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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6. 사선기관 천안장복 강의. 유낙준주교.
배우는 마음으로 사람과 사물을 만나는 분을 존경하라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삶의 슬기를 찾고,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음을 즐긴다(잠언15:14).” 지적인 사람들은 배우기를 원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지와 함께 만족한다(영어직역).
우리의 삶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실수투성이로 이어지는 우리들의 삶이고 보면 우리들의 삶은 실수의 연속으로 성숙해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완벽하지 않은 것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스스로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삶으로 인하여 너무 자신을 학대합니다. 완벽한 틀을 세워 놓고 그 완벽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을 닥달하는 삶의 방식을 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유지하는 방법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은 자신의 실수를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고 그 실수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지 않게 되어 다른 사람의 실수를 관용있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타인의 실수를 매몰차게 대하는 사람은 자신조차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리더쉽은 바로 이러한 실수의 연속으로 이어진 인생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돌봄으로 반복된 실수를 점차 줄이고 새로운 실수를 맛보며 성장하고 성숙해지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입니다.
괴튕겐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야곱그림(1785-1863)과 빌헬름그림(1786-1859) 형제가 쓴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1284년 6월 28일 독일 하멜른에서 130명의 어린이가 사라진 사건을 토대로 이루어진 동화입니다. 흑사병을 옮기는 쥐들을 강물에 빠지게 한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보상금을 주지 않자 피리소리를 듣고 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1212년 프랑스 한 목동이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십자군을 세우다가 이들소년소녀들을 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노예로 팔렸다는 이야기가 결합되었다는 설도 있고, 상인들이 희생양을 피리부는 사나이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멜른은 5만 6천명이 사는 독일의 동네로 대수도원이 중심이 되어 상업이 발달된 도시입니다. 피리부는 사나이 동상이 있고 박물관에는 쥐와 관련된 물건들이 있고, 그림형제는 “헨젤과 그레첼”등 많은 동화를 쓴이로 유로 전에 독일의 천마르크 지폐에 형제의 얼굴이 담겨졌습니다.
흑사병이 퍼지니 사람들은 거칠어졌습니다. 거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로 사람들이 온유해지게 되니까요. 흑사병같은 재난인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의 돈으로 나라 살림을 하고서 8개월만에 건설업체들이 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역업을 하면서 경제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2020년 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하여 무역업이 중단된 상황에서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2021년 3월이 되면 건설업체들이 무진장 어려워질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공회 한 신부님은 밥을 못먹는 사람들이 나타날 듯하니 무료밥집을 사모님과 함께 여시겠다고 합니다. 식량대란이 올 것이니 오히려 감자농사를 많이 져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자를 나눠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소금만 있으면 감자를 쪄서 먹을 수 있으니까요. 성공회 신부님은 그렇게 식량대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사들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어려움이 오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피하려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면 그 어려움을 조절하여 그 어려움이 나아갈 길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한 가정의 리더이시고 장애인들의 리더이시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리더이십니다. 리더는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는 리더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조절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조절자 리더로 오늘 우리 앞에 다가온 문제를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재난이 주는 어려움의 출구정책을 만드는 사람으로 대해보자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이를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같이 있고, 어떻게 내보낼까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대해서 내가 대하는 태도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피리부는 사나이를 불러와서 쥐들을 사라지게 할 전문가를 모셔와야 합니다. 정은경 중대본 본부장은 피리부는 사나이로 우리 시대의 전문가집단입니다. 전문가집단은 통계수치로만 봅니다. 초기에 그 통계수치가 유익하였고 그 분석으로 대응책을 세웠습니다. 손씻기와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로 확고한 성숙한 길로 국민보건교육을 성장시켰습니다. 2월에 시작하여 7월까지 6개월간 전문가집단이 아사와 병사 사이에서 병사에 대한 대응을 잘하였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하여 병으로 죽는 병사문제에 초기대응을 하였고, 이제는 배고픔으로 죽는 아사 문제에 대하여 대응하는 전략으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8월부터는 전문가집단이 내놓은 통계수치를 토대로 하여 각 집단 간 일상생활에서의 이해가 상충하는 자리가 커지면서 집단 간 이해조절을 필요로 하는 자리인 아사 문제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전문가집단의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정치집단과 종교집단과 법률집단이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재난이 와서 지나가면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재난후에 우경화가 됩니까? 좌경화가 됩니까? 재난 이후에는 분배로운 사회가 됩니까? 성장을 주로 선전하는 사회가 됩니까?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가 1987년입니다. 한국경제의 최고조의 성장 시기에 노동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울때에는 노동운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재난을 지난 시기에 어떤 정책이 나올지는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재난 시기에 재난을 조절하는 사람은 재난 이후의 길을 내다보면서 재난을 조절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재난 이후 더 재난을 불러오지 않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실수는 어느 자리에서든지 나타납니다. 전문가집단이 통계수치에서 분석을 다르게 하여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 간 조율을 잘못하여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가 반복적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만 잡으면 좋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에서는 실수가 나타나기 마련이니까요. 새로운 세계는 실수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수한다고 하여 배제하지 마십시오. 실수를 통해 새로운 세계가 확고하게 됩니다.
