 봉사자 교육에는 2,000명이 넘었습니다.
예산 규모도 달랐고, 만나는 사람도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성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명동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관계>
2016년,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즉,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를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사회를 더욱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제정된 것임을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후, ‘어떻게 하면 법에 걸리지 않는지, 법망을 피할 수 있는지’ 등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또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이루어지고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법의 기본 정신과 취지는 보려고 하지 않고, 걸리냐 걸리지 않느냐를 따지는 상황이 너무 우스워 보입니다.
그리고 작년(2023.2)에 물가 상승률 감안 및 내수 진작 차원에서, 이 법을 손질하는 방안(음식값 3만 원을 5만 원으로 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청탁 금지를 위한 것인데, ‘5만 원 정도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라며 죄짓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힘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타협해서는 주님께 절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에 가까워질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얼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 민족, 인종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타협한다면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의 참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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