“띠로에서 온 히람 Huram은 그 당시의 최고의 산업기술을 지닌 청동기 기술자로 솔로몬왕이 이를 초대합니다(1열왕7:13).” “히람은 하느님의 성전 본전 현관에 기둥을 세우고 오른쪽에 세운 것을 야긴, 왼쪽에 세운 것을 보아스라고 명명하였습니다(1열왕7:21).” 히람은 솔로몬 성전 현관에 구리기둥(놋기둥)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 지었습니다. 남쪽에는 야긴 Jachin, 북쪽에는 보아즈 Boaz라고 불렀습니다. 솔로몬의 신앙관이 이 두 기둥의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높이 8m, 둘레 5m이 큰 기둥인데 꼭대기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백합(나리꽃)이 400개 모양을 하고 순수한 생명을 상징하는 석류가 200개의 모양으로 늘여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기념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짓는다면 어떻게 짓겠습니까?
남쪽이고 오른쪽의 놋기둥의 이름인 야긴은 “하느님이 세우셨다”는 뜻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지어진 성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큰 나라의 왕인 솔로몬이 세웠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이 세우셨다는 신앙고백이 솔로몬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사는 솔로몬의 야긴이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길 바랍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할 때 하느님이 만드시는 것(창조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자세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사는 것이 야긴신앙입니다. 이집트서 탈출하여 광야의 길을 걸을 때 낮에는 무진장 덥습니다. 이 때 구름기둥으로 해를 가려서 더운 날씨에 지치지 않게 보호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광야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긴신앙은 구름기둥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입는 신앙입니다.
솔로몬의 하느님의 성전 왼쪽(북쪽) 놋기둥의 이름은 보아즈입니다. 보아즈는 “하느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이 내리신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추운 광야의 여정에서 살려주신 것처럼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려달라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솔로몬의 신앙관이 보아즈라는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나의 인생조차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한 치의 앞도 모르고 사는 인생이잖습니까. 실수에 실수를 거듭해도 끝까지 돌보시는 하느님의 능력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를 고백하며 사는 이가 성공회 신앙입니다.
비젼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비젼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치와 의미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망을 세울 때 그 전망이 하느님과 연결된 전망이면 솔로몬이 야긴과 보아즈라는 이름을 고백한 신앙관과 연결이 됩니다. 나의 비젼과 전망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내 가정의 전망이, 내 자녀의 비젼과 전망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내 공동체인 직장의 비젼과 전망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이 나라의 비젼과 전망이 하느님과 연결되어서 보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비젼과 전망을 찾는다면 금방 좌절과 절망의 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 연결을 짓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인간이 온전해지니까요.
솔로몬왕은 이스라엘의 좋은 리더입니다. 우리들도 솔로몬왕처럼 숙고하는 삶의 방법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좋은 리더가 되길 바랍니다. 2년전 2018년 10월 20일에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를 재개하되 원전은 축소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공사재개 59.5%, 공사중단 40.5%의 결정으로 “미래를 염두에 두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하버마스의 ‘숙고 민주제 deliberative democracy’를 도입하여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은 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여론의 창출능력을 가진 공중으로 회집하는 커뮤니케이션 마당으로, 신분제 사회에서 민주제사회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민주제는 숙고로 탄생되는 것이지 막무가내로 탄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면 좋을 것입니다.
새로운 일 new things은 nova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인데 news가 이 단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 새로움 이라는 노바 nova가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그만큼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려면 생각을 깊이 하고 생각을 깊이하여 하느님과 연결된 일인지를 숙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솔로몬 왕처럼 좋은 리더가 될 것입니다.
2주전 아탈란타에서 버락 오마바 미국 전 대통령의 “어디서 용기가 오는가?”라는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입니다.
첫째, 각각의 변함에서 용기가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각각의 변함일 때 용기가 오는 것입니다. 나 홀로 변해서 큰 일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변함일 때 용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둘째, 미움과 분열의 씨뿌림에서 용기가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실을 퍼트리는데서 용기가 옵니다. 욕망을 채우려는데서 용기가 오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전제로 하는 사랑을 행할 때 용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셋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에서 용기가 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쁨과 영원성과 함께 책임을 높이기 위해서 용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가지고 서로를 향한 사랑을 지닐 때 용기가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어떻게 용기를 끄집어낼 것입니까? 오마바대통령이 제시한 방식으로 우리의 용기를 끄집어내 봅시다.
리더는 왕관을 쓴 사람입니다.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왕관을 쓸 자격이 주어집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 왕관을 쓴 머리는 편안히 쉴 수 없다.”는 세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 대한 글에서 나온 것입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은 신뢰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책임질 자리에 있는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리더쉽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은 숙고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용기를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밥 한번 안 사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공동체에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밥 자주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리더는 많이 견딤을 요구합니다. 참아야 좋은 리더가 됩니다.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그 공동체는 어렵게 됩니다. 참지 못하고 버럭 잘 화내는 사람이 한국인입니다. 좋은 공동체가 되려면 리더가 마음의 균형을 잘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균형이 무엇 때문에 깨졌는지를 잘 파악해야 균형을 찾아가게 됩니다. 언제 내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지 서로 얘기를 나눠 봅시다. 그 깨지는 순간을 조심하면 됩니다.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원칙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절제와 자신의 노력을 중시여기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물론 자유를 향한 열정과 숙고가 동행하면 더욱 인간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창조하려면 자신의 삶에서 용기와 믿음과 희망을 공동체에 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리더는 공동체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용기와 믿음과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지켜 주면서 함께 흘러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존심을 해치면서 함께 살기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공동체는 절제와 노력으로 살게 할 수는 있지만 분노가 쌓여 폭발하기 직전의 폭탄을 안고 사는 긴장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자비심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에서 ‘나는 이 공동체에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는 고백이 나오는 공동체가 우리의 공동체이기를 기대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공동체를 지옥이라 부릅니다. 천국은 사랑의 공동체이니까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세상너머에 있는 이상적인 나라를 향하려면 신비적인 힘이 있어야 가능할 일입니다. 그 신비는 하느님의 자비심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큰 힘이 우리에게 미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게 되기를 성공회 신앙은 바라고 향하고 있습니다.
유태인의 성인식은 소녀 12살, 소년 13살에 거행되는데 부모님이 3가지 선물을 줍니다. 부모 없이 하느님과 직접 관계를 맺으라는 뜻으로 성경을 주고, 약속시간을 지키고, 시간을 아끼라는 의미로 손목시계를 주고, 축의금을 주어 돈을 20세까지 잘 키우는 것을 익히도록 합니다. 약 5만달러(6천만원)을 주어 20세까지 돈을 운용하여 그때 큰 돈이 되어 창업하는데 사용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한 18세에 혼인할 나이니까 18달러의 배수로 36달러, 54달러 순으로 축의금을 친척들과 친구들이 준다 합니다. 하느님과 관계된 비젼을 갖는 성경을 주는데 반하여 우리는 비젼을 세우는 자녀로 키우기 위하여 무엇을 부모로서 자녀의 성인식에 주고자 합니까? 돈의 운용을 어릴 때부터 익히기 위하여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어려운 사람을 우리는 만나지만 늘 만나지는 못합니다. 어려운 사람이 홀로 어려움을 만났을 때 홀로 이길 힘과 용기를 지니게 하는 나만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제가 제안한다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짧은 기도를 해도 좋습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느님만이 저를 도와주실 분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면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다운튼 애비 Downton Abby”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인데 한국의 델리비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두 번 보았는데 영국의 전환기인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변화에서의 사람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녀들과 자신이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이 드라마를 다 보시길 발합니다.
최고의 책 “순례를 떠나다”로 마이클 마셜주교님이 지은 책입니다.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책이 많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이끌어 준 책입니다. 또한 카잔타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추천합니다. 맑시스트, 허무주의자를 거쳐 새로운 생명을 존중하는 카잔타스키의 인생관을 보며 도움이 많이 된 책입니다.
프랑스의 청년공동체인 떼제노래가 지금도 좋습니다. 그레고리안 찬트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김효원의 “사랑하니까”를 최근에 들었습니다. “세상 끝나는 날 그 순간까지 내 마음 깊은 곳에 넌 살아 있으니까!” 일만 많이 하다가 즐겁게 사는 방법을 모르면 사람들로부터 배제당합니다. 즐겁게 사는 방법을 숙고하시길 바랍니다.
+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나와 함께 일하는 공동체를 위해서, 성공회 교회를 위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합시다.
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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